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자는 역시 호러 >
마이코닉스의 사무실은 며칠 사이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일단 초기에는 직원들의 업무 환경만을 생각하고 준비하느라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회의실이 완성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부분이다.
바로 그곳에서 제이스 완과 레이 오넬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을 만나고 싶다고 했던 윤태식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제이스 완. 이쪽은 레이 오넬입니다.]
이번의 통역사는 곽지원 전무였다.
밝은 얼굴로 인사하는 두 사람.
2000년대를 가장 뜨겁게 달굴 호러계의 거장이라는 상상 속 이미지와는 다르게 참으로 앳된 외모였다. 그럴만한 것이 둘은 1977년생으로 나보다도 어린 인물들이었다.
‘청춘이야. 암~ 청춘이고말고.’
이들과도 자주 사진을 찍어둬야겠다. 자고로 남는 건 사진뿐이다.
“제가 요즘 영화 제작에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두 분을 알게 되었고, 꼭 함께 멋진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희는 그냥 일개 대학생일 뿐인데요?]
고작 대학생을 미국까지 오도록 비행기 표도 구해주고 영화까지 제작할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을 그 누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직접 만나보니 미국 사람도 아닌 웬 동양인이고 말이다.
믿음보다는 의심부터 하는 게 당연했다. 최대한 불안한 마음을 내비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사업 경험이 쌓인 내 눈에는 확연하게 보였다.
‘그래서 여기까지 부른 거거든. 우리 회사를 보여주려고.’
무려 할리우드가 있는 LA다. 그리고 이곳은 그 LA에서도 가장 잘나가는 다운타운!
영화인에게 이곳은 그 자체만으로도 꿈과 같은 장소였다. 그러니 인종적인 차이로 우리에게 불안감이 있을 테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믿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게 되는 거다.
여기에 인간적으로 다가가는 마법의 단어를 덧붙였다.
“스티지안을 정말 감명 깊게 봤습니다. 여기 계신 제이스 완씨가 각본과 연출을 맡았었지요?”
[네? 스티지안을 보셨다고요?]
‘그럴 리가. 공포물은 내 취향이 아니고 너님들 인터뷰만 봤어.’
스티지안은 이들이 처음으로 함께했던 공포영화다. 제이스 완이 각본과 연출을 맡고 레이 오넬이 배우로 출연했는데 학교에서의 지원을 통해 만든 저예산 독립영화였다.
작품으로 딱히 내세우고 싶은 수준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언급한 이유는 뻔하게도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해서였다.
의도는 제대로 먹혔다.
[맙소사! 그걸 보신 분이 있으셨다니! 저희는 아무도 안 볼 거로 생각했거든요!]
[솔직히 호러에 광대를 넣는 것이 재미있지 않을까? 이런 실험이었는데, 만들고 보니 그냥 흔한 호러더라고요! 그래도 그때 경험이 진짜 컸습니다!]
목소리에 긍정적인 힘이 들어갔다.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리라.
“두 분이 그 작품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가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그것으로는 수많은 호러 영화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딱 보였습니다.”
[맞아요! 와! 진짜 정확하게 보셨네요! 저희가 안 그래도 지금 그거 때문에 1년이 넘도록 고민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 냈거든요!]
[혹시나 진짜 저희를 알아봐 주시는 분이라면 우리도 제대로 준비를 해와야 한다는 생각에 비록 짧지만 멋진 영화를 제작해 왔습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내가 하는 말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영화 그 어떤 것에 집어넣어도 어울리는 말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맞춰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덕분에 이들에게 나는 정말로 그 스티지안을 본 사람이 되었다.
계획했던 대로다. 시간도 며칠 없었을 텐데 영상을 제작한다는 건 매우 의외였지만 말이다.
“흥미롭네요. 한 번 틀어주세요.”
마이코닉스는 애니메이션을 개발하는 회사다. 회의실에 이 정도 영상을 틀 수 있는 장비 정도야 확실하게 갖추고 있다. 곽지원 전무는 비디오테이프를 받아서 영상을 재생했다.
화면 속의 두 명의 남성이 있었다.
한 남성은 바닥에서.
또 다른 이는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사람 모두 발에 아주 단단한 쇠사슬이 묶여 있고 그들 사이에는 피를 철철 흘리는 남성이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은 쇠사슬을 풀어보려 안간힘을 써 보지만 단단한 사슬을 사람을 힘으로 푸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밀실과 족쇄로 인한 공포로 비명을 지르는 남성.
화면은 이제 그들을 지켜보는 누군가로 넘어간다.
“We can see~”
‘역시 미래를 알지 못한다면 저게 뭔가 싶었겠어.’
약 4분가량의 짧은 영상이다. 잔인한 장면도 없고 대단한 장면도 나오지 않았으나 특별하지 않은 장면을 특별하게 꾸미는 영상미가 돋보인다, 라고 스스로 설득했다.
