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184화 (184/577)

< 미국으로 가자 >

성우 모집 오디션이 끝나고 난 뒤 나와 김유천 과장, 후배이자 경호원인 최준우는 펜트하우스에 모였다.

“회장님. 그 에밀리 스틴이라는 아이가 그렇게 가능성이 있습니까?”

“당연합니다. 김유천 과장님 눈에는 안 그래 보여요?”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 회장님이 이토록 크게 반응하시는 모습은 처음 봐서 질문드리는 겁니다.”

정답이다. 꼬마애가 커서 대성할지 쪽박을 찰지 안다면 그건 무당일 테니까. 그렇게 따지면 꿈이라는 형태로 신내림을 받았으니 나 역시 점쟁이라고 해도 될 듯도 했다.

‘아무렴 어때. 좋으면 된 거지.’

나는 김유천 과장에게 강한 확신을 보여주었다.

“제 눈에는 보입니다. 에밀리 스틴이 가진 엄청난 가능성이요. 아직은 어리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로 성장할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미리 사인을 받아둬야겠네요. 사진도 잘 찍고요.”

“그것도 좋죠.”

김유천 과장은 듣고 싶은 대답을 들었는지 흔쾌히 웃었다. 그리고 내일 다시 오겠다는 멘트를 남긴 뒤 펜트하우스를 나갔다.

둘만 남자 우두커니 폼만 잡고 있는 준우에게 물었다.

“어때? 지켜보니까?”

“네? 뭘요?”

“네 인맥으로 괜찮은 사람들을 더 데려오는 거 말이야.”

이런 내 물음에 녀석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

“뭐?”

강남의 회사 사옥도 임대가 아니라 우리 건물이고, 지금 LA 다운타운에도 숙소를 직접 구매할 정도로 큰 자금을 움직일 수 있는 회사인데 아직도 모르겠다니? 이 이상 대체 뭘 보여줘야 한다는 말인가?

의아해하는 내게 준우는 그런 말이 아니라며 덧붙였다.

“제 생각에는 형님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따로 고용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요. 일단 호칭부터가 회장님이고 밑에 회사도 상당한 규모들인 것 같은데 그런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주변 인맥으로 몇 명 데리고 다니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더욱 전문적인 업체를 통해서 VIP 경호상품을 이용하라는 이야기였다. 사실 최준우를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내가 선택했을 정석이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녀석을 부른 데는 괜찮은 직장 소개 이외에도 이유가 더 있었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경호원과 또 상황에 맞춰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회사가 훨씬 효율적이긴 하겠지. 그런데 준우야. 효율이라는 건 이성적으로만 따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준우는 내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한구석에서 미안함과 부끄러움이라는 감정도 읽을 수 있었다. 실력 이상의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으로 몸을 사리는 게 분명했다.

가볍게 웃었다.

“너 만약에 나 안 만났으면 뭐 하려고 그랬냐?”

“글쎄요?”

“너희 팀장은 뭘 하고 있을까?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경호 회사 취직이나 해외 훈련 교관 같은 거로 취업하겠죠.”

지금까지 해온 것이 이런 것이니 다른 것을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말에 나는 준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면 전문가를 목표로 공부하겠지? 다양한 경험도 시간이 가면서 쌓을 테고. 내가 너를 아는데 인맥 믿고 설렁설렁 있을 건 아니잖아.”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그러니 어차피 함께할 거 조금 앞당긴 셈 치자. 게다가 필요한 것을 얻으면서 주변 사람까지 도울 기회는 흔한 게 아니야. 그러니 엉뚱한 소리 말고 우리 회사를 소개해도 괜찮겠다 싶으면 그냥 소개해.”

그제야 준우가 수긍했다.

“한국에 돌아가는 즉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먼 이국에서 가볍게 술을 마셨다. 대화 안주는 남자들끼리만 공감하는 군대 이야기였다.

다음 날. 준우가 운전하는 차량에 나와 김유천 과장이 탑승했다. 목적지야 당연히 에밀리의 고향인 미국 애리조나의 스코츠데일이다. 더 정확하게는 쿠쿠파 미들 스쿨이 일단의 목적지였다. 그곳에서 에밀리를 태우고 그녀의 부모님을 뵙고자 집에 찾아갈 요량이었다.

“저기 있네요.”

수많은 학생이 뒤섞여 있는 틈 안에서도 에밀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냥 딱 봐도 눈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는 소녀다.

[오오! 진짜로 오셨어! 진짜로! 와! 전 혹시나 안 오시면 어쩌나? 이런 걱정 엄청 했다니까요? 수업시간 내내 하나도 집중이 안 되고 막!]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밝은 얼굴로 우리가 있는 차량으로 달려왔다. 그러며 웃으며 잔뜩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왠지 이해가 돼. 역시 딱 배우야.’

