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52화 (252/577)

< 낌새가... >

신이 나서 말하는 에밀리에게 일단은 원하는 대답으로 말을 맞춰주었다.

[대단한데?]

[네, 대단하죠? 사실 감독님 표정이 계속 엄청 무섭고 막 화가 난 사람 같아서 떨어질 줄 알았거든요. 그래도 붙었어요!]

난관을 극복했다는 그녀의 말이 내게는 다르게 들렸다.

‘감독 표정이 화가 난 사람 같았다. 이는 감독이 원한 게 아니라는 소리군.’

영화는 연출을 담당하는 감독의 권한이 엄청나게 큰 분야다.

‘그런 감독이 원치 않는 배우를 캐스팅할 수밖에 없었다는 건 최소한 영화사, 어쩌면 배급사에서 내려온 오더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지.’

관련된 내용은 조만간에 곽지원 전무에 의해서 보고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에밀리가 오디션에 합격하고 계약서에 도장마저 찍은 뒤 이틀이 지났을 무렵, 드디어 곽지원 전무의 보고서가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감독은 에밀리를 배우로 쓰는 것에 반대했는데 배급사에서 무조건 에밀리를 뽑으라고 지목했다, 이겁니까?”

“그렇습니다.”

예상대로다. 영화감독은 애초에 시나리오대로 9세 정도의 아역배우를 찾고 있었는데 배급사가 힘으로 찍어 누른 것이다. 이제 다음 스텝을 밟을 차례다.

왜 그랬을까?

“애초에 시나리오를 보고 투자를 결정한 것일 텐데, 배급사 입장에서는 그렇게 해서 영화가 망하면 더 큰 손해 아닙니까?”

심지어 마리맥스는 D.Genie 산하의 배급사로 할리우드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나가는 회사였다. 이런 곳에서 그런 막무가내 투자를 한다는 건 보통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한 곽지원 전문의 대답은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아무래도 저희도 그게 조금 이상해서 마리맥스에 대해서 조금 깊게 들어가 보았는데 소문이 좋지 않았습니다.”

“좋지 않다? 뭐가 말이지요?”

“배급사의 사장이 성추문을 자주 일으켰지만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계속 입막음을 해오고 있다는 정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추문?”

미국은 한국에 비해서 이런 스캔들에 매우 민감한 나라다. 특히나 그 대상이 미성년자라면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법의 심판을 각오해야만 한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여기도 유전무죄였었나?’

똑같은 법이 누군가에게는 솜방망이로, 어떤 이에게는 무쇠의 철퇴로 내려오는 차이가 여기에서도 나오는 모양이다.

곽지원 전무가 말을 이었다.

“사장이 제법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누군가가 와서 꼭 깨워줘야 한다고 거라더군요.”

“모닝콜치고는 특이하군요.”

알람이나 맞출 것이지, 일어나는데 사람을 불러서 깨우게 하는 건 또 뭔가? 게다가 이 역할은 갑질의 현장이지 성추문이 아니다.

여기에 곽지원 전무가 말을 덧붙였다.

“사장을 깨우는 일은 주로 여성 배우가 담당해야 하는데, 사장의 취침 습관이 나체로 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다. 제대로 변태 짓이다.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는데 지금까지 계속 조용하다는 겁니까?”

이 사장이 할리우드에서 배급사를 운영한 것이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럼 그동안 대체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을 것이고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을 것인가? 그런데 그것이 다 조용히 넘어가 졌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영화계에서 영향력이 큰 사람이다 보니까 여배우들도 함부로 터트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9살이 아니라 15살이 필요했던 이유가 고작 이거였다니.’

기함할 노릇이다.

막아야겠다. 성인은 물론이거니와 사춘기에는 사소한 경험 하나하나가 평생의 인격을 차지하게 될 수 있다. 만약에 진짜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면 트라우마에 얽혀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에밀리는 더욱 안 좋지.’

그녀가 코미디 연기를 시작했던 이유가 격리 불안증세 때문이었지 않던가. 연기는 그녀의 유일한 도피처다. 그런데 연기를 하다가 저런 일을 당한다면 에밀리는 더 이상 도피할 수 있는 곳이 없어지게 된다.

