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틀 거래 >
게이머스 포럼의 게시판에는 거의 축제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면 조금 밋밋해졌을 수 있겠지만, 몰래 숨어서 우리의 싸움을 몇몇이 보았고 또 우리가 올라가서 싸울 거라는 홍보가 되었던 덕분에 나중에 용기 내서 올라왔던 이들이 우리의 승리를 눈으로 확인했다.
‘증인은 넘칠 정도로 많다는 소리지.’
그렇기에 사대룡에서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었는데 쪽수로 깨진 거다!’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 말은 힘을 잃고 있었다. 이즈음에 내가 결정적인 것을 올리면 상황은 종지부를 맞는다.
바로 싸우면서 찍어둔 내 이미지들이었다. 다시금 「구운몽이 실황을 알려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그 결과, 어떻게든 언플을 하면서 목에 힘을 줬던 사대룡 연합은 당장 사라지고 말았다.
게시판에는 ‘아까 떠들던 새끼들 죄다 어디 갔냐?’ ‘집 나간 누구 씨를 찾아요.’ 등이 올라왔다.
그러자 사대룡 연합은 방향을 바꿔서 사람들의 감정을 소모하고 부계정을 통해서 비난하는 등 상황을 시궁창으로 만들고자 했다. 논점을 흩뜨려서 싸움의 승패를 감추려는 수작이었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내가 여기 오너거든.’
운영자의 관리 권한으로 녀석들이 부계정으로 올린 글들을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삭제해버렸다.
치사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
강자의 횡포를 부린 것이다.
‘어차피 이 싸움 한 번으로 사라질 놈들은 아니지만.’
이런 싸움이 몇 번 이어지면 결국 사대룡 연합은 싸우기를 포기하고 무너지게 될 것이다.
‘범죄 캐릭터들은 아이템 드랍률이 높으니까 페널티가 크지.’
적반하장이 두 번 눕고 두 번 다 아이템을 떨어뜨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이번 싸움에서 많은 사대룡의 정예들이 장비를 상실했는데 그 액수는 우리 쪽에서 합산해보니 무려 현금 2,200만 원 수준이었다.
이만하면 아찔할 정도의 큰 피해다.
하지만 포기해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아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도박판에서 모든 재산을 다 잃고 있다가도 ‘이번 한 번만 대박 나면 돼!’라며 집착하는 것처럼 미련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쓸데없이 집착하게 만든다.
사대룡 연합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정점기를 누리고 목소리에 힘을 줬던 만큼 추가로 우리 길드와 싸움을 벌였다. 그러다가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패배하니 이번에는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여 치고 빠지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전투를 벌였다.
그 탓에 길드원이 죽는 상황이 발생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우리 거야.”
“맞아. 짜증은 나지만, 어차피 저런 방법으로는 오래 못 가.”
“진득하게 통제하고 PK랑 사냥을 두루 해야 템도 먹는 건데 저런 식으로는 제살 깎아먹기임.”
단기적으로는 보상이 없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무언가를 벌이려면 수중에 남는 것이 있어야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산발적인 싸움에서 우리 길드원 몇을 때려눕힌다고 해도 그때의 쾌감이 전부일 뿐이다.
더군다나 나를 비롯한 핵심 멤버들은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으니 사대룡 연합은 잔가지만 무수히 쳐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울러 희생을 각오하고 쓰러뜨린다 해도 PK유저인 저들에 비해 우리는 아이템을 떨어뜨릴 확률이 매우 낮았다.
결국, 이겨봐야 잠깐 즐거울 뿐 남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때가 곧 올 것이다. 그리고 집단이 크면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많은 것이 당연한 만큼 차츰차츰 무리에서 이탈하는 이들이 나오게 된다.
“그래도 매듭은 딱 짓는 편이 후련하니까 마지막으로 선물 하나만 줘봐야겠다.”
“선물?”
“어떤 거임?”
“중립유저들을 묶어주는 일.”
거만의 탑에서 사냥하는 유저들과 화룡의 안식처에서 사냥하는 이들을 모두 모아서 사대룡 연합에 대항하는 단체로 만들어버린다면 집단이 개인에게 부리는 행패가 아니라 집단과 집단 간의 동등한 싸움이 된다.
우리의 압박으로 주춤한 놈들에게는 회생불가의 치명타가 될 테로 결국, 갈 곳을 잃은 사대룡 연합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한편, 이 말에 친구들이 우려를 보였다.
“그러면 서버에서 가장 큰 단체가 되는 거 아냐?”
