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28화 (228/577)

< (번외) 촬영장에서 >

누군가는 ‘억지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의미부여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매우 중요할 수 있는 법이다.

지금의 에밀리는 후자에 속한다고 본다. 이런 말이 다행히 먹혀든 모양이었다.

[배우 활동을 하는 연기라니! 그거 진짜 멋있을 거 같아요.]

그녀는 ‘일상에서도 연기하는 배우!’를 되새겼다.

[그거 엄청 멋진 일이 될 거 같아요!]

[그렇지? 그럼. 이제 식사를 맛있게 하고. 식사를 다시 촬영을 시작하면 반장으로의 역할에 충실해지는 거다? 알겠지?]

[네!]

한층 밝아진 에밀리의 표정을 보면서 그녀의 어머니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기운 넘치는 활기참을 보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식사를 모두 마치고 약속했던 12시 20분이 다 되어갔다.

[에밀리. 가서 오전에 깎인 점수를 모두 만회하고 와. 할 수 있지?]

[걱정 마세요! 이번엔 진짜 잘하고 올게요. 그리고! 에밀리 말고 이제는 라일리라고 불러 주세요!]

[···라일리?]

[이제부터 저는 라일리로 활동할 거거든요. 그러니 촬영장인 지금은 라일리로 부르셔야 해요.]

‘아니야. 너는 엠마라고.’

잘 하다가 마무리에서 삐끗한 기분이었다. 예명으로 성공한 배우가 있고 실패한 이가 있는 만큼 이름은 중요하다. 그런데 보장된 성공의 이름인 엠마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얼떨떨해하는 나에게 그녀의 어머니가 알려주었다.

[에밀리라는 이름이랑 느낌이 비슷한 이름으로 고른 거였어요.]

[이미 골랐었어요?]

[네. 결국, 바꿔야 한다는 건 저 아이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아까는 왜 에밀리에 그렇게 연연해서···]

[어리니까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다 나는 어머니가 한 ‘미리 골라놓았었다’라는 말을 되새겼다.

‘아. 나 때문에 점심 먹다가 정한 이름이 아니구나. 그러면 라일리라는 이름은 원래부터 정해놨던 것인지도 몰라.’

아니라는 생각을 80% 정도 하면서 나 자신을 설득하는 변명거리를 열심히 생각했다. 그녀는 라일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나중에서야 엠마로 이름을 변경하는 게 틀림없었다. 뭔가의 사건을 겪었거나 그냥 마음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영화를 시작으로 하게 되면 애초에 크레딧에 라일리가 아니라 엠마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래야 필모로 딱 나오거든.’

즉, 영화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엠마로 마음을 바꿔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건 시간을 두고 넌지시 권해서 유도해야겠다.

‘지금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현재의 관심사는 감독의 마음에 들게 에밀리가 연기할 수 있느냐, 하지 못하느냐였다. 그리고 이는 컨디션을 되찾은 만큼 다른 면모를 보여주며 해결되었다.

[좋았어! 그 표정이지!]

감독의 표정과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래! 그래! 아주 좋아 훌륭해! 마이티 말대로 연기를 잘하는구나. 이렇게 잘하는데 아까는 왜 그랬던 거냐? 아! 배가 고파서 연기에 집중이 잘 안 됐었나? 이거 에밀리가 배고프지 않도록 단단하게 준비해야겠는걸?]

막혔던 진행이 술술 풀리며 마이티가 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특히나 촬영이 이어질수록 에밀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연기를 보여주는 다른 악기연주자들의 엉망진창 연기 덕분에 스태프들은 에밀리에게 훨씬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를 보며 마이티가 내게 와서 말했다.

[회장님의 설득이 완벽하게 성공했네요.]

다행일 따름이다.

미국의 촬영현장이자 에밀리의 연기이기에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약속했던 오후 4시가 다가왔다. 조감독과 약속한 햄버거와 콜라를 쏠 시간이다. 돈으로 나눌 수 있는 행복의 시간을 다시금 우리는 가졌다.

[아까 점심때와 마찬가지로 이 햄버거와 콜라도 여기 에밀리 양의 후원자인 미스터 윤이 쏘는 겁니다! 햄버거를 받기 전에 다 같이 박수 한 번 칩시다!]

