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37화 (237/577)

< 나빠요 >

“완전 배짱 영업이야.”

내 입에서 불만이 나오는 건 바로 이 부분 때문이었다.

‘웃긴 건 이런 불편함 때문에 더 기억이 잘 남고 추억 보정이 된다는 거지만. 이래서 노인네들이 말하는 ‘나 어릴 적에는 더 심했어.’라는 소리는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일 거야.’

이동시간을 늘리는 불편함을 게임회사라고 모르겠는가. 이게 다 불편함을 통해 콘텐츠의 소모량을 줄이려는 얄팍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2005년도가 지나면 유저들이 반발을 시작하고 목소리가 커지면 회사가 일부 받아들여 패치를 하게 된다.

‘우는 아이한테만 밥을 준다는 마인드는 영 별로야.’

어쨌거나 이건 미래의 일이다. 아직은 게임사에서 의도한 것이 있다면 유저들이 친절히 따라주었기에 여론을 모으지 않는 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지금 시점에서는 이런 주장을 해봐야 ‘겨우 그걸로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라는 반응을 얻을 것이다.

시스템을 바꾸기보다는 시스템 안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찾아내는 방식을 발견하고 말이다.

지금 시점에서의 요령은 잠시 접속을 종료했다가 접속하는, 리스타트의 방식이었다.

‘이러면 내려갈 것 없이 거만의 탑에서는 무조건 1층으로 가게 되거든. 자리 잡고 플레이하던 중에는 환장하겠지만 이동하려면 이게 딱 좋지.’

해당 테마의 1층이 아니다. 11층에서 사냥 중이건  27층, 48층이건 튕겼건 간에 재접속 하면 맨 아래층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사용하여 재접속한 뒤 1층 마법진에서 『거만의 탑 11층 이동 마법석』을 사용했다.

“사람이 꽤 되는데?”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본격적인 거만의 탑은 여기부터다’라고 인정해주는 곳이 바로 11층이다. 1~10층은 단층이라고 부르는데 11층 이후와 비교하면 확실히 난도가 낮은 편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1~10층에서는 8검 5세트의 방어구를 착용한 나이트 유저가 몬스터 출몰이 적은 층에서 혼자 사냥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반면에 똑같은 장비를 갖춰도 11층에서는 매지션을 더하여 2인 이상의 파티를 맺어야 사냥할 수 있었다.

‘주로 3인이나 4인 파티가 많고. 아직은 내가 기억하는 시기보다 유저들의 스펙이 떨어져서 그런가 보군.’

나이트, 엘프, 매지션의 3인 파티 혹은 나이트가 둘에 매지션이 하나인 파티 등, 다양한 구색으로 11층을 찾은 사람들이 보인다. 다만 엘프가 없는 파티는 있어도, 나이트나 매지션이 없는 파티는 보이지 않았다.

11층에서 주로 만날 수 있는 몬스터는 바로 서큐버스다.

특징 중 하나인 ‘3보 텔’은 서큐버스가 세 걸음 이상 걸어야 하는 상황이면 순간이동을 해서 유저의 앞에 등장하기 때문에 붙인 말이다. 이런 접근 탓에 엘프 특유의 강점인 원거리 공격이 의미를 잃어버리는 사냥터이기도 했다.

굳이 유인하거나 쫓아갈 필요 없이 몬스터가 알아서 찾아와주는 사냥터다. 나이트들에게는 꿈만 같은 사냥터인 셈!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 대쉬마스터 : 힐! 힐!

- 탄산나이스 : 아! 빠져. 빠지라고!

- 고구마팼스 : 망할··· 나 죽었다. 부활! 부활! yyyyyy

이곳에서의 사냥에서 주의해야 할 점 중 하나는 서큐버스의 마법 공격이다.

‘마방이 낮으면 그냥 지옥이지.’

자유자재로 순간이동 하는 몬스터이인 만큼 데미지가 상당하다. 그러니 마법 방어력이 낮다면 서큐버스가 몰려드는 순간, 체력 게이지는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쓱싹쓱싹 사라져버리는 처지에 이르고 만다.

- 씻은거예요 : 눈깔! 눈깔 온다! 눈깔부터 잡아!

- 피노기옥 : 으아··· 안 돼. 서큐 진짜 너무 아파. 서큐부터!

- 씻은거예요 : ㅂㅅ아 눈깔부터 잡으라고!

눈깔.

불신의 테마를 가진 이번 층위에서는 ‘불신의 비홀더’라고 이름 붙은 몬스터를 말하는데 이 녀석의 기본 특징은 석화 마법이었다.

『몸이 서서히 굳어 가는 걸 느낍니다.』

『몸이 완전히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습니다.』

- 피노기옥 : 어? 뭐야? 얼었어.

- 씻은거예요 : 아! 그래서 눈깔부터 잡으라고 했잖아!

