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3 >
‘빌 게이트?’
이제 막 시작된 포스트 콘퍼런스.
ZBox에 엄청난 기대를 하는 빌게이트의 마음을 표현하듯이 이 자리에 그가 직접 나와 있었다.
‘이거나마라도 감사해야지.’
세계 최고의 갑부.
게임에 관련된 기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기사로 남길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녹음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는 동시에 카메라와 필기구를 챙겼다. 다만 한 가지는 아쉬웠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만족스러운 게임을 확보할 거라고 약속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게임이 발매된 현재의 시점에서 ZBox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빌 게이트는 그저 지금 이 자리에 나와서 자리를 빛내고 있을 뿐,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ZBox 개발의 대표격인 제이 앨러스였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2002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바로. 지금 오늘 밤부터 말입니다!]
‘그래도 뭐라도 말하고 돌아가겠지.’
기대하던 중에 앨러스의 말이 끝났다. 뒤이어 커다란 화면에서는 Zbox의 신작 게임의 영상이 나왔다. 그녀는 혹시 이 중에 최고의 게임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기대하고 눈에서 빛을 내며 영상들 뚫어지라 노려보았다.
‘오오! 망할 테일로!’
처음은 ZBox 독점작이자 최대 기대작 그리고 현재 ZBox의 판매량을 담당하고 있는 1위 킬러 타이틀인 테일로다.
‘지겨워! 지겹다고! 언제까지 그것만 붙들고 있을 심산이야? 평생 테일로만 붙들고 살래?!’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사회에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다. 로렌즈 제인은 주위의 다른 기자들과 똑같은 표정으로 미국을 강타한 최고의 게임 영상에 열띤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비디오 게임은 우리 ZBox의 핵심입니다. 우리 ZBox는 새로운 종류의 혁신적인 경쟁과 새로운 장르의 새로운 형태를 연결하는 것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게임이 지역과 사회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중심에 ZBox가 있습니다. 새로운 ZBox의 혁신. ZBox 라이브입니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던 테일로가 아닌 멀티 플레이를 진행하는 테일로의 영상이 나타난다.
‘이건 좀 흥미로운데?’
확실히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호응이 이어졌다. 본격적으로 콘솔 멀티 플레이가 시작됨을 알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노트에 별다른 내용을 적지 않았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딱히 큰 이슈를 만들기에는 부족해. 한 방이 없어.’
아쉽다. 한 사람의 기자이기 이전에 그녀도 한 사람의 게이머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도 결국 보조적인 요소일 뿐이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라 재미있는 게임 그 자체다. 그리고 마이크루는 계속해서 자신들이 왜 온라인을 생각했는지, 이 온라인이 콘솔 게임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를 계속해서 설명했다.
예상하던 지옥이 펼쳐졌다.
‘지루해··· 지루해요··· 지루합니다··· 말 좀 짧게 해줘요··· 으아악!’
말로 하는 고문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의 얼굴에 똑같은 표정이 나타나고 있다. 결국 혼자서 취해있던 제이 앨러스를 일깨워준 건 빌 게이트였다. 그의 작은 수신호에 사람들의 그런 반응을 눈치챘고 제이 앨러스는 빠르게 말을 정리했다.
【ZBox에서 현재 준비하고 있는 게임은 무려 200가지나 됩니다. 지금부터 올해 여러분의 즐거움을 책임질 게임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 게임은 미국에서 좋아하는 FPS라던가 혹은 FPS를 베이스로 한 공포 게임이라던가 하는 그냥 ZBox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게임들의 영상들이 나타났다.
‘쟤들은 똑똑한 사람들만 죄다 채용해놓고 왜 머리를 저렇게 쓰는지 모르겠어. 200개? 아이고~’
업계의 많은 유통사가 착각하는 대표적인 부분이었다.
핵심은 보유한 게임의 숫자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게임을 갖고 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게임을 가지고 있느냐였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 ZBox가 공개하는 게임들은 1,000개가 넘어도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200발이 총을 쐈으니 하나는 명중하지 않을까? 제발 테일로 같은 게임 하나만··· 아니면 그 반에 반만 되는 게임이라도.’
