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156화 (156/577)

< 리얼 팜 >

***

[플레지 운영진의 한숨]

“이번에는 절대 못 잡을 거라며!”

엠씨 소프트의 회의실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가득 메웠다. 그 안에는 격정적인 어조만큼이나 감출 수 없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운영진과 개발자들. 그들은 유저들의 야유를 감수하면서도 드래곤의 새로운 변화를 꿰었음에도 업데이트 삼 일만에 사냥을 당해버리는 황당한 사건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문제는 임원 회의에서 탈탈 털리고 나온 고위 간부의 입에서 결코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느 놈이야!? 구운몽이 아니라 구운몽의 할아비가 와도 못 잡을 거라고 큰소리치던 놈 누구냐고!”

“죄송합니다.”

“입으로 할 줄 아는 말이 죄송합니다. 밖에 없어!?”

구운몽.

플레지의 개발자와 운영진 모두의 멘탈을 붕괴에 빠뜨리는 이름이다. 그렇다고 미워할 수만도 없었다. 플레지가 이 정도로 인기있는 게임이 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견인한 유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주 뒤통수로 인생을 살지그래? 그만 좀 죄송하고 제대로 만들란 말이야!”

“하지만 이렇게 해도 잡힌다는 건 공격력이랑 체력을 올리는 방향으로밖에 다른 방법이···”

“지금 나랑 장난쳐? 공격력이랑 체력?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그따위 발상밖에 못 해!?”

답답한 나머지 그가 넥타이와 셔츠의 윗단추도 풀었다.

“그런 거 말고 창의적으로! 창의적으로 하란 말이야! 창의력이 없으면 저기 뉴 온라인에서 나온 새로운 보스를 보고 배우기라도 하던가! 그··· 뭐냐. 뉴 온라인에서 이번 업데이트로 새로 나온 보스! 그거 이름 뭐야!?”

최근 제대로 퇴근도 못하고 새로운 개발에 몰두하고 있던 개발자들이 타 게임사의 몬스터 이름까지 일일이 확인할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문제는 이러한 사정을 이해해줄 인격적인 상사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었다.

“이것들 봐라? 지금 경쟁사에서 그 업데이트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데 해당 몬스터의 이름도 몰라?”

개발자들의 얼굴이 일제히 운영진과 기획자에게로 향했다. ‘우리야 퇴근도 못 하고 회사에만 있어서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 제발 너희가 이름을 좀 말해봐!’라는 얼굴이었다.

켄헬 서버의 운영자인 박태양이 나섰다.

“아이스퀸입니다.”

“그래. 우리의 문제적 인재 박태양이. 서버 모니터링은 똑바로 못해도 그런 건 잘 알고 있구만?”

빈정거리는 그의 말에 박태양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고위 간부는 ‘네 수준이 그렇지.’라는 같잖다는 투의 시선을 보이고는 말했다.

“아이크퀸. 그거 사냥하는 거 본 적 있는 놈 있어? 어떤 놈인지 아는 놈 있냐고?”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침묵했다. 그 모습에 짜증을 곱씹으며 고위 간부가 저들을 나무랐다. 들끓는 감정만큼 말을 끊을 때마다 신경질이 담겨 있었다.

“아이스 퀸이라는 이름답게! 얼음으로 강력한 공격도 하고! 냉기로 얼어붙게도 만들고! 또 그뿐이야!? 느리게도 만들면서! 유저들이 스스로 공략법을 찾아가는 재미를 만들고! 있단 말이다. 사냥하기? 당연히 어렵지! 그런데 공략법만 잘 알면 누구나 잡을 수 있어!”

‘···저 자식이 뭐라는 거야?’

박태양을 필두로 한 그들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말의 앞과 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는 ‘아무도 잡을 수 없는 용을 만들라’면서 씩씩댔는데 이번에는 ‘누구나 잡을 수 있는 몬스터라고. 끝내주지?’라는 말을 한다.

개발진도 운영진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한심하기는. 내 말에 그런 표정을 짓고 앉았으니까 안사락스고 파푸니르고 그따위로 밖에 못 만드는 거지. 봐봐. 아이스 퀸은 애초에 모두가 잡을 수 있는 몬스터로 상정하고 만든 보스야. 아무도 못 잡게 만든다면서 올린 우리의 드래곤이랑 다르단 말이지!”

고위 간부가 혀를 찼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나? 디자인을 말하는 거야. 게네는 새로운 재미를 위해 등장시킨 몬스터이고 착실하게 디자인에 들어맞는다. 그런데! 왜 우리가 만든 드래곤은 이따위냐고!”

사실 지금 그가 하는 말은 고위 간부가 임원회의 중에 질타를 받으며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는 들었던 레퍼토리를 고스란히 읊으며 직원들을 나무라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지적은 있되 마땅한 해결책은 주지 못하는 반쪽짜리 지시가 되었다.

‘저게 말이 되는 소리야?’

‘레벨과 공략법을 알면 사냥하기 쉬운 녀석쯤은 우리도 얼마든지 보낼 수 있어! 문제는 그게 아니라고!’

