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으로 가자 >
“고생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까 동생도 운동한다고 하지 않았냐? 유도 선수였지?”
“네. 제가 다 그놈 상대해주다가 싸움 실력이 늘어난 거 아닙니까?”
“운동하는 거에도 돈 많이 들어갈 텐데 큰일이네.”
“안 해요. 걔도 쫓겨났거든요.”
“응?”
형도 쫓겨나고 동생도 쫓겨나고 무슨 가족사가 이 모양인가.
“동생은 왜?”
“동생이 유도 선수인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땄거든요? 근데 그 전날 먹은 감기약이 도핑에 걸렸어요. 그 날로 메달 뺏기고 선수 자격도 3년간 박탈인데 딱히 줄도 없고··· 그냥 선수 인생 끝난 거죠.”
간혹 이런 일들이 있다. 선수들은 자신들이 먹은 약이 어떤 약인지 모른다. 그래서 담당 의사가 판단을 잘 해서 처방을 해야 하는데, 의사들의 실수인지 혹은 실력 부족인지 이렇게 안타까운 결과를 맞이할 때가 있다.
“너도 참 우여곡절이 많다.”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했지만, 사실 그래서 부른 것이기도 하다.
경찰특공대 출신에 유도 선수 출신.
총보다 근접 경호가 중요한 한국에서 이보다 유능한 인재들이 또 어디 있으랴. 게다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생판 남보다야 조금이나마 연고가 있는 이들이고 말이다.
적당히 배경이 깔렸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다.
“준우야. 너 형이 제안 하나 하면 할 생각 있냐?”
“뭐요? 사업 같은 거면 안 해요. 전 그런 머리는 전혀 없어요.”
“에라이 이놈아. 내가 너랑 일 년을 같이 먹고 자고 살았어. 그런 머리 없는 건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다.”
우직하고 요령을 피우는 것도 잘 모르는 놈이다. 일을 맡기면 뭘 해도 평타 이상을 칠 성향이지만 사업은 오히려 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 뭘 제안하시게요?”
“내 경호원 해라.”
“에? 무슨 예비역 부사관이 경호원을 모집한다고 그러십니까?”
이럴 때 ‘회장님이 주먹질하면 모양 빠진다.’라고 하면 멍청이다. 자고로 용인술은 상대의 실력과 필요성을 인정해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예비역 부사관이 가끔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거든.”
그리고는 나의 매력적인 건치를 보여주며 살짝 웃어 보였지만, 녀석은 어처구니없는 걸 보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역시, 이런 모습은 여자한테만 먹히는 것 같다.
‘이런 말은 애인부터 사귀고 나서 해야 설득력 있으려나? 이제 사업도 잘 나가겠다, 연애 쪽도 관심을 가져볼까.’
아무튼, 이건 혼자 있을 때 생각해도 될 일이다.
나는 장난스럽게 나무라며 말했다.
“눈빛이 심하게 건방지시다? 짜샤. 형이 뭘 하자고 하면 ‘알겠습니다. 형님이 하시는 말씀이면 뭐든지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야.”
사실 오랜 인연도 아니다. 고작해야 군대에서 1년여 시간을 함께했을 뿐이다. 그런데 대뜸 이런 말을 하면 ‘당장 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이 너스레에 녀석이 의외로 승낙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하죠. 뭐 까짓거.”
“그래. 너도 당연히 생각할 시간이··· 응? 한다고?”
“네.”
“뭐 설명도 제대로 안 듣고 뭘 해? 아니, 왜 하냐?”
“흑룡 대대 최고의 사나이이신 윤태식 중사님이 하자고 하는 건데, 까짓거 뭔지 몰라도 믿고 해보죠 뭐.”
“윤태식 중사님은 무슨. 내가 전역한 게 언젠데 인마!”
말은 이렇게 해도 괜히 미소가 지어진다.
“됐고. 그럼 요 근처에 회사 있으니까 보여줄게. 보고 결정해.”
“결정은 이미 했다니까요?”
“너 말고 인마.”
“저 말고요? 그게 무슨?”
“그 팀장이라는 사람이랑 네 동생까지 다 채용할 생각이다. 회사보고 데려올 마음이 생기면 연락해서 데려오고 아니면 너 혼자 해. 그거 결정하라고.”
“저 하나면 몰라도 다른 사람들까지라면 좀 많이 확신을 주셔야 할 겁니다?”
“너 내가 무슨 사업하는지 모르지?”
“당연히 경호업계 아니십니까?”
“놀라지나 마라, 인마.”
대한민국에서 성장성으로 가장 주목받는 회사가 바로 게이머스 포럼이다.
확신? 그까짓 것은 차고도 넘치게 줄 수 있다.
결과는 예상 그대로였다. 엉뚱하게 게임은 무슨 게임 개발이냐던 최준우는 회사를 보고 기분 좋게 팀장과 동생을 데려왔고 나는 세 명의 믿음직한 경호원을 채용할 수 있었다.