게임 하나당 짧은 영상은 5초 긴 영상은 30초 정도로 짤막하게 만들어진 영상들. 하지만 그 짧은 영상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전부 B급.’
그런 게임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 게임이 두 개만 더 있었어도, ZBox는 업계 1위와 어깨를 나란히 했을 테니 말이다.
이번에는 박수도 환호도 없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 중에 기대할만한 작품이 없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그때였다.
“오오!”
빌 게이트가 앞으로 나섰다.
제발 뭐라도 있길 바라는 간절한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로렌즈 제인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명성이 자자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모두의 염원을 들어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ZBox의 대단함은 지금까지 설명한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이 부분은 우리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제품을 이용하신 분이라면 바로 아실 수 있으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가장 기다리는 것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네요.】
‘설마? 뭐가 더 있는 거야?’
【오늘 이후로 그 누구도 이제 우리 ZBox가 총만 쏴대는 게임이 아니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모두를 환상의 세계로 초대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스크린에 집중하게 되는 묘한 매력. 그리고 그런 매력과 함께하는 생기 있으면서도 웅장한 음악과 함께 한 편의 애니메이션이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동영상이었다.
캐주얼한 디자인이지만,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 그래픽. 영상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상당한 문명이 전쟁과 함께 황폐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는 빠르게 시간이 넘어간다. 그리고 다시 같은 자리를 비추었을 때에는 과거의 찬란했던 문명은 사라졌다.
메마른 땅이 나타났다.
‘이거 애니메이션 광고가 아니고 신작 게임이야?!’
이 타이밍에 ‘우리 ZBox는 이런 애니메이션도 잘 구동할 수 있습니다!’ 와 같은 정신 나간 소리를 할 리 없었다. 그러니 이건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게임 오프닝이 분명했다.
찬란했던 문명을 잃어버리고, 메마른 사막과 같은 세상이 된 것과 대조적으로 음악은 이전의 웅장함에서 발랄함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었다. 이윽고 동양의 소년만화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 발랄함으로 무장한 세 명의 캐릭터가 나왔다.
아기자기한 마을의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
곧이어 그들을 뒤따르는 귀여운 모습의 멧돼지들.
발랄함으로 무장한 이 게임은 영상만으로도 굉장한 이슈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거야! 이거였어!’
이런 생각은 그녀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 주변을 잠시만 둘러보아도 알 수 있다. 아니 둘러보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전과는 달리 열기가 느껴지고 있으니까.
‘다들 게임 트레일러를 보는 게 아니라 무슨 애니메이션을 보듯이 보고 있잖아?’
영상 속 캐릭터들은 계속해서 다양한 몬스터들에게 쫓기는 것을 반복했다.
귀여운 멧돼지, 판다, 토끼, 다람쥐, 양.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저 귀여운 존재가 몬스터라는 것을 인식하게 함은 물론이고, 이 게임이 얼마나 아기자기한 맛을 가졌는지 잘 알려주는 요소였다.
「알고 있어? 원래 이 드라이랜드는 물이 가득한 곳이었대!」
「사막이 뭔 줄 알아? 과거에는 이런 물이 없는 곳을 사막이라고 불렀대!」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그 물을 찾고 말 거야!」
「Shining Lord : Dryland」
마무리와 함께 자막이 떠오르자 엄청난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로렌즈 제인 역시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영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실제 플레이 영상도 함께 있어!’
간혹 트레일러만 기가 막히게 뽑고는 본 게임이 엉성한 것들이 있다. 그런 게임이라면 이렇게 당당히 플레이 영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그만큼 자신 있다는 이야기다.
이전보다 그 기대감이 훨씬 증폭됐다.
샤이닝 로드는 처음 트레일러 영상으로 볼 수 있듯이, 압도적인 스케일이라거나 대단한 전투가 있는 게임은 아니다. 전투 역시 실제 긴장감이 넘친다기보다는 발랄한 캐주얼의 느낌이 강하다.