“중립유저가 전부 다 뭉치면 우리도 무시 못 할 규모일 텐데?”
“상관없어.”
“뭐가 상관없냐? 쪽수는 진리야.”
“아무리 우리가 강해도. 500명 넘게 쳐들어오면 절대로 못 이겨.”
맞는 말이다. 500명이 똘똘 뭉쳐서 공격해 온다면 막을 수 없다. 그런데도 내 표정에는 조금의 걱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은 없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냄비 근성이라는 잘못된 방식의 표현이 아니다. 본래 감정 역시도 자원이다. 격하게 불타오르면 에너지를 다 쓴 만큼 식는 것이 정상이기에 오래도록 들끓게 만들려면 그만한 노력과 각오가 필요하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적대감은 그런 지속성을 발휘하기 어렵지. 구심점이 없을 때는 더더욱 그래.’
플레지 1은 물론이고 최근에 출시한 플레지 2의 사건사고들 중에는 중립이라는 간판을 걸고 대량의 유저들을 모집한 사례가 흔한 편이다.
그들은 비대해진 몸집을 이끌고 공성전에 나섰는데 기존 성주들과 비교해서 한참이나 큰 세력을 자랑했음에도 실제로 성을 차지했던 일은 단 1건에 불과했다. 이유는 그들의 성향이 안정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싸움의 스트레스 없이 게임을 쾌적하게 즐기고 싶은 라이트한 유저. 딱 그 정도의 각오가 전부거든.’
괜히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수틀리면, 이 선을 넘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태도와 행동을 보여줘야 세력 내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이러한 전투적이며 능동적인 태도를 가져야만 길드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중립 길드에 가입한 유저들은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런 성향이 아니었기에 모여든 무리인 만큼 집단적이며 깃발 아래에 뭉쳐서 소리 높이는 성향이 아니다.
‘눈치 보면서 게임하는 것만 아니면 충분히 만족하는 플레이어들이지. 그런 사람들이 500명씩 모여서 성을 공격할 정도의 행동력을 보인다? 그런 꿈같은 일은 있을 수 없지.’
폭압과 강력한 억제가 있다면 혹 모르지만, 우리 길드는 서버 내의 세율부터 사냥터 통제의 행패를 부리지 않는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불만이라는 혁명의 불씨가 생길 일 자체가 없다.
나는 이와 같은 설명을 해주며 친구들에게 단언했다.
“그러니 무조건 진행하시라. 오케이?”
“오케이이기는 한데, 뭔 게임에 사람 심리니 혁명이니를 들먹이냐?”
“하여간 이 새끼는 게임에 미쳤다니까. 차라리 논문을 써라, 논문을 써.”
“너희도 게임으로 먹고 살려면 이 정도는 머리를 굴려라.”
“싫다. 그냥 노가다나 할 거임. 사냥만 하면 골드가 꾸준히 떨어지잖냐.”
“대박은 너님이 까치처럼 물어다 주고 우리는 개미처럼 일하련다.”
“그려~”
피식 웃으며 잡담을 나눈 뒤 집에 돌아갔다.
111. 타이틀 거래
“다녀왔습니다.”
게임 폐인이 지금의 딱 내 몰골일 것이다. 미국에서의 반년은 물론이고 돌아온 뒤 24시간을 플레지만 하고서 돌아왔다. 이런 아들의 방문에 어머니께서 핀잔을 섞어 맞이해주셨다.
“아이고. 이게 누구세요?”
“자랑스러운 고 여사님의 장남 윤태식 아닙니까?”
“우리 집엔 아들이 없는데?”
해외 생활을 마치고 오랜만에 돌아와 놓고는 코빼기도 제대로 비추지 않던 아들에게 단단히 삐치신 모양!
하지만 내게는 상황을 무마할 아이템이 들려 있었다.
“짜잔! 여기 한우 갈비 대령입니다! 화 푸세요~”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높이 들었다.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신다.
“명절엔 명절이라서 한우 갈비. 좋은 날은 좋은 날이라서 한우 갈비. 화가 나면 화 풀라고 한우 갈비. 너는 어떻게 된 애가 그렇게 센스가 없니?”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안쓰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화를 푸시는 모습이었다.
‘한우갈비가 얼마나 맛있는데······.’
어쨌건 어정쩡한 모습으로 어머니가 계속 째려보시는 것보다는 이런 게 훨씬 나았다. 어머니는 다 큰 아들의 애교에 이내 웃음으로 맞이해주셨다.
“됐다. 무겁게 그거 계속 들고 있지 말고, 일단 저기 올려두고 와라.”
