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152화 (152/577)

< 긴급 공지 >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나는 관대하다. 이건 무슨 영화의 대사를 따라 한 것도 아니고 지나친 자화자찬이거나 종교적인 소신이 있는 게 아니었다. 돈이 많고 여유가 넘치기에 게임을 취미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지간한 게임 내의 페널티에도 피식 웃고 넘길 아량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나조차도 기막힐 정도이니 다른 유저들은 오죽하겠는가.

<엠씨 ㅋㅋㅋㅋ 완전 급쫑???>

<이 신발 새끼들이 게이머스 포럼 글 보고 파푸니르 잡힌 거 알게 된 듯.>

<로그 확인해 보고 알았겠지 싶음.>

<부랴부랴 파푸니르는 내부 수리 중~ 오예 긴급점검~>

<아무 말도 안 하면서 아닌 척 하려나 본데, 눈치 못 채면 그게 이상한 거지.>

당연히 성토의 글들이 올라왔다.

게이머스 포럼은 물론이고, 플레지의 공식 홈페이지까지 많은 사람이 유저가 보스를 공략했다고 보스를 수정하는 게 말이 되냐는 항의 글을 올라왔다.

일정 시간이 지난 뒤부터 한 명만이 독식하는 보스라면 없는 게 낫다는 반박의 글이 나타나며 과격한 키보드 배틀이 이어졌다.

‘나는 손도 안 댔는데, 네티즌들이 알아서 판을 다 깔아주네.’

소란이 이쯤 일어나면 게임사 입장에서는 눈 딱 감고 넘기기는 어렵다. 모여서 대된 대중의 목소리가 운영진의 철 가면 너머로 전달됐는지 알림 내용이 올라왔다. 그런데 이 내용이 정말 뻔뻔했다.

『[긴급 공지]

안녕하세요. 플레지 운영팀입니다.

수호대 여러분들의 질문대로 파푸니르는 구운몽 레이드 팀이 사냥에 성공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플레지에서 지향하는 드래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젠가는 사냥이 가능하겠지만 너무나도 강력한 존재.’

‘도전 자체만으로도 떨리는 존재’

이를 상정하고 디자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더욱 강력하고 두려운 드래곤을 만들고자 긴급 업데이트를 진행합니다. 또한, 앞으로도 정벌을 당한 후에는 이렇게 업데이트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어쭈? 이건 무슨 패기냐? 그런 깊은 뜻이 있었다면 진작 말했어야지.”

대놓고 하는 말이 ‘잡을 테면 잡아 봐라. 우리는 그때마다 계속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말하는 중이었다. 이쯤 되면 코미디가 따로 없을 정도다. 더불어서 한번 해보자는 묘한 오기와 정복 욕구도 생겼다.

‘어차피 내가 한 방에 죽을 정도로 만들지 않는 한 방법은 찾아내면 돼. 그리고 이놈들도 양심상 그렇게 만들지는 못하겠지.”

사상 초유의 게이머와 개발진의 싸움이 벌어지는 순간이다.

뚫리느냐!

뚫어 버리느냐!

창과 방패의 격돌이라 하겠다.

“해보자. 대신 너네도 머리를 잘 써야 할 거야. 극단적으로 나오면 나도 확 200강화로 끝장내는 수가 있어.”

자고로 막장에는 막장으로 응수할 테니 그런 파국은 맞지 않기를 바란다.

이틀.

사라졌던 드래곤이 나타나는 데 걸린 시간이다. 그것도 안사락스만 업데이트했고 파푸니르는 아직 더 수정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인지 ‘대기 중’이라고 했다. 자연스레 개발진의 도전장을 받아 든 내 입장에서는 확인해야만 하는 강력한 사명감이 있었다.

‘어디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해 주지.’

짬 나는 시간마다 나도 어떤 식으로 나올지를 많이 염두에 둔 바다. 우선 수룡이 미래의 레이드 형태의 파푸니르와 매우 유사한 형태로 나타나며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했으니 지룡도 이와 같은 형태로 나타났을 확률이 높았다.

‘안사락스가 어떤 용언들을 사용했더라?’

