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18화 (218/577)

< 느낌 따라 >

강경한 내 말에 아놀드 역시 단호하게 대꾸했다.

[고집이 심하시군요. 하지만 이 부분은 양보해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 영화를 끝까지 날로 먹겠다는 심보였다.

‘누가 들으면 엄청나게 이미 양보받은 줄 알겠네. 이 개자식아. 우리도 영화가 성공하면 게임으로 만들 줄 알고 TV 방영에 장난감을 출시할 수도 있다고. 그런 건 몽땅 양보하라는 건데 그걸 어떤 호구가 오케이 하냐?’

영화 하나 만들고 끝낼 것 아니지 않은가.

처음부터 다 양보하고 시작했다간 이후로도 계속 끌려다닐 수 있기에 재차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마케팅···]

[거절합니다.]

‘이제는 말을 듣지도 않겠다?’

싹둑 자르며 그가 자신의 할 소리를 내뱉었다.

[어떤 조건을 제시하셔도 저희가 만족할만한 내용은 없을 것 같군요. 그리고 당신 말입니다. 이 이상의 제안을 할 자격은 있는 겁니까? 거기까지 감당할 수는 있으십니까?]

아까부터 제일 어린놈이 당당히 말을 하니까 ‘뭔가 있긴 한가 보다’ 해서 들어주긴 했는데, 점점 스케일을 키우는 모습에 ‘진짜 그럴 위치는 되나?’ 하며 확인하려는 모습이었다.

나는 여유 있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그에게 툭 말했다.

[제가 GF의 오너입니다.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되는군요.]

[오너?]

예상치 못했던 말에 아놀드가 순간 커피를 테이블에 쏟았다.

‘그래 인마. 내가 이런 사람이야.’

살짝 헛기침하고서 아놀드가 말했다.

[실례했군요. 조금 전에 하려던 제안이 어떤 거였습니까?]

[마케팅 비용으로 5,000만 달러를 지원하겠습니다. 그 대신 영화의 수익 배분은 슬라이드를 적용하도록 하지요.]

[구간과 비율은 어떻게 적용하시려는 겁니까?]

[5,000만 달러까지는 100% 양보하겠습니다. 그리고 7,500만 달러까지는 50%, 1억 달러까지는 30%, 1억 5천만 달러까지는 20% 그 이후부터는 우리가 100%입니다.]

[음······.]

[당연히 이건 매출액을 기준으로 하는 분배입니다. 거기에 마찬가지로 2차 판권은 저희가 가지는 조건으로 하지요. 다만, 임대 형식으로 미국에 한정해서는 파라마운틴에서 향후 5년간 활용할 수 있는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원작자인 저희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내 말에 아놀드는 아주 마음에 든다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에게도 참 좋은 조건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귀사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별다른 경험이 없고 지금 보여주신 것만으로는 솔직히 부정적인 견해입니다. 그리고 2차 판권은 양보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넥타이 풀고 맞짱 한번 뜨고 싶은 놈이네. 이 자식아. 광고비로 무려 5,000만 달러를 투자하는데 니들이 손해 보는 게 뭐가 있어? 이런 데도 2차 판권, 2차 판권 앵무새처럼 지껄인다고?’

눈 가리고 코 베어 가는 수준이 아니다. 이건 대놓고 날강도다. 아까부터 배우처럼 표정과 목소리만 바꿔가며 억지만 쓰는 모양새인데, 이쯤 되니 내심 천불이 났다. 자꾸만 좋은 제안을 하니 더 뜯어먹을 게 있는 줄 아는 모습이었다.

이러면 나도 방법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통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수를 쓸 수밖에.

‘회사가 너희만 있냐?’

나는 표정을 싹 지우고 담백하게 말했다.

[4,500만 달러.]

[네?]

[마케팅에 투자하는 금액을 4,500만 달러로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착각하셨나 보군요. 500만을 올리면 5,500만 달러입니다.]

[그럴 리가요. 착각한 게 아니라 내린 게 맞습니다.]

나는 손목의 시계를 가리키는 제스처를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도 다음 사람을 만나서 회의를 또 한다고 했잖습니까? 우리 역시 할 일이 많고 바쁜 사람들입니다. 즉, 귀한 시간을 허비했으니 돈이 줄어들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 빨리 선택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길어지면 그만큼 계속 줄어들 테니까요.]