‘마치 질다의 전설 같아.’
제목 그대로 시리즈마다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는 대작 게임과 비견할 만했다. 차이점은 질다의 전설을 조금 더 서구적인 느낌으로 해석한 게임 같다는 정도였다.
그러다 요리하는 부분에서 경악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저런 게 진짜 된다고?]
게임에서 요리하는 건 전혀 놀라울 부분이 없는 요소다. 게다가 영상에서도 요리하는 컷은 전에도 여러 번 나온 마당이었다. 그런데도 로렌즈 제인을 비롯한 이들이 놀라는 이유는 그 과정을 보아서였다.
‘맙소사. 마법으로 땅에 불을 지르고 요리를 만들었어!’
현실에서 요리를 하는데 무조건 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요리는 많다. 하지만 게임은 분명히 요리를 위해 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그 불이 없을 때 매지션은 땅에 파이어 월을 시전하고는 그 위에 냄비를 올려서 요리를 완성했다.
그뿐인가? 몬스터들은 돌아다니면서 털갈이를 하고 그 털 뭉치를 주워서 옷을 제작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제작은 일종의 리듬 게임과도 같은 미니게임의 형식을 취했는데 게임을 아주 훌륭하게 해낸다면 기본보다 더 좋은 성능의 아이템을 획득할 가능성이 커졌다.
하지만 도드라진 장점만큼 단점도 보였다.
[저런 걸 매번 제작 때마다 하려면 좀 귀찮을 거 같지 않아?]
[맞아. 새로운 것도 한두 번이지. 이미 제작한 아이템을 또 제작한다거나 아니면 중간 과정의 아이템을 제작할 때에는 진짜 번거로울 것 같아.]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미리 읽은 것일까?
[이야! 게이머들의 마음을 좀 아네!]
요리부터 아이템까지 모든 제작은 자동과 수동으로 변경할 수 있었다. 수동은 미니게임을 통해서 더 좋은 아이템 획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자동은 기본 성능의 아이템만 획득 가능하다는 차별성을 두었다.
그러나 숙련된 게이머들이자 다양한 게임을 접한 기자들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좋아. 아주 좋은데··· 솔직히 못 믿겠어.]
[뭘?]
[이런 게임 홍보 한두 번 보냐? 홍보할 때는 이래놓고 실제 나온 결과물은 이 반도 안 되는 게임이 수두룩하잖아.]
[그건 그렇지.]
‘나도 동감.’
주변 사람들의 말에 로렌즈 제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대로 게임이 출시한다면 대단한 작품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때 빌 게이트가 서 있는 곳으로 조명이 떨어진다.
【과연 실제로 이 게임이 출시 될 때도 이런 수준을 가질 수 있을까, 의심하는 분들이 많으실 거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의심을 떨칠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조명의 방향이 바뀌었다.
무대의 구석.
빛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고 있던 어두운 곳에 핀 조명이 떨어졌다.
그곳에는 ZBox의 컨트롤러를 들고 지금 화면에 나오는 캐릭터를 플레이하고 있는 세 명의 동양인이 앉아 있었다.
[와아! 이거 진짜? 진짜야?]
[말도 안 된다 진짜! 와!]
[ZBox에 새로운 킬러 타이틀의 등장이다!]
[닌텐두로 안 가고 여기로 오길 잘했어!]
눈을 크게 뜬 로렌즈 제인의 귀에 빌 게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개합니다. 2002년 ZBox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환상의 세계로 초대하는 장본인 GF 팬더그램입니다!】
어쩌면 새로운 레전드 시리즈의 시초일지도 모르는 지금을 정확히 기록하기 위해 많은 기자가 펜을 들었다. 그녀 역시도 펜을 들었다. 만약에 질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질문을 해야 더 좋은 정보를 가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려 미친 듯이 노력했다.
두 명의 젊은 남성과 한 명의 중년 남성.
그중에서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젊은 남성이었다.
‘중년 남성이 발표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그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열심히 영어 발표를 준비한 윤태식이었다.
< E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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