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197화 (197/577)

< 간단하게 복권 >

발음이나 발표를 연습하는 데에는 리안나 킴의 도움이 절대적이었고 말이다. 이 두 사람의 도움이 아니라면 능숙한 연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무리 미리 연습을 했어도, 그 자리에서 잘 해낼 수 있다는 건 그동안 게을리하지 않고 열심히 준비했다는 증거죠.]

그런 말과 함께 가볍게 웃는데 왜 대학생들이 그녀의 수업을 들어가지 못해서 안달인지 알 것만 같다.

‘역시 외모는 경쟁력이구나.’

‘선생이 잘 가르치기만 하면 되지 외모가 무슨 소용?’ 같은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저는 외모 안 봐요.’라면서 최고의 미남과 결혼하는 여배우나 마찬가지의 발언이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10분짜리 강의에서 그랬던가? 비율상 미남과 미녀가 마음도 착한 경우가 많다더라. 사랑받고 컸으니까.’

내심 툴툴거리다가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냐며 그만 웃고 말았다.

아무튼, 리안나 킴의 수업 방식은 조금 독특하다. 기본적으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에 최대한 맞춰서 거기에 필요한 대화를 만들어가는 방법을 쓴다. 이런 게 바로 1대 1의 맞춤 교육 아니겠는가.

덕분에 실력도 쑥쑥 늘고 있었다.

[그럼 한동안은 미국에 가는 일이 없는 건가요?]

[벌려놓은 것들이 많아서 아마도 자주 가게 될 것 같네요.]

[월드컵 구경은 안 하세요?]

[해야죠. 딱히 축구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열린 월드컵이니까요.]

그녀가 날짜를 헤아렸다. 오늘은 6월 3일이다.

[내일이 한국 대 폴란드 경기가 있는 날이죠?]

6월 4일은 한국의 첫 번째 조별예선이자, 2002년 전설이 시작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죠. 차량도 혼잡할 테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업무 효율이 잘 나오지 않을 수 있으니 한국 경기가 있는 날에는 퇴근 시간을 1시간 앞당길 요량입니다.]

[와! 멋진 회장님이세요. 직원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제 눈에도 보이는걸요? 그럼 내일은 수업하지 않도록 해요. 대신 오늘 더 열심히 하고요.]

한국 대 폴란드 경기가 있는 날이라서 오래간만에 진수성찬과 약속도 잡았다. 흑심을 부려서 ‘시간 되시면 같이 볼래요?’라는 말을 하는 건 무례한 짓이라서 하지 않았다. 현실이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과 다르다.

알고 보면 주인공에게 은근히 호감을 느끼고 우주가 도와주듯 기막힌 에피소드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나름 회장입네 하게 된 위치인 만큼 내 주변에 도달한 실력파 여성들은 마냥 수동적이지도 않았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는 생각으로 들이대면 바로 신고당하기에 십상이지.’

선 봐서 결혼이라는 미션을 이루려는 것이 아닌 이상, 연인과의 인연은 차근차근 공감대를 이루다보면 맺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함에도 내가 아직 애인이 없는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하다.

‘바빠! 망할!’

고정 영화에 나오는 회장님은 시가 한 대 물고 발로 부려먹고 요즘 드라마의 상류층은 여주 사시사철 놀자판이던데 나는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그러지를 못하고 있다.

물론 짬이 잠깐이라도 생기면 밀린 게임을 하기 일쑤라서 더 그럴 테지만 말이다. 그렇게 영어 수업을 알차게 마치고 나고 하루가 지났다.

한국에서 열린 세계의 축제. 우리나라의 애국심이 유난스러우리만큼 미친 듯이 폭발하는 날인 월드컵이 밝았다.

*

강남의 한 호프집에 들어가자 번쩍 손을 든 친구가 나를 반겨주었다.

“여어~ 살은 우리가 더 쪘지만 움직이기 싫어하시는 회장님 오셨는감?”

“열정 없고 게으르신 우리 엉덩짝 무거운 회장님~ 치맥 잡숴~”

한편으로는 툴툴 거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최근에 두 친구는 잠실로 이사를 왔다. 덕분에 강남에서 축구 경기를 관람하기로 했는데, 여기서 진수와 성찬이가 삐져 버렸다. 굳이 부산까지 가서 폴란드전을 직관하자고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내가 강력하게 반대해서다.

“니들이 언제부터 열성 팬이었다고 부산까지 가네 마네 하냐? 가봐야 어차피 스크린 화면만 보고 오는 거라고.”

“저 자식은 머릿속에 할배가 든 게 틀림없어. 마! 정열! 열정!”

“뜨겁게 불타오르는 썸! 그런게 있다고!”

“경기 틈타서 몹쓸 짓 하는 거 아니다.”

“헐! 이 사상이 불손한 자슥! 우린 그런 생각 안 했거든?”

“맞아. 맞아.”

“헐!?”

