< 낌새가... >
기함할 만큼의 개소리였다.
‘제대로 똥 멍청이들이군. 있기나 한 수준이 아니라 넘쳐흐를 거다!’
하지만 나에게는 빤히 보이는 아부일지라도 변태 놈한테는 마냥 흡족하게만 여겨진 모양이었다. 호비는 매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바보들이랑 대화하는 나 자신이 미안해질 정도야.’
여기서 이어질 말은 뻔했다. 매니저로서 성공하고 에밀리 역시도 소위 표현하는 핫한 배우로 만들고 싶으면 자신의 수발을 들게 하라는 것이었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알면 그것만큼 모자란 짓도 없다. 나는 지저분한 대화가 더 이어지기 전에 먼저 치고 들어갔다.
[제가 지금 이 말을 왜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그런 일에는 관심 없고 오직 계약을 해지하려고만 왔을 뿐입니다. 그러니 계약해지나 진행했으면 좋겠습니다만?]
[뭐?]
둘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흡사 ‘너 따위가 지금 내 말을 무시해?’라는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자네. 지금 자네가 한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자네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배우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도? 이런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라일리는 더 이상 배우로 살아가지 못할 수도 있어.]
눈살을 찌푸린 호비가 이어서 말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너와 배우 둘 다 이 업계에 발을 못 대게 하고 싶지만, 나는 충분히 관대한 사람이니 특별하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지.]
[기회?]
[그래. 지금부터 내 제안을 듣고 잘만 따라온다면 라일리는 이번 영화는 물론이고 다음에도 역시 블록버스터급의 작품에 계약하게 거야. 자네 역시 계약만으로도 흡족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테지.]
당근 다음에 그는 채찍을 제시했다.
[하지만 제안을 거절한다면··· 내 약속하지. 자네와 라인리 모두 다른 직업을 찾는 처지가 될 걸세.]
매섭게 노려보는 눈빛에 나는 짐짓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제안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곧 굳어졌던 호비의 얼굴에 ‘그럼. 그렇지.’ 하는 비릿한 웃음이 그려졌다.
[그래. 남자는 무엇보다 성공을 위해서 어떤 줄을 타느냐가···]
나 역시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말을 끊었다.
[뭐~ 대충 이런 반응을 기대하신 모양인가 보군요.]
[뭐야?]
[구질구질하게 계속 빙빙 둘러서 떠들지 말고 여기서 깔끔하게 끝냅시다. 업계에서 잘나가시는 것도 잘 알겠고 또 그 잘 나가는 걸 이용해서 어떤 더러운 짓들을 하고 지내는지도 잘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되지도 않는 짓거리는 그만하고 말끔하게 여기서 헤어집시다. 오케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내려다보면서 말을 이어가던 호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너···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별로 심한 말을 한 것도 아니다. 그냥 당당히 내 의사를 전달했을 뿐임에도 이렇게 부들부들 댄다는 건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남을 깔보고 살아오고 있었는지를 직접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너 이 새끼!]
노기를 폭발하며 그가 일갈했다.
[경력이 미천해서 이 영화판이 얼마나 좁은지 모르는 모양이군! 당장이라도 사과하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다시는 얼씬도 못···]
더 들어줄 말도 아니고, 더 들어줄 마음도 없었다.
쾅!
조금만 더 말이 길어지면 에밀리의 이름이 나올 것 같아서 책상을 손바닥으로 크게 내리찍었다. 이 과격한 행동에 호비가 사뭇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너··· 너···]
[돼지가 앵무새처럼 같은 소리만 반복해대는군. 네가 얼마나 잘 나가는지 충분히 아니까 그만 반복하고 계약해지하게 서류나 가져오란 말이다! 이 말을 이해하는 게 그리도 어렵냐?]
[돼지? 이 칭크가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머리에 여자밖에 들은 게 없어서 오늘 본인 소개를 그렇게 많이 해놓고도 벌써 다 까먹은 건가? 이름은 호비 아인슈타인. 너는 마리맥스의 사장이지. 그런데··· 그래서 어쩔 건데?]
