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틀 거래 >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그는 금방에 넓은 이마를 한 왜소한 체격의 남자였다.
‘빌 게이트는 아니네.’
하지만 눈빛에서 강한 자신감이 보였다. 딱 봐도 이번 계약을 담당할 사람이었기에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는 일어서서 인사를 먼저 하는 걸 선택했다.
정확하게는 그러려고 했는데 나보다 먼저 상대가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마이크루의 부사장이자 홈 언터테인먼트를 맡고 있는 톰 핸슨입니다.]
꿈속 미래의 기억에는 없던 인물이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면서 알게 된 톰 핸슨은 외부에 유명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당금의 ZBox를 존재하게 만든 ZBox의 아버지였다. 내가 직접 온 만큼 마이크루에서도 어울리는 직함의 인물이 나온 셈이다.
[반갑습니다. GF를 운영하는 윤태식입니다.]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는 그저 말로만 영광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내게 큰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ZBox에 우리 게임이 큰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겠지.’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일단 앉으시죠.]
그가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고 함께 온 비서가 그의 의자를 빼주자 그 역시 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마이크루의 CEO라기보다는 세일즈의 느낌이 많이 난다고 것이었다. 이를 염두에 두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실물로 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으십니다. 젊음과 열정 거기에 성과까지. 정말 부럽습니다.]
[40대 초반에 마이크루의 부사장 자리에 계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많이 부끄럽군요.]
[혹시 오해하셨다면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는 그냥 도전할 용기가 없어서 안정적인 회사에 입사했고, 거기에서 성과를 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도전하고 성공한 사람을 보면 그것이 대단해 보입니다.]
그는 파라마운틴의 계약 담당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그 태도는 오히려 더 겸손했다.
[미국의 젊은 친구들도 당신처럼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고, 또 새로운 영역에서의 혁신을 찾아냈으면 좋겠는데··· 뭐, 이건 아무래도 저 같은 사람이 꺼낼 말은 아니겠죠.]
[천만에요. 어쩌면 핸슨 씨의 경험 덕분에 더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는 LA에서 열정이 넘치는 친구들을 만났었죠. 미국에도 여전히 새로운 열정이 타오르는 중입니다. 단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죠.]
[그렇습니까? 그거 아주 좋은 소식이군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노력하는 젊은이들을 탐욕스러운 괴물이 먹어치우지만 않는다면, 아마도 새로운 흐름은 계속해서 나올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탐욕스러운 괴물 역시도 제 몸집을 유지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더군요. 너무 성장한 탓이겠지요.]
내 말에 톰 핸슨은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역시나 만만치 않아. 어려운 타입이네.’
자신감과 여유를 모두 가진 스타일. 살짝 자극을 줄 겸 쿡 찔러봤는데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런 타입은 쉽게 무너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유지할 수 있다. 역시 마이크루라는 공룡을 운전하는 사람들 중 하나답다.
‘이만하면 서로에 대한 인사치레는 됐고.’
서로에 대해 간을 봤으니 이제는 슬슬 본론으로 넘어갈 타이밍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번에도 그러려고 했다.
[신작 게임의 계약 때문에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말을 꺼내려는데, 나보다 먼저 그가 입을 열었다.
‘간파당하는 기분.’
아까부터 내 행동을 예측하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타이밍을 보는 눈이 나보다 반 박자가 빠른 것인지 모르겠으나 계속해서 내 행동을 앞서나갔다.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약속을 잡을 때부터 우리의 목적을 확실하게 전달하고 출발했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하다. 김유천 과장과 마찬가지로 독점 계약 때문에 내가 직접 온 이유가 궁금한 것이다.
‘GF는 이미 ZBox의 기둥 중 하나가 된 상태니까.’
퍼스트 파티는 당연히 아니고 세컨드와 서드의 사이에 있는 애매한 위치의 게임사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발언권은 더욱 강력하다. 이런 회사에서 굳이 오너가 직접 찾아와서 계약할 이유가 무엇일까?
[어떤 계약을 원하십니까?]
가장 궁금한 것은 ‘도대체 왜 직접 왔습니까?’였겠지만 그는 절대로 먼저 해당 질문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대답했다.
[당연히 저희 신작 게임의 독점 계약. 그리고 베타 테스트를 위해 데모 버전을 라이브에서 전적으로 지원해주는 계약입니다.]
표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던 그의 얼굴에 드디어 파문이 일어났다.
[그런 거라면 그냥 직원끼리 만나도 아무 상관이 없었을 텐데요?]
가장 처음으로 드러난 그의 새로운 표정은 ‘고작 그거?’였다.