“네.”
안으로 들어서니 몇 년 만에 돌아와도 언제나 정겨운 느낌을 주는 안온한 일상이 나를 다독였다. 잘 꾸며진 집의 분위기가 아닌 사랑하는 가족이 이 자리에 있어서 전해오는 포근함이었다.
“태희야! 오빠 왔다. 내려와서 같이 과일 먹어라.”
거실 소파에는 아버지가 TV를 보시고 어머니는 과일을 깎아서 탁자위에 올리셨다. 뒤이어 과일을 깎으며 큰 소리로 동생을 부르시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방에 있는 거 맞아요?”
“오늘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를 않네. 얘가 무슨 일이 있나?”
“제가 한 번 올라가 볼게요.”
거실에서 계단을 올라 태희의 방문 앞에서 ‘똑똑’ 노크를 했다. 뒤이어 손잡이를 잡았는데 잠가놓지는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태희야?”
부르며 문을 여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서 고민 중인 동생이 보였다.
“어쩌지··· 아··· 이거 진짜 어떡해······.”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손톱을 인정사정없이 물어뜯으면서 같은 말만 반복하는 중이었다. 뭐가 저리도 고민되는 걸까, 질풍노도의 불량한 사춘기도 없던 태희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티 내지 않으며 불렀다.
“태희야. 뭐해?”
“아··· 어떡하지··· 이거 어떡해···”
“윤태희?”
“어? 으응? 오빠? 언제 왔어?”
“지금.”
그제야 날 보고는 화들짝 놀라는 태희.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게···”
대체 뭘 보고 이렇게 당황하는 것인지 태희가 보고 있는 모니터에 가까이 가서 확인했다.
“화신운수?”
관광버스 회사 홈페이지다.
“여기를 왜 보고 있어?”
“아니··· 그게···”
물어보니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듣고 나니 다소 맥 빠지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내일이 예과 MT인데 네가 버스랑 숙박지 예약을 담당하기로 해놓고 날짜 예약을 잘못했다?”
“응······.”
공부에서만큼은 늘 똑 부러지는 아이였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것과 이런 행사를 담당하는 건 전혀 별개의 일. 처음 경험하는 일에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태희는 책임감이 쓸데없을 정도로 커.’
섬세한 성격이라서 웃고 넘길 일도 그러지 못하고 미안해하는 타입이니 이번 실수가 더욱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오빠 이거 진짜 어떡하지? 애들 다 엄청 기대하고 있는데······.”
“원래 그런 버스는 학교에 요청하면 학교에서 해주는 거 아냐?”
“공식적인 MT면 그게 맞아. 그런데 이건 그냥 우리 동기들끼리 내년이면 본과에 들어가니까, 그 전에 같이 모여서 놀자고 하는 거라서······.”
‘아이고. 얘는 잘 나가는 오빠를 뒀다가 뭐에 써먹으려고 이러는지.’
상황파악을 마치고 나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버스는 몇 대나 필요한데?”
“우리 인원이 많지 않아서 한 대면 돼.”
“알았다.”
번호를 꾹꾹 눌러서 양도준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저 윤태식입니다. 미안한 부탁인데, 혹시 내일 버스를 한 대 정도 구할 수 있을까요?”
- 버스요?
레이컴 사장, 양도준. ‘버스가 필요하다면서 운수회사도 아닌 전자제품 회사에 왜?’라는 의문을 떠올릴 수 있지만 레이컴은 세계 2위의 MP3P 제작 회사다. 당연히 공장의 출퇴근 직원들을 위해 많은 버스를 운용하고 있다.
자체 운용이 아닌 북부운수라는 회사와 계약 상태로 운용하는데 여기서 갑은 레이컴이었다. 그리고 나는 양도준 사장에게 부탁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다.
“계약한 운수회사에서 혹시 쉬는 버스가 한 대 있으면 내일 하고 모레. 이틀만 빼달라고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당연히 갑작스러운 만큼 그에 맞는 비용을 지급할 겁니다.”
레이컴에서 북부운수에 매달 지급하는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갑의 힘을 발휘한다면 돈 한 푼 안 들이고 버스 한 대를 이틀간 빼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만, 그런 갑질 행위는 절대 사절이다.
‘이미 당장 내일 오전에 버스가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갑질일지도 모르지만.’
돈을 더 준다면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충분히 용인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당장 연락해서 버스 한 대를 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오전 8시까지 수도대학교 입구로 좀 부탁드릴게요. 목적지는 경포대입니다.”
- 알겠습니다.
< 타이틀 거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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