삽시간에 차가워진 공기는 사장실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영화사의 사장인 사일런트는 언성이 높아진 우리 둘을 보며 어찌할 줄 몰라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나나 새끼들이 그래도 머리는 잘 돌아가는 줄 알았건만 이런 모자란 놈도 있었군. 좋게 말하니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 하는 모양인데 제대로 짚어주지. 오늘 일로 너와 그년의 인생은 끝···]
[동물농장이 따로 없군. 하긴, 돼지와 원숭이가 떠들어대니 대화가 된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겠지?]
[너···!]
[나도 두 번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 마지막으로 알려주지. 이해 잘하고 있으니까 그만 꽥꽥대고 서류나 가져와. 당장!]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서로 노려보며 눈싸움을 벌였다. 서로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보던 우리는 호비가 실소를 내뱉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사일런트. 서류 가져와.]
더 이상의 모욕을 듣기 싫은 것인지 호비가 태도를 바꾸었다. 그 모습에 사일런트는 당황한 얼굴을 하면서도 재빨리 계약해지에 대한 서류를 가져왔다. 분노의 감정이 담긴 채 서로의 목소리가 오갔다.
[그만큼 설쳤으니 영화 계약금은 물론이고 영화 출연 파기에 대한 위약금 역시 지급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테지?]
[물론. 그까짓 거 얼마나 된다고.]
[좋다. 영화 계약금이 2만 달러였으니 배상액으로 4만 달러가 위약금이 되겠군.]
[4만 달러?]
스쿨 오브 밴드에서 에밀리의 출연료가 1만 1천 달러였는데, 계약금이 해당 금액의 두 배에 가까웠다. 내가 손수 키운 배우가 빠른 성장을 한 것 같아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기쁜 마음으로 놀랐는데 호비는 내가 생각보다 큰 액수에 놀랐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처음에 보았던 권위적인 태도를 되찾으며 그가 말했다.
[이제 현실을 느꼈나?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빈다면··· 그래. 그 정도로 기회를 다시 주도록 하지. 생각 같아서는 눈물까지도 보고 싶지만 네 그 작은 눈에서 눈물이 나와봐야 보기에 추할···]
[이 돼지가 이제는 개소리까지 하는군. 네가 인종비하를 하면 나 역시도 욕한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거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것을 몰라? 게다가 뭐? 현실? 거지도 아니고 고작 4만 달러가지고 유세를 떨어?]
내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들어오는 이자수익이 위약금보다 훨씬 많았다. 나는 단숨에 계약 해지를 마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새끼!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어디 감히 내가 말도 안 끝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모욕감에 얼굴이 붉게 변해서는 언성을 높이는 호비와 덩달아 행동하는 사일런트였다. 그러나 변태와 앞잡이의 말 따위를 듣고 대꾸해줄 이유는 하등 없었다. 무가치한 것들이니 더 이상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그 자체가 낭비다.
쾅!
문을 박력 있게 닫은 뒤 휴게실로 나왔다.
[회장님. 이거 정말로 괜찮은 건가요?]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에밀리의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영화사의 방마다 방음처리가 되어 있을 리 있으랴. 더군다나 마리맥스의 본사도 아니고 이곳은 보통의 영화사인데 말이다. 코딱지만 한 크기였기에 사장실에서 높아진 언성이 휴게실까지 다 들렸던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제가 잘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그래도 이 회사가 영화계에서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힘이 제법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밀리를 저런 놈들과 함께 있게 할 수는 없잖아요. 이 자리에서 약속을 받는다 해도 촬영이 이어지며 어떤 식으로 달리 행동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 불안을 안고 저런 녀석들과 같이 일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딸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어머님을 태우고 영화사를 벗어났다.
[아, 그래요?]
영화 출연을 못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에밀리는 예상외로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은 채 금방 수긍했다. 자신의 결정을 어른들이 마음대로 바꿨다고 불만스러워하면 어쩌나 했던 내가 머쓱해질 정도의 반응이었다.
