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저씨 팬의 서포트 >
“욕 나올 만큼 땅덩이만 더럽게 큰 나라 같으니라고.”
마이코닉스에서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니 평소라면 한국에 갔을 테지만, 지금은 에밀리를 도와주기로 작정한 마당 아니겠는가. 관심 있는 미래의 대스타이기도 한 만큼 에밀리의 매니저 노릇을 겸사겸사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오디션을 위해 LA에서 시카고까지 이동하고 있는데, 이럴 때마다 불만이 연신 나온다.
‘졸라 멀어,’
무려 2,015마일이 조금 넘는 거리다.
익숙한 단위로 환산하면 3,245Km.
비행기를 타고 무려 4시간 반을 이동해야 하니 이럴 때마다 기가 막힐 따름이다. 이렇게 이동했는데도 나는 여전히 미국이라는 한 국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역시 나는 여행 타입보다는 집에서 게임하는 스타일이 맞나보다.’
그렇게 다 커서 나 자신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며 에밀리의 오디션 하루 전날, 시카고로의 이동을 마쳤다.
우리는 호텔에서 최대한 편하게 하루를 보낸 뒤 오디션장에 갈 준비를 마쳤다.
[긴장되니?]
[아니요! 긴장은 저보다 대장님이 더 하신 거 같은데요?]
[그래 보여?]
[네! 걱정 마세요. 까짓거, 떨어지면 떨어지는 거지. 이거 경쟁률도 엄청나다면서요? 전 아직 어리니까 또 오디션 보고 또 보고 그러면 돼요.]
‘헐··· 대박 철 들었어. 얘도 나처럼 꿈이라도 꿨나?’
힘든 가정환경에서 역경을 이겨낸 경우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온실 속의 화초처럼 큰 아이인데 정말 야무졌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은 환경의 영향도 받지만 타고난 천성을 무시 못 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떨어지면 화는 좀 나겠지?]
[음~ 아주 쪼오금~?]
[그래.]
조금이라는 말을 늘려하면서 엄지와 검지 사이의 간격을 생각보다 넓게 잡는데 그 모습에 실소가 나와 버렸다. 그렇게 대화하며 호텔 로비를 나오니 입구에 롤스로이스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회장님. 차 준비됐습니다.”
“그럼 출발합시다.”
단순히 좋은 차를 타고 이동하려는 욕심에서 준비한 게 아니다. 이것도 1,000대 1이라는 경쟁률을 에밀리가 뚫도록 돕고자 준비한 요소 중 하나였다.
스쿨 오브 밴드의 배경이 되는 그레이스 호린은 뉴욕에서 가장 잘나가는 명문 사립학교 중에 하나다. 그리고 세계 어느 나라건 간에 명문 사립학교는 부유층들이 다니는 학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거기에 에밀리가 준비하고 있는 역할은 반장이고 영화에서의 어머니는 학부모회장을 담당하고 있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스쿨오브 밴드의 반장은 명문가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가장 콧바람이 센 집안의 아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에밀리가 준비된 배우라는 사실을 어필하는 거다.
‘일단 자동차부터 부티나는 차를 타고 가면 더욱 그 캐릭터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여기에 하나 더.
일부러 그녀의 복장도 교복과 비슷하면서도 매우 고급스러운 느낌의 정장을 새로 맞췄다. 이것이 바로 출발선부터 다른 고급진 편법이 되시겠다! 남이 쓰면 반칙이지만 내가 쓰면 자본주의의 합리적 소비라고 얼렁뚱땅 넘기는 요소이기도 하다.
‘처음 등장부터 임팩트가 빡! 하고 올 거야. 이게 바로 내가 준비한 첫 번째 무기지.’
에밀리 합격을 위한 두 번째 무기는 오디션 장소에서 건네는 명함이었다.
수행하기 위해서 따라 온 최준우는 함께 건물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차에 남았고 안에는 에밀리와 그녀의 어머니, 나. 이렇게 셋만이 입장했다.
[지원자의 이름이 어떻게 되죠?]
[스틴. 에밀리 J 스틴이요.]
[보호자분은요?]
바로 여기에서 내가 나섰다.
본래 보호자라면 그녀의 어머니가 나서는 것이 맞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나서기로 이미 말을 맞췄다.
[윤태식이라고 합니다.]
그와 함께 스태프에게 명함을 건넸다.
‘1,000대 1을 뚫기 위한 두 번째 편법!’
글씨는 물론이고 회사의 심볼까지 전부 금박으로 되어 있는 명함.
