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48화 (248/577)

< 방임=자유? >

컬러 액정에 화음 벨 소리를 사용하는 휴대폰들이 등장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시너지 역시 컸고 말이다. 고작해야 액정은 256 컬러에 화음은 8 혹은 16수준이 전부지만 흑백에 단음이었던 과거에 비하면 출시할 수 있는 게임의 수준이 무궁무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추억 돋네. 나도 왕년에 동전 쌓기는 꽤 잘했었는데. 이맘 때 나왔던 게임으로 당시에 3위였나? 뭐 그걸 기록하고 게임사에게 5만 원을 상금으로 받고는 신나서 자랑했던 기억도 있었지.’

입가에 가는 미소를 매단 채 번화가를 걸었다. 과거와는 다르게 이제는 식당들도 많아져 있었다.

‘마땅한 먹을 곳이 없어서 컵라면으로 때우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구내식당을 만들 때의 상황도 떠올랐다. 본의 아니게 맛집으로 소문이 나서 직원을 추가로 고용하는 등 난리가 난 기억이다. 지금까지 잘 운영되고 있으며 음식 맛 역시 두말할 나위 없이 좋아서 명물이라고 봐도 좋았다.

터벅터벅 걸으며 한참을 둘러본 뒤 이제는 어디를 구경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오락실에서 게임 잘하는 형들의 플레이를 기웃기웃하며 구경하던 것이 떠올랐고 소속 프로게이머들의 연습과 방송을 다시 구경 가기로 했다.

‘한 달 전에는 좋은 깨달음도 줬었으니까.’

신과 같이의 판매 활로를 뚫어준 방송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았다.

“회장님?”

“채진우 감독?”

“네! 감독입니다.”

TFA 창단 선수로 들어와서 현재는 선수들 전체를 케어하는 감독의 자리를 담당하고 있는 채진우 감독. 그는 살짝 긴장하며 내게 물었다. 굳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상급자의 등장에 자연스럽게 보이는 반응이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심심해서라는 대답을 살짝 포장했다.

“오랜만에 선수들이 잘 지내나 보고 싶었다고 할까요?”

“이런! 연락을 주셨으면 제가 미리 준비하고 있었을 텐데요!”

“그러실 필요 없지요. 그냥 편하게 하던 대로 하면 됩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이제라도 제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내심 입맛이 썼다. 군 복무 시절에 말없이 찾아온 연대장 때문에 그리도 짜증을 냈던 기억이 선명하건만 내가 똑같은 짓을 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가면을 쓰고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남을 배려하면서 움직이기는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찌 됐건 이 마당에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쁜 일이 있으셨던 거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그냥 테스터겸 방송하는 선수들도 다 제 아이들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가끔 그 친구들 방송하는 거 보러 스튜디오에 내려가곤 하는데, 지금도 그냥 그런 거였습니다. 바쁜 일 없고 시간은 충분히 많습니다.”

내 성격 같아서는 혼자 알아서 둘러보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감독의 입장도 난처할 것 같아서 그냥 안내를 허락했다.

“한 달 전쯤에 다녀갔었는데, 그때와도 꽤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요.”

“최근 우리 선수들의 인기가 부쩍 늘어났거든요. 덕분에 지원도 빵빵하게 받았습니다. 추가로 연습실 분위기가 좀 칙칙한 것 같다, 뭐 이런 말 한마디 했더니 바로 이렇게 내부를 고쳐주더군요.”

각 프로팀은 상징하는 색깔이 존재한다. 배추가 연두색을 좋아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트레이더스 포럼은 연두색이 상당히 많이 쓰였고 덕분에 어느 때부터인가 트레이더스 포럼을 상징하는 색이 곧 연두색이 되어버렸다.

말할 것도 없이 TFA의 상징도 연두색으로 자리매김했고 말이다.

‘아주 파릇파릇, 초록초록하네.’

내부 인테리어가 팀 색깔인 연두색 천지였다. 하지만 유치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잘 디자인했기에 눈의 피로를 해소하기에 좋은 부가 효과마저 있었다. 눈을 많이 쓰는 선수들이니까 이것 역시 괜찮은 부분이다.

선수들의 연습용 컴퓨터 역시도 커다란 변화들이 생겼다. 일단 최신형 레오닌 PC로 나름대로 쾌적한 PC 환경이 제공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려 LCD 모니터가 달려 있었다.

“본사 사무직들도 아직 CRT에서 다 벗어나질 못했는데 여기는 LCD를 쓰는군요?”

모니터의 크기는 21인치.

지금이 2003년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얼마나 크고 귀한 사이즈인지 알 수 있다. 심지어 스타 드래프트 리그 대회장에서도 아직 CRT 모니터를 쓰는 입장이니 말 다 한 것 아닐까?