조용히 식사했던 점심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원래라면 촬영을 이어가면서 돌아가면서 햄버거를 먹는 형태를 취해야 했지만, 에밀리의 변화 이후로 예정보다 빠르게 촬영이 진행된 덕분에 간식 타임에 30분을 배분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오전과는 달리 오후에는 공주님처럼 여겨지게 된 그녀를 만족스럽게 구경했다.

그즈음 감독인 리처드 링클턴이 내게 다가왔다.

[잠시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물주인 만큼 더없이 공손한 태도로 그가 말했다.

[마이티가 그러는데, 받은 명함이 GF그룹이라고 하더군요.]

[맞습니다.]

[혹시··· 블루워터와 쏘우리스트에 투자하셨던 그 투자자분이 맞으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내 대답에 그는 무슨 스타를 만난 팬처럼 말했다.

[아!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이 사람도 투자받고 싶은 영화가 있는 건가?’ 생각하는데 그가 뜻밖의 이름을 거론했다.

[블루워터의 감독인 크리스와는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습니다. 그에게서 당신의 이야기를 진작 들었죠. 시나리오만 보고 투자를 결정하셨다고 하더군요. 성공할 영화를 확신하셨고 말입니다. 두 개의 영화를 모두 시나리오만 보고 성공을 예감하셨다니 참으로 대단한 통찰력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비꼬는 건가?’

칭찬만 잔뜩 늘어놓아서 의심해봤는데 자세히 보니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얼굴 표정, 목소리로 판단할 때는 이건 진짜 칭찬이 맞았다.

어쨌거나 잔뜩 좋은 말을 들었으니 나 역시 대꾸를 해줘야 했다.

[통찰력이라니요. 단지 저예산인 만큼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내 말에 리처드 링클턴이 대답했다.

[보통 저예산은 저예산답게 수익이 나고 블록버스터는 또 그것에 맞게 수익이 나는 법이지요. 물론 실패의 리스크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미스터 윤은···]

별로 친하지도 않은 이가 잔뜩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넌지시 말을 자르며 그에게 물었다.

[네. 그건 그렇죠. 그런데 이 이야기의 요점이 뭐죠?]

[다름 아니라, 그 안목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찾아뵈었습니다. 우리 영화의 시나리오를 한 번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시나리오를 보시는 능력이 탁월하시니까 우리 영화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지. 아니라면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한 번 봐주셨으면 합니다.]

감독도 배우도 모두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는 자신의 영화가 성공할 거라고 확신을 하지 못하는 법이다. 게다가 그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이 다른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한 갈증을 나를 통해서 해갈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내가 에밀리만 아니었으면 그냥 무시하고 갔을 텐데, 봐준다.’

내심 웃고는 그에게 말했다.

[에밀리를 통해서 이미 봤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어떻게 보셨는지······?]

무언가 내 대답을 기대하는 그 얼굴을 보니 좋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이 시나리오는 무조건 성공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가 성공을 가져올 수 있는 핵심일까요?]

그 말에 감독이 왜 이렇게까지 물어오는지를 얼추 알 수 있었다.

‘에밀리를 발견하고부터 대본의 수정이 꽤 많아졌지.’

스쿨 오브 밴드의 대본을 보고 가장 놀란 점은 원래 내가 알고 있던 것과 꽤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는 점이다. 내 기억보다 교장 선생님의 비중이 높았으며 여 학생들 중에서는 베이시스트 역할이 가장 비중이 높았다.

특히나 놀라웠던 점은 엔딩까지도 차이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리처드 링클턴 감독은 그 변화된 요소들이 불안했고 내 말에 따라 비중을 조절하려는 의도였다. 오디션 자체를 연기자가 아니라 뮤지션으로 뽑았기 때문인지 저 배우는 ‘로봇 연기가 저거구나’라고 생각될 정도로 정말 연기를 못했다.

‘그러니 십중팔구로 베이시스트의 비중을 줄이고 그 대본을 에밀리에게 넘기려는 거겠지.’

문제는 감독의 물음에 내가 딱히 대답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 있었다.

나는 놀라운 분석력을 갖고 어떤 시나리오가 성공하는지 아는 게 아니다. 그저 미래를 알고 여기에 따라 투자 대상을 골랐을 뿐, 시나리오에 대한 지식 같은 건 없었다.

‘그럼 무슨 대답을 해줘야 하려나?’

에밀리에게도 유리해야 하고 감독도 만족스러울 만 한 대답을 찾아야 한다.