나 역시 입술이 씰룩이려는 걸 겨우 참았다. 궁금증이 슬슬 그의 방어막을 뚫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대화의 우위나 분위기는 소소한 것에서부터 갈리기 마련인데 그것을 거머쥐었음을 직감한 것이다.
[이번 계약은 단순한 신작 게임 하나만을 걸고 계약하고 싶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번 신작 외의 다른 게임을 함께 계약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이것 외에 개발 중인 게임이 또 있으십니까?]
[개발 중인 게임이야 당연히 있지만, 게임을 미리 계약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래 아무런 정보가 주어지지 않으면 궁금하던 것도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시들해지기 전에 던져진 밑밥에 타올랐던 그의 궁금증은 그 다음 대답으로 인해서 해결보다 더 큰 공허함을 남겼다.
[그럼 대체 어떤 계약 때문에 직접 오신 겁니까?]
‘드디어 원하는 질문이 나왔다.’
결국, 참지 못한 그가 먼저 질문을 꺼낸 것. 이제야 그를 내 페이스 안에 둘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비로소 김유천 팀장에게 말했다.
“우리 자료를 보여드리세요.”
“알겠습니다.”
영문으로 제작된 GF 엔진에 대한 세세한 내용이 담긴 자료.
그것을 받은 톰 핸슨의 얼굴이 상기 됐다. 그리고는 빠른 속도로 자료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장르에 상관없이 모든 게임을 개발할 수 있는 게임 개발 툴. 이것이 GF에서 가지고 있는 핵심 기술이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걸 보여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는 이제 포커페이스를 완전히 포기하고 자신의 호기심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신작 게임과 함께 그것도 계약하려고 온 겁니다.]
[게임 개발 툴을 계약하시겠다고요? 하지만 저희는 따로 개발 툴을 외부에서 가져오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물론 마이크루야 직접 개발할 인력도 많고 또 자본도 넉넉한데 이런 외부 툴을 가져다가 쓸 이유가 없죠.]
[그런데 굳이 이걸 계약하자고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우리 게임이 잘 나가고 있다고 해도, 우리 게임을 계약하는 조건으로 ‘너희도 우리 엔진을 써!’ 이따위 조건을 내걸 생각은 없다. 차라리 우리 게임을 안 쓰고 말지 마이크루 소프트가 그런 걸 허락할 이유가 없었다.
내 목적은 당연히 다른 것이다.
[마이크루에서 게이머에게 게임을 판매하듯이 게임 개발사에게 우리 엔진을 판매해줬으면 합니다.]
[지금 이 개발 툴을 우리를 통해 판매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게임엔진의 판매. 이건 마이크루의 입장에서 아주 좋은 조건이다. 거기에 고작 두 개뿐이지만 출시한 게임을 모두 대박 낸 게임사의 신작과 함께 해당 게임을 개발한 엔진을 판매할 수 있는 권한이지 않던가.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지만, 지금쯤 엄청 머리를 굴리고 있겠지.’
물론, 어떻게 계산을 해봐도 ‘이건 무조건 해야 해!’라는 식의 대박 계약으로 결론이 날 것이다. 엔진이야 팔리면 좋은 거고 안 팔려도 마이크루에서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그게 내 노림수고.’
처음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나면 그 감정은 나머지에도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계약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나누는 세부사항에 대한 의논은 그렇지 않았을 때와 생각의 반경이 매우 크게 달라진다.
[그렇다면 게임에 대한 가격과 개발 툴의 가격. 그리고 수익금 분배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야겠군요.]
[게임이야 기존의 가격과 분배를 그대로 가면 될 것이고 GF엔진은 딱히 이야기를 나눌 것도 없습니다.]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니요?]
[GF엔진에 대한 판매 권한을 마이크루에게 드리는 조건으로 마이크루는 이 엔진으로 인한 이익을 얻지 않는다, 이것이니까요.]
그의 얼굴에 세 번째 표정이 생겨났다.
[뭐라고요?]
바로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우리가 직접 홍보도 하고 판매까지 하는데 수익은 가져가면 안 된다? 이런 불공평한 조건이 계약으로 이어지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자리까지 나왔지요.]
이어지는 내 말에 그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그런 상대에게 내가 말을 이었다.
[우선 지금 저희가 보여드린 GF엔진은 몬스터 프레데터스를 개발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20명 정도의 인력이 1년 정도를 고생하면 어설프게나마 인디게임과 상업게임의 중간 정도 퀼리티를 가진 게임을 개발할 수 있을 정도죠.]
과거에 비해 게임 개발은 그 난도가 엄청나게 상승했다. 그렇기에 20명 정도의 인원이 준 상업게임을 1년 만에 만들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우리도 보통 하나의 게임을 만들 때 200명 정도가 달라붙으니까.’
