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대룡 연합 >
‘옛날의 구운몽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정면으로 덤빌 자신은 없나 보군.’
틈을 보여줘서 공격하게끔 만들어야겠다.
7층에 들어서면 이제는 키메라들이 유저를 맞이한다.
사자와 염소 뱀 따위 것들을 이래저래 짬뽕시켜 놓은 녀석인데 1~10층 구간에서 상층부에 나오는 몬스터인 만큼 나름 강력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키메라에게는 슬픈 전설이 있어.’
분류가 소형 몬스터라는 점이다. +11 싸울아비 장검의 무지막지한 데미지를 그대로 입어야 한다. 그래서 엉뚱한 방식으로 내 계획이 어긋나버렸다.
“너무 금방 죽어버린다?”
열심히 사냥하는 흉내를 내야 PK 유저들이 덤비는데 몬스터가 금방금방 죽어버리니 바라던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더 위층으로 올라가야겠다.
8층은 지난 4층과 마찬가지로 트랩 구간이다. 방심을 유도하고 말고가 없으니 더 올라가기로 했다. 뒤이어 9층에서 사냥하는데 여전히 나를 공격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팬심으로 따라오는 건가 싶을 정도다.
움직임을 보인 것은 10층에 도착해서였다.
‘몬스터가 많이 몰리기를 기다린 게 아니었구나.’
몬스터 웨이브 때문에 허덕일 때 뒤치기하려는 줄 알았는데 마냥 10층에 오를 타이밍만 보고 있었다.
‘상대는 다섯.’
피장파장과 릇데껌이라는 매지션 둘, 적반하장과 셈표라는 닉네임의 엘프 유저가 둘, 자일리텔이라는 나이트가 하나였다.
그들이 움직였다.
- 릇데껌 : 우리도 드래곤 한번 먹어 보자!
- 적반하장 : 캔슬! 캔슬 걸어!
켄헬 서버의 5대 드래곤.
안사락스, 파푸니르, 볼카나스, 윈드비오르, 구운몽.
‘추억 돋네.’
처음에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민망한 이름이었는데 역시나 과거의 기억은 아름답게 포장되기 마련인가 보다. 이렇게 들으니 반갑기까지 하다.
‘일단. 어느 정도 수준인가 시험해볼까?’
플레지에서 다수전이 발생하면 타깃을 정하여 우선순위부터 처리해야 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단연코 매지션 클래스부터 배제해야 옳다.
- 릇데껌 : ㅇㅋ! 바로 캔슬!
캔슬레이션은 대상자에게 걸린 모든 버프와 디버프를 제거하는 마법이다. 내가 장비 세팅이 마법 방어력을 중요시하고는 있지만 완벽하게 ‘마방 전문세트’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기에 44의 마법 방어력을 뚫고 캔슬레이션이 구운몽 캐릭터에게 적용됐다.
데스나이트를 비롯한 변신마법과 다른 일체가 해제된다. 그러나 상관없다. 버프 물약과 주문서는 다시 사용하면 그만이니까.
- 피장파장 : ㅅㅂ! 뭐야? 졸라 빨라!
- 자일리텔 : 물약이랑 변신속도가????
- 셈표 : 닥치고 다시 캔슬!!!!
‘형이 인마. 너희들이랑은 차원이 달라요. 이른바 고인물 유저다, 이 말씀~’
꿈속 세월에다가 현재의 반응속도 증가의 능력.
당장 이세계의 숲에 떨어져도 몬스터를 때려잡으며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 스펙으로 키보드와 마우스를 다루는데 어찌 일반인이 나를 상대할 수 있으랴. ‘플레지 프로게이머가 존재한다면 그 완성체가 나다’라는 기세로 신속 정확하게 버프로 무장하고 달려들었다.
이어서 계속 캔슬이 들어왔고 떠 해제됐지만, 상관없다.
나도 또 쓰면 된다.
‘사실 가속 포션만 마셔줘도 얘네는 무난하게 상대할 수 있지만, 퍼포먼스라는 게 그렇잖아.한걸음씩 변신, 해제, 변신, 해제에서 오는 압박감 같은 거.’
그렇게 굳건하게 맞아가며 매지션을 집요하게 노렸다.
- 릇데껌 : 18! 주홍이 먹으면서도 귀환할 타이밍 시간이 안 나와!
- 피장파장 : 캔슬 맞고 그냥 가속에 변신인데 이게 말이 되냐?
‘너희는 안 돼. 나는 되고.’
거만의 탑이라는 사냥터가 재미난 점은 무작위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던전은 무작위 텔레포트로 위기를 모면한 뒤,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필드가 아닌 비교적 좁은 사냥터이기에 이런 식의 합류는 상대의 골치를 여간 아프게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거만의 탑에서는 무조건 귀환의 돌을 써야 했고 그러면 마을까지 갔다가 10층에 올라오는 긴 딜레이가 생긴다.
‘10층을 위해서 1층부터 올라오는 건 여간 지겨운 게 아니지.’
귀찮음!