나 같은 일반인은 경기장에서 보는 것보다 편한 자세로 먹고 마시며 큰 스크린으로 보는 게 더 재미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싶을 때 해설위원들이 친절한 설명도 해주니 편하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윤태식이! 이런 날에 복장이 왜 그래? 너 복장 불량이야!”

“맞아! 정장이라니! 이런 날 정장이 말이 돼!? 우리는 붉은 악마라고!”

물티슈로 손을 닦고는 치킨을 뜯는데 녀석들이 또 뭐라고 한다.

‘그려~ 붉은 악마.’

2002년 월드컵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사실 월드컵이 이제 막 시작했기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절반, 평상복을 입은 사람이 절반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이번 폴란드전이 끝남과 동시에 빠르게 변화할 것이다.

‘거리 전체가 붉게 물들겠지.’

말만 보자면 엄청난 피의 전쟁이나 학살이 일어날 것 같다. 그러나 이는 Be the Reds라는 슬로건으로 하나가 된 대한민국의 응원 물결을 표현한 말이다. 진수성찬은 벌써 그런 감정에 고취되어서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 상태였다.

“빨리도 샀네.”

“당근이지, 짜샤. 이런 건 빨리빨리 사서 입어야 해.”

“우리나라가 몇 경기나 하겠어? 입을 경기도 몇 개 안 될 텐데 지금 안 입으면 영영 못 입을 수도 있다?”

2002년이 오기까지 한국의 목표는 늘 16강이었다.

월드컵에는 늘 진출하는데, 언제나 조별예선에서 좌절하는 나라. 제발 16강에 한 번만이라도 올라가자! 라고 외치는 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그러나 2002년은 다르다.

“벌써 초 치는 말을 하고 그래. 누가 알아? 16강까지 갈는지?”

“에이~ 태식아 그건 아니다~ 솔직히 16강은 무리라고. 우리 조에 폴란드랑 포르투갈이 있잖냐.”

“싫지만 완전 인정함. 그래서 기왕이면 우리가 같이 보는 경기는 만만한 미국이기를 바랐는데.”

그런데 16강.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다.

“어허. 갈 수도 있다니까? 너네들 하도 오래간만이라서 잊은 모양인데, 내가 누구냐?”

“윤 회장.”

“게이머스 포럼 주인장이지.”

“그거 말고 그 이전에 말이야.”

“그야 플레지 상인··· 오옷!? 설마?”

“그분이 오신 거임?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니고 진짜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는 거임?”

“느낌이 그러하더라. 어때?”

진수와 성찬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완전 답답하네. 우와. 다른 사람이 말하면 그냥 헛소리하지 말라고 할 텐데 이 자슥이 말하니까······.”

“불가능한데 왠지 진짜 올라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참 감정 기복이 심한 친구들이다. 이쯤에서 오늘 흥밋거리로 가져온 물건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어때? 이거 한 판 해보는 건?”

준비해온 온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오잉?”

“스포츠 복권?”

사실 월드컵이나 축구에 관한 복권으로 가장 큰 수익을 낼 방법은 국내가 아니라 영국 혹은 이탈리아로 날아가서 그곳의 복권을 사는 것이다. 시장도 크고 워낙 축구와 복권을 좋아하는 나라들이라 한국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규모를 자랑한다.

‘오죽하면 자국의 브렉시트 사건을 걸고도 복권이 성행했을 정도니까. 이기려고 별의별 기상천외한 짓도 했고. 알면 알수록 뭔가 급이 다른 미친 세계가 복권이지.’

하지만 문제가 있다. 첫째는 언어다.

부쩍 실력이 늘고는 있지만, 실제 내 회화능력은 초보단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통역사를 대동해야만 볼 일을 제대로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명색이 사업체를 키우고 있는 회장님이 복권을 사겠다고 인력을 대동하여 현지까지 날아간다?

이건 엉뚱하기도 하고 입방아에 오르기 딱 좋다.

그리고 더 중요한 두 번째 문제는 내가 스코어를 몽땅 꿰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나는 게임 마니아이지 축구 팬이 아니었다고.’

우리나라가 4강까지 간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한국 외의 국가들이 어찌 됐는지나 경기 결과가 어떠한지는 몰랐다. 제대로 배팅하고 수익을 내려면 한국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게임을 연달아 맞춰야 하는데 그걸 맞출 방법이 없는 셈이다.

그래서 내가 확실하게 알면서도 우리 조만 맞추면 되는 국내 스포츠 복권을 선택했다.

‘친구들끼리 재미 삼아 하는 그런 느낌도 있고 말이야.’

좋은 기회를 놓쳐서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이것 말고도 영화나 게임 분야에서 압도적인 성공을 이루고 있는 마당이다. 이런 판에 불만족스러워한다면 놀부 심보 저리 가라 할 만큼 욕심쟁이일 것이다.

“캬~ 고등학교 졸업하고 진짜 오랜만에 보네. 생긴 게 영락없이 OMR 카드잖아?”

“요즘은 복권이 OMR 카드로 나오냐?”