“덕분에 선수들은 물론이고 연습생들도 사기가 엄청나게 올랐습니다. 아마 프로게임단치고 연습실의 모든 컴퓨터가 LCD인 곳은 우리뿐일 겁니다. 다들 그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부심을 느낀다니 좋은 일이네요.”

“이게 다 회장님 덕분이십니다. 회장님이 아니셨다면 저희가 감히 프로게이머라는 것을 생각이나 해봤겠습니까? 지금처럼 대기업들이 이렇게 게임단을 만들고 게이머에 지원하는 일도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단순히 컴퓨터나 모니터 이런 것들만이 아니라 지금 이 모든 환경이 생긴 것은 회장님 덕분입니다.”

‘하여간 직장인들의 아부 내공이란······.’

컴퓨터랑 모니터만 내 덕분인 게 사실이다. 프로게임단은 어차피 생겨날 거였고 나는 어차피 생길 게임단이 내게 도움이 될 거 같으니까 가장 인기 있을 선수를 먼저 데려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직원의 입장에서는 이마저도 칭송 거리가 되니 세상 참 헛웃음만 나올 따름이다.

“어어!? 사장··· 아니 회장님!”

연습에 몰두하고 있던 선수들이 회장님이라는 단어에 놀라서 고개를 들고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여기서 살짝 당황했다.

‘뭐냐? 눈빛이 왜들 저래?’

흡사 학교를 찾아간 연예인을 보는 학생들의 시선 같았다. 다행이라면 게임에 열정을 쏟는 순수한 청년들인 덕분에 마치 연대장이나 사단장이 병영을 찾아간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반응이라는 점이었다.

“처음 보는 분들이 많네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하시던 연습을 계속 하세요.”

안다. 이런다고 신경이 안 쓰일 수 없다는 것쯤은. 그런데 막상 이런 입장이 되면 이 말을 대체할 다른 말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게 된다. 이래서 보고 듣는게 중요한가보다. 무의식중에 같은 짓을 해버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게 억지로 저들을 물린 뒤 내부 이모저모를 보았다.

‘이상하네. 컴퓨터도 좋고, 에어컨 때문에 시원한 것도 좋고 다 좋은데 뭔가가 은근히 거슬려.’

기분이 찜찜한데 그게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막상 잘 떠오르지 않았다. 정리되지 않는 모호한 의문이 나를 콕콕 자극한다. 그즈음 티격태격하는 둘의 대화가 들렸다.

“아! 형! 지금 몰래 내 화면 봤지?”

“아니거든? 안 봐도 이기는데 뭐하러 훔쳐보냐?”

“안 봐도 이긴다고? 우와. 이 형 허세 봐라?”

“허세라니? 일인자가 이인자를 이기는 건 누가 봐도 당연한 거야.”

“헹? 그래서 리그 8강에서 그렇게 탈락하셨어요?”

“야! 그··· 그건!”

“난 4강 올라갔지롱!”

송진호와 김요환이다. 이들은 본래의 미래에서도 팀으로는 한솥밥을 먹는 좋은 동료이면서 개인전으로는 서로를 잡아야만 하는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이런 캐릭터로 e-sports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구도였는데 지금은 훨씬 더 영향력이 큰 존재로 게임계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원래도 초반에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했지만, 내 덕분에 한발 앞서나간 전략들이 아주 크게 일조했지.’

시대를 뛰어넘는 전략 덕분에 역사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고 그 결과, 다른 선수들을 압살했다. 그러나 공개된 전략을 공부하는 것은 다른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우리 팀 적 팀 할 것 없이 모든 선수의 평균 실력이 상승하며 이들은 빠르게 도달한 전성기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걱정했는데. 저 모습을 보니 괜한 일이었다 싶기도 하네.’

침울해하기는커녕 밝게 연습하고 즐기는 표정을 보니 미안함이 덜어졌다.

슬쩍 끼어들어서 말했다.

“뭐야? 진호는 요즘도 요환이에게 지고 있는 거야?”

“아. 회장님! 아니라니까요? 요즘은 진짜 제가 더 많이 이겨요! 아니 원래도 연습할 때는 제가 더 많이 이긴다니까요? 근데 이 인간이 대회만 나가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막 해가지고 대회 성적만 저보다 좋은 거라고요!”

“어허! 결국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대회 성적 아니겠냐? 중요한 경기에서 이기느냐 지느냐. 결국은 그게 진짜 실력이지.”

“으아아! 회장님도 지금 이 형이 하는 말 들었죠? 와! 밖에서는 엄청 겸손한 척은 다 하면서 여기서는 아주 그냥··· 으아! 이 여우 같은! 아니지. 아니야. 흥. 내가 이번에 우승하면 결국 형은 몰락한 게이머가 되는 거고 사람들은 이제부터 나만 기억할걸?”

“그거야 ‘네가 우승하면’이겠지. 그런데 못 하잖아? 어차피 우승자는 정해져 있어.”

