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38화 (238/577)

< 나빠요 >

구경하는 재미가 아무리 커도 직접 플레이하는 것만 하겠는가.

나대로의 거만의 탑 즐기기를 다시 시작했다.

‘와. 댄싱 소드! 진짜 오랜만에 본다.’

사람이 검을 들고 춤추듯이 싸우는 소드 댄서가 아니다.

칼이 혼자서 둥둥 떠다니며 사람들을 썰고 다니는 몬스터인 댄싱 소드다. 이 녀석은 12층에서 사냥하는 거의 모든 유저가 가장 싫어하는 몬스터 1위로 꼽는 부류에 들어간다.

‘칼이 몬스터 그 자체라서 클릭이 무진장 안 돼.’

몸뚱이가 가만히 있고 칼이나 팔로 공격하는 부류가 아니다. 댄싱 소드는 칼날의 이미지인데 이놈이 공격해오면 당연하게도 칼이 휙휙 이동해버린다. 그래서 클릭하려 해도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여기에 짜증 나는 점이 한 가지 또 있다.

‘탑 1층의 변종 코카트리스랑 비교하면 딱 보이지.’

바로 스펙이 쓸데없이 높다는 것!

「댄싱 소드 : Lv : 37 성향치 : -39 방어력 : -43

HP : 380 MP : 0 이동속도 : 빠름」

「변종 코카트리스 : Lv : 34 성향치 : -36 방어력 : -15

HP : 450 MP : 100 이동속도 : 빠름」

댄싱 소드는 변종 코카트리스보다 레벨이 3이나 높다. 반면에 체력은 무려 70이나 낮았다. 이것을 보고 ‘체력이 낮으니까 빨리 죽어서 잡기 좋겠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체력이 낮다는 것은 그만큼 떨어진 스탯이 다른 곳으로 갔다는 걸 의미한다.

‘이 녀석은 특히 공격력으로 몰방인 타입이고.’

즉, 빠른 이동속도와 클릭하기 어려운 짜증 나는 움직임과 이미지, 강력한 데미지라는 삼박자를 갖췄기에 유저들이 매우 꺼리는 몬스터가 된 것이다. 여타 몬스터와는 달리 댄싱 소드는 달랑 2마리만 붙어도 체력 좋은 나이트조차 바로 위기에 처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뿐 아니라 이 녀석은 마나가 0이다.

플레지에서 매지션은 마나 소모량에 비해 마나 회복속도가 느리다. 그렇기 때문에 몬스터의 마나를 훔쳐야 힐이든 뮨이든 해줄 수 있다. 그런데 댄싱 소드를 상대하면 그조차 불가능해진다.

‘또, 선공 몬스터라서 유저를 발견하면 먼저 공격하는 점. 칼이라서 눈이 없기 때문인지 변신을 해도 공격당한다는 점. 투명망토를 착용해도 걸린다는 점. 동족의식까지 가지고 있어서 우르르 몰려든다는 점. 아이템이 떨어져 있으면 다가와서 홀랑 줍는다는 점. 이만큼이나 까다로우면서 비싼 템도 안 떨구는 거지라는 점 등등이 있지.’

도대체 칼이 어떤 이유로 동족의식을 갖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개발자가 이런 식으로 디자인했으니 어쩌겠는가. 그저 치미는 짜증을 참으며 사냥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꺼림칙함은 어정쩡한 보통의 유저들에 사례일 뿐이다. 나처럼 압도적인 스펙으로 중무장하면 썰고 가기 좋은 알량한 경험치 덩어리들에 불과하다.

- 애플민튜 : 야. 저기 봐봐.

- 쿨가이 : 응? 저기 왜?

- 애플민튜 : 저거 안 보이냐? 나이트 혼자서 소드 세 마리에게 맞으면서 사냥하고 있잖아.

- 쿨가이 : 에이. 힐이랑 뮨 받고 하는 거겠지.

- 애플민튜 : 뮨은 고작 30초 유지되는 마법이거든? 주변에 매지션이 보이냐?

- 쿨가이 : 그럼 어디서 힐 겁나 퍼붓··· 헐? 뭐냐? 저거? 저게 가능해?

- 애플민튜 : 한 마리 더 붙는다. 도와줘야 할까?

- 쿨가이 : 냅둬. 귀환하겠지.

온라인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 건져놓았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의 사고가 곧잘 일어난다. 딱 봐도 몬스터들한테 당하기 직전이라 도왔더니 ‘어디서 스틸을!’이라며 성질을 낼 때가 잦았고 만약 고가의 아이템이 떨어지면 분위기는 무진장 살벌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만만한 서큐버스나 비홀더도 아니고 무려 댄싱 소드가 아닌가. 품은 많이 드는데 삯은 적으니 애써 수고롭게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 애플민튜 : 뭐야? 왜 베르 안 하지?

- 쿨가이 : 데스로 변신한 거 보면, 레벨이 높은 것도 아닌데···

- 애플민튜 : 데스가 안 높냐? 52부터인데?

