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160화 (160/577)

< MP3 플레이어 >

나는 치열하게 고민 중인 김유천 과장에게 말했다.

“케이리버와 와플이 브랜드 가치로 저울질을 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김 과장님은 그를 만나야 합니다.”

“설마 마이크루 다음에 빌 게이트라고 말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바로 이해하셨군요. 정답입니다.”

“···오오! 세상에! 회장님. 저를 높게 평가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빌 게이트를 만나서 MP3 플레이어를 파는 것은 무리입니다. 게다가 그곳은 유통사도 아니잖습니까?”

“저들의 상황, 만나는 방법, 협상안, 여기에 핵심 카드까지 주어진다고 해도 말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난색을 보이던 그의 표정이 그림처럼 확 바뀌었다. 뒤이어 흥미진진하게 내 이야기를 들으며 무릎을 치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등의 리액션을 보였다.

‘사실 이것도 표절이야.’

마이크루 소프트의 이름값 뒤에 숨어서 케이리버의 가치를 상승시키는 방법.

이는 꿈 속 미래의 케이리버가 사용한 방법이었다. 다만, 그 시기가 한참 뒤였다. 이미 와이팟이 세계 시장을 점령하고 난 이후였던 것이다.

‘물론, 최소한의 증명조차 되지 않은 듣보잡 회사의 듣보잡 제품을 마이크루 소프트가 마케팅해줄 리 없었을 테지만, 지금의 내게는 괜찮은 무기가 있거든.’

물론, 말을 하는 나부터도 막상 ‘해봐’라고 하면 ‘못해’라고 할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구슬이 서 말이지만 꿸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유천 과장의 능력에 기대어 본다. 개떡같이 띄엄띄엄 말해줘도 찰떡같이 잘 받아먹어 주기를 바란다.

‘쪽팔림 당하더라도 내가 면전에서 당하는 건 아니니까. 이거 너무 비겁한 생각이려나?’

···아무튼, 잘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진짜다.

***

[김유천], [양도준]

10월 27일에 레이컴의 양도준 사장과 게이머스 포럼의 해외 마케팅 전문가인 김유천 과장은 미국 워싱턴주의 시애틀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여기입니다!”

양도준 사장과 김유천 과장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그들을 마중한 인물은 레이컴의 미국 법인 대표인 제임스 킴이었다. 사실 거창하게 표현해서 미국 법인이지 총 3명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요!”

그가 한국말로 양도준 사장을 불렀고 고개를 연신 돌리던 두 사람이 재빨리 그에게로 움직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컴 미국 법인을 담당하고 있는 제임스 킴입니다.”

“반갑습니다. 게이머스 포럼에서 해외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김유천 과장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 말로요. 영업과 관련된 김 과장님의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악수하며 인사를 얼추 나누자 양도준 사장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굳이 시애틀을 선택하신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도착한 현재까지도 자신이 왜 시애틀까지 날아와야 했는지 영문을 모르는 상태다. 이는 제임스 킴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불안감의 크기만큼 기대치도 갖고 있었다. 둘 다 김유천 과장에 대한 영업과 관련된 실적들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쉽게 알려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야 우리의 MP3 플레이어를 팔기 위해 온 거죠. 그건 그렇고 여기서 이렇게 서 있기보다는 일단 호텔로 가서 짐부터 푸는 게 어떻습니까?”

김유천 과장은 어깨만 으쓱할 따름이다.

“하여간 시차라는 게 참 재미있어요. 토요일 오후 6시 비행기를 탔는데 막상 미국에 오니 다시 토요일 오후 4시라니.”

온몸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무장한 모습이었다.

‘회장부터 부하에 이르기까지 죄다 의뭉스럽기는.’

양도준 사장은 대답을 듣기 글렀다는 생각을 하며 바깥을 보았다. 시간이 오후 4시인데도 어둑어둑했고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중이었다.

“우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네? 갑자기 내린 건가?”

그의 혼잣말에 제임스 킴이 대답했다.

“시애틀은 일 년 내내 안개와 습기가 가득한 지역입니다. 해가 쨍쨍한 여름을 제외하면 거의 늘 이런 환경이라 대부분 우산보다는 방수 옷을 입는 것을 즐기죠. 그래서 이런 날씨에 우산을 쓰는 사람을 보면 ‘타지인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들은 잠시 시애틀의 묘한 환경을 구경하다가 이내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일정이 어찌 됩니까?”

“오늘은 별다른 걸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호텔에서 푹 쉬시면 됩니다.”

‘아이고. 정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구나. 무슨 도깨비 장난도 아니고.’

양도준 사장의 마음이 여러모로 심란했다. 이는 호텔에 도착하고 저녁 11시가 될 때까지도 이어졌다.

‘술이나 마셔야겠어.’