실로 의사소통의 놀라운 마법이었다. 표현력 풍부한 에밀리의 얼굴과 몸짓 덕분이기도 하다. 표정과 뉘앙스를 통해서 긴 문장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희가 늦게 올까 봐 걱정···”

“괜찮습니다. 따로 해석은 안 해주셔도 될 것 같네요.”

김유천 과장을 제지하자 그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오!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며칠 만에 벌써 영어에 통달하신 겁니···”

‘에이, 오해하지 마.’

“아뇨. 지금 것만 생략입니다.”

“아··· 네.”

겸연쩍어하는 반응에 나 역시 쓴웃음을 지었다. 한국에서 살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불편함이 실감 나서다.

‘역시 영어를 공부해야 하려나. 게임 쪽도 아닌 이런 공부는 건 정말 싫은데.’

게이머스 포럼은 점점 글로벌하게 사업을 확장해나가고 있는 기업이다. 이런 기업의 소유주가 된 이상 최소 외국어 하나는 할 줄 아는 게 당연할 것이다.

사실 부자가 되면 전문가를 옆에 두고 그 사람한테 귀찮은 일을 떠맡기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줄 아는 것과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건 엄연히 달랐다.

현실은 돈이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에 필요한 공부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 대장님은 우리 말 못 해요?]n[대장님?]

얼굴에 호기심을 가득 담은 아이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오디션 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분이 여기 대장님이잖아요.]

전체적인 분위기만으로 지금까지 보았던 사람 중에 내가 가장 높은 위치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성인이라면 어쩌면 당연하게 연상할 수 있는 일이겠다만, 아직 어린 그녀가 눈치를 챘다는 건 아이가 그만큼 영특한 것 같다.

김유천 과장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맞아요. 대장님은 한국어만 하실 줄 아세요.]n[한국? 그건 어디 있는 나라에요?]

아직은 한국 기업도, 한류도 미약한 시대다. 동아시아의 인종을 보면 당연히 일본인부터 생각하는 시기였기에 이런 반응은 익숙했다.

[저 멀리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지.]n[와 엄청 머네요. 그럼 대장님이 영어를 배우는 건 어려울 테니! 제가 한국어를 배우겠습니다!]n[에밀리. 너는 이제 앞으로 공부와 연기를 병행하려면 시간이 빠듯할 거야. 한국어 공부라니. 해야 할 거에 집중해.]n[괜찮아요~ 괜찮아~ 원래 저처럼 어리고 귀여운 소녀는 뭘 해도 빨리 배운다니까요?]

김유천 과장을 거쳐서 들은 답변에 그만 웃고 말았다. 내가 엠마 스틴의 팬이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것이다.

‘무한 긍정 에너지 타입이었지. 활기차고 자유분방하고. 그냥저냥 살던 나한테는 그래서 더 대단해 보였을지도 모르겠어.’

혹시 모른다. 정말 긍정 에너지로 어느 날 갑자기 짠하고 한국어를 익혀서 깜짝 놀라게 할지.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나 역시 영어를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이런 소녀도 당차게 포부를 밝히는데 어른이 되어서 ‘공부하기 싫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 그건 됐고. 집은 어디로 가야 하지?]n[쩌어~기 골목에서 왼쪽으로 가셔서 두 블록 지나서 다시 오른쪽으로···]

자막 없는 외국 영화를 보는 듯이 다양한 영어 단어들이 귀를 스쳐 갔다.

“김유천 과장님. 길 안내까지는 통역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회장님.”

열띤 설명에 힘입어서 무사히 도착한 에밀리의 집. 그곳 정경은 기대와는 달랐다.

‘이건 좀 계산에 착오가 생기는 그런 느낌인데? 배우가 되려고 혼자 나와서 고생했던 거 아니었어?’

도착한 곳은 채멀백 골프 클럽. 그곳 뒤편에 있는 내부 리조트였다.

[에밀리. 지금 우리가 제대로 온 거 맞니?]n[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집이 어려운 거야? 아니면 엄청 잘 사는 거야?’

뭔가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골프장의 리조트라면 일반 아파트의 월세보다 비쌀 것이다. 즉, 저렴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굳이 아파트나 단독 주택을 구할 수 있는데 이런 곳에서 살 이유도 없고.’

물론 미국은 땅이 넓은 나라이니 한국처럼 ‘무조건 부동산이 최고니까 일단 집을 사둬야 해!’ 같은 문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고려해도 느낌이 이상했다.

미묘한 기분은 집에 들어섬과 동시에 뚜렷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흙수저가 아니었어. 완전 금수저.”

그동안 에밀리에 대해서 혼자 생각하기를 꿈과 열정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성공한 사례로 보았다. 그러나 집 어디에도 가난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건 부자의 냄새가 물씬 났다.

[어머. 에밀리. 이분들은 누구시니?]n[응~ 우리 대장님이랑 대장님네 직원분들~]n[대장님?]