- 쿨가이 : 그게 낮다는 게 아니라 52렙은 우리 길드에도 많이 있잖아. 근데 저게 가능한 나이트 있냐?

- 애플민튜 : 없지.

- 쿨가이 : 그러니까 저게 되려면 60렙은 넘기고 방어력도 80방은 넘어야 하는 거거든. 52렙이라고 치면 족히 90방은 되어야 할 테고.

- 애플민튜 : 방어력 90? 그게 말이 되냐? 80방만 넘겨도 서버 최고 지존급 아이템인데?

- 쿨가이 : 그러니까 이상한 거지.

‘미안한데 레벨은 70넘겼고, 방어력도 80, 90이 아니라 100을 넘었단다.’

이 강력한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나이트는 고급 체력회복제를 사용해야 하지만, 나는 일반 회복제로도 충분히 다 따라가고 있었다.

‘2마리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고 3마리부터는 체력 회복속도와 피가 떨어지는 속도가 비슷하지.’

4마리가 되니까 살짝 부족한 감이 생기지만, 그래도 문제는 없었다. 사냥 속도가 워낙 빨라서 4마리 이상에게 포위당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 애플민튜 : 뭐가 이상한··· 야. 아이디 봐.

- 쿨가이 : 왜? ···구운몽!

- 애플민튜 : 와. 이제야 이해가 되네. 구운몽이네.

- 쿨가이 : 그러네··· 구운몽이면 가능하겠지. 요즘 통 안 보인다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구운몽은 구운몽이구나.

- 애플민튜 : 난 솔직히 이제 우리 정도면 구운몽이랑 비슷하거나 우리가 더 쎌 줄 알았는데··· 내가 감히 건방진 생각을 했다.

- 쿨가이 : 응. 너무 건방졌네.

‘그래도 아직은 다들 내가 강력하다는 인식을 기본으로 깔아주는구나.’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닐까? 그런 고민을 많이 했는데, 마주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를 알아보고 강력했던 구운몽을 떠올려준다는 사실이 제법 고맙고 어깨가 으쓱여진다. 이래서 칭찬이나 존중이 사람을 우쭐하게 만드는가 보다.

‘고작 게임 캐릭터 강한 것뿐인데도 이런 기분이 드니 말이야.’

이제 슬슬 12층에서의 재미는 다 봤다. 그래서 13층으로 향하려고 하는데 내 눈에 질펀하게 펼쳐진 시체들의 대화가 보였다.

- 광속구르기 : 아··· 뭐야? 쟤네 또 왔네?

- 무스펠하임 : 저놈들 오는지 잘 좀 봐주지.

- 다크칼라 : 내가 그럴 시간이나 있었냐? 그냥 멀리서 확 날아오지, 갑자기 댄싱 소드 딜이 들어왔지. 뭐 하기도 전에 누워버렸는데.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손발이 잘 맞아서 제법 감탄하면서 봤던 그 파티. 아까 체계적으로 사냥하던 무리들이 전원 바닥에 누워있었다.

- 망치나가셨다 : 이대로 부활을 부탁하는 게 과연 좋은 선택일까?

- 무스펠하임 : 왜?

- 망치나가셨다 : 어차피 걔네가 계속 여기 있을 거라면 또 죽을 수도 있잖아?

- 무스펠하임 : 그건 또 그런··· 아, 망할. 어차피 돌아가긴 해야 하네.

- 망치나가셨다 : 왜? 설마 뭐 떨궜냐?

- 무스펠하임 : ㅅㅂ, 검 떨궜어.

‘피케이 당한 거야?’

‘걔네’라는 표현으로 봐서는 복수형이다. 여기에 ‘또’라는 표현이 들어갔으니 상습범의 소행이라는 의미가 된다.

상습 피케이단!

플레지에 오래간만에 들어온 나조차도 딱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서도 포기하기는커녕 준비를 철저하게 한 뒤 재차 죽이려고 들었던 이들.

‘사대룡이 생각 이상으로 극성인가 본데.’

지금까지는 일반적인 다른 유저들과의 대화를 의도적으로 피해왔으나 이번만큼은 사태 파악을 위해 나서야 할 것 같았다.

- 구운몽 : 혹시 사대룡 애들이 왔었습니까?

물으니 분노 섞인 답변이 돌아왔다.

- 망치나가셨다 : 사대룡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스스로 이렇게 말하기 민망하지만, 걔네 아니면 지금처럼 어이없게 눕는 일도 없습니다.

확실히 아까 사냥하는 모습으로 봤을 때, 쉽사리 죽거나 그럴 파티는 아니었다.

- 무스펠하임 : 걔들 왔으니까. 오늘 여기서 사냥하는 건 텄네요. 단층에서 사냥하는 건 안 내키지만, 더 고층으로 올라가는 건 무리니까 단층이나 가야죠.

- 구운몽 : 사대룡 녀석들이 한 번 자리 잡으면 꽤 오래 있나 봐요?

