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162화 (162/577)

< 스텔라 >

‘당연히 실리콘 밸리에서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사실 어디에서 발표회를 해도 우리가 손해를 볼 것은 전혀 없다. 실리콘 밸리는 그 자체가 전 세계의 IT를 선도하는 상징적인 장소라 할 수 있으며 뉴욕은 미국 소비시장의 중심지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니 말이다.

아무튼, 제품 발표회 역시 잘 해내기를 바란다.

***

케이리버 스텔라의 발표회가 있는 11월 6일 뉴욕.

마이크루 소프트의 제품 발표회장을 향하는 세 사람이 있었다. 양도준 사장과 김유천 과장 그리고 제임스 킴 미국 법인 대표다.

“고작 일주일 만에 이런 발표회를 준비하다니! 마이크루에 감탄하고 또 그런 마이크루를 이렇게 이용해 버리는 김 과장님에게 거듭 감탄하게 되네요.”

“동감입니다. 그때 봤었던 그 패기! 빌 게이트를 앞에 두고 전혀 밀리지 않는 노련함! 정말 감탄 그 자체였어요. 사실 이제 와서 고백하는 거지만 저는 당신의 정신이 정상적이지 않으리라는 생각마저 했었습니다. 그런데 제 식견이 부족했던 거였더군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게 다 회장님의 선견지명 덕분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저야 그분이 차려놓으신 밥상에 숟가락만 올렸을 뿐이지요.”

“도대체 윤 회장님은 어떻게 이런 것까지 미리 내다볼 수 있는 걸까요?”

“그러니까 그 젊은 나이에 엄청난 성공신화를 이룬 것 아니겠어요? 지금도 금자탑을 쌓아가고 있고 말이죠.”

시애틀에서 뉴욕이라는 장장 4,0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내내 나누었던 대화였다. 하지만 그토록 이야기했음에도 도저히 말이 끊길 줄을 몰랐다. 그만큼 흥분했고 들뜬 기분에 고취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도착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의 성사를 염두에 두며 고민하던 부담을 내려놓은 채 그들은 풍광을 즐기는 여행객의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이야~ 뉴욕은 정말 으리으리하네요.”

김유천 과장의 감탄사에 제임스 킴이 물었다.

“김 과장님. 듣기로는 미국에서 유학하셨다던데 뉴욕에는 처음 오세요?”

“예. 저는 텍사스에서 공부했거든요.”

그 말에 양도준 사장이 불쑥 말했다.

“A&M?”

“이야~ 보통 텍사스에서 공부했다고 하면 오스틴을 물어보는데! 바로 A&M을 짚어내시는군요?”

“오성 전자에 있을 때 어느 순간부터인가, 연구원에 A&M 출신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제임스 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공대로는 세계 최고 대학 중 하나죠.”

보통 TAMU 혹은 A&M이라고 줄여서 부르는 이 학교의 정식 명칭은 Texas A&M University이다. 텍사스 최고 명문대학교 중에 하나로 이공계열 최강자 중 하나로 매년 미국 내의 상위 대학교에 랭크가 되는 곳이다.

또한, 미국 학교 중에 한국 동문을 가장 많이 배출한 학교이기도 했다.

“대단하시네~”

엄지를 척 드는 그에게 김유천 과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떠나서 연구원에 A&M 출신이 많은 건, 학비가 싸기 때문일 겁니다.”

기회의 땅이라 불리는 미국은 대학이건 대학원이건 모두 엄청난 학비가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A&M은 상위에 랭크 된 학교들과 비교해서 크게는 3배 적게는 2배의 차이가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한국에서는 일명 ‘가성비 갑’의 학교로 불린다.

“그래요?”

“네, 엄청 저렴합니다. 게다가 세탁소나 도넛 가게는 한국인들이 다 점령했죠. 알바자리 구해서 학비 벌기도 좋고요.”

말을 하다 보니 김유천 과장은 당시의 기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잠시 추억에 잠긴 그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행복에 겨운 반응이 아니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끔찍한 시간이었지.’

아무리 추억보정을 한다고 해도 힘들었던 과거는 고생으로 남을 뿐이다.

“그래도 보통 미국에서 유학하면 뉴욕 같은 곳은 한 번쯤이라도 구경하러 오고··· 뭐, 그러지 않아요?”

“하하하. 그런 건 돈 있는 집 애들이나 그러죠. 저와 비슷한 부류는 상상도 못 해봤어요.”

“그렇구나······.”

“재밌는 건 같은 환경이라도 다르게 여긴다는 겁니다. 어떻게든 의욕을 가지고 온 애들은 텍사스에서 학교 다니는 걸 배움의 기회라 부르거든요. 반면에 돈 좀 있는 집 애들은 그것을 유배지에 처박혔다, 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길을 걸어갈 즈음이었다. 누가 가리킨 것도 아닌데 이들 세 명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아?!”