88. 미국으로 가자
인간은 자신의 경험적 근거를 바탕으로 추론한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담백하게 보면 별 것 아닌 이야기다. 그냥 내게 익숙하고 간편한 방식인 ‘내 식대로 생각’을 한다는 거니까. 내가 마커 주크버그를 만나려던 일정이 바로 여기에 속했다.
- 회장님. 죄송하지만 미국은 3월이 아니라 8월에 입학합니다.
미국의 신입생에게 투자할 거라는 내 계획을 곽지원 전무가 듣더니 이런 답변을 해주었다.
‘깜빡했네. 다른 나라였었지?’
그렇다. 마커는 아직 대학에 입학하지 않았다.
나는 의식의 흐름대로 쉽게 생각했었다. ‘태희가 대학교에 입학했고 달력을 보니 한국 대학교는 3월에 입학하더라, 그러니 당연하게도 미국 역시 그러겠지, 갓 신입생이 된 마커 주크버그를 꼬시자!’라고.
그런데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미국은 우리 동네가 아니었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잘 되짚어야겠어.”
나름대로 글로벌하게 움직이게 되었으니 거기에 어울리도록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미국행 자체를 취소할 필요까지는 없지. 마커 말고 다른 것들도 있거든.’
일단 마이코닉스의 직원들이 미국의 신규 법인으로 떠날 때 함께할 수 있다. 또한, 마다가스칼의 음원, 성우 등의 계약을 처리하고 국내 영화시장에 투자하며 돈을 벌었듯이 미국이라는 큰 시장을 쇼핑할 요량이다.
특히 이번에는 꼭 몸소 출장 가고자 작정했다.
‘시애틀은 몰라도 이 LA만큼은 무조건 간다. 천사들의 도시! 세계 오락과 유흥의 수도! 나도 드디어 물 건너 외국으로 가본다!’
본래 마이코닉스의 사무실은 뉴욕으로 예정했었다. 하지만 두 가지 의견에 따라서 바꾸었는데 첫째는 뉴욕의 갱을 배경으로 하는 것 보다 LA의 갱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훨씬 그림이 좋을 것이라는 점. 둘째는 추후 마이코닉스의 애니메이션을 다뤄 줄 할리우드가 LA에 있어서였다.
지역 바깥으로 벗어날 것 없이 가까운 곳에 법인을 두면 여러모로 편할 테니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계획을 수정했다.
“회장님. 준비 끝났답니다.”
“좋습니다. 이제 갑시다.”
그렇게 마이코닉스의 직원들과, TS 자산운용의 곽지원 전무 마지막으로 김유천 과장까지 꽤 많은 인원이 미국으로 향했다.
*
공항에서 우리 일행은 둘로 나뉘었다.
“오랜만에 뉴욕에 가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글쎄요. 그새 한국에 적응한 모양입니다. 전에는 뉴욕이 고향 같더니만 이제는 좀 낯설고 그러네요.”
곽지원 전무는 혼자서만 뉴욕에 가서 음반 회사들과 음원 계약을 하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LA로 간다.
‘한국이랑 미국, 일본은 다르니까.’
우리나라는 특별히 음원 계약에 열을 올리지 않더라도 음원을 구매할 수 있는 구석들이 많이 생겨난다. 그러나 미국이나 일본은 다르다.
사실 MP3P는 참으로 그 탄생과정이 아이러니한 제품이다. MP3 음원을 구할 수 있는 마켓은 전무한데 기기는 버젓이 판매되고 있는 황당한 시장이기 때문이다.
이를 쉽게 설명하자면 ‘기기는 우리에게 제값 주고 구매하시고요. 음원은 고객님들이 불법으로 알아서 구하시면 됩니다.’라는 시스템 위에 세워진 시장이었다.
여기서 차이가 발생한다.
너무 익숙해서 불법이 불법인 줄 모르는 시장이 잘 발달한 한국이나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은 절대 그렇게 넘어갈 수 없다.
자체 음원 마켓. 그것이 없다면 와이팟 과의 경쟁이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일본과 미국의 시장이 중요한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터놓고 말해서 한국 시장은 버려도 돼. 좁은 곳에서 아옹다옹할 이유가 없어.’
한국에서 음원 한 곡을 다운 받는데 필요한 금액은 40원에서 150원 사이다.
반면에 미국은 대략 1,300원 선.
일본은 2,500원가량이다.
비록 대략적인 금액이기는 하지만 기준값 자체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더군다나 음원 시장 자체가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크기까지 하니 각 곡당 수익도 훨씬 많이 남는다. 이런 판국에 사업하는 녀석이 애국자의 심정으로 한국에만 연연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나라 밖으로 전진하라! 기회의 땅이다! 오예~’
그래서 굳이 곽지원 전무를 뉴욕으로 보내는 것이다. 미국의 대형 음원 회사들은 전부 뉴욕에 있으니까.
