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17화 (217/577)

< 마다가스칼 >

“미국은 정말 대국이네요.”

예전에 마이크루 소프트의 본사를 찾아갔던 우리 직원들이 ‘여기는 회사가 아니라 마을입니다!’라며 규모에서 기함했는데 파라마운틴도 그 못잖아 보였다. 아직 세상을 두루 경험하지 못해서 내 눈에는 죄다 커 보이는 탓도 있을 테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이런 규모의 회사가 1위는커녕 2위도 아니라니.”

“미국의 영화 산업은··· 엄청나군요.”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질 정도의 규모였다. 이런 우리 둘에게 곽지원 전무가 그 정도는 아니라며 웃음을 보였다.

“엄청 크긴 하지만 왼편의 저 건물을 제외하고는 전부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한 세트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하!’

영화 배급사이자 제작사인 회사에서 이런 대규모의 세트장을 보유하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일 텐데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최종인 대표와 나는 겸연쩍음을 뒤로하는 공감대를 가졌다.

“그나저나, 아무리 우리가 찾아가기로 했기로서니 완전 코빼기도 안 보이네요?”

“파라마운틴은 미국 영화사를 지배하는 메이저 배급사니까요. 그만큼 콧대가 엄청 높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처음 제작하는 동양의 회사이니 크게 기대하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생각하면 파라마운틴이 오만한 게 아니라 상식이라도 봐도 좋을 만큼의 당연한 행동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의 6대 메이저 배급사가 미국 영화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야말로 막대한 수준이다.

우리처럼 하루가 멀다고 방문하는 신생 영화사들이 줄을 서는데 이들 하나하나에 시간과 공을 들일 이유가 없다.

‘아니지.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이면 다행이야. 우리는 그나마 미국도 아니고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회사니까.’

그나마 케이리버의 인지도를 활용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런 식으로 만나주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금 세계가 넓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우리는 파라마운틴의 본사에 들어섰다.

혹시나 너무 넓고 복잡해서 우리가 길을 못 찾으면 어쩌나,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내심 들었다. 하지만 아주 다행스럽게도 건물 바깥까지 마중 나오지 않았을 뿐, 내부에는 미리 우리를 기다렸던 직원이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3층의 미팅룸에 무사히 들어섰다.

‘닥치고 커피냐?’

한국의 흔한 문화였다면 ‘커피나 차 중에 어떤 걸 마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이 나왔을 텐데 이곳은 아주 자연스럽게 원두커피 두 잔을 내려놓고는 별다른 설명 없이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그냥 이거나 마시면서 기다리라는 말이죠?”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 설명이 없다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아 들어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건 다행이군요.”

곽지원 전무의 말대로였다.

원두커피를 세 모금 정도 마셨을 때, 파라마운틴의 계약 담당자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대략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였는데 서양인들의 평균적인 노화 속도를 감안하면 30대 초반일지도 모르는 이였다.

‘아무튼, 관리자의 느낌은 확실히 드네.’

대략 어떤 스틸일의 사람인지 생각할 즈음, 파라마운틴의 담당자가 말했다.

[마이코닉스의 최종인 대표님?]

[네. 접니다.]

[반갑습니다. 아놀드입니다.]

우리가 그를 보듯이 담당자 역시 우리를 한 번 훑는 것이 느껴진다. 그의 표정을 해석하자면 최종인 대표 혹은 곽지원 전무가 회사의 대표이고 나는 계약에 관련된 전문가로 보는 시선이었다.

서로 눈대중을 마친 뒤 대화를 시작했다.

[요즘 너무나도 많은 회사가 계약하고 싶다고 찾아와서 제가 여러분에게 낼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러니 투자나 배급에 관련된 계약을 위해서는 최대한 간략하고 빠르게 진행하면 좋겠습니다.]

‘이 놈 이거. 세게 나오네?’

말투에서도 느껴지듯 우리를 어중이떠중이로 여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감히 우리를 무시해?’라면서 혼쭐을 내주고 싶지만, 비즈니스라는 게 본디 이렇다. 웃으며 칼로 베고 당신을 위해준다면서 내게 이로운 계약을 하는 것이다.

아울러, 현실적으로 파라마운틴과는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좋았다.

‘대신 우리가 갑이 되면 나도 자연스럽게 갑질을 해줄 거라고. 아놀드 이 자식, 그때 보자. 기대해도 좋아.’

꼭꼭 마음에 새기는 사이, 최종인 대표는 아놀드의 요구대로 아주 빠르게 마다가스칼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상업화에서 성공한 애니메이션들의 특징입니다.]

