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192화 (192/577)

< E3 >

‘이번 행사에 우리가 쓴 총예산과 맞먹는 돈이지. 윤태식이라는 젊은 놈이 돈을 꽤 굴린다고는 들었다만 20억씩 허공에 부어버릴 정도라니.’

송만호 이사로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부스 이외의 서비스는 E3에 막강한 권력을 가진 마이크루에서 준비해주었을 뿐이지만 그가 이러한 속사정을 알 리 만무하다. 그 탓에 외부인의 시점에서는 게이머스 포럼이 무모하리만큼 정신 나간 투자를 하는 것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이는 준비한 트레일러 영상이 상영되는 순간 바뀌었다.

“어어?”

이른바 ‘돈 지랄’에서 ‘과감한 투자’로의 전환이었다.

영상은 초반부터 많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한 장소에서 빽빽한 나무들이 엄청난 바람에 휩쓸렸다.

우드드득-.

강한 힘에 나무들이 쓰러지고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굉장히 큰 체구를 자랑하는 것 같은 괴수의 강렬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드래곤!’

동서양을 막론하고 게임을 즐기는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드래곤을 좋아한다. 그런 그들의 눈에 게임으로서는 처음 접하는 사실적인 몬스터가 현현했다.

카메라 앵글은 이제 괴수의 눈이 되어 전방에 자신을 향하는 헌터로 향했다. 이어서 점차 헌터의 시선으로 앵글이 변화한다.

암흑과도 같은 검은색이면서도 묘한 광택을 내는 거대한 체구의 드래곤.

헌터는 이 괴물과 맞서며 거대한 칼을 빼 들었다.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군. 실제 플레이와는 전혀 딴판을 만들다니.’

지금 자신이 있는 현장은 E3인데 잘 만든 영화의 예고편을 보았다. 이러면 눈을 사로잡을 수는 있지만, 실망감은 몇 배는 더 증폭하게 된다.

하지만 송만호 이사로서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김강철이 얼간이도 아니고 정말 저랬을 리가 없는데 설마··· 에이, 그럴 리가.’

의심하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의식한 것일까. 트레일러 영상은 실제 플레이 편집 영상으로 이어졌다.

버스만 한 체구를 가진 거대한 곰이 달려들자 재빨리 주변에 있던 나무줄기로 올라타서는 곰의 등을 거대한 해머로 내리찍는 모습.

외형은 타란툴라와 흡사했지만 그 크기가 코뿔소만 한 괴물의 빠른 내리찍기를 구르기로 피한 후 엄청나게 단검으로 난도질하는 헌터.

‘맙소사! 이거 실제로 인 게임에서 가능한 것들을 보여주는 거야.’

머리가 튼튼해 보이는 괴물이 한국의 전통 무사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헌터에게 달려들었다. 헌터가 재빨리 회피하는데 아차 하는 순간에 괴물이 절벽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놀라운 장면은 여기서 나타났다.

몬스터가 절벽과 충돌한 후 진동 때문에 낙석이 일어난 것이다. 몬스터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 이후 낙석으로 말미암은 지형변화에 따라서 헌터는 몬스터를 다른 방식으로 사냥하기 시작했다.

송만호 이사는 바로 알아차렸다.

이 영상은 단순히 ‘우리 게임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를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우리 게임은 이런 것도 가능합니다!’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만큼 감격의 크기도 커지는 법이다.

E3라는 행사에 참여할 정도의 인사들은 짧은 내용에 담긴 많은 메시지를 단박에 이해했다.

“와아아!”

“Unbelievable!”

영상은 계속해서 관람객의 시선을 잡아끌었고 그것을 지켜보던 게임 마니아들이 모두 탄성을 쏟아냈다. 송만호 이사 역시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차라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러다 유령이라도 나타난 양 흠칫 떨었다.

‘뭐지? 여기에는 나 혼자 밖에 없었는데 등 뒤의 느낌이··· 헙! 이게 뭐야? 언제 이렇게 몰려들었어?’

부스의 제일 앞자리에서 스크린에 흠뻑 빠져 있느라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가 영상을 보던 몇 분 사이에 부스는 물론이고 그 주변까지 사람이 꽉꽉 들어찬 상태였다. 그야말로 우글우글에 바글바글 이다.

김강철 팀장을 골려주러 왔는데 이건 놀리기는커녕 되레 당하고 가야 할 느낌이 들고 있었다.

‘젠장.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이런 내심을 김 팀장에게 안 보였으니 망정이지 대뜸 놀렸으면 망신살이 뻗쳤겠군.’

그것까지 보였다면 창피해서 고개조차 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영상이 끝나기만 기다렸다가 참담한 표정으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스에서 나가려는 그의 움직임은 매우 은밀했다.

