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176화 (176/577)

< 사람 부족 >

“빌어먹을. 빌어먹을!”

너무도 허탈한 상황이 되니 괜히 몸에서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게 된다. 황당한 건 입에서 마른 웃음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우리 진짜 잘할 자신 있지 않았어요? 우와··· 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제작한 애니가 재미없어서 망하는 것도 아니고 제작 도중에 이렇게 망해버리다니···!”

상황이 암담하다 보니 별의별 생각마저 들었다. 신이 있다면 딱 한 번만 도와주기를, 그도 아니라면 제발 누군가 도움을 주기라도 한다면 그가 악마이더라도 손을 잡을 요량이었다. 그런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는 민망하고 유치한 생각마저 했다.

하지만 상상과 현실은 다르다.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오는 만화 같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 응?’

그 순간, 문이 활짝 열렸다.

오기로 약속한 이가 없는데, 들어올 손님이 없는 처지인데 누군가가 들어왔다. 젊은 남자와 중년의 남자였다. 같은 정장을 입었지만 어깨에 힘을 주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저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이들이었다.

“실례합니다.”

두 손 맞잡고 이 사태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회사의 직원들도, 컴퓨터들을 챙기던 덩치들도 모두 새로 들어온 저들을 보았다.

권문수는 간절히 바랐다. 저 사람이 ‘분위기가··· 커흠. 다음에 다시 올게요!’하며 도망치지 않기를. 부디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주기를 말이다.

***

[윤태식]

꿈속 미래를 경험한 이후 감각이 좋아지고 신체 능력이 향상되었지만 나는 구기종목이나 격투가의 길을 걷지 않았다. 게임하고 만드는 일이 더욱 즐겁고 사업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크기 때문이었다.

‘돈도 훨씬 잘 벌고.’

하지만 힘은 사용하지 않더라도 가진 것만으로 사람을 여유 있게 만든다. 경호원 없이도 험상궂은 사내들 속에 내가 성큼성큼 다가갈 수 있는 이유. 천연덕스럽게 있을 수 있는 배경이 되어 주었다.

사나이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점. 육체적인 힘의 역할은 회장인 내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기가 마이코닉스가 맞습니까?”

태연자약한 말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누군가는 ‘이건 또 뭐 하는 놈이야?’ 또 ‘혹시······?’ 하는 기대감을 보인다. 쭉 훑으며 말했다.

“어휴. 분위기가 영 좋지 못하네요. 죄송하지만 마이코닉스가 맞다면 여기 대표님 좀 만나고 싶은데요?”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온 곽지원 전무는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었다. 얼핏 보면 무표정하게 무게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톡 건드리면 와들와들 떨 만큼 긴장한 상태였다.

‘이거 내가 아니라 우리 회사 식구들을 위해서라도 경호팀을 만들어야겠군.’

싸워서 이기는 것도 좋지만 일반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괜히 나 때문에 간이 쪼그라들어버린 우리의 인텔리 인재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꼭 경호원을 고용해야겠다.

“저기···”

기묘하게 오가는 침묵 사이에서 한 사람이 쭈뼛쭈뼛 몸을 일으켰다.

“제가 이 회사의 대표입니다만···”

찾았다. 최종인 대표.

뾰통령의 아버지.

그에게 다가가려는데, 덩치 중 한 명이 내 앞을 막아섰다.

“뭡니까?”

“내가 할 소리인데. 너 뭐냐?”

눈살을 찌푸리는 덩치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굳이 정의하자면 손님이랄 수 있겠군요. 대답이 됐습니까?”

“장난 치냐?”

안 된 모양이다. 그는 굳어진 얼굴로 여전히 내 앞을 막아서고 있다. 나는 웃으며 물었다.

“영 이상하네요. 여기가 애니메이션 회사 아니었습니까? 조폭 사무실을 잘못 찾아왔나?”

태연자약하게 당당히 나서는 데는 육체적인 힘 이외에 이성적인 판단도 있었다. 이자들이 비록 깡패처럼 굴고는 있다. 그러나 어쨌건 회사의 탈을 쓰고 있었다. 즉, 법의 테두리 안에서 불합리한 이득을 취하는 놈들이기에 정도 이상의 막장 행동을 할 수는 없다.

누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다들 겁을 집어삼킨 이유는 두려움에 미처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본래의 마이코닉스 역시도 어찌어찌 이를 깨닫고 버티지 않았을까, 예상해 본다.

“계속 길 막고 있을 겁니까?”

“이게···!”