“그럼. 보고 잘 해주시고. 일 끝나고 봅시다.”
“예. 회장님도 잘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공항에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서 헤어졌다.
기대하고 고대하던 비행기의 탑승 소감은 이러했다.
‘배경이 새롭긴 한데, 느낌은 그냥저냥 이야.’
흔들림이 덜한 관광버스를 탄 것처럼 편안히 앉아서 볼거리, 먹을거리를 씹는 일이 전부다. 사실 이게 당연한 거다. 승객들이 휘몰아치는 바람을 느끼고 고도의 상승과 하락을 몸서리 처지게 절감하면 누가 항공기를 타겠는가.
어릴 적 꿈꿔본 ‘떴다, 떴다 비행기’의 속도감은 내가 스포츠카나 경비행기를 직접 운전해보지 않는 한 느낄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꿈과 현실은 다르다는 어른의 깨달음을 얻고 LA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모르는 길에서는 자고로 택시가 정답이다.
공항에서 마이코닉스 미국 법인 사무실을 향해 택시를 이용했고 나는 창밖 풍경을 보며 미국스러움을 부단히 찾았다. 처음에는 딱히 느낌을 받지 못했고 실망스러웠다. 그러다 LA 다운타운에 도착하면서 ‘그래. 이래야 미국이지!’와 같은 생각을 하였다.
LA 다운타운.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에서도 뉴욕 바로 그 다음가는 대도시.
마이코닉스의 미국 법인은 바로 이곳에 마련했다.
‘분위기 좋네.’
다운타운을 메인 배경으로 잡고 라스베가스와 할리우드를 서브 배경으로 잡으면 진짜 멋진 게임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확신이 생길 정도였다.
“바로 여기 32층에 마이코닉스의 사무실이 있습니다.”
목적지인 이곳은 다운타운 7번가에 위치한 대형 빌딩이었다. 그곳에서도 꽤 고층으로 잡았는데 직원들이 이곳의 전경을 보면서 더욱 디테일한 배경을 만들어달라는 의도에서였다.
약 200명은 채울 수 있을 넓은 사무실 공간은 고작 70명을 위한 사무실로 여유 있게 꾸며져 있었다. 거기에 여러 화분과 깔끔한 인테리어는 사무실에 갇힌 느낌을 받지 않기 위한 최대한의 배려도 보였다.
‘새 집 줄게 헌 집 다오~가 딱 이거지.’
대부업계의 건달에게 괴롭힘 당하던 마이코닉스 직원들로서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당연할 따름이다.
“회장님! 여기가 진짜 저희 사무실입니까?”
“김유천 과장님 말씀 들으셨잖아요? 맞아요. 사무실.”
마이코닉스의 직원들은 물론이고 최종인 대표까지 감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럴 때 돈 쓴 보람을 느낀다.
‘역시 행복은 돈으로 사는 거야. 돈만 갖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지만 돈이 있다면 행복의 크기도 훨씬 커지는 거라고.’
이곳에 사무실을 구해주기 위해서 꽤 거금을 들였으나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건 단순한 복지가 아니다. 더 큰 돈을 벌기 위한 중요한 투자였다. 나는 손뼉을 한 차례 쳐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사무실을 둘러보기 바쁜 마이코닉스 직원들에게 말했다.
“지금은 고작 이 한 층만 사용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이 건물 전체를 다 사용해야 할 정도의 회사로 키웁시다. 아셨죠?”
“네!”
“좋습니다. 그럼 자기 이름이 적힌 자리를 찾고 대충 물품 정리하세요. 20분 뒤에 숙소로 이동합니다.”
“예! 회장님!”
쓸 때는 화끈하게 쓰는 게 좋다. 나는 장차 할리우드에 애니메이션을 진출할 귀한 직원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숙소를 통째로 구매했다. 80여 개의 방이 있는 호텔 형 아파트였다. 당장은 방이 남아돌지만 앞으로 기업이 성장하며 더 많은 직원을 고용할 때를 대비한 것이다.
물론 1인 1실은 아니고 2인 1실이다.
혹시나 가족과 함께 오는 직원들에게만 1인 1실을 배정할 계획이다.
‘게다가 여기가 어디냐. LA 다운타운이잖아. 부동산으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고. 앞으로도 꾸준하게 상승할 전망이거든. 그리고 남는 방은 렌트해서 손실을 최대한 줄이고.’
참고로 최고층은 펜트하우스로 나만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세팅했다. 언제든지 LA에 오면 내가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회장님! 저희는 모두 게이머스 포럼에 완전히 뼈를 묻기로 했습니다!”
사무실보다 숙소가 더 마음에 들었는지 자발적인 아부성 멘트가 저절로 들렸다. 낯 간지럽기는 해도 이는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저들이 LA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열정을 보여주며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발맞춰서 나 역시도 움직였다.
< 미국으로 가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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