오늘이 첫 국외 출장이라서 긴장한 게 아니다. 14시간이라는 한국과의 시차 때문도 아니었다. 막막하기 때문이다. 앞뒤 사정을 모르고 왜 이곳에 자신이 따라와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오게 됐다.

‘회사의 사활이 걸렸는데 왜 저들은 태평한 거지? 12만 개의 재고 따위는 감당할 수 있다는 건가? 게이머스 포럼이 오성 급은 되고 윤태식이가 이건휘 급이 되는 거였어? 아니잖아. 그런데 왜 이러는 거냐고.’

자신만 초조하다는 것. 여기서 오는 답답함이 크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양사장님. 와인 한 잔 안 하시겠습니까?”

게이머스 포럼의 김유천 과장이었다. 이런 타이밍에 와인을 가지고 오다니. 한껏 긴장했던 그의 입에서 피식하는 바람 새는 소리나 나와 버렸다.

“들어오세요.”

결국, 와인을 가지고 찾아온 김유천 과장은 물론이고 미국 법인의 대표인 제임스 킴까지 모두가 같은 심정으로 잔에 와인을 따르게 되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시네요.”

김유천 과장은 양도준 사장을 공항에서 처음 봤다. 그런데도 꽤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편하게 말을 꺼내고 또 친근함까지 느끼게 되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붙임성도 좋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왜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따라서 온 것이 그렇게 걱정이세요?”

그는 공항에서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과장한 어조로 말했다.

“아이고. 걱정일랑 그냥 다 붙들어 매세요. 우리 회장님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냥 미다스의 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분이 하자고 하면 가능성을 점칠 필요가 없어요. 우선 ‘그냥!’ 하시면 되는 겁니다.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을 경험하게 될 테니까요.”

“어디에 가는지조차도 말입니까?”

“이 모두가 회장님의 지시이니 여러분은 부담일랑 내려놓고 즐겁게 보셔도 무방합니다. 아마 여러모로 꽤 흥미로울 겁니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제품을 팔기 위해 진지하게 왔다는 이야기이고 조만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거라는 점입니다.”

김유천 과장의 호언장담에 양도준 사장과 제임스 킴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 방법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모르겠다, 지들이 다 해결한다는 데 내둬야지.’

리스크를 감당하겠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반복하는 사람과 무슨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유천 과장은 와인 잔을 들었다.

“한잔합시다.”

“···그럽시다!”

“마십시다!”

쌉싸름한 와인 특유의 향이 코끝부터 혀끝까지 자극하며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이들의 모습을 보며 김유천 과장이 내심 웃었다.

‘나를 괴짜 취급 하는 게 빤히 느껴지는군. 그런데 나 역시도 당신들과 비슷한 심정이거든.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라 했다지만, 정말로 그런 상태로 영업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어서 빨리 해내고 싶어서 긴장이 될 정도야.’

저들이 느끼는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그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윤태식 회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미리 언급한다면 나름대로 확인하고 도움을 주고자 움직일 테고 그러며 일이 헝클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모르면 평타, 알면 미지수인데 불안감을 풀어준답시고 미리 언급할 이유가 없지.’

그렇기에 그는 공수표만 남발하는 허풍쟁이의 이미지를 고수했다.

“자! 케이리버의 성공적인 출발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선창하면 재창하는 것이 술자리의 기본이다. 그렇게 와인 잔의 와인이 줄어가는 만큼 그날 밤도 저물어 갔다.

다음 날인 일요일 오전 10시.

너무 이르지도 않지만, 너무 늦지도 않은 시각에 그들 세 명은 호텔을 나섰다.

“맙소사!”

김유천 과장은 출발 직전에야 목적지를 김유천 과장은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사람들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었고 세계 굴지의 대기업을 들은 일행은 벌써 긴장하고 말았다.

“과장님은 긴장도 안 되십니까?”

“긴장이요? 당연히 되죠.”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태연해 보이시는데.”

“그 기분이 좋으니까요.”

“예?”

그는 도전과 실패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 긴장보다는 흥분과 자극을 느끼는 타입이다. 더군다나 실패할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지시를 내린 윤태식 회장을 떠올리니 더욱 흥미가 생겼다.

소위 말하는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IT 회사, 마이크루 소프트.

그 위명에 걸맞게 본사는 거대한 성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고 그 탓에 타운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름이 주는 정신적인 충격과 규모의 웅장함에 허우적거리느라 인포 데스크를 찾는 것에만도 적잖게 시간이 걸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제임스 킴이 1층 내부 구조 지도가 설치된 인포메이션을 찾아냈고 이를 토대로 인포 데스크 앞에 도착했다.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직원의 말에 그들 세 명은 서로를 보았고 김유천 과장에게 시선이 모였다. 영어를 몰라서 떠넘기는 것이 아니었다.