“아니거든? 이번엔 진짜 우승할 거거든?”

“아니야. 못 해. 마음을 편하게 가져. 그러다 실망만 더 크게 한다. 지금 옆에 영욱이 표정 안 보이냐?”

다른 선수들은 회장이 와 있다는 것 때문에 숨죽이고 연습하는 척하고 있는데, 이 둘은 오히려 더 시끄럽게 떠드는 것 같다. 덕분에 피식피식 웃는 이들이 보였다.

‘나 때문에 경직된 분위기를 둘이서 이렇게라도 풀어보려는 건가?’

전성기가 끝나도 고참 선수들이 팀에 꼭 필요한 이유 중 하나다. 어떻게든 팀의 분위기를 이끌고 갈 수 있는 리더십. 이건 감독이나 코치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

“저희가 요즘 성적이 안 좋다고, 막 우울한 얼굴하고 그러고 있을 줄 아셨던 거예요, 설마?”

“응?”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진짜 내가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보니, 괜히 움찔하게 된다.

“와. 회장님 진짜 그렇게 생각하셨나 봐.”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모니터 안 보냐? 지금 너 멀티 깨지게 생겼는데?”

김요환은 승리욕이 강하다 못해서 넘치는 타입이다. 그는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이용하는 타입으로 아마도 송진호에 비해서 전적이 좋은 이유가 이런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가 송진호의 관심이 게임에서 나로 넘어온 이 찬스를 놓칠 리가 없었다.

“이 여우 같은 인간이! 또 이렇게 치사하게 공격을 하네! 페어플레이 몰라?!”

“승부 중에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리니까 지는 거야.”

“이건 사기야!”

놀란 진호가 어떻게든 수습을 해보려고는 했지만, 버그가 휴먼을 상대로 이런 기회를 주었고 또 그 상대가 김요환이다.

‘수습 불가.’

억울하겠지만 이번 공격을 허용한 덕분에 진호는 확실히 패배할 것이 정해졌다.

“아아! 졌어! 망할! 이 치사한 인간!”

“그래. 나 치사하다. 근데 승부는 승부니까? 오케이?”

“씨! 알았다고!”

화가 난 것인지 씩씩거리는 거친 호흡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진호가 연습실을 나섰다.

“어디 가?”

“간식 사러요!”

아마 둘의 이번 승부에 간식 내기가 걸렸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손짓하며 덧붙였다.

“그건 내일 사.”

“네?”

“간식 올 거니까 내일 사라고.”

그래도 명색이 회장인데, 빈손으로 올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근처에 있는 유명 피자 프랜차이즈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부유한 황금 피자를 시켜뒀다.

‘슬슬 올 때가 된 거 같은데?’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더니만 붉은색의 두꺼운 가방을 들고 두 명의 인물이 들어왔다. 푸짐하게 담긴 피자가 하나씩 가방 바깥으로 황홀한 자태를 뽐냈다.

“오오! 맛있는 피자다!”

“회장님! 이거 설마 고구마가 들어 있다는 그 고급 피자가 맞습니까?”

“진호야 이런 식으로 말하면 돈도 얼마 안 주고 가난한 게이머들을 내가 착취하는 거 같잖냐.”

“그래. 송진호. 너 지금 연봉이 얼마야?”

“그건 회사에서 대외비라고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랬거든요?”

“진호 쟤 작년에 1억 8천 받아갔어요.”

“요환이 형은 작년에 2억 2천 받아갔어요!”

‘그래. 잘들 논다.’

성적을 보면 비등비등한 거 같은데, 생각보다 둘의 연봉 차이가 좀 난다.

“작년에 중요한 경기 두 번을 다 저 인간이 얍삽하게 가져가서 차이가 나는 거지. 제가 요환이형보다 한참 못해서 이런 거 아니라는 거 아시죠?”

몰랐는데?

“그런데. 회장님이 오늘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손은 피자를 향하는 와중에도 자기가 궁금한 건 물어봐야 하나 보다.

“왜? 내가 못 올 곳 왔냐? 여기도 엄연히 내 소유거든? 내가 오고 싶으면 올 수 있는 곳이거든?”

“와. 그럼 그동안은 오고 싶지 않으셨던 거네요?”

‘···어라? 그건 몰랐네?’

내 말을 저렇게 연결할 줄은 몰랐다. 대단한 창의력이었다.

“오고 싶다고 다 와지냐? 회장이라는 위치가 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얼마나 많은데요?”

“몰라. 피자나 먹어.”

조심스럽게 피자를 먹는 연습생들과 신입 선수들은 회장에게 스스럼없이 말하는 진호의 모습이 퍽이나 대단해 보이나 보다. 진호도 그런 시선이 좋은지 더 콧대를 세우고 내게 편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 방임=자유?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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