모녀의 대화를 듣고 김유천 과장이 조용히 말했다.

“회장님. 에밀리가 오늘 저희의 방문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네요.”

결심하면 확실하게 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소녀였다. 부모님 설득을 살짝 우리에게 미뤄둔 모양새였고 이는 마땅히 우리가 할 일이었다.

“어머니에게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일단 소개부터 하죠.”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눈초리가 점점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할 즈음 더 늦어지기 전에 나서야겠다고 판단한 김유천 과장이 빠르게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실례합니다. 갑작스러운 방문 때문에 놀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희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게이머스 포럼이라는 회사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n[게이머스 포럼이요?]n[네.]

하지만 어머님의 눈빛은 여전히 우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일단 같은 백인도 아니고 분위기로 보았을 때 미국인 역시 아니었다.

동양에서 찾아온 인물이 자신의 딸과 함께 집을 찾았으니 부모 된 입장에서는 충분히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엠마 스틴을 만났다는 생각에 너무 무턱대고 찾아왔네.’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실수였다. 앞으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겠다 생각하며 나는 김유천 과장과 그녀의 대화를 분위기와 뉘앙스로 따라갔다.

[그런데 그 회사가 우리 에밀리와는 무슨 관계가 있어서 이렇게 찾아오신 거죠?]n[이번에 저희가 성우를 뽑는 오디션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에밀리 양이 저희 오디션에 발탁되었죠.]

순간 어머니의 눈에서 경계가 사라졌다.

‘오오. 세상에.’

좋아진 게 아니었다. 경계가 아니라 눈으로 불을 뿜는다.

우리는 순진한 에밀리를 꼬드긴 사기꾼 같은 입장으로 확정이 난 분위기인 것이다. 그녀가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다.

[저희가 딱히 나눌만한 대화는 없을 것 같군요. 나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n[아니. 어머니 그래도 저희 말을···]n[아뇨.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를 겁니다.]

‘저 단어는 나도 알지. 젠장, 미국 경찰이라니. 한국이랑 다르게 이 사람들은 말로 타이르는 부류가 아니잖아.’

초반에 신뢰를 그냥 말아먹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나간다면 우리가 사기꾼이라고 인정하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난색을 보이는 김유천 과장에게 언질을 주었다.

“딸이 그토록 원하는 꿈을 좇을 기회인데 이걸 말 한마디 안 듣고 쫓아낼 거냐고 말하세요.”

“알겠습니다.”

평소라면 ‘그런 말을 해도 될까요?’라며 조심스럽게 확인할 사람인데, 지금은 뭐라도 해야 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김유천 과장은 별다른 대꾸 없이 바로 내 말을 어머니에게 통역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여전했다.

[내 아이의 꿈은 제가 찾아줄 겁니다. 당신들이 걱정해줄 필요는 없어요.]

‘좋아. 우선 문이 닫히기 전에 발은 들이밀었어.’

여전히 싸늘한 태도였지만 내 느낌은 정반대였다. 지금처럼 우리가 건넨 말을 되받아치는 것만으로도 가능성은 열린 것이기 때문이다. 사업과 영업에서 가장 난감한 상대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단호히 거절하는 이들이다.

‘일단은 대화가 되는 거니까.’

이때부터는 내가 말하고 김유천 과장이 최대한 빠르게 통역하는 일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졌다.

“아닙니다. 에밀리는 이미 그 꿈을 찾았고 이제는 꿈을 향해 나갈 일만 남아 있죠. 어머니는 아이의 꿈을 진지하게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머니의 굳은 얼굴에 살짝 당혹감이 피어났다.

‘들어봤겠지. 그리고 애써 외면했을 테고.’

‘그런 힘든 길은 가지 마라. 그렇게 어려운 길보다는 훨씬 편한 길을 가는 것이 좋다. 지금은 아프겠지만 결국은 고마워하게 될 거다.’ 부모의 마음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저희는 에밀리가 언제부터 연기에 꿈을 두고 있었는지, 또한 어떤 환경에서 그런 꿈을 꾸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건 아마도 어머님이 아시겠죠.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뭐죠?]

“지금 에밀리의 바람은 절대 실현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에밀리는 충분히 그걸 이뤄낼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자식을 칭찬하는데 싫어하겠는가.

확실히 어머니의 표정도 꽤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과제들이 산재해 있다. 바로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한계였다.

‘일단 미국에서 배우가 되고 싶은 아이. 그런 아이가 배우가 되어서 훨훨 날아가는데 동양에서 온 회사가 무슨 도움이 될까?’

미국은 전 세계에서 최대 시장을 가진 국가다. 그중에서도 영화에 관련해서는 다른 모든 국가를 아득하게 초월하는 규모를 가지고 있다.

‘유럽 전체와 일본을 합친 것보다 미국 하나의 규모가 크니까 말 다 했지.’

< 미국으로 가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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