화면에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애니메이션의 포스터와 수익에 대한 내용들. 그리고 사회적 영향에 대한 것들이 출력되고 있었다.

아놀드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이런 내용을 저희는 분석한 적이 없을 것 같습니까?]

[파라마운틴인데 당연히 하셨겠죠. 하지만 분석과 달리 파라마운틴은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이 없습니다.]

직설적인 최종인 대표의 말에 아놀드의 표정이 아주 조금 찌푸려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최종인 대표가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바뀌면서 토이월드 스토리가 화면에 비쳤다.

[3D 애니메이션 분야는 명백하게 새로운 애니메이션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재미와 감동, 여기에 기술력까지 고루 갖추어져야만 성공의 열쇠를 가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귀사에서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보셨겠지만, 마다가스칼은 지금까지 나왔던 애니메이션들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참신함을 보실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안에는 차별 없는 우정이라는 교훈도 담겼고 재미까지 있죠.]

[뭐, 스토리야 그렇다 칩시다. 대표님의 말대로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기술력은 어떻게 증명하실 겁니까? 당장 이런 애니메이션이 처음인데?]

[우리가 3D 애니메이션을 처음으로 제작하고 있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최종인 대표의 말에 아놀드의 눈썹이 가운데로 몰린다.

‘은근히 얼굴에 포스가 있네. 일반적인 작은 영화사들은 저 표정만으로도 겁나겠어.’

배우를 해도 캐릭터 성이 제대로 있을 인물이었다. 그에게 최종인 대표가 말했다.

[하지만 3D 작업은 물론이고 영상물을 제작하는 건 마다가스칼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놀드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화면이 넘어가면서 샤이닝 로드, 몬스터 프레데터스 그리고 ‘신과 같이’의 영상물들이 이어져서 출력되었다.

[혹시 지금 나오는 영상이 어떤 것들인지 아십니까?]

[요즘 유행하는 게임이군요. 이 중에서도 몬스터 프레데터스는 상당히 재밌어서 저도 최근에 즐기고 있는 게임이죠.]

‘응? 우리 게임 유저였어? 그러면 원래 갑질 하려던 것보다는 조금 수치를 조정해줄게.’

나는 고객한테는 제법 관대하다.

[다행이군요. 저희가 바로 이 게임의 영상물을 제작한 제작사면서 현재 해당 게임들의 그래픽을 담당하고 있는 제작사이기도 합니다.]

그 말에 아놀드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상반되게 변했다.

같잖다, 대수롭지 않다, 에서 흥미를 보이는 쪽으로의 변화였다.

[그러고 보니 이 게임을 개발한 게임사가 한국의 게임사라고 했던 것 같군요. GF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그리고 GF는 저희 마이코닉스의 모회사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모회사는 케이리버라고 들었습니다만?]

보유하고 있는 사업체 중 미국에서 제일 잘 먹히는 회사가 케이리버라서 그것 위주로 어필하다 보니 이런 오해는 더러 받는 편이다.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케이리버나 저희 마이코닉스 모두 GF 산하의 계열사입니다.]

[놀랍군요.]

[덕분에 저희는 별다른 자금 압박 없이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합당한 결과도 얻었습니다. 말만 앞선 자신감이 아니라는 점은 이걸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화면에 나오는 장면은 마다가스칼의 엔딩 씬이나 마찬가지인 부분이었다.

알록달록 갖가지 색깔로 치장된 해변의 파티장의 모습이었는데 액션이나 재미있는 장면을 두고 굳이 이것을 보여주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최종인 대표는 넓은 빔프로젝터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빔으로는 무리가 있군요. 제 노트북으로 영상을 다시 봐 주시겠습니까?]

[이건···]

[한 번에 출력할 수 있는 색상. 그런데도 명확하게 구분되는 선명함이 느껴지시는지요?]

아놀드는 영상의 색감에 완전히 빠져서 돌려보기를 거듭했다. 다섯 번 정도 반복한 뒤에야 노트북에서 그가 말했다.

[풍부한 색감이 확실하게 눈을 잡아끄는군요. 좋습니다. 계약 하도록 하죠.]

처음에 보였던 오만해 보이는 태도와는 다르게 그는 흔쾌히 말했다. 첫인상 때문에 내가 그를 너무 나쁘게만 보지는 않았나, 반성이 들 정도였다.

[상영관 800개에 2주를 보장하고 15%의 수익금을 배분하겠습니다.]