심리적으로 거만의 탑에 들어온 유저들은 귀환 버튼을 멀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타이밍을 놓쳐서 죽는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뽀작!
내리치는 검에 언데드로 변신한 상대 캐릭터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 릇데껌 : 아··· ㅅㅂ······ 미친 데미지······
사이좋게 다음 타깃도 보내줬다.
어억!
- 피장파장 : 주홍이 빨 때부터 어째 늦었다 싶더라니···
- 릇데껌 : 미친 새꺄. 그런건 끝나기 전에 씨불이라고!
- 피장파장 : 그건 그렇고 우리 엘프들은 여태 뭐 하는 거냐? 화살 없어?
죽은 자들의 만담이 이루어졌다.
- 릇데껌 : 화살 나가는 거 안 보이냐?
- 피장파장 : 근데 왜 멀쩡해?
- 릇데껌 : 화살 안 박히는 거 같은데?
엘프들의 화살이 전혀 안 들어오는 건 아니고, 대충 5번 정도 쏘면 한 번 정도 들어오는 중이었다.
- 릇데껌 : 적반하장 쟤 체력 엘프야?
- 피장파장 : ㄴㄴ 민첩 엘프에 9장궁 꼈다.
- 릇데껌 : ···ㅅㅂ 미쳤네. 민엘 9장궁인데도 안 박힌다고????
‘어라? 너네 생각보다 장비가 좋은 편이었네?’
하도 데미지가 안 들어와서 +7 무기 정도를 쓰는 줄 알았는데 +9장궁일 줄이야. 제법 놀라울 정도다.
‘아무튼, 이러면 게임 끝이지.’
매지션을 처리하면 다음 목표는 엘프다. 그런데 빠르게 달리는 내 캐릭터가 다시금 캔슬레이션에 걸리고 말았다.
‘엘프의 캔슬조차도 한방에 딱 걸리다니.’
익숙하게 데스나이트로 다시 변신한 뒤에 달려갔다. 이를 보고 녀석이 연거푸 캔슬레이션을 사용했지만, 엘프는 매지션과 다르다. 빗나가며 50% 미만의 성공률을 보인 것이다.
가볍게 무시해주며, 엘프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나는 빛이 솟구치는 광경을 보았다.
휘링!
- 릇데껌 : 뭐야? 지금 저 새끼 혼자 도망간 거야?
- 피장파장 : 쓉새··· 졸라 빠른데?
몇 대 맞지도 않았는데도 자신이 타깃팅이 되자마자 재빨리 귀환해버린 것이다. 결국, 매지션 둘이 사망하고 적반하장이 도주하면서 남은 PK 유저는 나이트와 엘프 각 한 명씩이었다.
다섯이 못 이긴 싸움을 둘이서 어찌 지속하겠는가.
적반하장과 마찬가지로 즉각 도망치고 말았다. 가볍게 승리한 셈이다.
‘그런데 이게 나한테야 가볍지 어지간한 플레이어였으면 비벼볼 엄두도 못 냈겠는데?’
장비와 컨트롤 모두 압살해버렸기에 나온 결과일 뿐, 공격의 연계가 꽤 체계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부 같은 길드이었는데 파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 이는 ‘구운몽이네? 잡아서 이름 좀 날려봐?’가 아니라 전문적으로 PK를 해온 집단이라는 의미였다.
‘내가 없는 동안 새로운 막피단이 부활했나?’
모를 때는 물어보는 게 좋다.
“진수야.”
“어? 왜?”
“화룡 길드라고 알아?”
“너 거만에 가서 게네 만났냐?”
화룡이라는 이름을 들은 진수의 목소리에 급 짜증이 섞였다. 아무래도 요즘 서버에서 꽤나 유명세를 타고 있는 길드인 모양이다.
“몇 놈 있던데?”
“얼마나?”
“다섯.”
“걔들 지금은 어디 있는데?”
“마을에 보내줬지.”
자랑스럽게 승리했음을 알려주는데 반응이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너 정확히 어디야?”
“거만 10층.”
내 말을 듣고는 바로 키보드를 두드린 것이다.
- [연합] 황성찬허좁 : 거만! 거만의 탑 10층에 화룡! 거만 10층 화룡 등장!
- [연합] 황성찬허좁 : 모이세요! 거만 갑니다!
신고를 받은 경찰처럼 재빨리 채팅창에 알리고서 출동할 채비를 갖추었다.
“인마. 싹 마을 갔다니까?”
“그러면 좋겠지만, 그 자식들이 보통 끈질긴 게 아니거든. 쉽게 포기하고 그럴 종자들이 아니라고. 졌다는 것보다는 네가 혼자서 싸웠다는 것을 기회로 알 거야. 5대 1로 안 됐다? 10대 1이나 20대 1로 늘리면 그만으로 보는 놈들이거든.”