성공의 냄새가 폴폴 풍기는 게임이니 시원하게 인정하고 칭찬과 덕담을 주고받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심보가 소인배인 송만호 이사에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응? 저 사람들은 넥스와 엠씨의 부사장인데?’

나가는 중에 익숙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저들 역시 게임의 영상에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인데 그럼에도 자신만큼 참담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직 흥분의 기색만이 가득했다.

‘진짜로 게이머스 포럼의 신작이 궁금해서 온 건가? 저 정도나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왠지 게이머스 포럼의 이슈는 상상 이상이 될 것만 같았다. 그냥 트레일러 영상만 보고 돌아가면 한국에서 ‘뭘 보고 온 겁니까?’라는 추궁을 들을지도 모른다.

‘속이 뒤틀리지만, 현장 반응을 조금만 더 보고 가자.’

마무리까지 확실히 하고 가는 것이 자리보전에도 좋을 성싶었다.

게임 체험 중인 한 유저가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이 게임은 정말로 미쳤어! 와! 이거 보여? 이런 게 진짜로 돼!]

그는 나무 위에 있는 아이템을 획득하려고 나무를 타다가 미끄러지고 거듭 실패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주위의 돌을 집어 던졌는데 놀랍게도 돌에 맞은 아이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유도였다.

여행과 탐험이 다양한 요소로 즐거웠다면 전투는 이들에게 벽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 게임 너무 어려운 것 같지 않아?]

[그동안 너무 쉬운 게임들만 나왔잖아. 이래야 깨는 보람이 있지.]

첫 보스 몬스터와의 대전.

애석하게도 체험 중인 유저 중에 승리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우와 이거 몬스터 주제에 머리까지 쓰네. 또 죽었어.]

[혹시 지금 준비된 게 이 몬스터 하나뿐이라서 클리어 못 하게 만든 건 아닐까?]

송만호 이사는 옳거니 싶었다.

‘이곳에선 소문이 빨라. 실제로 그렇다면 소문 때문에라도 망할 수 있지.’

변방의 작은 국가에서 만든 게임이다. 이런 게임은 소문 하나에 쉽게 외면받는다. 송만호 이사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한 여자가 자리에 앉더니 익숙한 솜씨로 몬스터를 공략하는 것이 아닌가! 다른 이들보다 훨씬 안정적인 플레이였다. 그뿐만 아니라 광대 같은 이상한 이들도 나타났다.

‘뭐야? 저 쪽팔린 새끼들은?’

영상 속 헌터들이 입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차례로 나타나더니 체험판 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수군대는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태연자약하게 플레이를 시작했다.

진실은 외국어를 전혀 할 줄 몰라서 전혀 알아듣지 못하기에 생긴 일이었지만 모르는 이들에게는 마냥 침착하게만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10분에서 15분 사이로 몬스터들을 잡아내며 첫 보스가 난공불락이 아님을 입증해 주었다.

[우와! 이 사람들 진짜 잘해!]

[저렇게 하면 되는 거구나.]

[아니! 난 아까 50분을 때려도 안 죽더니? 왜 이 사람들이 때리니까 금방 죽어?]

[장비들 괜히 있는 게 아니었어.]

저마다 다른 심정으로 화면을 보았다. 스테이지가 더 남았다는 기대감, 출중한 플레이를 통한 공략법 숙지, 그리고 다른 이는 자신의 손가락에 한탄과 같은 부류였다.

게임이라는 건 원래 지켜보는 게 아니라 직접 플레이할 때 재미있는 거다. 하지만 진짜 재미있는 게임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 즐거움이 함께할 수 있다. 몬스터 프레데터스는 뒤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손에서 땀이 났고 플레이하는 유저를 응원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어어? 피해야 해! 아앗! 맞았···!”

‘이런!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송만호 이사는 군중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플레이어와 동화되어 그를 응원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며 큰빛소프트의 부스를 향해 뛰쳐나갔다.

‘남이 만든 게임에 빠져든 모양새라니. 군중심리라는 게 무섭구나. 주위에서 바람만 안 잡았어도 내가 이런 치욕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다.’

연신 남 탓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지만 그렇게 여기면서도 그의 입에서는 한숨만이 푹푹 나왔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인상적이었던 헌터들의 사냥 장면이 재생되고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만 했다.

“몬스터 프레데터스라더니. 진짜 괴물 게임을 만들었군.”

게이머스 포럼의 이번 작품은 대작이 틀림없었다.

‘김강철 그 자식을 잡았어야 했어. 윤태식, 이 더럽게 운만 좋은 자식 같으니.’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었다.

