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19화 (219/577)

< 느낌 따라 >

‘관심 두기 전에는 렌더링이라 그러면 3D 그래픽을 만화같이 하는 그런 거를 말하는 줄 알았었지. 그런데 광원효과니 뭐니 별별 모르는 소리가 다 나오는 작업이더라고.’

여기에는 엄청난 연산능력이 필요하고 이를 전문적으로 해주는 일종의 슈퍼컴퓨터가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의 이름이 렌더 팜이다.

‘렌더링을 해주는 농장이라나 뭐라나.’

최종인 대표가 말하는 요점은 이러했다.

마이코닉스는 3D를 전문으로 다루고 있는 만큼 미국으로 오면서 렌더 팜을 구매했다. 그런데 지금 수준의 렌더 팜으로는 기한 내의 완성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게임과 관련해서 맡긴 일들은 척척 해냈기에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파라마운틴에 보여준 동영상은 어떻게 만든 겁니까?”

“그건 해상도를 극장용이 아니라 애초에 작게 보도록 제작한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본래 제대로 된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일루미네이션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시간에 맞출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로컬 일루미네이션을 사용한 일종의 편법을 썼습니다.”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럴 땐 그냥 닥치고 있어야 하는데.’

글로벌은 뭐고 로컬은 또 무엇인지 생경한 이야기들이다. 아무래도 나중에 공부해 봐야겠다. 그리고 굳이 그 의미를 알지 못하더라도 맥락을 통해 그가 말하는 바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 그 편법으로 계속 제작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로컬인지를 계속 쓰면 되지 않느냐는 말에 그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저희도 처음에는 그렇게 개발을 해보려 했습니다만··· 일단 한 번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종인 대표가 재빨리 지금까지 제작된 영상을 틀어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서는 통하지만, 미국에서는 TV 방영 판으로나 먹힐 수준의 영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면 퀼리티면 극장판으로는 어림도 없어. 100%로 망해.’

암담해 하는 내게 최종인 대표가 다른 영상을 보여주었다.

“이건 저희 GF 엔진을 최대한 활용해서 만들어본 영상입니다.”

얼룩말과 사자가 제자리에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이건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수준이었다. 대관절 뭐가 문제일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이들이 움직이자 문제가 발생했다.

‘이 노이즈는 뭐야?’

움직이기만 하면 배경에 노이즈가 생겨버린다.

“GF엔진을 이용하면 훨씬 쉽게 그래픽을 만들어낼 수는 있습니다. 다만, 게임기를 통해 기기가 추가 렌더링 작업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상 출력만 가능하게 제작하면 이런 현상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모두 활용하는 방법은···”

“가능은 하지만 작업 효율이 떨어져서 많은 시간을 잡아먹게 됩니다.”

“기한 내에 불가능하게 되는군요.”

“죄송합니다.”

결국, 성능 좋은 렌더 팜을 구매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는 소리였다. 간단하게 축약하면 ‘끝내주는 놈으로 슈퍼컴퓨터 한 대가 필요합니다.’가 된다.

참으로 고민되는 부분이었다.

‘비싸서 사는 게 아깝다’는 식이 아니다. 필요한 장비는 값이 나가더라도 구매하는 편이 옳다. 문제는 지금 시기가 2002년이라는 데에 있다.

‘이건 진짜 돈 낭비라고.’

2002년은 그야말로 하루가 멀다고 컴퓨터가 발전하는 시기다. 지금의 300억짜리 슈퍼컴퓨터를 구매해봤자 10년이 지나면 이건 가정용 컴퓨터와 비슷해지는 수준이 될 만큼 발전이 있는 시기였다.

‘게다가 문제는 또 있어.’

300억을 투자해서 1,000억을 벌면 그건 괜찮은 투자가 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슈퍼컴퓨터 그 자체에 있다. 이건 일반 컴퓨터처럼 근처 매장에서 오늘 구매한 뒤 ‘짜잔’하고 완성품을 들고나와서 바로 사용하는 게 아니다.

주문하고 조립한 뒤에 우리 회사까지 배달와서 연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에 족히 몇 개월은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허공에 날린 시간은 당연히 기한 내의 제작 불가라는 같은 결과로 이어진다.

‘패기 넘치게 파라마운틴이랑 계약했는데 이런 난제가 있었을 줄이야.’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마이크루에 부탁해볼까?’

세계 최대의 IT업체이니 그곳에 가면 업무처리 용도의 슈퍼컴퓨터는 당연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빌 게이트와 아는 사이이기는 해도 막역하거나 친구라도 볼 정도는 아니다. 엄연히 거래 관계이기에 그걸 우리에게 마음껏 사용하도록 내줄 리가 없었다.

‘호의를 보인다고 해도 남은 남이야. 남의 회사의 슈퍼컴퓨터를 이용한다는 것은 우리의 영화가 보안에 취약해진다는 뜻이 돼.’