머리를 굴리며 완성작인 스쿨 오브 밴드를 회상하고서는 말했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를 놓치지만 않으면 될 것 같네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미스터 윤께서 생각하시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뭐죠?]

[순수함입니다.]

[네?]

그는 내게서 꿈이라거나 열정 뭐 그런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궁금해하는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짐 블랙이 왜 거짓말로 속여서 학교에 보조교사로 들어왔습니까? 그는 왜 그렇게 거짓말로 들어와서도 여전히 밴드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아이들은 또 왜 그런 짐 블랙이 사기꾼으로 밝혀지고도 그를 따라서 밴드 배틀에 나가게 되는 겁니까?]

내 말을 할리우드에서 꽤 이름난 감독이 주의 깊게 들었다.

[저는 그 이유를 순수함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어른들이 다시 동심의 순수함을 떠올리게 되는 거죠.]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말을 하면서도 이게 무슨 개소리야? 이런 생각이 들더라도 상대방이 나에게 높은 호감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걸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일을 뜻하는 말이다.

[그렇군요!]

자존심 강한 감독이라 내 말에 기분이 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서 그런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크리스에게서 나에 대해 좋은 말을 잔뜩 들은 영향이 틀림없었다. 그 호응에 힘입어 나 역시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있는 대본에서는 몇 가지를 수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무래도 이건 조금 주제넘겠지요?]

[아닙니다. 어떤 부분이죠?]

[교장과 짐 블랙의 연애 부분을 더욱 덜어내는 겁니다.]

[왜죠?]

[연인에게까지 사기 치는 모양새는 관객에게 기만의 감정을 주기 쉽기 때문이지요.]

[그렇군요. 진짜 좋은 지적입니다. 다른 것은 또 없을까요?]

[마지막에 스쿨 오브 밴드가 우승을 하는 것이 걸립니다.]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짐 블랙이 버림받은 밴드에게 복수를 하고 꿈에 대한 열정과 성공을 장식하는 느낌을 잘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요. 하지만 학생들과 달리 그것을 직업으로 하는 다른 밴드들은 뭐가 되는 걸까요?]

[······!]

미국은 밴드를 사랑하는 나라다.

그만큼 밴드를 경험한 사람들도 많고 이 영화를 보면서 감정을 이입할 관객도 많다. 그런데 진짜 직업으로서 열심히 준비한 밴드들을 제치고 잠깐 준비한 학생들이 우승한다면 어떨까?

그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겠지만 반대로 비판하는 사람도 상당히 나올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바꾸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우승은 기존의 밴드에서 하는 것으로 말이지요.]

[그리고요?]

[스쿨 오브 밴드는 등수가 아니라 인기상을 주는 겁니다. 그리고 우승한 팀이 보통은 앙코르 공연을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영화에서는 모든 관객이 스쿨 오브 밴드를 외치면서 우승팀이 아니라 이들의 앙코르를 부르는 겁니다.]

[아!]

[이로써 우승은 아니지만 마치 우승한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거지요. 상금은 기존 밴드가 가져가지만, 실제 우승자의 스포트라이트는 우리 학생들이 가지게 되는 겁니다]

이건 내가 생각한 장면이 결단코 아니다. 바뀐 것을 꿈속 미래의 영화대로 고스란히 설명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뒀어도 자기들끼리 문제를 느끼고 이렇게 수정해서 제작했을 거야.’

즉, 지금 내 이야기는 남이 아닌 저들이 고민한 해답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감독의 마음에 쏙 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예상대로 그는 고민이 해결되어 후련하다는 얼굴로 내게 연신 감사의 인사를 했다. 너무 좋은 생각이라면서 말이다. 남의 해답지로 지금까지 꽤 자랑해왔지만, 막상 당사자에게서 무한정 감사를 받다 보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여기서 그는 한 걸음 더 나가 내게 말했다.

[미스터 윤. 혹시 영화에 대한 조언이 필요할 때 따로 연락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할리우드 감독과의 친분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물론입니다.]

흔쾌히 승낙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리처드라고 편하게 부르시면 됩니다.]

[네. 저도 그냥 태식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러며 한국과는 다른 문화적 차이를 느꼈다.

‘자신보다 열 살이 넘게 어린 나한테 이런 자세로 조언을 구하다니.’

더군다나 앞으로도 조언이 필요할 때 연락을 해도 되냐고까지 말했다.

나름 새로운 경험이었다.

< (번외) 촬영장에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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