결국, 매지션의 말을 듣지 않고 당장 위협이 되는 서큐버스부터 처리하려던 나이트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고 말았다. 저러면 사냥은 종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여러 몬스터들을 끌고 다니면서 부리나케 돌던 중인 매지션은 석화에 당해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나이트에게 마법을 걸 수가 없었다. 결국, 석화마법은 해제되지 않았고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서큐버스의 강력한 마법 공격을 맞던 나이트 유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 피노기옥 : 아. 또 죽었어!

- 겨자맛참치 : 레벨업 하러 왔는데 레벨업은 커녕 레벨만 떨어지는 거 같아. 우리 여기서 사냥하지 말고 1층 내려가는 게 낫지 않겠냐?

- 씻은거예요 : 에이! 썅! 그러게 내가 뭐랬냐? 욕심내지 말고 단층에서 사냥하자 그랬지?

- 피노기옥 : 니가 석화만 제때 해제해줬으면 괜찮았지!

- 씻은거예요 : 눈깔 병신이냐? 그럴 상황이 아니었잖아!

- 피노기옥 : 지가 못해놓고 뭐라 씨부렁거리냐?

- 겨자맛참치 : 그러지들 말고···

- 씻은거예요 : 씨부렁? 이 함마로 대갈빡을 찍어도 시원찮을 않을 종간나···

레벨업이 잘 되고, 돈이 잘 벌리는 행복한 상황에서는 불만이 잦아들고 다툼 역시도 없다.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모두 여유 있는 문화시민으로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어려울 때 품성이 드러나는 법이다.

누군가 죽거나 열심히 사냥했음에도 적자가 나면 감정은 격해지고 싸움이 발생한다.

한편, 죽은 채로 말다툼인 이들이 있는 반면 한번 부딪쳐보고서 열심히 반성하며 자기 평가 중인 이들도 있었다.

- 해미리마트 : 아··· 진짜 여긴 너무 쎈 거 같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을 만든 거야?

- 크라운상가 : 이런 곳에서 사냥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니까 만들었겠지.

- 해미리마트 : 솔까 이건 못 깨라고 만들었다고 본다. 우리도 솔직히 쎈 편인데 다 죽다가 간신히 살아남았잖냐. 이거 길드단위로 오라는 건가?

- 크라운상가 : 너의 허접함을 엉뚱한 곳에 돌리지마. 저기 봐. 나이트 혼자 사냥하잖아.

그들이 말하는 유저는 바로 나였다. 구운몽은 지금 서큐버스 두 마리와 비홀더 한 마리를 데리고 싸우는 중이었다.

- 해미리마트 : 헐. 매지션도 없이 혼자서 저걸 물약으로 버티면서 잡는다고? 저게 돼? 어디 안 보이는 곳에 매지션이 있는 거 아냐?

- 크라운상가 : 아냐. 힐 쓰는 소리도 안 들리잖아.

- 해미리마트 : 아이디가··· ㅅㅂ! 구운몽이다!

- 크라운상가 : 구워? 원숭이를 구워?

- 해미리마트 : ···어디 가서 그런 썩은 드립 치지마라. 뭔 멍멍개 같아서 웃기지도 않고. 아무튼, 너 구운몽 몰라?

- 크라운상가 : 내가 알아야 하는 법이라도 있냐?

- 해미리마트 : 아니 그건 아닌데··· 플레지 랭킹 1위를 모를 수가 있나 싶어서.

- 크라운상가 : 랭킹 1위는 포세이돈인데?

- 해미리마트 : 에이. 포세이돈은 최근에야 주가가 오른 거고 원래 플레지 하면 구운몽이었어. 요즘 잠적하고 있어서 접었네. 어쩌네 말이 많았는데··· 저거 보니까 아닌 거 같다.

- 크라운상가 : 그런데 왜 저 사람은 마비에 안 걸리냐?

- 해미리마트 : 그러게다? 아무리 마방이 높아도 저렇게 많이 당하면 한 번은 걸려야 정상인데?

일반적으로는 제아무리 마법 방어력을 높여도 석화 주문에 한 번은 걸리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저런 말은 거만의 탑에 올 만큼 레벨과 장비를 맞췄음에도 저들이 게임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반사 방패가 괜히 반사 방패인 줄 아나.’

석화에 가장 특화된 장비는 메두사의 방패지만, 강화를 마친 반사 방패가 있는데 굳이 다른 아이템을 쓸 이유가 없었다. 이것만 갖고 있어도 석화에는 걸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기본 정보조차도 알아보지 않은 채 사냥하러 온 저들이 내게는 비정상일 뿐이었다.

‘플레지가 다른 게임처럼 레벨업이 쉬운 것도 아니고 죽고 나서 경험치를 복구하는 게 장난 아닌데. 하긴, 이런 걸 알아보는 것도 역시 공부니까 귀찮을 테지.’