실로 고급스러움의 끝판이자 결정판이라고 자부하는 윤태식 회장 표 미국 사업용이며 단가는 무려 1장에 1달러다. 이 시기 한국인들의 명함은 대부분 한 장에 5센트, 비싸면 15센트 정도이니 이게 얼마나 특별한지는 누구나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용은 별거 없어. 명함은 그냥 명함이니까..’
그저 ‘GF Group. Tae sick Yoon.’라고 적힌 연락처가 전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받는 입장에서는 느낌이 다를 거다.
아니나 다를까, 명함을 받아 본 스태프의 표정이 크게 바뀌었다.
‘미국의 영화판은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정점. 캐릭터도 캐릭터지만 렝? 냄새가 크게 나면 일단 호감부터 가지게 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지.’
그런 인물이 에밀리의 보호자이니 저들은 신경을 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187번. 여기 번호 받으시고 2번 방에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두 번의 강한 인상 남겨주기를 성공리에 마치며 안내대로 이동했다.
원래 건물이 이런 것인지, 그게 아니면 이들이 오디션을 위해서 준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대기실 자체가 마치 교실과도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영화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186명이 언제 끝나려나.’
대기 번호 187번은 오디션을 위해 오늘 이곳을 찾은 사람 중에서는 크게 늦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비교적 짧다는 것이지 시간이 꽤 걸리기는 매한가지다. 결국, 에밀리의 차례가 다가왔을 때는 어느덧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을 무렵이었다.
[187번. 에밀리 J 스틴.]
[네!]
[준비해주세요.]
드디어 그녀의 차례가 되었고 대망의 오디션을 보기위한 문을 열었다.
[에밀리 잘하고 와!]
[네~ 대장.]
그 말을 끝으로 오디션장의 두꺼운 문이 닫혔다.
***
스쿨 오브 밴드의 1차 오디션 장의 문이 열렸다.
금발의 예쁘장한 아이가 들어오자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인 마이티가 눈을 찡그리며 주의 깊게 보았다.
[지금 저 아이가 말씀하신 그 아이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타고 온 차량뿐만이 아니라 매니저가 준 명함도 범상치 않더랍니다.]
[그래요? 흐음··· 일단 외모는 좀 부티가 나긴 하네.]
그는 자신이 그린 반장의 모습과 눈앞의 에밀리를 비교했다.
‘부티가 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반항아적인 기질이 느껴지는 눈매. 거기에 또 어떻게 보면 푼수와 같은 느낌도 있어. 상당히··· 잘 맞는군.’
이런 복합적인 느낌을 가진 아이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첫인상과 외관만으로 봤을 때는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충분히 가산점을 줄 만하다.
하지만 연기력은 아직 보지 못했다.
‘기대해도 되려나?’
어린아이들인 만큼 냉정한 잣대는 대지 않을 요량이다. 기본만 되어도 좋겠다는 신축성 있는 합격선을 그는 준비했다.
[작가님. 바로 연기를 볼까요?]
[그래요.]
[에밀리?]
[네.]
[대본 가지고 있죠?]
[여기 있어요.]
[51페이지에 28씬. 해볼게요.]
[네.]
마이티는 흥미로운 눈빛을 하고는 연기를 기다렸다.
곧,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수업은 언제부터 하나요? 저희는 매주 시험을 보고 만점을 받으면 별을 받거든요. 수업을 나가야 시험을 보고 시험을 봐야 별을 받을 수 있는데 수업을 안 하면 별을 못 받잖아요.]
28씬은 반장 역할의 아이가 처음으로 하는 대사다. 이 부분은 사실상 반장 자체의 연기보다 대사 이후, 짐 블랙의 사상과 캐릭터. 그리고 이 영화의 지향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니 그녀의 연기력이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발음도 좋고 호흡도 괜찮아. 전반적으로 연기하는 톤도 정석으로 배운 폼이 나는군.’
어린 나이부터 연기를 배운 아역들의 고질적인 실수 중 하나가 특유의 습관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 무의식적인 말투가 에밀리에게서는 보이지 않았다.
‘기본은 됐어.’
적당히 자연스럽게 대사를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님, 어때요?]
[괜찮네요. 이제 본격적으로 캐릭터가 드러나는 씬으로 가봅시다.]
마이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보조 작가는 에밀리에게 다른 씬의 연기를 요구했다.
[97페이지의 47씬을 해볼게요. 상대역은 제가 해줄 테니까 그냥 편하게 해요.]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인 뒤 이번에는 한결 개성이 드러나는 연기가 나왔다.
[사생팬?]
[뭐?]