‘아 몰라. 어쨌건 대박이잖아. 무조건 박수! 이런 게 립 서비스··· 아니, 핸드 서비스인가?’
뭣도 못 느낀 영화 모르는 놈이면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모습에 제이스 완이 물었다.
[어떤가요? 괜찮아 보이십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이렇게 박수까지 치고 있지 않습니까? 아주 훌륭합니다.”
내 말에 정말 순수하게 기쁨을 표현하는 두 청년이었다.
‘분위기 좋고.’
친밀감은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본다.
이제는 본격적인 사업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차례가 됐다.
[그렇다면 저희 영화에 정말로 투자를 해주시는 겁니까?]
“그 전에 영화의 시나리오를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아! 이런 저희가 중요한 걸 잊고 있었군요! 지금 바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레이 오넬은 급히 허름한 가죽가방에서 자신이 공들여서 쓴 시나리오를 꺼내 정중히 전달했다.
“지금 보여주신 영화의 시나리오가 맞는 거죠?”
[네! 네! 맞습니다.]
나는 첫 장을 딱 넘기는 순간 직감했다.
‘이건 외계 문자로구나. 흰 것은 종이고 검은 것은 그냥 글씨로다. 망할 언어의 장벽 같으니.’
요 며칠간 미국 진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빡세게 영어 공부를 하는 중이다. 그러나 벼락치기로 외국어에 통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당연히 회화만큼이나 독해 능력도 형편없었다. 다시금 시간을 내서 값비싼 과외라도 받겠다며 굳게 다짐했다.
‘몰라. 쏘우리스트면 됐어.’
짧은 영어 구절을 토대로 알고 있는 영화의 스토리에 껴 맞춰서 얼렁뚱땅 받아들였다. 그리고 모두 읽은 양 고개를 끄덕이며 곽지원 전무에게 말했다.
“제가 찾던 게 맞네요. 영화를 제작하기까지 얼마의 투자가 필요한지 물어보세요.”
“영화에 관련된 모든 비용을 전액 투자하시려는 것이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곽지원 전무가 말했다.
[회장님께서 이 시나리오로 영화를 제작하려면 얼마나 투자를 해야 하는지 궁금해하십니다.]
[영화의 전체 투자말씀이십니까?]
[네.]
[이럴 수가!]
[거 봐. 제이스. 내가 이번에는 느낌이 완전 있다고 했잖아!]
[미친놈 아니냐고 했으면서.]
[야!]
그러며 난잡하게 무분별 하게 자신들의 사정을 떠들었는데 그 덕분에 얼마나 흥분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화에 상업적으로 투자를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이스 완은 대학을 다니면서도 계속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근무했고 레이 오넬은 드라마 단역을 하며 돈을 모으는 중이었다.
언젠가는 영화를 제작할 돈이 모일 거라는 희망을 품은 채 말이다. 그런데 지금 더 이상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은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된 것이다.
[저희가 스티지안을 제작한 적이 있긴 하지만 거의 초보나 다름없습니다. 그럼에도 저희에게 이런 투자를 하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시나리오가 좋고 영화 연출이 좋은데 그 이상 무엇을 보고 투자를 해야 합니까? 영화에 그거 말고 또 봐야하는 것이 있습니까?”
없다. 뭐 굳이 말하자면 감독 파워 배우 파워라는 것이 있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니까. 그리고 곽지원 전무를 통해서 내 말을 전해들은 두 사람은 엄청난 은혜를 입은 것처럼 감동을 하였다.
[영화 전체를 제작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15만 달러 정도로 예상합니다.]
2002년 3월인 현재를 기준으로 하자면 약 1억 7천 5백만 원.
원래의 제작비가 14억 정도였던 것으로 알고 있으니 지금 들은 액수는 한참 못 미치는 비용이었다.
“영화 한 편을 제작하기에는 너무 적은 금액이 아닙니까?”
[저희는 최대한 적은 비용으로 만들 수 있는 영화를 구상해야만 하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조건을 가장 충실하게 따를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냈고, 돈이 더 많이 있다고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는 않습니다.]
[영화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은 필요한 금액을 얼마나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느냐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답변이라서 꼭 초등학교 2학년생이 발표하는 것 같았다.
‘연습했네. 연습한 거야.’
혹시라도 언젠가 투자자를 만나서 금액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바로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한 멘트가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인터넷에서 스쳐 지나가면서 보았던 문장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말하는 만 배의 수익, 천 배의 수익 같은 것은 대부분 독립영화로 제작했던 비용과의 비교였다. 실제 영화관에 상영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필름 교체와 편집이 필요하고 해당 비용으로 제작비를 다시 산정하면 수익률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일종의 과대광고 효과 같은 셈이지.’
그러니 지금 들은 15만 달러는 독립영화로 제작할 때의 비용일지도 모른다.