“답 나왔네.”

이미 계약을 마쳤으니 영화를 계속하면서 문제가 터지지 않도록 관리할 것이냐, 영화에서 하차하게 할 것이냐의 선택지가 나왔다. 이 가운데에 무엇을 선택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어차피 망할 영화에 스트레스 받을 이유가 있나?.’

하차가 곧 정답이다.

결론을 내리고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내가 찾아간 사람은 에밀리가 아닌 그녀의 어머니였다.

[아무래도 에밀리가 출연하기로 한 이 영화. 계약을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에밀리의 일이니까 에밀리에게 말을 하고, 설득해야 한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으나 당장 에밀리를 설득한다고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어린 에밀리에게 성추문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고 포기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반면에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듯이 그녀에게는 감추지 않고 모두 말해주었다.

[에밀리를 강하게 추천한 배급사의 사장에게 안 좋은 소문이 너무 많습니다.]

[안 좋은 소문이라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 거죠?]

[섹스 스캔들입니다.]

대번에 굳어지는 그녀의 얼굴. 딸을 키우는 부모에게 이보다 큰 문제가 또 있을까? 그녀는 나체로 잠자는 사장의 습관과 이를 깨우는 여배우의 일에 듣고는 더없이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미 계약까지 모두 한 상태인데, 계약 해지가 쉬울까요?]

[쉽지 않더라도 해야만 합니다. 이대로는 에밀리의 미래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합니다.]

[알겠어요.]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이튿날 함께 정식으로 영화 계약을 해지하기 위해서 영화사를 찾았다.

[라일리의 어머니 아니십니까? 갑작스레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맞이하러 나왔다. 그는 에밀리의 예명을 말하며 친절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었다.

해지와 관련해서는 전적으로 내게 맡겨 달라고 이미 이야기를 끝낸 상태였다. 어머님 대신에 내가 나섰다.

[이번 영화의 계약을 취소하려고 합니다.]

[네? 저기··· 그런데 누구신지?]

[라일리의 매니저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것 같군요.]

[매니저라고요?]

그때, 사장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일런트!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누구지?’

영화사에서 가장 높은 직함이 바로 사장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에게 명령조로 이야기를 한다?

투자 혹은 배급에 관련된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설마 마리맥스의 사장이 이곳에 있는 건가?’

내부의 목소리에 당황한 그는 우리를 사장실로 안내했다. 한 회사의 오너라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는 문자 그대로 굽실굽실하는 안내였다. 실제 누구에게 권한이 있는지, 이 사장은 한낱 바지사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제 안방처럼 편안히 있는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과 마주했다.

[반갑습니다. 호비 아인슈타인이라고 합니다.]

마리맥스의 사장이 있었다.

‘이런 말은 편견에 불과한데 이 상황이 되니 할 수밖에 없군. 정말이지 생긴 대로 노는구나.’

뚱뚱한 체격. 덥수룩한 수염에 험상궂은 얼굴에 이르기까지 첫인상은 그야말로 산적이나 다름없었다. 성추문과 관련되었기 때문인지 괜스레 음흉하고 눈빛마저 게슴츠레하게 느껴졌다. 이게 그에 대해 선입견을 품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계약을 해지하러 오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영화 촬영 파기 위약금은 둘째 치고···]

스윽, 위아래로 훑어본 호비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이유를 듣고 싶군요. 왜 그런 결정을 한 겁니까?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이 영화의 감독은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뉴저지 걸에 예정된 배우들 역시 수준 높은 이들이고요. 그런데 이 좋은 기회를 왜 마다하는 겁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볼 수도 있다? 허허··· 이제 막 이 바닥에 들어온 모양이라서 잘 모르는가 보군요. 이보세요. 지금 에밀리 양의 커리어로 이만한 기회를 얻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다른 배우들은 평생을 기다려도 거머쥐기 어려운 기회를 걷어차다니요?]

[그러시다면 서로의 견해 차이는 명확한 것 같군요.]

초지일관 거절의 메시지를 보이자 그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다가 이내 펴졌다.