꿈속 미래에 따르면, 실제 레이드에서의 난이도는 파푸니르에 비해서 안사락스가 훨씬 낮았다. 그럼에도 낙관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세 개가 있다.

당시와는 다르게 지금의 개발진들은 독이 바짝 올랐으리라는 것.

기존의 파푸니르가 사냥당한 만큼 적어도 ‘그 이상’의 난이도로 구성했으리라는 것.

‘카운터 스펠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

사실 마지막 이유가 가장 큰 어려움의 요인이다.

4클래스 마법인 ‘카운터 스펠’은 비교적 낮은 레벨의 마법이다. 효과는 ‘16초 이내 한 번에 한해서 스킬을 무효화시킨다’인데 이 스킬이 있고 없고에 따라 레이드의 난이도는 확 달라진다.

범위 용언 중에는 카운터 스펠에 막히는 것도 있었기에 보스 몬스터의 패턴을 일부 씹어먹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기 상 이 마법이 업데이트되기 전이었다.

유저의 기술은 거북이 걸음인데 보스 몬스터의 스펙은 날아가듯이 쑥쑥 성장한 상황이라 하겠다.

‘오직 맞으면서 버틸 수밖에 없어. 레이드 형 안사락스를 상대라고 보면··· 매지션이나 엘프들은 한 방에 쓰러질지도 모르겠군.’

고전이 예상되지만 그래도 해볼 만한 게임이다.

나는 기존처럼 늦은 저녁에 진수성찬의 간석동 사무실에서 자리를 잡았다.

오늘을 벼르고 별렀던 드래곤 레이드 팀 역시 즉시 합류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용의 협곡 깊은 곳에 있는 안사락스의 안식처였다.

- 구운몽 : 파푸니르처럼 여러 가지 용언을 사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모두 긴장 바짝 하시고, 당장 한 번에 성공한다는 생각은 하지 말기를 권유합니다. 이번 사냥은 탐색이 목적입니다. 위험하면 바로 귀환하는 것. 이게 필수입니다. 다들 아시겠죠?

- 지옥검 : 존명!

- 분노의 활질 : 존명!

- 좌호법 : 존명!

- 황성찬호좁 : 존명!

무수한 답변을 이제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대답했다.

- 구운몽 : 좋습니다. 입장합니다.

안사락스는 나 홀로 진입한 뒤 자리를 잡고 그 이후에 팀원들이 들어오는 것이 순서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선 안사락스의 안식처.

‘달라졌다.’

이번 업데이트가 단순히 안사락스만 업데이트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레어에 들어오니까 그게 아니었다. 모니터를 같이 보는 진수와 성찬이 역시 바로 알아챘다.

“넓어졌네?”

“지형을 이용해서 안사락스의 광역이나 용언을 피할 공간을 줄이려는 거?”

“개수작 맞음. 얘네 패턴 추가하고 마는 줄 알았더니 꼼꼼하게 손 봤어.”

어떻게든 우리 팀을 공략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세상 이치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는 법.

저들이 가져간 지리적인 이점은 그만큼 다른 틈이기도 하다.

“그냥 같이 들어가도 괜찮겠는데?”

“운동장이라서 몰살당할 일도 없어 보임.”

통로부터 공간이 모두 여유가 생긴 만큼 이제는 딱히 자리를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중요한 위치에 연연할 것 없이 각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곳으로 자리를 잡으면 됐다. 이런 포지션의 변화만으로 맵 재구성의 페널티는 가볍게 상쇄할 수 있다.

“다들 들어오라고 해.”

“존명~!”

잠시 속속 팀원들이 합류했고 13인의 레이드 팀이 안사락스를 향했다. 그리고 떠들썩한 화제의 주인공인 안사락스가 당당한 위용을 화면에 드러냈다.

“나 붙으면 바로 엘프들 가스트 붙이라고 해.”

“그런 건 이제 말 안 해도 알아서 다 하니까 걱정 마.”

“오케이.”

레어에 내려온 순간부터 나는 채팅을 하지 않는다. 베테랑 파트너인 진수와 성찬이를 믿고 2단 가속 상태로 돌진했다.