앞의 덩치가 손을 들었지만 이내 제일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의 손짓에 잠잠해졌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대놓고 지으며 막았던 길을 열어주었다.

그제야 최종인 대표와 마주할 수 있었다.

“대표님. 드디어 이렇게 만났네요.”

“저를 아시는지?”

“당연하지요. 안다 뿐이겠습니까? 거의 팬입니다, 팬.”

“아··· 예······.”

내 등장에 잠시 기대를 했었던 사람들은 가벼운 내 행동과 팬이라는 말에 기대감을 다시 내려놓았다. 잘 알면서 이렇게 행동한 것은 내가 투자하고 나아가서 인수하려고 왔다는 사실을 저 덩치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같은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지금까지의 점잖은 행동 대신 정말 싸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들이 받을 돈을 최대한 높일 구실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 좀 그렇지만, 잠시 따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얼떨떨해하는 최종인 대표에게 말했다. 그리고 어깨동무하듯이 친밀감을 과시하며 그와 함께 마이코닉스의 회의실에 들어갔다.

전혀 예상 못 한 움직임에 덩치들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못했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회의실에 최종인 대표와 직원, 나와 곽지원 전무. 이렇게 총 네 명이 들어올 수 있었다.

문을 닫은 뒤 나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우고 진지한 낯을 했다.

“대충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이해는 됩니다만, 혹시 자세히 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네? 팬이 아니었던 건가요?”

“팬이기는 한데 조금 특별한 팬입니다. 기왕이면 마이코닉스가 무너지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거든요.”

그 말에 최종인 대표와 그 옆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 말씀은 투자를 해주신다는 거군요?”

“회사를 인수 하고 싶습니다.”

“······.”

활짝 펴졌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이놈에게 뺏기나 저놈들에게 빼앗기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건 이대로 회사가 끝나는 것과 크게 다를 것 없다고 생각이 되네요.”

“형님.”

같이 들어온 직원의 말에 최종인 대표가 푸념하듯 말했다.

“우리가 잘 다니던 회사를 나와서 왜 창업했냐? 누군가의 밑에 있으면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걸 못해서 그런 거잖아.”

“그랬죠. 그랬어요, 형님.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세요. 이대로면 형님은 물론이고 저도. 그리고 밖에 있는 친구들도 다 길거리에 앉는다고요.”

“그건 정말 미안하다. 내가 너희에게는 따로 할 말이 없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거 같다.”

“형님!”

덩치들의 위압 때문에 미처 밝히지 못한 그의 속내였다. 최종인 대표는 누군가에게 회사를 넘기는 것 자체에 굉장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그와 매우 친해 보이는 인물이 인수에 긍정적이라는 점이다. 형님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막역한 사이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이러한 아티스트들과 많은 작품을 함께 만들어왔다.

저들이 원하는 자유를 안겨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회사 경영권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글쎄요. 제가 꼴은 이렇지만 사회 경력이 10년이거든요. 회사를 인수할 때에는 다들 그렇게 말하고 인수하더군요.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아시겠죠? 약속? 그런 건 다 부질없는 겁니다. 밖에 있는 저들도 처음에 투자금을 줄 때는 이런 식이 아니었어요.”

자조적인 그의 말에 나는 오히려 실망했다.

이건 정말이지 무책임한 태도다.

“그래서 이대로 회사를 끝낼 생각입니까? 밖에서 불안감에 떨고 있는 직원들보다 창업자의 자존심이 중요한 겁니까?”

창작자로의 자존심은 존중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백수가 되는 상황 아니랴. 활로가 나타났는데 진짜인지, 어떤지 확인하려는 자세조차 보이지 않고 짐작만으로 독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건 책임감이 없는 행동이었다.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결과보다 약속을 믿는 게 더 어려운 일입니까?”

“그건······.”

단호했던 얼굴이 내 말에 움찔하고 옆의 사내를 보며 조금 풀어졌다. 강직했던 얼굴이 처음의 나약했던 남성으로 변해간다. 이상을 좇던 창작자에서 다시 위기를 맞은 사업가가 된 것이다.

“형님. 일단은 생각 좀 하고 있어 보세요. 우선은 제가 몇 마디만 좀 나눠보겠습니다.”

그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동생이라는 남자가 나섰다.

“권문수라고 합니다.”

“윤태식입니다.”

“우선 실례되는 질문을 하겠습니다. 우리 회사를 인수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능력은 있으신 겁니까?”

당연한 말이다.

“그러니까 나선 겁니다.”

“저희가 진 빚이 얼마인 줄은 알고 하는 말입니까?”