“저건···!”

뉴욕. 이 거대한 도시의 전광판 곳곳에서 보이는 케이리버의 로고.

마이크루 소프트와 레이컴, 케이리버의 로고가 화려하게 출력이 되고 있었다.

【Would you like to join us?

kRiver

Miclone Soft & Raycom】

전광판에 출력된 화면에는 스텔라의 이름도, 그 모델의 모습도 나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체가 엄청난 홍보 효과를 가지게 될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렇기에 저 문구들은 실로 아름답기까지 했다.

반가움과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아릿함이 거세게 이들의 심장을 강타했다.

“자. 감동은 여기까지 하시고 계속 가시죠.”

오늘 제품 설명회에는 스텔라의 개발자로 양도준 사장도 함께하기로 했으니, 늦지 않게 서둘러야 했다.

“맞네요.”

“네. 그렇죠.”

걸음도 모두 잊은 채 멍하니 바라보던 그들은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뉴욕 컨벤션 센터는 그 입구부터 기자는 물론이고 각 유통사의 바이어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를 보며 오늘만 몇 차례인지 모를 감탄사가 연이어 나왔다.

“이게 바로 마이크루 소프트의 힘이로군요.”

“브랜드의 파워가 실감 납니다.”

엄청난 일이었다. 정확히 무엇을 공개한다고 뚜렷하게 밝히지도 않았다. 그저 새로운 제품을 공개하겠다고 말한 것이 전부인 제품 발표회다. 게다가 준비 기간 역시 매우 짧아서 그동안 마이크루 소프트의 발표회와 비교하자면 조촐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대단위의 인파가 높은 기대감을 보이며 카메라를 든 채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질서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아. 거 갑자기 끼어들고 그러면 어떡합니까?]

[잠시만요! 잠시만요! 뉴욕 시장님이십니다. 양해 좀 부탁드립니다! 잠시만요!]

아직 발표회가 시작되기 이른 시간임에도 기자는 물론이고 각 유통사의 바이어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어 매우 혼잡하고 시끌시끌했다.

[케이리버는 뭐고, 레이컴이라는 업체는 또 뭘까요?]

[와플에서 몰래 와이팟을 준비했던 것처럼, 마이크루도 조용히 무언가를 준비해왔겠지.]

[회심의 한 방이라는 건가! 기대된다, 기대돼!]

삼삼오오 모여 있는 기자들 혹은 바이어들은 대관절 이토록 갑작스레 기습 발표하는 마이크루의 제품이 무엇인가를 두고 많은 호기심을 보였다.

[뉴욕 시장님까지 찾아오신 것을 보면 어마어마한 것일 게 틀림없어.]

[와이팟이 나오고 난 타이밍이라는 점을 보면 아마도 음향재생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겠지.]

다들 이런 분야에는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정확히 어떤 제품을 발표할 것이냐는 몰라도 ‘대충 어떤 것을 발표하려는 것이다’ 정도는 유추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꽤 사실에 근접했다.

[어차피 이런 발표회는 특종 같은 건 없어. 그냥 사진이나 잘 찍어서 남들에게 밀리지만 않도록 하면 되는 거야.]

[진짜로 엄청난 제품을 발표할지도 모르잖아요.]

[주변 안 보이냐? 아무리 엄청나면 뭐해? 우리가 아는 만큼 쟤들도 다 알 텐데.]

많은 기자가 의욕적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미국 내의 모든 언론사가 다 모인 이런 자리에서 자신만 특별한 무언가를 얻어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기자들은 ‘남들이 다 하니까 우리도 해야지’ 정도의 의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뭔가 찾아보면 남들과 다른 정보를 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뉴욕 포스트의 인턴 기자인 베릴은 어떻게든 이번 발표회에서 남들과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는 각오를 다졌다. 인턴이 아닌 정식 기자가 되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열정을 불태웠으며 마음 편히 발표회를 지켜보는 선배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러던 중 박수갈채가 울렸다.

짝짝짝-!

스텔라의 발표 현장에 나와 있는 모든 사람이 기립해서 누군가를 열렬하게 환영하고 있었다. 그 대상은 바로 빌 게이트였다.

미국의 신제품 발표회는 일종의 데몬스트레이션이라 할 수 있어서 그들은 단순히 프레젠테이션이나 ‘우리 신제품의 스펙은 이러저러합니다.’ 등의 설명회 분위기만 갖지 않는다.

지금 빌 게이트가 이렇게 박수를 받는 것은 바로 스텔라를 꺼내서 보여줄 때 그가 선택한 방법 때문이었다.

최초의 목걸이형 MP3P.

이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방법!