[저더러 사생팬 역할을 맡으라고요?]
[사생팬은 밴드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이야.]
[저도 인터넷으로 다 조사해봤거든요? 그건 가수랑 잠이나 자는 헤픈 여자들이라고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사생팬은 스포츠의 치어리더 같은 역할이야.]
[전 치어리더 하기 싫어요! 잘 들어요. 우리 엄마가 학부모회장인데 이걸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걸요?]
[좋아. 잘 들으렴. 내가 다른 아이들이 들으면 질투할까 봐 이야기 안 했는데···]
에밀리가 연기에 쉽게 집중할 수 있도록 대역의 역할을 해주던 보조작가도 에밀리의 연기에 휩쓸려서 자신도 모르게 열정적으로 감정을 실어 연기를 하고 있었다. 절대 아역 배우의 연기라고 할 수 없는 이 감정은 혹시나 카메라에 제대로 담기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오호. 이거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데?’
내심 합격선이 그어졌고 두말할 나위 없이 그녀가 딱 맞다는 결론마저 나왔다. 이는 비단 그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에밀리가 다른 어떤 면모를 보여줄지 기대하게 됐다.
[작가님. 우리 이 친구 연기 좀 전체적으로 다 봐도 돼요?]
[그럴까?]
이미 1차 오디션은 만장일치로 통과했다고 봐도 무방한 분위기에서 에밀리가 어떤 감정선을 보여줄지를 보기로 했다.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아이답지 않게 적당하게 조였다가 또 그걸 적당히 풀어준다. 그러면서 과장되면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통해 이 영화의 장르가 코미디라는 것을 잊지 않게끔 해주는 점이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심 흡족하면서도 마이티는 내색하지 않은 채 재차 요구했다.
[에밀리. 아무거나 노래 한 곡만 불러볼래요?]
[그냥 아무거나 불러도 돼요?]
[네. 편하게 불러요.]
이 영화에서 에밀리가 맡은 반장 역할은 지독한 박치다. 어떻게 보면 스쿨 오브 밴드에 등장하는 이 반에서 음악에 재능이 없는 유일한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밀리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노래는 허스키하면서도 명랑했고 이 정도면 가수는 몰라도 뮤지컬은 충분히 도전해봄직한 수준급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쉽군. 배역 그 자체라고 봐도 좋을 만큼 완벽했는데 이것 하나가 딱 안 맞아.’
그래도 크게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노래를 못하는 배우에게 잘하는 연기를 시켜야 한다면 그게 문제가 되는 거지 잘 하는 배우가 못하는 연기를 하는 건 조금만 조정하면 쉽게 해낼 수 있는 거니까.
마이티는 그리 생각하며 재차 요구했다.
[혹시 노래를 못하는 척도 할 수 있어요?]
[네.]
너무나도 자신 있는 표정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윤태식 회장이 필수로 연습시킨 것 중 하나가 최대한 고급스러운 동작으로 웃기게 노래를 망치는 훈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밀리의 입에서는 조금 전과 똑같은 노래가 다시 흘러나왔다. 엉망이라서 오디션장에 있는 모든 심사위원이 배를 잡고 쓰러질 정도로의 변화였다.
[아. 미치겠다. 어떻게 갑자기 저렇게 변할 수가 있지?]
[와. 작가님. 이건 진짜 하늘이 보내준 배우 아니에요?]
[완벽하네. 정말 완벽해.]
어지간하면 티를 내지 않으려던 이들조차 모두가 만족스러움을 보였다. 그러다 마이티가 말했다.
[나 지금 당장 뉴욕으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왜요?]
[대본을 수정해야겠어. 짐 블랙의 원맨쇼 영화로 밀어붙이려고 했는데 이런 아역 배우가 생겨버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투톱으로 시나리오를 바꿔도 충분히 통할 것 같아.]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요. 그래도 오디션은 전부 끝나고 가셔야 합니다.]
이들과 달리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에밀리는 혼자서 그저 멀뚱멀뚱 심사위원들을 지켜볼 뿐이다. 분위기가 자신에게 매우 좋게 흐른다는 사실은 느낄 수 있지만, 저 웃음이 완벽하게 합격이라는 뜻인지 단언해주지 않아서였다.
[잘했어요. 에밀리. 이제 그만 나가봐도 좋아요.]
[저기··· 오디션은···]
[원래 오디션은 그 자리에서 바로 합격을 잘 이야기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돌아가세요. 아까 명함을 주신 분에게 따로 연락이 갈 거예요.]
[네.]
< 아저씨 팬의 서포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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