“아니요. 모릅니다.”

금융정보를 파헤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곽지원 전무의 다급한 요청에 얼른 달려오기 바빴고 말이다.

이런 내 말에 그는 황당해했다.

“그게 얼마인지도 모르시면서 해결하실 수 있다고 하시는 겁니까?”

“네. 그래서 드리는 질문인데, 정확히 얼마입니까?”

“2억입니다.”

권문수는 금액을 말하면서 내 눈치를 보았다. 그의 표정은 ‘네가 이 돈이 있냐?’ 라는 의혹보다는 ‘제발 돈이 있어 다오!’ 에 가까웠다.

그리고 내게는 그 이상의 여윳돈이 있었다.

“회사를 인수하려면 인수비용도 필요하겠지요. 그건 얼마입니까?”

“5억입니다.”

“2억에 5억이라······.”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최종인 대표도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인수 협의를 하는 쪽으로 마음을 잡은 모양이었다. 그는 내가 5억이라며 되뇌자 움찔하더니 권문수에게 눈짓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권문수가 말했다.

“4억도 좋습니다만···”

그때 지금까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조용히 자리만 지키던 곽지원 전무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회장님. 이익은커녕 앞으로도 계속 적자만 낼 가능성이 높은 회사입니다.”

인수 협상이기에 타이밍 좋게 들어온 서포트였다. 심리전으로 흔들면 얼마든지 더 깎을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심리전을 이용해서 회사의 가치를 후려칠 마음이 없었다.

“곽 전무님. 이 회사는 그런 대우를 받을 곳이 아닙니다.”

내 뜻을 밝힌 후 저들에게 말했다.

“5억으로 갑시다. 그리고 앞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확실한 투자를 해드리겠습니다. 대신, 애니메이션만 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럼 저희가 뭘 하죠?”

“그래픽 아트와 애니메이션을 병행하게 될 겁니다.”

“그래픽 아트요?”

의문을 보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할 여유는 없었다. 당장 문 너머에는 인상파 중국 투자사의 직원들이 위풍당당하게 있는 마당이다. 저들을 내보낸 다음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

게다가 그래픽 아티스트가 필요해서 찾아온 것이기는 해도 저들이 ‘그건 못하겠습니다만.’이라고 한다면 억지로 맡기지 않을 생각이다. 이 회사는 애니메이션만 해도 뽀통령이라는 최고의 성공을 이룰 곳이다.

다른 회사를 인수하여 그들에게 그래픽 아트를 맡기면 그만이다.

“우선 하나씩 해결합시다. 일단 회사를 저에게 넘기기로 동의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예? 아··· 예!”

“좋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저들을 보내고 나누도록 하지요.”

그들에게 중국의 창업 투자사가 운용하는 계좌의 번호를 물은 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미진 과장님. 저 윤태식입니다. 지금 부르는 계좌로 2억 3천만 원을 이체해주세요.”

- 2억 3천만 원이나요?

덩치들을 보내기 위한 돈이었다.

“회사 하나 인수하려고 하는 거라서 추가로 5억 정도 더 나가게 될 겁니다. 일단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할 돈이 2억 3천만 원입니다.”

게이머스 포럼은 보유하고 있는 계좌가 아주 많은 편이다. 주거래 은행이야 하나지만 고객이 다양한 은행을 통해서 결제를 진행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많은 계좌를 이용하고 있다.

그 때문에 2억은 몰라도 나중에 움직일 5억은 여러 계좌에 있는 자금 중에 어떤 자금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한가를 산정하고 사용한다.

‘대략 5분 정도 걸리겠··· 엥?’

- 지금 이체됐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빠르네요.”

- 2억 정도야 그냥 아무 계좌에서나 사용해도 되니까요.

‘헐. 2억 정도래.’

회사를 인수하고 게임을 개발할 때 억 단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면서도 여전히 억 단위의 돈에 대한 개념이 잘 잡히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회장 이기는 회장인데 아직 정신적인 지갑의 크기는 여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이러면 안 돼. 나도 개념을 다시 잡아야지.’

회사가 커지면 커질수록 돈에 대한 개념이 확실해야 한다.

이런 버릇은 고칠 때가 되었다.

휴대전화의 통화를 종료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이제는 들어올 때 했던 가벼운 모습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뽀통령이라는 새로운 파트너에게 강인한 인사도 심어줄 겸, 나는 회의실에 들어올 때와는 전혀 다르게 가라앉은 모습으로 덩치들에게 말했다.

< 사람 부족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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