- 쿠아아!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놈의 입에서 초록색의 가스가 나왔다. 삽시간에 온 화면이 체력이 쭉쭉 내려갔다. 무려 한 틱에 200이라는 엄청난 데미지였다.

“오우! 야. 이거 독 상당하다.”

“난 3초면 사망이겠는데?”

나이트는 4틱.

매지션과 엘프는 3틱이면 사망이다. 그러나 익숙한 패턴인 만큼 모두가 능숙히 엔트의 가지를 사용하여 해독했다.

- 황성찬허좁 : 엘프들 가스트 붙이세요!

적절한 타이밍에 내린 진수의 오더. 이에 따라서 엘프들의 화살세례가 이어졌고 가스트들은 느릿느릿하게 안사락스에게로 이동했다.

“늘상 보는 거지만, 저놈들은 헤이스트를 걸어줘도 어쩜 저렇게 느릴까?”

“늘상 하는 말이지만, 저리 생겨먹은 것들이니 별수 없겠지.”

가장 긴장감이 넘치는 타이밍이 바로 안사락스에게 가스트를 붙이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이 과정 중에서도 여러분 가스트가 죽어버리고 부활시키는 반복 과정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국방부 시계가 거꾸로 놓아도 흘러가듯이 가스트 역시도 안사락스에게 붙었다.

“좋아! 이건 꾸준하게 걸려주는 구만!”

쇳소리를 내려 때렸고 침묵의 독을 걸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수가 막히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 황성찬허좁 : 가스트 독 걸리네요! 근접하도록 할게요!

바로 지령을 내리는 진수에게 내가 말했다.

“방심하지 마. 파푸니르처럼 중간에 풀어버릴지도 몰라.”

매지션은 ‘힐’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힐러가 전멸한다면 레이드를 포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보스 몬스터의 패턴조차도 보지 못하는 상황에 봉착한다.

“오케이. 그러면 혹시 모르니까 매지션은 붙이지 않을게.”

각자의 위치를 정돈하고 안사락스를 공격했다. 지금까지는 딱히 달라진 점이 없다.

그러나 약 30초의 시간이 흘러 페이즈 2에 돌입했을 때부터 진가가 나타났다.

우선은 꼬리치기 공격 추가!

- 황성찬허좁 : 페이즈 2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기존에는 가스트의 독 때문에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 마냥 앞발 공격만 했다.

업데이트 이후인 지금은 여전히 침묵에 걸려서 용언을 사용하지 못하는 채지만, 꼬리치기라는 패턴이 추가됐다.

앞발 공격은 어그로 대상자인 구운몽만을 노리는 1인 공격이다.

꼬리치기는 정반대로 어그로 대상자만을 제외하고 주변의 모든 적들을 공격하는 범위기술이었다. 위력은 엘프들을 일격에 빈사상태로 만들 정도였다.

매지션들을 혹시 몰라서 대기하게 둔 것이 정말 잘한 선택인 셈이다.

문제는 매지션이 붙어서 안사락스의 마나를 뺏지 못하기 때문에 마나 수급이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엘프들을 회복시켜야 하기에 ‘힐 올’을 연속해서 사용했고 그만큼 마나 소모량이 늘어났다.

“태식아. 얘가 꼬리를 너무 자주 휘두른다!”

“엠 어떻게 함?”

어쩔 수 없다.

“돌아가면서 6층에서 회복하고 다시 내려와.”

“오키!”

6층에서 푹 쉬고 오라는 말이 아니다. 빨리 가서 일반 몬스터에게 마나를 빼앗은 뒤 다시 내려와서 합류하라는 의미였다. 진수가 바로 지령을 전달했고 가장 먼저 모든 마나를 소모한 좌호법이 6층으로 올라갔다.

바로 그때였다.

- 콰드드드···

안사락스가 땅속으로 숨어버렸다.

“어? 뭐야 이거?”

- 지옥검 : 설마 이걸로 끝이야?

- 범 : 예전에 안사락스를 잡을 때보다도 빠른데요?

- 지옥활 : 운영진이 적당히 타협하자는 거려나?