이조차도 한 번에 붙는 인원을 의미하는 것일 뿐, 해당 게임에 참여한 전체 숫자를 말하면 무려 500명이 넘어간다.
[대단한 성능을 지닌 개발 툴이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저희가 수익을 포기하면서 이 툴을 판매해야 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마이크루에서 수익을 포기할 이유는 이 엔진의 성능 때문이 아니라 이 엔진을 어떻게 배포할 것이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배포할 것이냐?]
[네. GF엔진은 무료로 배포할 겁니다. 물론 완전한 무료가 아니라 조건제 무료 배포입니다.]
[어떤 조건이죠?]
[첫 번째 조건은 ‘GF엔진을 무료로 이용하는 게임 개발사는 완성된 게임을 무조건 ZBox로 출시해야만 한다. 다만, 독점 형태가 아니어도 된다.’ 두 번째는 ‘게임을 판매해서 얻은 이익의 10%를 엔진에 대한 로열티로 GF에 지급한다.’입니다.]
그의 표정에 경악이 서린다. 이건 터무니없는 조건이다. 외부의 업체에서 넘겨줄 계약이 아니다 이 정도면 내부의 자회사에서 만든 것들에나 붙을만한 조건이었다.
‘누가 봐도 낚시를 위한 미끼다. 대놓고 이건 미끼입니다. 이런 광고를 하지만, 물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매력적인 미끼지.’
그렇기에 톰 핸슨은 침을 삼키며 혼자만의 생각을 이어갔다.
‘계산을 아무리 해봐도 이건 계약을 하는 게 이득일 거다.’
ZBox의 고질적인 문제는 게임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쩌면 단박에 해결해줄지도 모르는 해결책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대형 게임사는 이미 섭외를 했거나 마이크루에게 등을 돌렸어. 하지만 중소 게임사들은 입장이 다르지.’
대부분의 중소 게임사들은 한 번에 두 가지 플랫폼을 모두 생각하면서 게임을 개발하는 데에 애로사항이 많다. 그래서 메인 플랫폼을 하나 정한 뒤 먼저 개발을 하는데 여기서 가장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부분이 바로 소프트웨어다.
그런데 이 최신 게임을 개발하는 것에 적합한 엔진을 지원해주는 플랫폼이 있다면?
그 플랫폼에서 제공하는 엔진이 최근에 가장 핫한 게임을 개발했던 엔진이라면?
무조건 들어온다.
[확실히 이건 이득을 포기할만한 제안이군요. 좋습니다만, 물론 기한이 있겠지요?]
[당연합니다. 기한은 2년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계약합시다.]
엔진을 판매하는 것으로 내지 못하는 수익은 플랫폼에 게임이 많아지며 발생하는 타이틀 판매 수익 증대로 상충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좋아. 이제 미끼를 물었으니 진짜를 이야기할 차례다.’
물고기를 낚는 낚시꾼의 심정으로 내가 말했다.
[다만 추가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보시지요.]
[GF 엔진으로 개발된 게임에 대한 PC타이틀은 저희가 판권을 가지겠습니다.]
콘솔 게임의 판권은 너희에게 주겠다. 하지만 PC 타이틀은 포기해라.
바로 이것이 우리의 조건이었다.
매력적인 미끼 속에 가려져서 볼 수 없었던 미끼. 그것이 드러낸 순간이다.
‘다 알게 됐음에도 여전히 매력적이지? 바늘에 걸린 것을 알아도 놓기가 싫지?’
톰 핸슨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손익을 계산해보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쉽게 계산이 되지 않는지 그는 연거푸 인상을 썼다가 한숨을 내쉬며 빠르게 결론을 짓지 못했다.
게임 스테이션의 타이틀이 빠르게 시장을 점유해나가고 있고 마이크루에서 준비한 것들은 그들의 물량 공세에 아무런 힘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콘솔 시장이다.
이 마당에 유일하게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낼 수 있을 계약!
그러나 그 조건 때문에 PC 타이틀을 포기한다?
도대체 어떤 것이 이익이고, 어떤 것이 손해란 말인가?
‘그렇다고 모든 PC게임을 포기해야 하는 건 또 아니니까 더 판단을 내리기 어렵겠지.’
하지만 결국 그의 계산은 계약을 하는 것이 이익으로 끝이 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신과 같이’가 남아 있으니까.’
이것이 바로 신작 게임의 계약을 위해서 찾아왔지만, 아직 신작 게임에 관한 계약 사항은 조금도 꺼내지 않았던 이유였다.
< 타이틀 거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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