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강 >
***
미국에서의 스케줄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양도준 사장과 김유천 과장이 사무실에 설치된 DVD로 발표회의 진행과정을 보여주었다.
보고 나서 처음 든 솔직함 소감은 헛웃음이었다.
“생각보다 발표회 분위기가 조촐하군요.”
말을 글로 옮기면 냉엄하고 주관성이 배제된다. 마찬가지로 화면 속의 현장은 콘서트 무대가 아니었기에 들뜬 심리와 시청자에게 자극을 주는 요소들이 적었다.
이래서 탁상행정이 현실을 모른 채 이뤄지는 것이라고 본다. 감개무량한 양도준 사장의 표정이 머리로만 이해되지 감정적으로는 ‘오바 아니야?’라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이러한 내 말에 김유천 과장이 대답했다.
“아무리 마이크루라고 해도 이런 발표회를 급조해서 준비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긴.’
당연하다. 사실 마이크루와 같은 회사가 아니라면 일주일 만에 이런 행사를 진행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니까. 단지 내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문제였으리라고 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기사들이 많이 올라왔더군요.”
“뉴욕 포스트의 인턴 기자라는 사람이 따라왔었습니다.”
“호오? 인턴이?”
“스텔라와 와이팟을 분석해서 진짜 제대로 된 기사를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뉴욕 포스트의 베릴이라고 했죠?”
“예, 회장님.”
나도 봤다. 와이팟의 무게가 얼마인지 스텔라의 무게가 얼마인지, 서로가 가지고 있는 기능이 무엇인지를 다른 기사들과는 다르게 구체적으로 비교한 기사였다.
덕분에 마이크루로 시작해서 마이크루로 끝날 뻔했던 발표회에서 케이리버라는 이름이 제대로 각인이 될 수 있었다.
“제임스 킴에게 해당 기자와는 친분을 유지해 두라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케이리버가 이번에 미국에서 계약을 하고 온 물량은 마이크루와의 계약을 제외하고 50만 대다. 20만대 정도면 성공적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베릴의 기사 덕분에 훨씬 큰 대어들이 몰려와 주었다.
“영국, 스웨덴, 독일, 프랑스··· 전부 음반 매출 규모가 상당한 나라들이군요.”
미국에서 미국 기업인 와플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미국 시장은 먹을 수 있는 만큼 먹고 유럽과 일본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한 방법이라고 본다.
“수고하셨습니다. 슬슬 국내에도 기사들이 올라올 텐데. 기자들에게 괜찮은 정보들 물려주면서 좋은 기사들 많이 뽑아주세요.”
“예!”
그는 자신 있게 대답하고 실제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 모두가 다 물 건너서 온 소식이기 때문이다.
【마이크루가 극찬한 기업! 레이컴은 누구인가?】
【레이컴? 그거 진짜 한국 기업 맞아?】
【중소기업이 일냈다! 전 세계 50만 대 납품 계약 따낸 중소기업 레이컴!】
대한민국이 시작부터 대외원조와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일까. 어찌보면 입으로는 국격이라고 하지만 정작 스스로 자존감이 낮기에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대대로 국내에서 반짝하는 것보다 해외에서 인정받고 온 제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덕분에 케이리버의 관심과 인기는 기대 이상이었다. 무려 세계에서 첫 손꼽히는 선진국에서 극찬을 받은 제품이라는 말. 이는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뛰어난 홍보 그 자체였다. 국내의 소비자들이 모두 케이리버를 기다리는 현상을 끌어내는 것에 무난하게 성공한 것이다.
“케이리버는 이제 완벽하게 궤도에 올라섰어.”
여기서 잠시 한숨을 돌렸다.
‘슬슬 정리가 필요하겠구나.’
놓고 가기 아쉬운 정보들을 어찌어찌 움켜쥐다 보니 한 번에 벌려놓은 사업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아졌다. 회사가 잘 나가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좋은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과한 욕심은 모든 것을 망칠 수 있다.
잘못 하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질 수 있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우선 게임은 뉴 온라인을 시작으로 나그네로크도 해외에서 정식 서비스를 시작했지.’
반응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나오는 실정이다. 당장 미르의 전사에서 150억, 뉴 온라인에서 150억, 그리고 나그네로크에서 80억이라는 매출을 달성하고 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국내에서도 약 40억가량의 매출이 나오고 있는 상태니까 이 게임들은 더 내가 신경을 쓸 필요는 없겠군.’
몬스터 프레데터스 역시 꽤나 안정적으로 개발이 되어가는 중이다. 지금대로라면 E3가 있을 6월 즈음에 70% 이상 개발 완료할 것이고 게임 엔진 역시 50% 이상을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즉, 이쪽도 가만히 놓아두는 게 낫다.
‘알아서 잘 굴러가고 있으니까 내가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지.’