***

E3 행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게임 행사다. 그렇다는 건 유저들만큼이나 관련 기사를 적어내는 기자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행사라는 의미를 가진다.

[으아··· 기사 쓰기 좋은 건 다 선배들이 가고 나만 이게 뭐야.]

이 행사에는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서 엄청난 게임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데, 당연히 그중에 기대작이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콘택트의 우선순위는 경력자가 쥔다. 이것이 막내 기자인 로렌즈 제인이 울상을 짓는 이유이기도 했다.

[다들 너무해. 양심이 있으면 최소한 닌텐두 정도는 양보해줘도 되는 거 아니야?]

행사의 시작일.

플랫폼을 가진 회사나 대형 게임사의 경우는 자신들의 차기작을 홍보하기 위한 프레스 콘퍼런스를 연다. 여기서 로렌즈 제인은 당연하게도 선배들에게 밀렸고 가장 가고 싶었던 게이밍 스테이션2의 행사는 물론이고 2지망의 닌텐두, 마지막 3지망의 컴퓨터 게임 관련 기업에도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말이라도 못하면 얄밉기라도 덜하지. 마이크루로 보내면서 대단히 양보하는 척이나 하다니!]

그녀가 지금 가고 있는 행사장은 바로 마이크루에서 최근 발매한 ZBox의 프레스 콘퍼런스였다.

작년 E3 행사에서는 엄청난 기대를 모으면서 단연 최고의 화제였던 이 콘솔은 뚜껑이 열리는 순간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했다. 결혼하기는 쉬워도 살림하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듯 테일로를 제외하고는 믿을 게임이 없다는 평을 받으면서 곧바로 추락한 것이다.

그녀가 연신 입술을 삐쭉이며 불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게이밍 스테이션에서는 데몬 메이 크라이2를 공개할 것 같고 닌텐두에서는 질다의 전설 후속작! PC게임 쪽은 기대작이 너무 많아서 문제일 정도야. 그런데 ZBox는? 없어. 없다고!’

담백한 표현이 정답일 만큼 그냥 없었다. 공개예정인 것들은 많지만 세계의 어떤 게이머도, 업계 종사자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가야 했다. 사수인 필립의 말 때문이었다.

‘혹시 모르는 곳에서 대박 예상작이 나오면 그것보다 큰 기삿거리가 있겠냐. 라고 했는데 그거 다 핑계잖아.’

그냥 막내인 그녀에게 좋은 기삿거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밀어 넣은 거다. 그러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야. 진짜 모르잖아. 엄청난 대박 게임이 나와서 선배들의 콧대를 아주 뭉개버릴 수 있을지도 몰라! 다치기도 전에 울지 말자! 로렌즈.’

하지만 스스로 용기를 주는 그녀의 어깨는 여전히 축 내려가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독수리가 늙어도 젊은 까마귀보다 낫다더니······.]

ZBox의 프레스 콘퍼런스를 보며 로렌즈 제인이 거듭 감탄했따.

확실히 마이크루는 타 기업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자본력을 가졌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회사였다.

로비부터 엄청난 규모의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1층을 가득 메우는 엄청난 규모의 콘솔들은 ZBox에서 공개하는 다양한 게임의 데모 버전이 플레이되고 있었으며 벽에는 3층 빌딩 크기의 거대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테일로··· 어휴. 하긴, 여긴 저거 말고는 딱히 말할 수 있는 게임이 없지.]

부풀던 기대감이 한순간에 꺼져버렸다.

아무리 큰 자본력을 가지고 있어 봐야 소용없다. 자고로 게임 회사라면 재미있는 게임을 보유해야 최고의 회사인 법이다.

어지간한 게임업계의 회사 관계자가 거대한 테일로 포스터를 경험하면 대단한 압박감을 가지게 될 터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기자였다. 압박감보다는 ‘역시나 테일로 말고는 가진 게 없구나.’와 같은 생각부터 들었다.

‘일이나 하자. 각오했었잖아.’

Zbox 프레스 콘퍼런스를 진행하는 컨센션 센터의 극장은 약 300석 규모로 이루어졌는데 기자나 관련 업계 종사자들에게 미리 보내준 초대장을 통해서만 입장할 수 있다.

「데일리 it」

로렌즈 제인은 회사 사명이 적힌 스티커가 붙은 의자를 확인했다. 여기가 그녀가 앉을 자리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열의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다른 회사의 기자들이 보였다.

‘기자를 안 보내자니 마이크루에 눈치 보이고 잘난 선배 기자들을 보내기에는 욕심나는 다른 게임들이 많으니 여기저기 다들 막내 기자들만 줄줄이야.’

그즈음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가 무대에서 나타났다.

< E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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