현실이나 플레지에서 흔히 쓰면서 진리로 통하는 말이 ‘다굴에 장사 없다’ 거나 ‘쪽수가 진리다.’ 라는 것이다. 다섯이야 충분히 맞으면서 싸울 수 있지만, 군소길드가 아닌 거대 규모의 막피단이라서 20명, 50명이 되면 제아무리 구운몽 캐릭터라고 해도 감당하는 건 불가능하다.
생각보다 집요한 놈들인가 보다.
“네가 그 정도까지 반응하는 거 보면 꽤나 악질이겠는데?”
“말도 마라. 연말에 갑자기 야인시대라는 애들이 등장했었거든.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올포원이랑 합치더라고.”
“올포원이 흡수한 게 아니라 합쳤다고?”
“어. 정확하게는 올포원이 그놈들한테 먹혀버렸어.”
“뭐?”
올포원이 사람들 길드에 늘 밀리며 이인자의 역할을 하고 있어서 그렇지 절대로 약한 길드가 아니다. 서버가 달라서 나만 만나지 않았다면 능히 성을 독점하고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을 세력인데 그들을 신규길드가 흡수했다고 한다.
아무리 게임이라고 해도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은 역시나 자본이었다.
“자세한 정보는 알 수는 없지만, 소문으로는 야인시대를 운영하는 애들이 돈이 많은가봐. 카더라에 따르면 경상도에서 유명한 클럽을 운영하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만든 길드라더라.”
게임을 하다 보면 별의별 소문이 다 퍼지는 법이다. 실물로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신뢰할 수 없는 거짓 정보들이 그냥 판을 치는데 플레지에서는 특히 자금줄이 튼튼하면서 전쟁을 좋아하면 ‘저 새끼들 조폭 출신이네.’ 하는 소문이 흔하게 퍼졌다.
“그래서 화룡이랑 야인시대랑은 무슨 관계인데?”
“둘이 합치고 나서 사대룡이네 뭐네 하면서 나눴졌거든. 여기서 화룡은 가장 딜이 좋은 멤버들로 구성된 집단이야. 격수는 최소한으로만 들어가고 엘프랑 매지션의 비중이 높지.”
“사대룡이면 수룡, 지룡, 풍룡 같은 길드도 있는 거냐?”
“그렇지. 이제 곧 보게 될 거다.”
단순하게 콘셉트만 잡은 게 아니라 부분별로 전문화도 이룬 모양이었다.
“걔들은 어떤데?”
“수룡은 매지션 중심, 풍룡은 엘프가 태반이지.”
“지룡은?”
“거기는 다 짜고 남은 애들을 모아놔서 사대룡 중에서는 제일 약해.”
“그렇군.”
이쯤 들으니 진수가 서둘러서 출동할 법했다. 더군다나 다섯 명이 쓸렸다는 것은 그만큼 내 장비가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드래곤처럼 광역기술을 쓰지는 못하는데 잡기만 하면 초대박일 수 있으니 포기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지원군과 함께 이번에는 제대로 내 뒤통수를 치려고 하겠지.’
가장 확실한 건 싸움을 피하는 거다. 이쯤에서 귀환하면 저들을 닭 쫓던 개 신세로 만들 수 있고 안정적으로 다음 싸움을 기대하면 보장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만의 컴백이고 전 서버 통합 최강자라는 타이틀이 있지 않던가.
꼬리를 말고 도망쳐서 만만하게 여겨지기보다는 강렬한 한 방을 보여주는 편이 나았다.
“마을에서 대기했다가 우리랑 같이 올라가는 게 어때?”
“괜찮아. 내가 여기 있어야 쟤네도 유인되겠지. 너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면 그만이니까 이참에 한번 쓸어보자고.”
“오케이.”
성찬이 역시 웃으며 말했다.
“좋았어. 오랜만에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는 게 좋네. 이래야 플레지지.”
“병신아. 여태 우리가 한 게 플레지거든?”
“그러긴한데 태식이 녀석 있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이 말씀.”
“그건 나도 인정.”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둘에게 말했다.
“아무튼, 물약 배달 요망. 버티다 보면 아무래도 거의 다 떨어질 것 같아.”
“오케이.”
“괜히 강짜 부리지 말고 여차하면 바로 튀삼.”
“오냐~”
화룡인지 사대룡인지가 몰려온다고 해서 구석에 숨어 있을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 저들을 몰랐을 때처럼 ‘나는 이겼으니 이제 이 구역의 짱은 나다.’라는 태도로 태연하게 사냥하다가 놈들을 마주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진짜 마음에 안 든다니까. 아무리 개인 취향이라지만 저런 식으로만 게임을 하는 게 좋은 걸까?’
물론, 게임이니 당연히 싸울 수 있고 상대를 죽여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잃어봐야 고작 아이템에 경험치에 불과하니 말이다. 현실과 다른 가상의 세계인 만큼 도덕적인 잣대를 너무 엄격하게 들이대는 게 오히려 난센스였다.
그러나 뭐든지 정도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몰라도 PK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공감하기 어렵다. 즐겁게 지내기 위해 게임을 한다지만 나 하나 좋다고 다른 백 명을 괴롭힌다는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사대룡 연합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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