[아무래도 전문적인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어머니는 잠시 다른 곳에서 쉬었다가 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호비의 말에 그녀가 눈빛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왔다. 나는 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휴게실에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알겠어요. 믿고 기다릴게요.]

내가 아니었다면, 에밀리는 아직까지도 지역 연극 극단에서 연극을 배우는 중학생이었을 것이다. 스쿨 오브 밴드의 오디션에 어떤 공을 들였는지도 가까이에서 지켜본 마당 아니겠는가. 그녀는 깊은 신뢰를 보이며 별다른 걱정 없이 자리를 비워주었다.

그리고 사장실에는 남자들만이 남았다.

‘기왕이면 민낯을 제대로 보고 처리하는 게 낫겠지.’

호비 아인슈타인.

이 변태 녀석은 의자에 앉아서 잘 꼬아지지도 않는 비대한 다리를 억지로 꼬고는 자신의 잔에 양주를 따랐다.

[자네도 한잔 할 텐가?]

흔히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뉘앙스와 단어로 경어와 하대가 분명하게 나뉜다. 그리고 호비의 어투는 에밀리의 어머니가 퇴장함과 동시에 하대로 바뀐 상태였다.

[술은 생각 없습니다.]

[그러던지.]

그는 마시지 않으면 너만 손해라는 투로 양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자네, 매니저 경력이 얼마나 되나?]

[글쎄요. 오늘 대화에서 딱히 매니저 경력이 중요한 요소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럴지도 모르지만, 업계 선배로서 조언하나 해주지. 내가 이 자리까지 올라오면서 많은 것들을 경험했는데 그중에서도 경력이라는 건 이렇더군. 한순간의 선택으로 확 치고 올라갈 수도 있고 딱 한번의 실수로 단박에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지.]

장황하게 들어오는 협박이었다. 뒤이어 옆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던 사장이 거들었다.

[그러니까 아인슈타인 사장님이 하시는 말씀은 지금 자네는 경력을 오늘 끝내느냐, 그게 아니라면 날개를 달고 날아보겠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라는 말씀이시네.]

영락없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 풋내기로 비쳤나 보다.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준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결국 한통속이라는 말이군.’

하긴 영화판을 주무르는 놈이 있다면, 그놈의 밑에서 콩고물을 주워 먹는 놈도 생기기 마련 아니겠는가. 그리고 규모가 클수록 콩고물 역시 커지기 마련이다. 양심 따위는 슬쩍 눈감아버리고 앞잡이 노릇 하기를 서슴지 않을 정도는 된다.

눈앞의 이 사장은 이러한 시류에 잘 편승하고 아첨하는 이였다.

‘이 바닥에서 매장해버리겠다는 소리이니 보통의 매니저였다면 갈등도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어. 압박이 제법 컸을 거야. 남의 돈줄을 옥죄는 치사한 새끼 같으니.’

이 변태 놈은 단순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지나가는 여학생 앞에서 나타나는 수준의 인물이 아니었다. 정신적인 수준은 똑같지만, 할리우드의 영화판에서 신과 다름이 없는 위치를 가지고 있기에 더욱 질이 나쁘다고 보겠다.

‘저 지위를 가지고 한다는 짓이 성추행이고.’

한숨만 푹푹 나왔다.

호비는 침묵하는 내게 말했다.

[자네도 이 일을 선택한 거, 기왕이면 더 크게 성공하고 멋지게 살고 싶지 않나? 멀리서 찾지 마. 내가 도와줄 테니까.]

일단 먼저 압박을 준 뒤에, 살살 구슬린다. 전형적인 방법이지만 전형적이라는 건 그만큼 잘 통한다는 이야기다.

[영화계에서 마리맥스가 차지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굳이 설명할 것도 없겠지. 내 말 한마디면 사람 하나 끝장내는 것도 저 높은 곳에 올려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야. 안 그런가?]

[그럼요. 할리우드에서 감히 사장님의 말씀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 바닥에서 빠르게 성공한 인물치고 사장님 도움 안 받은 인사가 있기나 합니까?]

< 낌새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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