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P3 플레이어 >
“알겠습니다. 그러면 게이머스 포럼 명의로 경매를 부탁드릴게요.”
“총군주 회장님.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뭐죠?”
“왜 게이머스 포럼의 법인 명의로 땅을 구매하시려는 겁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유는 단순했다. 리얼 팜을 위한 테마파크니까 게이머스 포럼 밑의 법인으로 추가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달리 말했다.
“단순히 회사로 운영하기에 그리 결정하시는 거라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 그래도 된다고요?”
“예. 총군주 회장님의 명의로 구매하셔서 법인에 임대를 하시면 됩니다. 굳이 개인 자산으로 갈 수 있는 토지를 회사자산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오오! 진짜 내가 꿀꺽할 수 있는 거였어!?’
나는 속물이 틀림없다. 욕심에 초탈해서 플레지에서처럼 칼같이 보좌해주는 그와는 달리 가슴이 뛰고 괜스레 배가 부르는 것 같았다. 이런 게 먹지 않아도 만족스럽다는 것이리라.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당연히 괜찮습니다. 세금 탈세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의 임대료만 지급한다면 말이죠. 물론 세금이 필요하지만, 연봉 외의 개인 수익을 추가할 수 있다는 점도 어찌 보면 이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오! 뭔가 어려운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법인을 차리고 보니 생기는 문제가 이거다.
이 회사는 전적으로 내 회사다.
내 자본이고 내가 만들었다.
그런데도 회사의 자본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면 횡령이 된다. 개인사업자가 아니라 법인사업자이기에 회사 자본과 내 자본이 구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그렇게 진행하도록 해 주십시오.”
“존명.”
···회사 내에서는 안 저랬으면 좋겠다.
아무튼, 오케이 싸인을 받은 후 경호 형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김지애 팀장과 함께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고 그 결과, 새로운 법인은 물론, 경매와 해당 경매 지역을 빠르게 개발 가능한 지역으로 탈바꿈시켰다.
‘대단한 사람들이야.’
우리 회사의 능력자들만 모아서 드림팀을 구성하면 세상에 처리하지 못할 문제는 없을 것 같다.
77. MP3 플레이어
2001년 10월의 아침.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게이머스 포럼의 문을 두드렸다.
“앉으시죠. 차는 커피로 드시겠습니까?”
“네? 아··· 네.”
잔뜩 어깨를 움츠린 남자. 긴장한 얼굴로 커피 한 잔에도 황송해하는 그는 투자를 기대하는 흔한 개발자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MP3 플레이어 회사인 레이컴. 훗날 케이리버로 불리는 곳의 사장.
그는 장차 국내 점유율 1위, 세계 점유율 2위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두게 되는 한국의 스티브 존스 양도준 사장이다. 화려하게 비상할 시기도 내 기억으로 멀잖은 시점이었다. 당장 몇 개월만 지나면 국내에서 가장 유명세를 가지게 되니 말이다.
그런 양도준 사장이 내가 말문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하긴 하네. 케이리버라는 대어가 찾아온 건 좋은 일이다만 우리는 게임회사잖아. 그렇다고 케이리버가 문화예술 콘텐츠 쪽 분야도 아니고.’
전혀 상관없는 업종의 회사에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다.
나는 친절함으로 온몸을 무장한 채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떻게 오셨다고요?”
“그게··· 투자를 좀 받았으면······.”
‘역시 투자 때문이군. 이유는 모르겠지만.’
짐작했던 바지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상식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타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태도는 친밀감을 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불안감을 주기도 한다. 특히 사업이 얽혀있다면 더욱 그렇다.
“의아하군요. 보통 투자 같은 건 우리 회사보다는 투자사를 먼저 찾아가지 않습니까? 아니면 비슷한 계열의 회사라던가 말이지요.”
“그게··· 이미 다 다녀왔습니다.”
“네?”
양도준 사장은 속이 꽤 답답했는지 뜨거운 커피를 아무렇지도 않게 후루룩 마셨다.
“저희같이 작은 회사는 MP3 플레이어를 제작할 수 있는 핵심 기술을 개발해 봤자 어차피 양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대기업에 기술을 팔아넘기려고 개발한 거였습니다.”
본래라면 일면식도 없는 내게 꺼낼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여러 회사를 거치면서 자신감이 많이 하락한 상태로 보였다. 그는 속에 쌓인 감정들을 모조리 던져버리는 중이었다. ‘듣고서 투자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아라.’ 이런 자포자기의 모습이다.
나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니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요?”
“다들 기술을 사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고 그저 가격을 후려쳐서 OEM으로 납품받으려는 생각만 하더군요. 이 기술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그런 걸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역시 세상에는 도둑놈들이 참 많다.