이전까지의 복권은 동전으로 긁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미 번호가 찍혀진 복권 자체를 구매하는 방식이었다. OMR 카드에 직접 자신이 결과를 예측해서 넣는 방식이 도입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아직은 인생역전의 대명사인 또또복권은 발행되지 않은 시점이기도 하고.’

매주 토요일의 일확천금.

복권을 투자 대상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사람 여럿 잡아먹은 이것을 꿈속의 나 역시도 참 여러 번 구매했었다. 그리고 꽝이 나올 때마다 속상하면서도 참 부러웠다. 매주 누군가는 당첨되는 데 왜 나는 안 될까, 하는 마음이었다.

“여기에 승부 결과를 예측해서 입력하고 결과가 맞으면 배당금을 받는 거다.”

“경기 결과를 넣고 배당금을 받는다고? 이거 도박 아니냐?”

“도박이면 함부로 했다가 은팔찌 차게 되고 은팔찌를 차면 사업이 망하고 사업이 망하면 돈이···”

“성찬아. 쓸데없는 소리는 1절로 끝내주삼.”

“그런감?”

“아무튼, 도박이냐고 묻는다면 뭐···”

한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교해서 도박에 대해 꽤 강경한 국가다. 그러다보니 도박이라는 단어 하나에 녀석들이 긴장하면서 집중했다.

“도박 맞아.”

“으악!”

“야! 너 큰일 나려고!”

“어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도박은 맞는데 국가에서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도박이다.”

“진짜? 나라에서 도박장을 운영한다고?”

“카지노 뭐 그런 건가?”

“아니. 도박장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 도박의 시스템을 가지고 복권을 운영하는 거라고. 여기를 봐봐. 딱 복권이라고 되어 있잖냐.”

“그게 그거지.”

“아무튼, 이건 합법적인 거니까 처벌 안 받는다?”

흡사 상세히 쓴 게시물에 댓글로 ‘한 줄 요약 좀···’이라고 다는 모양새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케이. 그거면 됐음.”

“그런데 여기에 이렇게 입력만 하는 거면, 경기 다 보고 결과를 입력하면 되는 거 아니냐?”

나도 처음 또또를 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결과를 보고 입력하면 그만이 아닐까? 물론 또또를 구매해보고는 내가 했던 이 생각이 얼마나 엉뚱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 OMR카드가 복권이 아니다. 그거 입력해서 기계에 넣으면 그때 복권 용지가 나오는 거거든.”

“아! 역시 그렇게 허접하게 할 리가 없지.”

“성찬이가 생각하는 게 다 그렇지.”

“진수야. 배틀 떠 볼텨?”

“말싸움은 조금 이따가로 킵해둬라. 조금 있으면 이거 다 마감되니까 마감하기 전에 처리해야 해.”

“좋았어!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운은 좀 있단 말이지!”

“나야말로! 다들 긴장하라고!”

‘운이 있기는 개뿔.’

자신 있게 말하는 진수와 성찬이는 2004년부터 2014년까지 매주 꼬박꼬박 10,000원씩 또또를 구매했는데 놀랍게도 5등조차 당첨된 적이 없었다. 무려 10년간 말이다.

‘4등도 아니고 5등인데 못해도 1년에 한 번 쯤은 당첨 됐어야 하는 거 아니냐? 적어도 나는 1번 됐었다고. 하하하하!’

우리가 입력하는 스포츠 복권은 월드컵에서 한 개 조의 결과를 예측하는 복권이다. 당연히 한국 대 폴란드만 입력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대 포르투갈전도 함께 예측해야 한다. 거기에 다른 조까지 맞추면 더 많은 배당을 노려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전혀 모르니까 나는 우리나라가 있는 D조나 하겠음.’

이 정도로 관심 없는 내가 미국과 포르투갈의 경기 내용을 아는 이유는 본의 아니게 자주 들어서였다. 뉴스는 물론이고 사람들은 한국이 자력으로 16강에 진출할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계속 골 득실차를 연구했고 그 이야기가 무수히 흘러나왔다.

‘폴란드는 우리가 2대0으로 이기고 미국은 포르투갈을 상대로 3대2로 이겼었지.’

체크를 마치자 흘끔 본 진수성찬이 한 소리씩 했다.

“뭐야? 와 진짜 윤태식 이제는 감이 아니라 완전 약자 응원 그런 거냐?”

“우리가 폴란드를 이기고 미국이 포르투갈을 이겨? 와. 진짜 이건 너무하네. 어지간하면 네 촉을 믿어보려고 했는데, 이건 진짜 아니다.”

“좋았어. 드디어 윤태식이를 이겨본다!”

말은 저리하면서도 한국이 지는 건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진수는 1대0으로 한국이 폴란드를 이기는 쪽에, 성찬이는 0대0 무승부에 걸었다.

“뭐냐? 너도 우리가 이기는 쪽이잖아?”

“노노. 나는 양심이 있고 너님은 몰 양심이다 이거야. 2대 0은 너무 했다고. 나처럼 양심적으로 1대0으로 이기는 게 적당하지!”

“아이고~ 그러세요?”

< 간단하게 복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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