이제 막 첫 삽을 뜬 리얼팜 테마파크가 있지만, 이쪽 역시도 기다려야 한다. 완공되기 전까지 내가 알아야 할 것은 그저 공사비 정도일 뿐이니까.
‘또 뭐가 있더라?’
현재 서비스 준비 중인 게임으로 팬더그램의 샤이닝로드가 있긴 하지만 여기도 딱히 내가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샤이닝로드는 월드컵 유니폼 악재만 막아도 알아서 돈을 벌어다 줄 효자 게임이니까.
그러니 월드컵 이벤트 때 ‘승리 당 가중 능력치’를 주지 않도록 하면 된다. 투자 역시도 시원시원하게 해주고 말이다.
‘케이리버는 제품 쪽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대신 상장을 어찌할지가 골치네······.’
게임과 달리 전자제품은 투자금이 많이 필요한 분야다. 그냥 무조건 내가 많은 지분을 가진다고 능사가 아니다. 우리의 명석한 직원들에게 자문하고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끝으로 내가 잘 아는 개인 자산 굴리기! 영화 투자가 있다.
“이렇게 두 개 정도가 내 일거리구나.”
대충 머리에서 정리한 결과가 나왔다.
케이리버의 상장.
영화 산업.
내 손이 닿아야 하는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할 사업들이었다.
‘아참. 하나가 더 있긴 했었지.’
정치인과 교육 쪽으로 말이다.
79. 인강
뉴욕에서 스텔라에 대한 설명이 한창 이어지고 있었던 11월 7일(미국 시각 11월 6일)은 대한민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 있는 날이기도 하다. 이를 익숙하게 말하면 수능일이라 했다.
나처럼 공부에 별다른 의미나 뜻이 없었던 녀석에게는 졸업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1등급과 모두가 염원하는 대학을 목표로 치열하게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청심환을 사 먹어야 할 만큼 긴장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수험생이 한 명 있다.
“어떡하지? 나 한잠도 제대로 못 잤어. 나 수능 망치면 어떡해?”
태희다. 고사장으로 데려가는 내내 여동생은 긴장감에 덜덜 떨고 있었다. 이런 상태일 때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니다.’라거나 ‘나도 해봐서 알아.’ 같은 건 꺼내봐야 손해만 보는 멍청한 대사일 뿐이다.
“지금까지 해온 게 있는데 오늘 하루 제대로 못 잤다고 큰일 나겠어? 잘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대수롭잖게 툭툭 말할 따름이었다. 그때 태희가 별안간 소리를 빽 질렀다.
“아~ 내 소원은! 제발 이번 수능이 엄청 쉬웠으면 좋겠어!”
‘난 알지. 그 소원은 이루어지셨습니다~’
없는 생각을 쥐어짜면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꿈속 미래의 나라는 녀석은 학교 공부랑 아예 담을 쌓고 살았다. 쥐꼬리만큼도 본 적이 없으니 쥐어짠다고 나올 리가 없다.
대신에 나름의 이슈를 어렵사리 끄집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2002년 수능은 역사상 최악이라고 불리는 물 수능이었다더라.’
여기서 년도는 수능시험이 치러지는 해가 기준이 아닌 수능을 본 학생이 대학을 들어가는 해를 기준으로 한다.
‘나 같은 녀석한테 풀라고 하면 엎어치나 매치나 밑바닥 성적이 나왔겠지만 공부하는 애들한테는 다른가 보지.’
오죽하면 문과와 이과를 통합해서 만점자가 66명이나 나왔으며 400점 만점 중 380점 이상의 고득점자가 지난 수능에 비교해 5배가 많은 3만 5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변별력이 없는 역대 최악의 수능으로 꼽힌다.
즉, 우리 동생 태희의 소원은 이루어지는 셈이다. 다만 그 소원이 좋은 결과가 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 어떡하지? 나 망치면 재수할까?”
“어이쿠! 시험도 치기 전에 벌써 재수부터 꺼내고 있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시험이나 잘 봐.”
큰일 날 소리다. 2002년 수능이 역대 최악의 물 수능이었다면 2003년 수능은 반대의 의미로 최악인 불수능이다. 오죽하면 수능 직후에 자살한 학생의 숫자가 두 자릿수를 넘겼을까!
사실 이번 정권은 쉬운 수능이라는 교육 정책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계속해서 수능이 쉬운 편이었다. 그러다가 2001년에 정점을 찍고는 언론의 공격이 거세지자 ‘조금만 난도를 높여볼까?’ 하고 올렸는데 여기서 실수가 있었다.
‘조금이 아니라 엄청 많이 올라간 거지.’
난이도로 설명하자면 지난해에 66명이나 되었던 만점자가 2003년도 수능에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언어의 1등급 컷 기준이 120점 만점으로 98점에 수리는 80점 만점에 61점이었을 정도다.