그것은 발표자가 직접 목에 걸고 나오는 것이었다. 빌 게이트는 스텔라 타이티도 아닌 스텔라 클래식을 목에 건 채로 나왔고 어느 정도의 설명이 진행되었을 때 스웨터 속에 숨겨두었던 그것을 꺼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퍼포먼스에 베릴 역시 연신 감탄하는 중이었다.

‘이럴 수가! MP3P가 저렇게 가벼울 수 있단 말이야?’

디자인과 크기에 놀랐고 녹음까지 할 수 있다는 기능성에 고마움까지 느꼈다.

“엄청 편해지겠군!”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제품이야.”

기자들의 반응이 더욱 기껍고 호응도도 높아졌다. 편하게 휴대하면서 녹음까지 가능한 MP3P에 굉장한 반응들을 보였다.

스텔라 클래식.

그중에서도 액정이 없는 모델의 무게는 고작 96g이다. 현재 경쟁작이라고 할 수 있는 와이팟의 무게가 140g이니 무게로 승부를 보기엔 충분했지만, 사실 목에 걸기에는 이것도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흥행을 위한 데몬스트레이션이다.

[이 엄청난 제품을 개발한 개발자가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객석에서 경직된 자세로 초조하게 보던 양도준 사장의 차례가 되었다.

[미스터 양! 나와 주시죠.]

그는 자신을 호명하는 빌 게이트의 목소리에 순간 움찔했다.

“뭐하십니까? 자신감 있게! 우리 제품이 세계 최고다! 당당하게 보여주고 오셔야죠!”

김유천 과장의 말에 양도준 사장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내심 심장이 터질듯하면서도 겉으로는 긴장하지 않은 양 당당한 걸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반갑습니다. 스텔라의 개발자인 양도준이라고 합니다.]

대기실도 아닌 일반 객석에 있다가 나온 개발자. 심지어 약간의 소란마저 일으키며 나온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기자들의 심리는 이미 빌 게이트에게 다 들었으니 빨리 발표회를 끝내고 기사나 쓰고 싶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베릴은 달랐다.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진짜 특종을 만들게 해줄 거야.’

정식 기자가 되기를 염원하는 간절함만큼 베릴은 알 수 없는 기대감을 느끼고 동양인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두 명의 남자가 들고 오는 물건을 보았다.

김유천과 제임스 킴이 들고 오는 그것은 저울과 초콜릭 과자였다.

‘왜?’

김유천이 무대로 가져간 것은 그냥 단순히 무게를 재는 저울이 아닌 천칭이라 불리는 저울이었다. 양쪽의 균형을 통해 무게를 재는 물건이다. 그들의 이상한 행동은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목에 걸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전자제품. 과연 이 제품은 얼마나 가벼울까요?]

미국인들에게 익숙한 초콜릿 과자를 한쪽에 두고 반대편에는 스텔라 클래식을 올렸다. 놀랍게도 과자쪽으로 기운 저울은 꼼짝 조차 하지 않았다.

[호우!]

그만큼 스텔라보다 과자가 한참이나 무겁다는 이야기다.

양도준 사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액정까지 달린 스텔라 클래식을 저울 위로 올렸다. 무려 두 개의 MP3P를 두었음에도 저울은 변함이 없었다.

[세상에. 여전히 과자가 무겁잖아?]

두 개의 제품보다 과자가 무겁다.

양도준 사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스텔라 타이티까지 저울위로 올렸다.

제품 세 개의 무게는 합쳐서 268g.

초콜릿 과자는 328g.

과자의 무게보다 한참이나 부족하기에 저울은 여전히 과자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직관적으로 보여준 저들의 퍼포먼스에 기자들의 시선이 양도준 사장의 입으로 향했다.

[우리 제품 모두를 올려도 과자보다 가볍습니다. 휴대용 음악재생기? 말만 휴대용이지 가방에서 꺼내지도 못하는 휴대용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제 당당히 꺼내서 가지고 다닙시다!]

[와아아!]

빌 게이트의 프레젠테이션만큼이나 커다란 박수가 그의 말에 화답했다. 이것은 유통업계의 사람들에게는 매출을 올려줄 좋은 상품으로 인한 박수였으며, 기자들에게는 드디어 기사를 쓰러 갈 수 있다는 해방감이 가득 담긴 박수였다.

‘저들을 인터뷰해야 해. 다들 이 내용만 쓸 때 나는 스텔라와 와이팟을 구체적으로 비교한 기사를 쓰는 거야.’

그는 직감하고 바로 관심에서 멀어진 동양인들의 뒤를 따랐다.

[베릴. 오늘 기사 쓸 거 정리··· 아니 이 새끼가 어디 갔어?]

그리고 선배 기자는 ‘역시 인턴들이란!’을 되씹으며 짜증을 냈다.

< 스텔라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