“투자 회사는 어땠습니까?”
“우리 같은 회사에는 투자할 신용도,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깎아내리더군요.”
이를 듣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이토록 어려웠던 상황에서도 그 정도로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구나, 하는 감탄이다.
둘째는 안쓰러움이었다.
‘성장한 이후의 대처가 신중하지 못했다 싶더라니. 애당초 거시적인 안목이 없었기 때문이구나. 위기 극복 후 너무 승승장구한 것도 한몫했을 테고.’
케이리버는 경쟁자였던 쿠원과 비교만 해봐도 그 차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쿠원은 케이리버 덕분에 만년 2위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회사다. 이름하여 ‘MP3계의 송진호’라 한다.
두 회사는 비슷한 시기에 MP3에 입문하고 MP3의 시대가 끝나던 그 날까지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각기 다른 행보를 보였다.
‘명암은 여기서 갈렸는지 몰라.’
쿠원은 소프트웨어 회사로 시작해서 안정적인 수익원을 확보했다. 그 후에 MP3 시장에 뛰어들었다.
반면 케이리버는 도전정신과 열정 하나로 맨땅에 헤딩했다. 그리고 세계 2위의 점유율을 거둔 시점에서 미국 시장의 절대 강자인 와이팟과의 가격 경쟁을 치르며 피 칠갑을 하게 된다. 패기 넘치는 도전정신이 부른 호기이자 참극인 셈이다.
한편, 쿠원은 미국 대신 일본 시장을 노린다. 그들은 파이는 작아도 자신만의 특색으로 일본 시장 점유율 1위를 이루며 안정적인 영업이익을 취했다.
그 결과, 케이리버는 빛 좋은 개살구 신세가 된다.
‘국내 1위, 세계 2위의 점유율을 가졌으면서도 적자를 내기 일쑤였으니까. 쿠원은 최초 설립했던 90년대 중반부터 2007년까지 단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고 운영했다는데 말이지.’
이렇게 따지고 보면 케이리버보다는 쿠원에 투자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투자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케이리버가 딱 좋았다.
‘쿠원은 체계가 확고하게 잡힌 회사거든.’
미래를 안다고 해도 내가 간섭해서 무언가를 더 하기 어렵다. 하지만 케이리버는 다르다. 지금부터 내가 원하는 방식과 길로 인도할 수 있고 그런다면 충분히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개발의 문제가 아니라 경영의 문제인 곳.
나는 이런 곳을 매우 사랑한다. 그 사이 양도준 사장은 고해성사 같은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오성에 있을 때는 자금을 구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습니다. 돈 많은 기업에 있을 때는 그렇게 자기네 돈 좀 써달라고 하더니 정작 돈이 필요한 회사로 오니까 모두가 외면하더군요.”
‘당연하지. 그게 국내 은행의 영업방식이니까.’
안전한 곳에 투자해서 리스크 없이 이익을 얻는 방식.
리스크를 많이 안고도 투자하는 곳은 투자은행이다. 그러나 국내에는 아직 그런 은행이 없으니 양도준 사장은 그저 끌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회사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듣고 오셨습니까?”
“예? 그게··· 그냥 게임 기사들 보다가 찾아왔습니다.”
“기사요?”
“에···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신다고 하길래요. 그래서 무작정··· 왔습니다.”
‘닥치고 돌격이네. 추진력은 끝내주겠어. 실수하면 대박 말아먹겠고.’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회사의 대표자가 아무 연고도 없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면식도 없는 회사에 투자요청을 하러 찾아오다니. 심지어 영업인도 아닌 기술개발자가 말이다.
이제 충분히 하소연을 들어줬으니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다.
“저희는 절대 그냥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냥 투자하지 않으신다는 건···?”
“최소 51%의 지분. 그 정도의 지분을 가져야만 투자합니다.”
“아···”
거짓말이 아니다. 실제로 텐션을 제외한다면 투자한 모든 회사들의 지분 51% 이상을 게이머스 포럼이 가지고 있었다. 이러는 이유는 내가 욕심쟁이라는 데 있다.
죽을 놈을 심폐 소생하고 훨훨 날아다니게 해준 게 나 아니겠는가. 미래 정보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지원을 해주었고 말이다. 이토록 공들인 회사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길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래도 지분 51%라면···”
팬더그램 때도 나왔던 걱정이다. 나는 익숙하게 말했다.
“저는 투자만 하고 투자한 돈이 불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경영에 참여하시겠다는 겁니까?”