‘아무도 잡을 수 없지만 한 방에 유저가 죽으면 안 되는 몬스터. 바로 그게 어렵다는 거다!’

기획부터가 잘못된 게 아니냐고 되묻고 싶을 따름이다.

하지만 직장 생활이라는 것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방식으로 전개될 리가 없다. 분위기와 상황에 따라서 납작 엎드리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지금처럼 간부가 분기탱천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일주일. 내가 임원 회의에서 어떻게든 받아낸 시간이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어떻게든 그놈의 구운몽이 나서서도 잡을 수 없는 드래곤을 만들어! 영원히 못 잡게 하라는 게 아니야. 최소한 한 달. 한 달은 공략을 못 한 정도의 녀석을 가져와야 해. 알겠지?”

“네······.”

“대답에 맥아리가 없군. 젠장!”

쾅!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는 간부가 거세게 회의실 문을 닫았다. 문이 부서지지는 않았을까 싶은 소리가 들렸고 간부가 나간 뒤에야 안에는 조촐하게나마 평화가 찾아왔다.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숨을 내쉬며 박태양에게 물었다.

“도대체 안사락스를 어떻게 잡았답니까?”

“그냥 인원을 많이 끌고 가서 잡은 거 같더라고요.”

“그게··· 그냥 많이 끌고 가면 잡아져요?”

“그 테스터 팀원들은 뭐래요?”

“그 사람들 각 서버에서 쟁쟁한 사람들 아니에요?”

플레지는 근래 구운몽 때문에 새로운 직원들을 모집했다. 이른바 테스트 팀원으로서 각각 ‘동네킹 이벤트’ 때 상위권을 점령한 유저들이 그 대상이었다.

서버는 다르지만, 어느 길드에나 들어가면 능히 간부에 오를 실력자들!

이들에게 구운몽의 레이드 팀과 동일한 장비와 스펙을 갖추게 하고 새로이 디자인한 보스 몬스터를 직접 사냥하도록 했다. 이후 안사락스는 공략 불가라는 바람직한 결과를 얻고 자신 있게 공개하였다.

‘그리고 박살 났지.’

이들은 실패했지만, 저쪽은 성공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이런 제반 사항을 모를 리 없기에 더욱 기막혔다.

“대체 그 구운몽이라는 유저는 뭐하는 사람이랍니까?”

“그러게요. 저도 알고 싶습니다.”

박태양으로서도 제일 궁금한 부분이다.

대관절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기에 업데이트를 꿰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며 아무리 머리를 감싸 쥐고 업그레이드해도 보스 몬스터를 순식간에 파헤쳐버린단 말인가?!

“어휴.”

동시다발적으로 한숨이 터진다. 이제 현실적인 문제가 그들을 괴롭힌 것이다.

“한 방에 유저가 죽어면 안 돼. 잡혀도 안 돼.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냥··· 한 달간 죽어라 때려도 안 죽을 체력을 넣어버릴까요? 어차피 한 달간 공략이 안 되는 녀석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했다간 또 이런저런 말이 나올 겁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요.”

“그게 뭐냐는 게 가장 큰 문제지만요.”

“아이고. 내가 돌아버리겠네!”

그렇게 엠씨 소프트 내의 회의실에서는 한숨이 끊일 줄을 모르며 매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76. 리얼 팜

【리얼팜, 게임에서 농산물을 키우시면 진짜 농산물을 드립니다?】

‘게임에서 지은 농산물이 진짜 배달된다!’

농담 같은 이야기가 현실이 됐다. 게이머스 포럼과 농업전문가이자 전국대학교 생명자원대학 임진석 교수가 함께 만든 농장경영게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다.

농장을 경영하는 이 게임은 스토리에 따라 작물을 기르고 일간과 주간, 월간 퀘스트를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쿠폰을 모아 채소나 과일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쿠폰을 많이 모으면 한우까지 포함된 ‘한우 세트’도 받을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은 절대로 녹록지 않다. 기초 식물에 속하는 상추는 기르는 시간이 고작 3분밖에 되지 않을 만큼 간단하지만, 직접 해보니 쿠폰 하나를 받기 위해서 진행하는 퀘스트를 위해서는 돈이 되는 작물을 키우고 돈을 벌어야만 한다.

게다가 게임 내에서 변화하는 계절마다 심을 수 있는 작물도 달라지고 작물을 심은 후에도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물의 양과 밭의 양분을 신경 쓰며 비료와 물을 공급해야 한다.

이렇게 열심히 기른 작물을 판매할 때가 되면 시장에 풀린 매물의 수량에 따라 가격이 오르락내리락한다.

가령 여러 유저가 한꺼번에 상추를 많이 생산하면 게임 내 거래가격이 떨어진다. 비싼 작물을 엄청나게 키워봤자 다른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시장에 내놓는다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겪는 거의 모든 요소를 철저하게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게임과 농업의 어울림. 상생하는 ‘리얼팜 오픈 베타 테스트’ 실시!】

리얼팜을 실제로 기획한 사람은 게이머스 포럼의 윤태식 대표다.