지금까지 안사락스는 죽기 전의 상태일 때 땅으로 숨어서 체력을 회복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도 같은 상황이라고 자연스럽게 유추했다.

하지만 낙관하는 팀원들과 다르게 나는 레이드 형의 패턴을 안다.

“진수야. 바로 격수들 버프 돌려!”

“응?”

“타이밍이 너무 빨라. 얘 금방 나올 거 같으니까 미리 버프 다시 돌려놔.”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 황성찬허좁 : 버프 다시 돌릴게요.

굳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엘프들에게 ‘직접 버프를 돌리라’는 의미였다. 이는 곧 사냥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니 팀원들에게 긴 설명 없이 바로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이윽고 모니터속 화면이 흔들렸다.

- 쿠릉! 쿠르릉!

강력한 진동과 함께 안사락스의 거대한 동체가 다시 나타난다.

- 안사락스 : 더럽고 미천한 놈들!

- 안사락스 : 감히 어디서 고개를 빳빳이 드느냐! 고개를 조아리거라!

화면 전체에 초록색의 가스가 퍼졌다.

『혀가 굳어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침묵의 독?’

우리가 가스트로 독을 걸들이 안사락스도 맹독뿐만 아니라 침묵의 독도 사용했다.

‘내 간지 나는 데스 나이트가.’

그뿐만 아니라 레이드 팀 전원이 변신이 풀렸고 모든 버프 마법을 상실하고 말았다. 광역 캔슬레이션으로 모든 마법을 해제해버린 것이다.

“귀찮게 만드네. 해독하고 매지션들 다시 버프 돌려.”

“가속 포션도 빨자!”

전투 중에 가속 물약을 다시 먹고 변신까지 하는 일은 제법 위험천만했지만 그래도 모두 해냈다. 변신 후, 녀석을 공격해나간다.

이때 보스 몬스터가 재차 용언을 사용했다.

- 안사락스 : 어리석고 나약한 것들아. 신성한 내 안식처에 침범한 너희에게 공포가 무엇인지 알려주마!

- 쿠아아!

초록색의 가스가 전방 30° 범위에 작렬한다.

『안사락스의 독에 중독되었습니다. 몸이 빠르게 굳습니다.』

이번에는 마비 독!

“젠장! 리무브! 리무브! 힐! 힐!”

내 입에서 오래간만에 다급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마비 독에 걸리면 물약을 사용할 수조차 없다. 우리 레이드 팀의 핵심이 나이고 최선두에 선 벽 역시도 내 역할이다. 내가 무너지면 바로 실패고 내 주변에 있던 나이트들은 그대로 전멸당한다.

“걸었어!”

『마비에서 풀려나는 것을 느낍니다. 다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보통 5초~10초 정도의 여유가 있는 것과 달리 이건 1초가 한계다. 어쩌면 그보다 짧은 시간만이 주어진 그 순간을 성찬이가 잘 케어해 주었다.

“오케이!”

간발에 차로 살아남았다. 안사락스가 마비 독을 사용함과 동시에 점프해서 바닥을 내리찍은 것! 새로 나타나는 이 공격은 주변 전 방위를 타격하는 광역 스킬이었다.

‘이 놈은 전체적으로 독을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하는구나.’

치명적인 맹독. 빨리 발견하고 해독하지 못하면 사망한다.

침묵의 독. 매지션들이 힐로 지원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마비의 독. 여기에 연계기를 사용하여 전열의 나이트들을 일거에 쓸어버린다.

레이드 형 안사락스에도 비슷한 패턴이 있다. 다만 그것은 독이 아니라 스턴이었는데 아마도 아직 해당 시스템이 생기기 전이라 변형 된 개념인 듯했다.

‘이만하면 그 전멸기도 나올만 해.’

이 업그레이드 버전이면 스턴 후의 발작 패턴도 있을 법하다.

개발진을 우습게 봤다가는 모양 빠지게 실패하기 딱 좋다.

‘이거 사냥 말고 탐색이라고 말해놓고는 내가 더 빠져들고 있네.’

오랜만이다. 제대로 긴장감이 내 척추를 타고 흐르는 느낌이다.

< 긴급 공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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