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스텝, 투 스텝 >
깍두기인 심영탁을 데리고 김형빈을 만난 것은 일요일 이른 오후였다.
명동에 있는 한 호텔 라운지 카페로 자리를 잡았고 내가 ‘영화 투자 대행자로의 채용’을 제안하자 그는 적잖게 당황했다.
“왜 저죠? 저는 경력도 고작 반년 정도밖에 안 되는 신출내기인데요.”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을 두고 갓 입문한 초보를 영입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이는 일반적인 여건에서라면 당연한 의문이었다.
통상적으로 투자사에서 하는 방법은 영화 투자사의 투자심사단에서 상품성 있는 영화를 심사하고, 최종적으로 승인이 떨어지면 투자가 진행되는 방식이다.
꿈속 미래 정보가 있는 나는 다르다. 내가 시놉시스나 시나리오. 영화 제목을 확인하고 골라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이런 속내를 밝힐 수는 없었다.
‘전문가랍시고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타입이 아니니까. 이의 제기 따위 하지 말고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히 하는 손 역할에는 네가 딱 맞거든··· 이라고 말하면 좋아할 리가 없잖아.’
적당히 포장해서 말했다.
“제가 원하는 유형은 앞으로 제작될 영화와 관련 정보를 취합해 줄 수 있는 사람. 그중에서 제가 컨텍한 작품에 투자를 대행해줄 사람입니다.”
“그건 투자 심사라거나 뭐··· 그런 건 무조건 사장님이 직접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 같기도 한데, 맞습니까?”
‘하하. 이 자식이. 청춘이라 그런지 요령 없게 말을 팍팍 질러대네. 애써 포장한 보람도 없게.’
맞는 이야기였고 김형빈은 단박에 제대로 이해한 셈이다. 내가 원하는 그의 포지션은 딱 잡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괜찮은 제안이라고 나름은 자부할 수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뭐 틀린 설명은 아니긴 하지만, 영화에 관련된 정보를 취합하는 것은 스스로가 해주셔야 하는 일이니까 완전히 시키는 일만 하는 건 아닐 겁니다.”
슬쩍 운을 떼자 녀석이 대답했다.
“무슨 말씀인지는 이해했습니다. 다만 저도 무턱대고 움직일 수는 없는 처지라서요.”
“그렇지요.”
“그냥 다 오픈하자면, 이 분야는 결국 경력으로 먹고사는 분야입니다. 박봉으로도 견디는 이유는 경력이 쌓이다 보면 결국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장님과 일을 하면 돈은 많이 받아도 경력이 단절됩니다.”
‘어쭈? 그러니까 위험수당이 필요하다 이거지? 이 자식, 자기 이익이랑 관련되면 꽤 노련하게 행동하네. 영탁이한테 들은 거랑 꽤 다른데··· 이런 녀석이 업계 정보를 내게 퍼주다시피 했다?’
회사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예상하건대 꿈과 열정을 갖고 들어왔다가 적은 급료에 실망하고 착취를 당하며 스스로 단속하려는 것 같았다. 세파에 완벽하게 찌들지는 않았지만 어수룩하게 보이면 곤란하다는 정도는 절절히 느낀 상태라 보면 되겠다.
‘그런데 네 위험수당까지 잔뜩 쳐주기에는 네가 너무 별 볼 일 없거든.’
돈?
어차피 이 투자를 시작하면 연간 수익이 최소 수십억에서 수백억까지 된다. 그 때문에 연봉을 억으로 달라고 해도 주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김형빈이라는 젊은이를 그렇게까지 주면서 쓸 이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내가 돈을 사용하는 원칙은 간단하다.
필요한 만큼 쓴다.
‘얘를 얼마로 봐야 할까?’
김형빈에게 어울리는 돈의 무게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때 녀석이 먼저 말했다.
“사장님. 제가 질문 하나만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네. 하세요.”
“앞으로 이 분야에 투자를 몇 년이나 지속하실 수 있을 거로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일 년에 얼마나 투자하실 계획이 있으십니까?”
‘야. 하나만 한다며? 두 갠데?’
게다가 생각보다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이 짜식. 내 생각보다 훨씬 일을 잘할 것 같은데?’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한 이십 년은 지속할 생각입니다. 투자금은 일단 50억으로 생각해두는 게 좋겠군요. 상황에 따라서 변동이 있을 테지만 우선은 그 정도라고 보면 될 겁니다.”
“예? 20년간 50억 이상이요!?”
“우와 형님! 50억!”