그래서 기각!

내 소유의 슈퍼컴퓨터가 필요하다.

‘오래간만에 명상하면서 머릿속을 샅샅이 뒤져봐야 하려나. 그런데 이런 쪽에 내가 일말의 관심이라도 가진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네.’

내심 한숨을 내쉬며 우선은 최종인 대표에게 말했다.

“일단은 지금 할 수 있는 작업 위주로 계속 진행해 주십시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긴 하겠습니다.”

“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은 됐고요. 인력을 늘리든 뭘 하든 일단 최대한 뭐라도 해보세요.”

“예.”

최종인 대표는 어깨를 축 늘어진 모습으로 내 펜트하우스를 벗어났다. 나는 그의 등을 보다가 가볍게 말했다.

“대표님. 직원들에게도 그렇게 축 처진 어깨를 보여주려는 거 아니시죠?”

“예? 아··· 아닙니다!”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기운차게 가서 일 보세요. 그 문제는 제가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다.”

“예! 회장님.”

억지로나마 힘을 북돋아 주었다. 하지만 정작 그를 내보내고 나니 내 입에서 한숨이 나오고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다··· 직감하기에도 이건 내 머릿속에 답이 없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확실하게 아는 분야를 잘 활용하며 막힘없이 기운차게 전진해 왔다. 필요한 공부를 실시간으로 하고 잠재된 기억을 더욱 자극하면서 도움을 받았고 말이다. 그렇지만 일의 규모와 종류를 넓히다 보니 믿고 있는 꿈속 미래의 내가 생판 모르는 부분까지 오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심각하게 고민해 본 게 언제였나 싶기도 해. 너무나도 탄탄대로를 달려왔나 봐.’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일까.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막연하게 상념만 떠올랐다. 그러다 보니 별의별 객쩍은 생각마저 들었다.

“왜 드라마에서 신경질 나면 물건을 집어 던지는지 이해가 되네.”

잘 정리해 놓은 서류 더미를 무너뜨리거나 하는 종류를 보면 그동안은 ‘대체 저런 짓을 왜 할까?’ 싶었는데 비슷한 상황이 되니 막 어딘가에 풀고 싶어졌다. 뒤이어 10분 전의 내가 미워졌다.

“그냥 가만히나 있을걸.”

괜히 ‘나만 믿고 진행하세요.’라고 했구나! 반성했다. 그간 너무 호언장담하는 것에 익숙해진 탓이다. 습관이 될 정도여서 비슷한 상황이 되니 그냥 무턱대고 질러버리고 말았다.

‘조심하자.’

툴툴거리며 자책하다가 이내 마음을 바꿔먹었다.

‘우선 해보자. 나도 모르게 어디에선가 신문 쪼가리나 인터넷 기사라도 훑어봤을지 누가 알겠어? 부탁한다, 미래의 나!’

해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은 지웠다.

“지금까지 운이 좋았잖냐. 대박인 꿈도 꿨고 모르는 능력도 생겼고. 뭐, 거의 쓸 일은 없었다만··· 아무튼! 나는 할 수 있다! 행운의 사나이 윤태식이니까!”

듣는 사람이 없으니 쪽팔릴 이유도 없는 대사로 심기일전!

냉수를 들이켠 뒤 호흡을 가라앉히고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에 몰입했다.

5분.

10분,

40분···

뒤이어 몇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플레지에서 아이템을 강화할 때와 마찬가지의 느낌을 받았다.

‘알았다.’

맑은 정신과 오랜 명상으로 총명해진 눈빛을 번뜩이며 확신했다.

“몰라!”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과 E=mc2를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특수상대성 이론에 대해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 이는 매우 적다.

나에게 있어 슈퍼컴퓨터는 이것과 같은 셈이었다.

일기예보가 틀려서 비를 잔뜩 맞았을 때 ‘세금 가지고 기상청은 뭐하냐? 제대로 된 슈퍼컴퓨터나 살 것이지.’ 정도의 푸념을 하는 것이 고작일 뿐, 제아무리 탈탈 털어도 이쪽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하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사실 현실적으로는 이미 답이 나온 거지만.”

판단 미스를 솔직히 인정하고 ‘기한 내의 완성’이라는 집착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예정이 어긋나지만, 이것 하나로 내가 죽어버리거나 파산하는 따위의 일은 생기지 않는다.

남들이 숱하게 겪는 자잘한 실패를 최초로 겪는 셈에 지나지 않으니 오늘 일을 잘 새기고 다음부터 잘하면 된다. 인간이 마냥 성공만 하는 것도 터무니없으니 오히려 이쪽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나는 지금 허무맹랑함을 떠올리고 있었다.