- 다크칼라 : 보통 끈질긴 애들이 아닙니다. 아마 오늘 하루는 여기서 죽치고 있을 거라고 보시면 돼요.

- 광속구르기 : 혼자 사냥하시는 거 보면 장비가 엄청 좋으신 거 같은데, 님 같은 경우가 더 좋은 다킷이에요. 님도 그만 내려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 다크칼라 : 야. 이 님 아이디나 보고 말해.

- 광속구르기 : 응? 어? 구운몽?!

게임이니까 당연히 아이디를 다 확인하고 대화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기다가 대고 지금 ‘그래. 내가 구운몽이다.’ 뭐 이럴 것도 아니니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튼 이런 식이면 명랑한 플레지 즐기기가 불가능해지지. 지금이야 썰고 다니지만 옛날의 내가 거만의 탑에 얼씬조차 못 한 이유가 뭐였었냐? 몹이 센 것보다도 저런 골 때리는 피케이 녀석들 때문이었어.’

느긋하게 콘텐츠를 즐긴답시고 탑을 돌아다닐 때가 아니었다. 경각심을 갖고 탐문하며 돌아다녔다. 그 결과, 8인 1조의 피케이 파티가 무려 5개나 운용되고 있는 철저한 싸가지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규모면 나조차도 제대로 걸리면 위험해진다. 그러니 다른 유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4명까지는 무난한데 5대 1부터는 살짝 부담되고 6대 1부터는 되면 아슬아슬하지. 7대1이 된다면 무조건 내가 밀린다. 만약에 충분히 물약의 회복력이 따라가 준다고 해도 녀석들을 다 처리하기 전에 포션이 먼저 바닥날 테고.’

길드원들을 다시 소집하여 함께 다녀야 하나, 고민할 무렵.

다른 시체들을 발견했다.

- 반스쿼트 : 아. 씨. 쟤네 뭐야?

- 윈도우짱커 : 활피단이네. 요즘 거만의 탑에서 활동하는 활피단이 있다고 하더니, 쟤네인가 봄.

- 반스쿼트 : ㅅㅂ 경험치!!!!

- 윈도우짱커 그래도 템은 안 빼앗겨서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또 다른 피해자들이다. 이는 녀석들이 아직 이 층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사실이 있었다.

‘왜 다들 전멸당했지?’

아무리 활피단의 화력이 강하다고 해도 거만의 탑에서 사냥하는 이들은 모두 파티 상태의 유저들이다. 누군가 당하는 순간 신속하게 마을로 귀환해버릴 수 있다. 그런데 단 한 명조차 도망치지 못하고 죽은 모습들이었다.

피케이 범들이 어떤 식으로 사냥하기에 그런 걸까?

조금 더 녀석들의 방식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디에 있는 거냐? 혹시 한 층을 더 올라갔나?’

혹시나 놈들이 다른 곳으로 간 것을 아닐까, 내가 지금 엉뚱한 곳에서 놈들을 찾는 것은 아닐까, 조금씩 조바심이 날 즈음.

녀석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레시틴 :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 에틸렌 : ㅇㄹ

세 마리의 댄싱 소드에다가 서큐버스까지를 상대하고 있는 나이트.

그를 보조하느라 매지션 유저의 마나가 고갈되었고 그는 다급히 ‘ㅇㄹ’를 쳐서 마나의 고갈을 알려주었다.

사대룡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활피에 투망피를 함께 하는 거였군.’

매지션의 마나 고갈 사인이 떨어짐과 동시에 디텍트를 사용.

순식간에 들이닥친 엘프들의 활질에 사냥 중이던 매지션과 나이트가 차가운 바닥에 눕고야 말았다. 정말이지 ‘엇?’이라는 반응을 채 끝내지도 못한 사이에 마무리된 현장이었다.

‘쌍놈들이긴 한데 타이밍이나 실력은 예술이네.’

엘프들의 공격력만 해도 감당하기 힘든데 댄싱 소드의 강력한 데미지와 서큐버스에게 둘러싸여 있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유저들은 무언가 대처조차 하지 못한 채 전멸하고 말았다.

이들은 마무리로 남아있던 몬스터들마저 정리했는데 그 속도가 실로 비범했다. 유저인 나이트와 매지션 만큼 댄싱소드와 서큐버스가 순식간에 녹아내린 것이다. 그만큼 저들의 공격력이 강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중에는 나름 자주 본 닉네임도 있었다.

‘적반하장? 저 녀석은 9장궁을 떨구고도 바로 여기에 왔네?’

보통 저 정도의 고 강화 아이템을 잃어버리면 한동안은 멘탈을 회복하는 데에 긴 시간을 쓰게 된다. 그런데 저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을 보니 피케이로 얼마나 남들의 아이템을 강탈해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9장궁 못잖은 활을 스페어로 둘 정도니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 적반하장 : 찾았다. 구운몽!

‘이런.’

< 나빠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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