과연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지 불안과 기대가 공존하는 눈빛이었다.

예의 어깨를 으쓱인 그가 성큼 나서서 말했다.

[CEO 빌 게이트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너무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김유천 과장의 모습에 ‘빌 게이트와 무슨 관계라도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 따름이다. 그리고 인포 데스크의 직원은 김유천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빌 게이트 회장님은 오늘 나오시지 않는 날입니다. 혹시 약속을 잡으셨나요?]

고개를 저으며 그가 CD 케이스를 꺼냈다.

“그게 뭡니까?”

“회장님이 주신 마법의 열쇠입니다. 우리와 빌 게이트를 만나게 해 줄 키워드지요.”

“그게요?”

모두의 시선이 CD를 향하지만, 그것을 본들 답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우리를 만나고 싶다면 빌 게이트와의 약속을 잡아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글귀와 함께 제임스 킴의 연락처가 적힌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 사이 김유천 과장이 인포 데스크의 직원에게 말했다.

[빌 게이트를 만날 수 없다면 지금 이 CD를 Z박스 개발자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정말 급한 겁니다.]

[그냥 이것만 전달해 드리면 되는 겁니까?]

[네.]

[알겠습니다.]

직원의 대답을 듣고 김유천 과장은 돌아 나왔다. 기대를 안고 구경하던 두 명의 관람객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무언가 거창할 것만 같았는데 여기서 끝이라고 했다.

“정말로 기다리면 되는 겁니까?”

“잠깐의 휴가인 셈입니다. 우리의 마법 열쇠가 잘 전달된다면 오늘 이 휴식이 그리워질 테니까요.”

“······.”

먼저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두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애틀에 온 둘째 날.

김유천 과장은 호텔에서 맛볼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을 하나씩 시켜 먹으면서 꿀 같은 휴일을 즐겼다. 편안함에는 쉽게 적응하고 젖어 드는 것일까. 양도준 사장과 제임스 킴 역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반나절을 지내다가 곧 그에게 동화되어 안락한 시간을 즐기게 됐다.

다만, 외관은 비슷하되 내심은 달랐다. 김유천 과장이 피서지에 온 여행객이라면 그들은 자포자기 상태로 즐기는 무념무상의 상태였다.

그리고 아침 식사가 끝나고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제임스 킴은 커피라도 사 와야겠다며 밖으로 나갔고 호텔 방에는 김유천 과장과 양도준 사장만이 늘어져 있는 그때 양도준 사장의 휴대폰 전화가 요란한 벨소리를 울렸다. 제임스 킴의 전화였다.

“무슨 커피를 사야 할지 벌써 까먹은 건가? 여보세요··· 제임··· 아. 네. 네? 뭐라고요!? 예! 네! 알겠습니다!”

그는 실시간으로 변화무쌍이라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더니 통화를 종료하고 김유천 과장에게 말했다.

“그··· 비··· 빌 게이트가··· 우리보고 만나자고 연락을 했답니다!”

‘맙소사. 짧은 휴가라 하시더니 정말 어지간히도 짧은 거였군.’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언제 보잡니까?”

“그게 최대한 빨리 만나보고 싶다고 합니다.”

“갑시다!”

우당탕-!

최대한 빨리라는 말을 듣자마자 김유천 과장은 지금까지의 나태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옷장을 뒤졌다. 그런 그를 양도준 사장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바로 채근했다.

“뭐해요? 빨리 만나보고 싶다잖습니까. 나갈 준비 하셔야죠.”

“아··· 맞다! 그래야지요. 네!”

그렇게 커피를 사러 갔던 제임스 킴 역시 빈손으로 허겁지겁 귀환했고 이들은 마이크루 소프트 타운으로 향했다. 어제와 같은 길이었지만 느낌은 정말 달랐다.

“하나 풀렸으니까 이제 좀 시원하게 밝혀주시죠?”

“도대체 어제의 그 마법 열쇠라는 게 뭐였습니까? 빌 게이트를 움직이다니?”

결과가 나온 마당이니 의심으로 이리저리 쑤시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김유천 과장이 비로소 흔쾌히 대답했다.

“게임입니다.”

“네?”

“게임이라고요?”

고작 게임 때문에 세계 최고 기업의 소유주가 자신들을 만나준다, 쉽사리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김유천 과장은 자신 역시 윤태식 회장에게 이와 같은 반응을 보였음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회장님의 지시라는 이름으로 그간 싸맸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지금부터 3주 후. 마이크루 소프트는 Z박스를 정식으로 출시한다고 합니다. 빵빵한 배경에 자본금과 기술력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최강의 콘솔이죠.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알맹이가 없는 속 빈 강정이라는 점이지요.”

< MP3 플레이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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