형빈은 물론이고 옆에서 잠자코 있던 영탁까지 화들짝 놀랐다. 눈만 끔벅거리는 모습이었다. 그와 동시에 사뭇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애쓰던 형빈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투··· 투자한 영화가 실패한다고 해도 매년 그 정도를 투자하실 계획이시라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일은 없어요.”
20년이라는 시간을 꾸준하게 하겠다는 말은 개인적인 경력이 끊어질 것을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물론, 나야 20년간은 미래 정보를 토대로 전부 대박을 치리라고 자신해서 하는 말이지만 말이다.
다?, 그 이후는 아는 바가 없으니 발을 뺄 요량이었다.
“저기··· 그러면 연봉은 얼마 정도로···?”
손을 티 나지 않게 연신 비비는 그에게 나는 알면서 되물었다.
“지금 얼마 정도를 받고 계시지요? 얼마나 올려드리면 되겠습니까?”
“어어··· 그, 그게··· 그러니까··· 제가 지금 1,400만 원 정도를 받고 있습니다. 그··· 만약에 이직한다면 1,800만 원을 목표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행이네. 난 또 엄청 돈 욕심이 있는 줄 알았더니 경력 쪽 욕심이 더 컸던 거군.’
결정이다.
“기본 1,800에 추석과 설에 100만 원씩. 총 2천으로 하지요.”
긴장한 김형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장님! 분골쇄신하여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투자 영업 담당자라서 그런 것일까.
선택에는 많은 고민을 했던 모양인데 선택을 마쳤을 때의 행동은 매우 빠른 사람이었다.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김형빈은 즉시 터보 엔터테인먼트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나에게 붙었다.
그는 게이머스 포럼과 상관없이 내 개인 자산을 운용하기 위한 사람이다. 그 때문에 개별적으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했고 도장을 찍은 순간부터 영화 투자에 관련된 업무를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사이에 김형빈과의 대화에서 변화가 생겨났다. 직원이면서 아는 동생의 지인이기에 그냥 편하게 말을 놓기로 한 것이다. 어지간해선 직원들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나로서는 파격적인 행사다.
“그러니까 영화 투자만이 아니라 괜찮은 시나리오가 있으면 판권도 매입하고 싶으시다 이 말씀이신데··· 그렇게 되면 저 혼자서는 일을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유가 뭔데?”
“영화산업은 아직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사실 대표님이 처음으로 투자한 영화가 터보 엔터였던 게 매우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죠. 터보 엔터의 대표님은 영화 투자금이 투명해야 영화 산업이 성장한다고 믿고 계신 분이거든요. 한국 영화 산업에 살아 있는 신화 속 주인공이시죠.”
‘놀고 자빠졌네. 그런 신화 속 주인공이 성냥팔이 소녀의 강림을 만들어?’
기가 막혀서 야박한 평가를 서슴없이 했는데, 형빈의 말을 들으니 가짜로 지어낸 헛소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야기인즉슨 터보 엔터의 사장은 90년대의 모든 영화계 인사들이 ‘그가 어떤 영화에 투자하느냐’에 이목을 집중할 만큼의 인사라고 했다.
한국 영화의 투자를 지금 수준으로 끌어들인 것이 그의 노력이며 일반 투자회사의 직원으로서 지금의 대형회사를 차릴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 반면에 다른 영화사는 투명성을 따지기는커녕 흙탕물 수준이다.
“그 때문에 흥행한 영화에 투자하고도 돈을 벌지 못하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법에 대해 전문가가 꼭 있어야 합니다. 사장님께서는 혹시 알고 지내는 변호사라거나··· 그런 사람이 없으십니까?”
보통 일정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게 되면 변호사와 같은 사람을 꼭 주변에 두게 되기 마련이다. 나 같은 경우는 아직 따로 변호사를 주변에 두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사람을 떠올릴 수는 있었다.
‘좌호법.’
절정의 컨트롤을 자랑하는 플레지 매지션 계의 대명사. 실명은 박경호이고 직업은 변호사다. 그것도 그냥 평범한 변호사가 아니라 대헌외고를 졸업하고 SKY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수도대 법대를 나왔다.
사법고시를 합격했으며 이후 연수원을 45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뒤 검사 명찰까지 단 촉망받던 존재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정모 대부분을 빠지지 않는 진수 녀석에게 들은 것이고 저쪽 계통은 관심이 없어서 45등이 어느 정도의 등수인지 나는 잘 모른다.
‘반에서 그 등수를 했다고 하면 어머니께 등짝 스매싱을 맞을 텐데. 아무튼, 검사니까 우수한 성적이겠지.’
그랬던 그가 모종의 이유로 검사를 때려치우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
‘경호 형은 무조건 믿을 수 있지.’