‘···반성 취소. 이런 개자식을 봤나.’

저건 우리 영화를 날로 삼켜버리겠다는 것과도 같은 심보였다.

한국에는 1,200개의 상영관이 있으니 800개면 일견 많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는 미국이다. 메인 상영관의 숫자를 합치면 4만 개가 넘는 넓은 땅덩이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이런 미국에서 800개는 ‘우와!’가 아니라 ‘에게?’가 맞다.

‘한국처럼 대기업이 완전 독점 하는 형태가 아니라고 쳐도 이건 너무하잖냐.’

이제 내가 나설 차례가 왔다.

“최종인 대표님. 수고하셨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하죠.”

“예, 회장님.”

난처해 하던 최종인 대표를 물리며 내가 말했다.

[최초 3,000개의 상영관과 2주간 2,500개를 최소 보장할 것. 이 조건으로 수익의 50%를 원합니다. 그리고 2차 판권은 저희가 갖습니다.]

[뭐요?]

갑자기 끼어든 나에게 아놀드는 대놓고 인상을 썼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화하던 최종인 대표가 내게 보인 태도를 보고는 실권자가 나라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넌 뭐 하는 놈이냐?’라는 식의 대응은 하지 않았다.

대신, 단호한 태도로 대꾸했다.

[최초 3,000개에 수익의 50%? 게다가 2차 판권을 온전히 가져가신다고 했습니까? 터무니없군요.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조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얼굴과 목소리가 제법 위압적이지만, 나 역시 이런 식의 대화라면 많이 해본 놈이다. 겉모습만으로는 쫄지 않는다.

[물론입니다. 충분히 합당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기존에 계약했던 독립영화들은 거의 80%의 수익을 보장받고 계약했다.

물론, 이들은 저예산 보정을 받았고 스크린 확보도 크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기에 이를 고려하여 파라마운틴에는 우리 쪽 수익 배분을 30% 낮춰서 제안했다.

[영화를 제작하는 모든 비용을 제가 댑니다. 파라마운틴에서는 광고와 배급. 오직 이 두 가지만 하면 되지요. 그런데도 절반이나 되는 수익을 챙기는 겁니다. 이게 적은 비용이라고 여기는 겁니까?]

[3,000개의 스크린으로 시작해서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광고비가 필요한지 모르나 보군요.]

‘맞아. 몰라.’

하지만 지금 같은 때 모르는 것을 티내면 곤란하다. 내가 가진 패와 강점을 가지고 강단 있게 나서는 편이 옳다.

[광고비가 크게 들어간다 한들, 영화 제작비보다 크게 들겠습니까?]

[그 말은 영화 제작에 관한 투자금을 일절 받지 않겠다는 의미가 맞습니까?]

[물론입니다. 딱히 투자가 필요한 입장은 아니라서 말이지요.]

그 말에 아놀드가 놀란 눈을 했다.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 하나를 제작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1억 5천만 달러 수준이다. 지금 나는 그만한 자금을 움직일 정도의 역량을 갖췄다고 하는 거였다.

‘실제로는 다르지만.’

일반적인 영화일 때는 저만한 자본이 들어간다. 그러나 마다가스칼은 게이머스 포럼의 엔진을 사용하여 비용을 절감했고 미국의 회사가 아니며 메인 스토리라인도 내가 짜서 더욱 비용을 낮출 수 있었다.

‘마다가스칼의 실제 제작예산이 2,000만 달러 수준이라는 걸 알면 까무러치겠지.’

이건 계약이 완료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숨겨야 하는 내용이다. 외부에 알려져서 계약에 유리할 건 조금도 없다.

그러자 아놀드는 크게 수긍한다는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3,000개의 상영관을 보장하는 대신에 이익금의 30%를 분배하도록 하겠습니다. 2차 판권은 당연히 당사에 귀속됩니다.]

포용력 있게 받아들인다는 모습이었지만, 어투에 속아서는 곤란하다.

저건 아직도 여전하게 개소리를 하는 거였다.

[분명히 50%라고 했습니다.]

[그건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

[좋습니다. 그런 견해라면 저희가 광고비로 1,000만 달러를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수익금 50%에 2차 판권을 갖지요.]

어떻게 보면 배급사에게 더 중요한 건 2차 판권이다. 영화사들은 2차 판권을 통한 상품으로 어떨 때는 영화보다 더 큰 수익을 확보하기도 한다. 게다가 애니메이션은 성공할 경우 그 확률이 매우 높아지는 분야이기에 더 중요했다.

< 마다가스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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