아놀드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2차 판권은 배급사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기에···]

[4,000만 달러.]

[저희는 이 권리를···]

[3,000만 달러.]

지금까지 500만 달러씩 내렸다면 이번에는 1000만 달러를 한 번에 내렸다.

순식간에 2000만 달러의 투자금이 빠져나간 셈이다. 아놀드는 그제야 내가 얕은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여겼다. 뒤늦게 표정을 달리하고 계산해보기 시작했다.

[생각이 길어지시네요. 저는 잠시 후 마케팅 비용을 1,000만 달러 더 줄일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 협상은 없습니다.]

[뭐라고요? 지금 우리와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겁니까?]

헛웃음마저 보이는 꼴이 ‘너희가 우리랑 계약을 안 하면 어디를 갈 건데?’ 하는 기색이었다.

그런데 이건 그가 큰 착각을 하는 것이다.

[당신의 실수를 알려드리지요. 지금까지 파라마운틴을 찾아온 회사들과는 이런 강압적인 방식으로 계약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소규모 영화사와 다릅니다.]

마케팅 비용을 턱턱 댄다고 할 때부터 눈치채야 정상인데 피부색이 달라서인지 그는 이를 간과했다.

[우리는 투자금이 필요한 회사가 아니기에 투자계약이 그렇게 급하지 않습니다. 당장이라도 이걸 가지고 다른 배급사를 찾아간다면, 그곳에 지금과 같은 조건을 내건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제 머릿속에는 당신들만큼이나 애니메이션을 무척 원하는 배급사 하나가 떠오르는데?]

그와 나는 같은 이름을 상기했을 것이다.

유니비전.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6대 메이저 배급사면서 마땅한 애니메이션이 없는 회사였다. 순위는 배급사 중 4위인데 이는 5위인 파라마운틴보다 높은 등급이다.

게다가 유니비전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사이며 파라마운틴은 2번째이니 근 100년 가까이 라이벌로 지내온 회사였다.

의식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눈앞에 있는 아놀드보다 더 오만하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대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아울러 유니비전에 가서 ‘너희 아니면 파라마운틴에 갈 건데?’라고 도발해봐야 유효함도 덜 하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그만 계산하고 물어라.’

가진 패를 쥐고 흔드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놀드는 갈팡질팡하는 모습만 보였다.

‘첫인상부터 마음에 안 들던 새끼.’

하는 수 없다. 기왕 이리된 것 더 세게 나갈 수밖에.

[비용을 2,000만 달···]

[하겠습니다!]

계산을 마쳤는지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3,000만 달러입니다! 3,000만 달러에 조건을 수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2천만이라는 말을 끝내지 않았으니 강력하게 주장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의 계약은 예정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신경전을 벌이느라 약정했던 한 시간을 넘었고 다음 회의에 늦게 생겼음에도 그는 당장 계약을 체결하자며 계약서를 수정하는 열의를 보였다.

그러며 사라진 2,000만 달러에 대해 아쉬움을 보였지만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솔직히 네가 5천이라 그랬을 때 냉큼 받았으면 내가 무진장 당황할 뻔했거든.’

바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시작한 레이스였고 이를 이용한 압박이 요체였다.

그렇게 계약을 진행하는 중인데 옆에는 나와 전혀 다른 표정의 최종인 대표가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회장님. 그게···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요?”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아놀드인 만큼 안심하고 나눠도 되는 대화였다.

“지금 계약대로라면 1억 2,500만 달러의 이익을 내야만 본전입니다.”

“아. 그게 걱정이셨군요?”

유명한 애니메이션들의 매출이 10억이니 어쩌니 떠들어서 그렇지 사실상 개봉하는 애니메이션의 대다수는 1억 달러도 넘기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 1억 2500만 달러가 본전이니 미래를 모르면 그냥 미친 짓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이건 매출도 아니고 수익금이다.

하지만 마다가스칼의 성공을 잘 알기에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난관이 있다면 시기 정도랄까? 2003년 5월 개봉을 피하는 것 말이야.’

그 시기에는 ‘인간에게 납치된 아들 물고기를 찾기 위한 아빠 물고기의 파란만장한 모험기’가 담긴 전설적인 애니메이션이 개봉한다. 그러니 피를 보기 싫으면 무조건 피해야 했다.

‘그러므로 마다가스칼의 개봉은 2003년 말을 목표로 하자.’