좋은사람들 길드에서 좌호법하면 충성, 충성하면 좌호법이 아니던가. 현실에서까지 그리 행동하려고 해서 나를 무척 당황하게 했고 말이다. 덕분에 그는 플레지에서 만난 사람 중 누구보다도 내가 신임하는 존재였다.
‘깐깐한 형이니 추천도 엄선해서 해주겠지.’
경호 형이 직접 해주는 것을 바라고 있기는 하지만 변호사로 자리를 잘 잡은 사람이다. 한창 일이 잘 풀리는데 그 업무를 접고 일반 회사의 변호사로 올 이유가 없었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할 수 있으니 새로운 사람을 추천받는 쪽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형빈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바로 전화했다.
- 여보세요?
“형. 저 윤태식입니다.”
- 아! 총군주님!
워낙 큰 목소리로 말하는 통에 형빈의 귀에까지 호칭이 들렸다. 그의 표정이 문자 그대로 ‘이상하게’ 변했다. 괜히 무안해진 나는 목소리가 작아졌다.
“아하하. 굳이 전화에서까지 총군주라니요. 그냥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 아닙니다. 총군주 자리에서 내려오실 때까지는 언제까지나 총군주님이십니다.
고집불통.
하지만 그래서 더욱 신뢰가 가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형. 한 가지를 부탁해도 괜찮을까요?”
- 물론입니다. 말씀하시지요.
“제가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숨길 이유도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최근에 내가 하는 투자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그에게 모두 해주었다.
- 그러니까 ‘총군주님의 판단으로 성공할 것 같은 영화와 판권에 투자하고 싶으신데, 마땅히 일을 맡길 사람을 찾는다.’ 이 말이군요. 그런데 저는 왜 제외입니까?
“네?”
-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원하시는 것인지 물어보는 겁니다.
“괜찮으세요? 저야 와주신다면 물론 감사하지만, 이미 변호사 사무실도 운영하고 있고··· 다른 분들은 어떡하시려고요?”
변호사 사무실에는 변호사 말고도 다른 직원들이 여럿 있지 않은가. 엄한 사람들 밥줄이 끊기는 건 아닌지 물었는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 없습니다.
“예?”
- 사정이 있어서 저 혼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담당했던 소송도 최근에 마무리가 됐고요. 그래서 바로 정리해도 딱히 무리 될 게 없어요.
‘이런 경우도 있구나.’
나로서는 적극적으로 환영할 일이었다.
그렇게 일이 잘 풀려서 김형빈 사원 연봉 2천만 원, 박경호 변호사 연봉 6천만 원.
총연봉 8천만 원에 두 명을 고용했고 명목상으로 회사를 하나 차렸다. 이름은 TS 투자 운용인데 사실 말만 거창하지 그냥 ‘윤태식의 개인 자산 운용 회사’가 본질이다.
사무실은 게이머스 포럼의 사옥에서 남는 곳 하나를 임대하는 형식으로 들어갔다. 게이머스 포럼과는 분리된 회사임에도 이렇게 결정한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었다.
‘여기 건물주가 나니까. 본업이랑 가까우니 편하기도 하고.’
그러며 한 사람에게는 꽁꽁 감춰뒀던 내 직업이 드러났다.
“헐! 사장님이 게이머스 포럼의 회장님이셨어요? 어쩐지 억을 시원하게 쏘시더라니!”
“회장까지는 아니고 그냥 대표지.”
호칭이야 아무려면 어때, 하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좌호법이 정색하고 말했다.
“총군주 대표님. 아무래도 그 부분은 변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변화라니요?”
“게이머스 포럼이라는 곳의 규모가 막상 들어와서 보니 상당하더군요. 트레이더스 포럼에 넷젠, 팬더그램까지 여러 회사들이 엮인 구조이고 말입니다.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도 무궁무진하고 계열사를 거느린 이 정도 규모의 회사라면 호칭을 회장으로 올려야 합니다.”
“네?”
‘아니, 자기는 말을 진짜 안 들으면서 이게 뭔 소리야? 형부터 총군주 대표라는 말이나 하지 말라니까 꿋꿋하게 버티면서?’
회장이라는 말은 지금도 이미 팬더그램의 대표님이 칭하는 부분이었다. 그분 역시도 회사에서 지조 있게 혼자서 회장님이라 하는데, 나는 그냥 ‘좌호법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넘겼었다. 그런데 가만히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 조금은 다르게 들렸다.
“대표님도 대표고 계열사의 대표도 대표인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짜 이곳의 대표자입니까?”
‘그야··· 어라? 그러네? 늙어 보여서 싫었는데 단순히 그게 아니었던 거구나.’
< 원 스텝, 투 스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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