“글쎄요. 경영은 앞으로도 지금 제 앞에 계신 양도준 사장님이 하실 겁니다. 다만 파트너로서 더 좋은 길을 제시할 뿐입니다.”
그는 입술이 바짝 마르는 듯 침으로 적시며 손가락을 비볐다. 고민과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충분히 이해한다. 세계 최초로 MP3를 개발했던 한 중소기업은 당시 투자했던 대기업에게 공동특허로 특허를 빼앗겼다. 그뿐만 아니라 회사까지 망해서 길거리로 내몰렸다.
51%의 지분을 요구하는 친분조차 없던 회사.
투자금 자체는 욕심이 나지만 먹고 탈이 나는 건 아닐까?
자신도 그들처럼 내쫓기는 것은 아닐까?
근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또 알고 있다. 이토록 간절한 표정과 기댈 곳 없는 사람은 탈이 날 줄 알면서도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겠습니다.”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다. 1번과 2번이라는 선택지가 아니라 오직 단 한 개의 선택지밖에 없기에 고르는 거다. 그리고 그는 운이 좋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전력으로 서포터 하여 동반성장의 길을 열 테니 말이다.
“지금 레이컴의 현재 가치 평가는 얼마나 됩니까?”
“상장사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가치 평가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장 가능성으로 이야기하면···”
“아니오.”
그의 말을 딱 잘랐다.
“성장 가능성이 아니라 현재 회사의 가치입니다. 성장 가능성은 그다음에 할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왕년에 나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뛰어나다. 크게 성공해서가 아니다. 당시보다 훨씬 열심히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의 장이라는 많은 이들을 책임지는 자리에 오르며 나는 사금을 캐듯이 꿈속 기억을 훑고 당장 할 수 있는 공부를 틈틈이 해왔다.
그중에는 투자에 대한 부분도 있었다.
‘일단 성장가능성을 보고 현재 가치보다 몇 배수로 투자를 할 것이냐를 결정한다고 했지.’
지그시 보고 있으니 그가 대답했다.
“현재 가치는 3억 원입니다.”
“당장 상용화할 수 있는 기술은 전부 준비되었다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본래 이런 투자는 자신들이 얼마나 투자받을 가치가 있느냐를 두고서 회사가 가진 기술을 증명하고 그 후에 투자를 받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에는 그 과정이 빠져 있었다.
‘너님들의 성공 가능성은 당사자보다도 내가 더 확신하거든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회사의 성장 가능성을 20배수로 보도록 하지요.”
“20배수!”
양도준 사장의 얼굴에 당장 화색이 돌았다.
1~5 배수의 투자라면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했을 거다. 그리고 7~10배수면 아쉽지만 감지덕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테지. 그런데 내가 제시한 금액은 무려 20배수다.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도 경영인 타입은 아니야.’
반가운 일이기는 해도 경영인은 이를 감출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면 패를 쥔 상대가 더 크게 흔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개발자가 천직 같다.
“그··· 그럼···?”
“20배수로 잡으면 레이컴의 가치는 총 60억입니다. 여기서 51%면 30억 6천만 원이네요.”
얼마 전까지의 영화 투자와는 다르다. 그때는 쓸 수 없는 금액이지만 지금은 윤태식이라는 개인이 아닌 게이머스 포럼이라는 법인으로 투자를 하는 상황이다. 투자 가능한 금액이 전과는 당연히 비교조차 안 된다.
“30억 6천만 원으로 지분 51%를 받고 추가로 20억을 연구 개발에 투자하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추가 연구비 지원까지 해준다고 하니 양도준 사장은 당장 일어나 자리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고마움을 표현한다. 그런 그에게 나는 처음과 같은 어조로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지금 개발한 MP3 플레이어는 플래시 메모리를 사용한 MP3죠?”
“네.”
이 시기 한국의 MP3는 전부 플래시 메모리를 이용한 제품이다. 크기는 작지만. 용량에 비교해서 터무니없는 가격대였고 실제로 고작 128Mb의 MP3 플레이어의 가격이 23만 원 가량. 가장 용량이 큰 512Mb는 무려 50만 원을 호가한다.
‘당시 32곡을 넣을 수 있다고 자랑스레 홍보하는 걸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네.’
끔찍한 그 꼴을 또 볼 수는 없다.
“대용량으로 갑시다.”
“네? 그럼 가격이···”
“플래시 메모리가 아니라. 하드를 장착하면 됩니다.”
“하드를요? 그러면 너무 크고 무거운 데다가 충격에도 약해집니다.”
“아닙니다. 워크맨을 생각해 보십시오. 충분히 컸고 충격에 약했습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보기 좋게 성공했습니다.”
< MP3 플레이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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