질문을 다시 했다.
“지금 이야기하는 예산이 35mm 필름을 사용하는 겁니까?”
[네?]
[35mm요?]
주로 영화용 필름은 8mm, 16mm, 35mm, 70mm 이 네 가지로 분류한다.
보통 8과 16은 저예산 독립영화에서, 35와 70은 상업 영화에서 사용하는데 70mm 같은 경우는 할리우드에서나 일부 사용할 뿐 그 외의 국가에서는 거의 쓰는 곳이 없는 고가의 필름이다.
‘반응을 보니 확실히 알겠네.’
8이나 16으로 만들려는 거였다.
“비용은 생각하지 말고 말씀해보세요.”
[그게··· 저희가 그런 필름은 아직 써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우선은 100만 달러를 투자하도록 하겠습니다.”
[배··· 백만이요!?]
경악하는 저들에게 말했다.
“부족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산의 50% 이상을 사용한 시점에서 영화의 진행도를 보고 추가 투자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집행한 예산에 비해 영화 제작이 허접하다면 더 이상의 투자는 없다는 협박과 같은 말이었다. 이들이 100만 달러를 활용해서 아주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 줄 것이라는 생각에는 전혀 의심이 없지만 그래도 사람은 모르는 거다.
무조건 긍정적인 행동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주지는 않고 눈먼 돈에는 자연스레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투자하되 절대로 호락호락하지는 않다는 느낌을 줘야 향후 불미스러운 일을 겪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
이 말에 두 청춘이 적극적인 의사를 보였다.
[예!]
[최선을 다해서 만족하실만한 영화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좋군요. 그러면 이제 이제 투자조건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이어지는 말에 지금까지의 밝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한껏 긴장한 청년들이 침을 꿀꺽하고 삼킨다. 이쪽에서 영화 제작에 대한 전반적인 비용을 다 지급하니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판권을 독식해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훌륭한 제작자를 죽이는 행위와도 같다.
“우리끼리의 지분은 8대 2를 잡겠습니다. 당연히 우리 회사가 8이고 두 분이 2입니다. 그리고 2차 판권은 저희 회사가 갖습니다. 대신 순수익의 1%는 두 분에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만약에 해당 영화로 100억을 번다면 1억은 둘에게 주겠다는 조건이다.
둘은 긴장하고 있던 얼굴이 맥없이 풀어지면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열성적으로 흔들어서 흡사 록밴드의 헤드뱅잉을 보는 것 같다.
“참고로 여기서 8:2의 지분은 어디까지나 우리끼리의 수익 배분 방식입니다. 만약에 100억을 벌었고, 배급사가 우리에게 50억을 주었다면 여기서 8:2가 되는 겁니다. 이해하시죠?”
[네! 네!]
[이해합니다!]
“좋습니다. 나머지는 여기 곽지원 전무와 이야기 마무리하시고··· 숙소는 잡으셨습니까?”
[네. 이 근방은 좀 비싸서 못 하고 저기 멀리···]
“곤란하군요. 방 빼세요.”
[네?]
뒤이어 김유천 과장을 불러서 지시했다.
“이분들이 당분간 LA에서 보내실 수 있도록 콘도에 숙소 배정 좀 이야기해주세요.”
“예, 회장님. 바로 전하겠습니다.”
계약도 바로 진행하면서 이들이 LA에 남을 이유가 있겠느냐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LA 관광을 시켜주기 위한 게 아니라 이 역시도 비즈니스다.
“며칠 이내에 우리와 계약할 다른 영화 제작자가 또 올 겁니다. 모든 계약이 마무리되면 함께 배급사를 만나러 갑시다.”
내가 기다리는 그룹은 총 네 개의 그룹이고 투자할 영화 역시 4개였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는 대단한 저예산 영화들이 탄생하는 시기지.’
2003년에는 Open sea라는 공포영화가 약 1억 5천만 원의 제작비로 621억 1천만 원의 수익을 내며, 수익률 420배를 달성한다.
2004년에는 무려 3개의 작품이 등장하는데 일단 쏘우리스트는 약 14억의 제작비로 1,260억을 벌어들인다.
‘대략 90배.’
그리고 나폴레옹 마이너붐버.
이 작품은 4억 5천만 원의 제작비로 524억의 수익을 거머쥔다.
‘115배!’
마지막으로 슈퍼사이즈 위.
7천만 원의 제작비로 234억 5천만 원을 벌어들이며 317배의 수익률을 달성하는 영화다.
사실 수익률만 보자면 쏘우리스트가 가장 적지만 수익 자체로만 보면 최고의 수익을 주는 영화기에 가장 중요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기왕 미국까지 왔는데, 이것들 다 먹고 가야지.’
카이닉스를 사려다가 돈이 없어서 최고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던가.
자본주의의 총알은 돈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 투자는 역시 호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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