‘솔직한 말로, 내가 보통 사람은 아니잖아? 꿈 하나를 대박으로 꾼 것 말고도 다른 능력이 많다고.’

쓸 일이 전혀 없어서 보이지 않았을 뿐, 지금 나이에 어떤 스포츠 업계에 진출해도 출중한 기량을 자랑할 수 있는 몸뚱이를 가졌다.

전생에 큰 희생을 해서 어마어마한 행운과 가호를 받아서인지는 모르겠다만, 지금의 내게는 탁월한 반사 신경 및 반응속도와 집중도로 감각을 강화하는 능력이 있다.

‘예전에 태희네 학교에서 불현듯 생긴 거였지. 만약 전쟁이 나거나 깡패라도 만났으면 여러모로 요긴하게 썼을 텐데, 내 삶이 그런 부류와는 전혀 만날 일 없었고.’

이뿐만 아니다. 자잘하게는 게임 속에서의 도박이 성공하는지 실패하는지를 직감적으로 아는 능력이 있었다. 이것은 +9, +10과 같은 아이템 강화를 통해서 자주 써먹은 부분이다. 게임 플레이는 취미가 되고 게임 제작이 직업이 되며 자제해온 능력이었다.

만약 순서가 바뀌어서 꿈속 미래 지식이 아니라 이들 중 하나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면 사업가가 아니라 다른 직업의 면모를 보였을 것이다.

보유하고 있지만, 막상 쓰지는 않았던 특별한 이것들을 지금 회상하는 이유는, 왠지 이 상황에서의 돌파구가 되어주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들어줄 정도는 아니더라도 뭔가가 바뀌기는 하더라고. 밑져야 본전이니까 한번 집중해보자.”

성공하면 좋고 아니면 놓아버리는 게 고작인 시도였다. 나는 꿈을 처음 꾸었을 때를 회상하고 강화를 할 때 느껴지던 미묘한 감각, 프로게이머와 처음 게임을 하며 손이 반응하던 느낌, 태희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던 당시를 집중해서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이 모두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는 착각과 동시에 미묘한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자리는··· 강화 실패의 느낌인데?’

‘감각적인 느낌’이라는 웃긴 표현이 딱 어울리는 그것은 나를 바깥의 어딘가로 인도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 곳이니 궁둥이 붙이고 제아무리 끙끙 앓아봐야 답이 없다. 대신 선형으로 이어지는 것 같은 이 안내에 따르면 뭔가가 달라질 것 같았다.

‘흡사 퀘스트를 받고 그 안내도가 뜬 것 같은데······.’

될 듯, 말 듯.

알 듯, 모를 듯.

왔다가 갔다가 하는 기이한 느낌은 내가 걸음을 옮길수록 강약이 달라졌다. 나 자신을 갓 생성한 신규 캐릭터로 여기고 튜토리얼 안내가 펼쳐진 양 여기면 딱 맞는 느낌이다.

“아예 친절하게 퀘스트 메시지라도 ‘단서를 찾아서!’라고 딱 나와주면 좋을 정도잖아. 하여간 누가 게임 만드는 놈 아니랄까 봐 이런 쪽으로 상상을 해버리네.”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기기는 하지만 밑져봐야 본전이니까.’

별의별 생각을 하며 수맥을 찾듯이 바깥으로 나섰다.

목적지가 불분명하고 나 역시 어디로 갈지 모르는 만큼 준우 녀석은 부르지 않은 채였다.

*

느낌에 치중하여 이동하다가 멈춰서 집중하는 묘한 행보를 이어나갔다. 그러니 꽤 머물렀다 싶은 LA 다운타운과 다른 식으로 와 닿았다.

‘도시라서 그런가, 죄다 바빠 보이네.’

LA나 서울이나 도심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곳인가 보다. 흔히 상상하는 서양의 여유로움은 유럽의 휴가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지 이곳은 빠른 걸음으로 분명하게 어딘가를 향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런 이들과는 다른 속도로 걸으며 어딘가에 있을 목적지를 찾았다.

‘설마 이러다 수십 마일을 걸어가게 되는 건 아니겠지?’

살짝 불안감이 들 무렵, 초라한 간판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City of star.

‘왠지··· 무진장 땡긴다!’

다운타운의 휘황찬란한 가게들과는 차이를 보이는 그것.

당장 바닥에 떨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낡은 간판! 바로 저기에서 퀘스트 아이템의 느낌표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미쳤는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가보면 알 수 있겠지.’

일반적이라면 초라한 간판 때문에라도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기분이 이끄는 대로 발을 옮겼다.

“어디로 들어가는 거야?”

간판에 적힌 층수는 5층. 반면에 건물은 4층까지만 있었다. 왜 그럴까, 내가 잘못 본 걸까, 싶어서 자세히 보니 건물 옆면의 철제계단이 옥상으로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었다.

< 느낌 따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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