만약 저들이 이곳에서 3번 사망했다면 플레지에 올인하는 스타일이 아닌 이상 한 달은 열심히 사냥해야 그 경험치를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여타의 게임처럼 한 시간 만에 경험치를 복구할 수 있을 정도로 플레지는 인간미 있지 않았다.

그러니 앞서나가거나 최소한 뒤처지는 일을 방비하려면 사전 정보를 먼저 입수해야 한다. 세상만사 노력하는 만큼 손실을 줄일 수 있는 법이다.

- 해미리마트 : 내가 구운몽이 켄헬섭에 있다는 이야기 듣고 켄헬 섭에서 시작했던 거잖아. 그래서 그런지 괜히 연예인 본 거 같고 그렇다.

- 크라운상가 : 근데 진짜 엄청 강한가 보다. 완전 혼자 쓸고 다니네.

- 해미리마트 : 그러게 그냥 길이 쫘악 열리네.

- 크라운상가 : 우리는 둘이서 잡아도 몹이 몰리던데.

서큐버스의 공격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파워 건틀릿에 +11 싸울아비 장검의 앞에서는 그저 흩날리는 낙엽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 크라운상가 : 우리가 졸라 쎈! 줄 알던 어느 누구 때문에 딜이 안 나와서 그런건 아닐까··· 싶다만?

- 해미리마트 : 그 누구가 설마 나님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 크라운상가 : 응. 너 탓이야.

- 해미리마트 : 젠장.

대화를 들은 것은 여기까지였다. 계속해서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전진하다보니 더 이상 그들의 대화가 채팅창에 올라오지 않았다.

‘이제 12층!’

11층과 달리 12층에서 사냥하는 유저들은 거만의 탑에 적응한 베테랑들이었다.

면면을 지켜보니 앞서 파티로 사냥하다가 죽었던 나이트와 스펙은 비슷한 것 같았다. 오히려 11층 유저보다 부족한 장비의 플레이어가 많았다. 그러나 사냥은 반대로 훨씬 안정적이었다.

- 광속구르기 : ㅁㅁㅁㅁㅁㅁㅁㅁ

‘ㅁ’은 ‘이뮨 투 함’이라는 마법을 줄여서 뮨이라고 부르는데 사냥 중에 ‘뮨 주세요.’라는 말을 다 쓰기 어렵기에 ‘ㅁ’만을 길게 꾸욱 누르고 엔터를 치는 것이었다.

- 다크칼라 : 5시 비홀더. 5시 비홀더 옵니다. 지금 못 잡으니까. 엘프가 돌려주세요.

나이트의 체력이 크게 떨어지면 회복마법을 사용하고 매지션의 마나가 부족해지면 잠시 붙어서 몬스터의 마나만 훔친 뒤에 빠르게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플레이였다. 여기에 원거리 딜러인 엘프는 딜링 겸 비홀더의 어그로 관리를 체계적으로 담당했다.

- 무스펠하윔 : 엘프에게 서큐. 서큐 붙었어요. 서큐 데려와요.

거기에 순간이동으로 엘프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서큐가 나타나면 재빨리 나이트가 다시 어그로를 빼앗아 오는 것까지. 이전에 보았던 파티와는 그 격이 달랐다.

‘워낙 고전 게임이라서 컨트롤보다 장비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스펙만 믿고 마구잡이로 해도 되는 게임은 아니라는 증거지.’

앞서의 미숙함 때문인지 저들의 능숙함이 여러모로 돋보인다.

‘보는 맛이 있어.’

일반적으로 대다수 게임에서 이뮨이라는 말은 주로 마법에 대한 면역성을 말한다. 하지만 플레지에서 사용하는 이뮨 투 함은 대상이 받는 모든 피해의 50%를 경감시키는 마법이다.

일단 길드의 매지션이 이뮨 투 함을 배웠느냐, 배우지 않았느냐를 중요하게 볼 만큼 효과가 탁월하다.

‘그래. 최상위 사냥터에 올 거라면 이렇게 제대로 준비를 해서 와야지. 마법도 제때 딱 쓰고 말이야. 눈이 편안하구만.’

이들을 보니까 내가 없는 사이에 우리 길드원들은 어떤 식으로 성장했을지, 사냥을 이어나가는지 궁금해졌다.

‘딱 이 파티원들 정도만 해줬으면 좋겠군. 나름 최강 길드로 불리는 위치니까.’

즐거운 구경이었지만 지켜보던 것도 잠시일 뿐이다. 내 쪽으로도 계속해서 몬스터들의 몰려왔기에 저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몬스터를 사냥하게 되면서 그들의 모습을 더 지켜볼 수 없게 되었다.

< 나빠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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