‘요딴 뉴스 내용 말고 시험지랑 답안지나 떠오를 것이지. 미래의 나라는 녀석은 왜 스치듯이도 보지를 않은 거냐? 물론 시간 남는다고 미적분 문제를 확인하는 게 외계인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공부가 일상이지만 아닌 경우도 존재하는 법이다. 아무튼, 재수를 했다가는 멘탈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니 태희는 이번 한 번으로 승부수를 봐야 할 것이다. 제법 집에서 발언권이 있는 내가 절대로 막을 테니 말이다.
“여전하구나. 청춘이로다~”
입구에서부터 학생들이 와르르 모였고 [선배님 파이팅!] 같은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냥 웃음만 나왔다. 그러고 있을 즈음 숨을 가다듬은 태희가 차량 문손잡이를 잡았다.
“오빠. 나 다녀올게!”
“그래.”
태희를 고사장으로 보내고 나서야 나 역시 회사로 출근을 서둘렀다.
그리고 그날,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회장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만나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지요?”
“강남구의 구청장이시랍니다.”
듣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의아함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를 뭐로 보고 구청장이 와?’
오만함이 아니다. 나에 대해 잘 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분기마다 하는 다른 회사와 달리 게이머스 포럼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렇기에 매달 목표 매출액과 실제 매출액에 대해서 보고와 실적에 대한 평가를 진행한다.
이에 따르면 불과 3개월 전인 지난 8월.
그 시기에 목표했던 매출액은 175억이었다.
실제로 달성한 매출액은 172억 7천만 원.
그리고 이번 11월의 목표 매출액은 무려 600억이다. 껑충 뛰었고 이 금액마저도 꽤 무난하게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 내부의 평가다.
즉, 현재의 성장대로면 2001년인 올해 예상 연 매출액은 1,500억을 바라보고 내년은 무려 7,000억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이것조차도 내년에 세계의 게임 시장과 음악재생기 시장이 얼마나 성장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예상한 것일 뿐이지.’
그렇기에 향후 미래를 대충 아는 내가 예상한 내년 예상 매출액은 1조 3천억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추가 대박 사업을 하게 된다면 심지어 더 늘어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 회사라 하겠다.
‘그런데 국회의원이나 시장도 아니고 구청장이 와? 에이··· 내가 생각보다 저평가되고 있나 보네. 쩝.’
내년의 성장은 고사하더라도 올해의 매출액만 보더라도 정치계에서 군침을 흘릴만한 회사인데 양쪽의 무게가 맞지 않는다고 냉정하게 본 것이다.
어쨌거나 사람이 왔으면 맞이해줘야 한다. 더군다나 시장 혹은 국회의원보다는 조금 직위가 애매하지만, 고위 공직자가 아니던가.
“지금 이곳에 오신 겁니까?”
“네.”
“몇 명이나 왔죠?”
“혼자 오셨습니다.”
‘혼자?’
고위 공직자는 공식적인 행사를 하면서 절대로 혼자 다니는 일이 없다. 이는 비공식적인 행사라는 의미였다.
대략 상황정리를 마치고 내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잠시 후, 조용히 문이 열리면서 꽤나 나이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남성이 들어왔다. 얼굴에 고집이 셀 것 같은 강직함이 보이는 인상이었다.
“게이머스 포럼의 CEO 윤태식 입니다.”
“강남구청장 권용민입니다. 반갑습니다.”
당연히 면식은커녕 꿈속 미래 정보를 통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보통 사람이었으니까. 언론의 프레임 덕분에 정치인의 수가 늘어야 한다는 현실보다도 ‘꼴 보기 싫은 식충이들 혜택이랑 월급이나 줄이지.’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는 평범한 유권자였다. 알려는 노력보다는 알려주는 사실들만 보고 판단하는 일반인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지. 이 지역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제1당의 표밭이라는 것. 아마도 향후 15년간은 구청장이고 국회의원이고 정당이 바뀔 일은 없어.’
정치 지지의 기반은 일단 내게 이익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닌가?
서민으로 살았던 삶에서는 내 인생의 적이라고 생각했던 여당이지만, 지금의 나는 사업가다.
‘굳이 내가 먼저 적대할 이유가 없지.’
일단 내 회사가 속한 곳에서 큰 발언권을 가진 사람과 친분이 생기는 것은 이익이면 이익이지 손해가 날 일은 없다. 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이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괜찮다, 이해할 수 있다. 오케이.’
이 표현만으로도 이 사람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는지 알만했다.
남의 회사에 아무런 약속 없이 불쑥 찾아와 놓고는 한 5분가량을 기다렸는데 자신이 사과를 받고 이해해주겠다고 한다.
‘대놓고 하대하는 거지. 이래놓고 선거를 위한 활동에서는 국민을 섬긴다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할 테고.’
좋은 정보다. 성향을 파악했으니 여기에 맞게 대응하면 될 뿐이다.
나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 인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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