[왜 영화 촬영을 거절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호기심에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묘한 감흥을 주었다.
[대장님이 결정한 일이잖아요. 무슨 이유였든 그게 저를 위한 결정이었다고 믿어요.]
어린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커다란 꿈을 꾸는 만큼이나 생각도 성장해있었나 보다.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뒤 그녀의 믿음에 상응하고자 움직였다.
“곽 전무님. 마리맥스에서 어떻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마리맥스 사장의 영향력은 제법 크지만 그 힘은 영화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에밀리가 영화 계약을 맺는 것만 아니라면 그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상대가 선점한 홈그라운드에서 싸울 필요가 없었다. 무대를 바꾸고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면 그만이다. 사실 영화 쪽에 에밀리를 출연시킬 만한 작품이 없다는 결정을 진작 내렸지 않던가. 단순히 호비 아인슈타인이 무서워서 피한다는 것이 아닌 셈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렸다. 이런 식으로 대충 봉합하는 처리가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물음이다. 내게야 별 것 아닌 4만 달러지만 다른 누군가는 지급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무릎 꿇어야 하는 돈일 수 있다.
또한, 잠시 기분이 나빴던 호비는 계속해서 같은 변태 짓을 일삼을 것이다.
‘배우와 매니저는 물론이고 그놈 밑에서 영화를 찍는 감독 등등의 커리어까지 엉망으로 만들겠지. 백해무익한 놈이야. 가능하기만 하다면 아예 없애버리고 싶은데······.’
흔히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는 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공권력을 마냥 꺼리는 이들이 하는 이야기다. 우리가 사는 현대는 제도가 잘 되어 있기에 방법만 제대로 취한다면 어지간한 문제를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그 때문에 폭력은 일차원적이면서도 매우 저속한 방법이다. 몇 대 맞는다고 개과천선하거나 반성하는 일 같은 것은 애들 만화에나 존재하지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증거가 확실하여 죄를 입증했는데도 마지막까지 억울하다며 선처를 요구하는 것이 보통이니 말이다.
‘피해자를 찾아서 호비의 성폭력을 입증하면 될 테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 리 없지. 누가 자기 커리어에 흠집을 내면서까지 증언에 나서겠어?’
정의로움과 자신의 이익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도덕적으로는 일러줄 수 있지만 어느 하나를 강제할 수는 없다. 취향을 존중해야 하듯 각자의 입장 역시도 헤아려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상대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빈틈과 약점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호비의 감정을 자극했고 성격 역시도 급한 편으로 보였다. 아울러, 나를 동양인으로 싸잡아 보며 만만하게 보았으니 분명 경솔하게 움직일 것이다. 그때를 조용히 사냥꾼처럼 기다려야 한다.
“곽전무님은 혹시라도 마리맥스가 언론을 통해서 이상한 소리를 퍼트리지 않는지 관련된 정보를 확인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정도는 이미 계약 해지를 위해 움직였을 때부터 대기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님에도 곽지원 전무는 빠르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성욕이 끓어 넘치는 돼지와의 일을 가름했으니 이제는 에밀리의 창창한 미래를 준비할 때다. 나의 선택으로 영화를 그만두었으니 이를 대신할 좋은 대안을 마련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어렵다.
‘영화는 뭘 하든 잘 안 풀릴 테니 TV로 방향을 돌려보자.’
문제는 역시나 에밀리의 나이였다. 2004년에 방영 예정인 드라마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정말 대박인 작품들이 몇 가지 존재는 했다. 그러나 아역이 나가서 할 만한 프로그램으로 추리니 난감해졌다.
‘그렇다고 성공하지 않을 작품에 무작정 넣을 수는 없고.’
성과 없이 열심히만 하는 일만큼 불쌍한 게 또 어디 있으랴. 우리가 게임을 즐기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노력한 만큼 레벨업과 아이템이라는 달콤한 선물을 받기 때문이듯 보상은 정말 중요하다.
< 낌새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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