하여간 2003년은 물고기와 해적 등 바다가 여러모로 문제다. 짤막하게 이런 꿈속 미래 정보를 되짚은 뒤 최종인 대표에게 말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잘 만들면 되니까요.”

“회장님은 우리 만화가 그보다 더 큰 이익을 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당연합니다. 도대체 어떤 오너가 자기네 상품이 잘 안 될 거라고 확신할까요?”

“그럼. 죄송하지만 얼마 정도나 예상하십니까?”

“3억 달러입니다.”

“흐익!”

소리 죽여 이야기하던 그가 화들짝 놀라자 아놀드 역시 의아해했다.

“아직 우리 계약 중입니다만?”

“죄송합니다, 회장님. 너무 놀라서 그만······.”

가슴이 쿵쾅거리는지 심호흡마저 하는 모습이었다.

‘거기에 2차 판권으로 동물원과 협력해서 인형을 생산하게 되면 훨씬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이건 말하면 안 되겠네.’

다만 게임 쪽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마다가스칼로 만든 게임!

‘···생각만 해도 재미없을 것 같아.’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라고 전부 게임에 적합한 스토리는 아니라고 본다.

그렇게 우리는 마다가스칼을 위한 계약할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104. 느낌 따라

마을이라고 봐도 좋은 파라마운틴을 다녀온 후로 미국 법인에 대한 마음가짐에 변화가 생겼다. 지금 있는 곳이 좁게 느껴진다.

‘다운타운에 위치하는 것도 좋긴 하지만 아무래도 더 넓은 쪽이 나아 보여.’

200명이 사용할 공간을 70명이 사용하니까 넓게 쓰는 중이기는 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과 게임들을 모두 활용하려면 이런 대도시에서의 사무실이 아니라 조금 외곽으로 나가더라도 훨씬 큰 건물을 통째로 가지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게다가 이유는 또 있었다. 내가 갖고 있던 편견 탓에 저지른 실수를 깨우쳤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부동산 욕심에 매몰된 보통 한국인이었단 말이지. 미래의 땅값이 어떻게 될지를 중요시하고 건물에 대한 투자 대비를 따지는 바람에 정작 당장의 효율을 간과하고 말았어.’

이사 시기는 마다가스칼을 개봉한 후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효과적으로 일하기 위해서 총 5개의 층을 통째로 추가 임대하였다.

필요할 때 내 입맛대로 딱딱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기회가 있을 때 자리를 확보해 놓아야 필요한 시점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32층만 사용하던 마이코닉스의 사무실은 27층부터 32층이 되었다.

한 번에 많은 공간을 임대하면 텅텅 비는 곳이 대다수가 될 거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임대와 동시에 스튜디오니 뭐니 여러 가지 설비를 추가하다 보니 4개의 층이 순식간에 새로운 활용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역시, 넓으니 좋군. 그동안은 비좁은 곳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모를 정도야.”

스스로의 결단에 흡족해하며 층층을 확인했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직원들이 일할 맛이 나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사이에, 마이코닉스의 직원들은 블록버스터급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자부심으로 제작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실력 있고 성실한 사람들이 열의를 보이고 파라마운틴과의 계약도 의도대로 이루었다. 개선된 시나리오 역시 나무랄 데 없으니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마당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업계는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를 다시금 안겨주었다. 느닷없이 발견된 이 암초는 매우 치명적인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내년까지 완성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기한 오버!

갑자기 들려온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는 제작 기한 내에 완성할 수가 없다는 고백이었다.

“죄송하실 게 아니라,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엄청나게 애를 쓰다가 마감이 임박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계획을 다 세우고 이제 막 시작했기에 1% 즈음 제작한 시점이다. 그런데 도저히 답이 없다는 말을 하며 불가능을 단언한 것이다. 나로서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시지 않았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큰 규모의 프로젝트는 처음이라 제가 계산을 잘못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죄송하다는 말보다 왜 죄송한지, 그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말입니다.”

최종인 대표가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저희가 가진 렌더 팜으로는 시간 내에 렌더링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렌더 팜.

마이코닉스를 인수하기 전에는 몰랐던 것 중 하나였다. 나 같은 문외한은 그냥 아티스트들이 작업해서 연결하면 그게 애니메이션으로 딱 완성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들을 제대로 출력해내기 위해서는 렌더링이라는 작업이 필수라고 한다.

< 느낌 따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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