윤태식 대표는 “어떻게 이런 게임을 생각했냐?”라는 질문에 “이 게임은 실제로 농가에 많은 빚을 지는 게임이 아니겠나? 그래서 농가에 실제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하면서 실물 상품을 직접 배송하는 시스템을 결정했다.”라는 대답을 했다.

전국대학교의 임진석 교수는 “사실적인 농업 환경을 담아 청소년은 물론이고 귀농을 준비하는 일반인에게 교육적 효과도 클 것”이라는 말을 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간접적이지만 가장 구체적인 방식으로 농사를 경험하고 농산물을 얻으며 현실의 농가들은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을 통해 농산물을 판매하는 경로를 얻는다.

그래서 리얼팜은 농장경영게임이라기보다 농업에 대한 산업적인 고민을 게임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해결하는 한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게임은 농업을 살려야 한다는 당위를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리얼팜의 유저들은 게임을 즐기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도시와 농촌이 서로 협력하여 각자의 이익을 가져가는 이 구조에 참여하게 된다. 게임과 도시와 농촌이 이렇게 결합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 고시원에서 맨날 라면만 먹는 인생인데! 이거로 고시생 식량난 해결인가?

└ 식량난 해결이고 나발이고 고시생이 공부는 안 하고 이걸 하겠다는 게 제정신이냐?

- 다른 건 몰라도 게임 유저들이 판매한 특정 작물의 수량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시장 시스템이 독특하긴 하다.

- 이거 진짜로 배달해 줌?

- 솔직히 게이머스 포럼 정도면 이제 어중이떠중이 게임사라고 할 수도 없잖아? 그런 회사에서 설마 그런 거로 구라를 치겠냐규?

└ 어중이떠중이라니? 명실상부 국내 최고 게임사를 어떻게 어중이떠중이와 비교를 하냐?

└ 국내 최고니 어쩌니 해봤자 해외의 게임사와 비교하면 어중이떠중이 맞지 뭘 그래?

2001년 10월.

비록 오랜 준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완벽하게 내 기획으로 만들어진 첫 번째 게임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까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도 차마 이런 게임을 못 까겠나 봐.’

새로운 게임을 출시할 때마다 긍정적인 기사는 적고 부정적인 기사가 늘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안티성 기사가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댓글 쪽은 아직 꼬질꼬질하지만.’

아무튼, 전 세계의 금융계가 잔뜩 움츠린 시기였음에도 게이머스 포럼은 계속해서 상승곡선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렇게 기분 좋은 소식을 음미하며 나는 집으로 향했다.

근래에 사업이다 안사락스 레이드다 해서 가족과 저녁을 함께 하지 못한 편이다. 그런 만큼 오늘은 어머니가 해주신 저녁을 먹겠다는 굳은 일념으로 면도날같이 퇴근했다.

주자를 마치고 막 차에서 나왔을 즈음,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놈의 동네는 오랜만에 왔는데도 그대로네!”

이른 저녁인데도 술을 건하게 마신 모양이다. 데시벨이 꽤 높아서 쩌렁쩌렁할 정도였다. 이를 듣자 새삼 주위를 보게 된다. 미래 정보를 알기 때문인지 단순히 목 좋은 곳을 넘어서서 훗날의 가치와 변동성까지 두루 떠올랐다.

‘우리 동네는 투자처로 메리트가 없기는 해.’

강남은 IMF로 투자할 자금이 메마르건, 고층 건물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건 아랑곳하지 않고 급속도로 변화하는 중이었다. 반면에 발전의 여지가 넘쳐나는 이곳은 게이머스 포럼을 처음 시작했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기껏해야 새로운 건물이 간혹 들어서는 정도에 불과하다. 장담하건대 향후 20년간은 특별한 일 없이 그냥저냥인 장소였다.

‘돈이라는 게 물이랑도 참 비슷하단 말이야.’

돈과 물.

양쪽 모두 흐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또한,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갈라지고 가뭄으로 농사가 망하는 시기에도 바다에는 언제나 물이 가득한 것도 흡사했다. 저 어마어마한 넓이에 넘쳐나는 거대한 물은 농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들이 사용하지 못하는 물이었다.

마찬가지로 강남이라는 일부 장소에 집중된 엄청난 부는 과거의 나와 같은 일반 국민에게는 미디어 속의 1조와도 같았다. 굉장한 돈이 어딘가에 쌓여 있다고는 하는데 현실과는 괴리감이 큰 것이다.

‘돈은 넘치는데 그 귀한 돈님은 이런 동네까지는 올 생각을 안 한단 말이야. 벌이가 시원찮은 땅이라서 그렇겠지?’

누군가를 탓하려는 생각이 아니다. 돈을 가진 입장에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곳에 투자하는 일은 지극히 마땅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될성부른 나무와 되는 것이 확실한 종목을 골라서 담고 있지 않던가. 이를 바탕으로 성공을 이루었고 말이다.

즉, 돈에 흐름이 있다면 그 흐름을 따라서 살면 될 일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잘 해왔듯이 앞으로도 쭉 나아가면 될 것이다.

< 리얼 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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