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스텝, 투 스텝 >
일이 얽히면 자주 만나고 그러다 보면 친분은 두터워지게 마련이다. 나에게 심영탁이 그러했다. 게임에서 캐릭터로만 보다가 정모 때 얼굴을 봤다. 인사를 나누고 ‘나중에 나름대로 유명해질 배우’라는 사실을 알기는 했지만, 관심은 거기서 끝이었다.
접점이 없고 게임 개발과 연예계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던 것이 영화 투자와 관련되면서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정도가 됐고 ‘도시로’ 촬영현장에 다녀올 때는 괜찮은 운전기사로 유용하게 써먹는 일꾼 겸 동생이 됐다.
‘너무 자주 가는 것도 그렇지만 딱 한 번만 보고 빠지기도 조금··· 그렇거든. 얘가 싫어하면 모르겠는데 싹싹하기도 하고 연락이 없으면 먼저 줄 만큼 열정을 보이니까 나도 쉽게 부르게 되네.’
오늘 역시 그런 의미에서 ‘도시로’ 촬영현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형님. 어디로 모실까요? 바로 회사로 가시겠어요?”
“어. 그러자.”
서울로 향하는 경부고속도로는 시원시원하게 뚫려서 차량은 상쾌하게 달리고 있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서천까지 조기 개통을 한 덕분으로 생각된다.
‘좀 먹여서 보내야겠지?’
아무리 자기 자신을 위해서 따라온 거라고는 해도 아침부터 부려먹었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고로 배고프면 서러운 법 아니겠는가.
“뭐 먹고 싶냐?”
“형님이 사주시게요?”
“그럼 너보고 내라고 하겠냐?”
“오오! 그럼 소고기··· 는 너무 갔죠? 그냥 삼겹살 정도로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런 거지 같은 연예인을 봤나.’
이 녀석은 무슨 대낮부터 삼겹살이 먹고 싶다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소고기가 먹고 싶으면 먹고 싶다 당당히 말을 할 것이지 애매하게 얼버무리는 것은 또 무엇이랴.
‘돈도 못 버는 녀석이니 사주자.’
내심 혀를 차고는 말했다.
“소고기 잘 하는 곳 아는 데 있냐?”
“헉! 형님 정말입니까?”
“내가 언제 헛소리 하는 거 봤어? 아는 곳 있냐고.”
“형님! 진짜 존경합니다!”
차량 내부가 울릴 만큼 말하는 통에 귀만 따가웠다.
“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아는 곳 있으면 그리 가라.”
“네! 제가 진짜 저렴하면서 맛도 끝내주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심영탁의 손이 벌써 이리저리 움직일 조짐을 보였다.
“한우냐?”
“예? 그게 호주산이긴 한데···”
“한우로 가자.”
안 사주면 몰라도 사 줄 때는 제대로 쏘는 게 좋다. 사실 누군들 아등바등 아끼고 싶어 하겠는가. 단지 부족하거나 여유가 없어서 허리끈을 졸라매고 최저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팍팍 부심을 부릴 수 있을 만큼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다는 현실은 매우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심영택의 대답이 미적지근했다.
“어··· 어? 저기··· 형님?”
“왜? 비쌀까 봐? 괜찮아. 형은 그런 거 가지고 뒷말하는 그런 성격 아니야.”
“아뇨. 형님이 존엄하신 걸 의심하는 게 아니라··· 제가 한우 집을 몰라서요.”
외국산만 먹었다고 한다.
“아니, 너는 도대체 플레지에서 돈 벌면 뭐에 쓰냐? 수입이 나름 될 텐데?”
“그게, 저는 현금거래를 잘 안 하거든요. 아주 가끔은 처분하는데 그때는 취미생활에 쓰죠.”
‘취미? 보통은 먹거나 물건을 살 때 쓰는··· 아하. 맞다. 얘가 나중에는 성공한 덕후라고 불리는 녀석이었지,’
아마도 지금의 수입 역시 특정 캐릭터의 인형이나 다른 관련 물품들을 사는 데 돈을 쓰는 것 같았다. 일본에서 물 건너서 오는 만큼 단가도 꽤 나갈 것이다.
“알았다. 그러면 우리 회사로 우선 방향을 잡아. 근처에 한우 집 좋은 데를 내가 아니까 그리로 가자.”
“넵!”
그리고 차량 이동시간에 김형빈에게서 받은 자료들을 읽고 대화했다. 내가 보는 관점은 철저하게 미래에 성공했는지 여부였다면 심영탁은 업계 종사자로서의 의견을 냈다.
‘성공한 수많은 영화를 알기는 하는데, 이맘때 나온 게 뭔지 까지는 몰랐거든.’
서류를 넘기다가 깜짝 놀랐다.
“우와. 이 영화들이 2002년 제작 예정작이었다니. 기막히네.”
“어떤 건데요?”
“미스틱 데이랑 아유리딩.”
“아! 그거요?”
“왜? 너도 아는 영화냐?”
“당연히 알죠. 이건 연예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엄청난 대작이거든요! 저는 특히 아유리딩을 엄청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안 오더라고요. 쩝. 진짜 캐스팅될 뻔했었는데··· 아. 정말 되는 거였는데.”
놓쳐버린 기회를 무진장 아쉬워하는 모습이지만, 녀석은 모른다. 자신이 얼마나 운 좋았는지를.
“종교 있으면 신한테 고마워하고 아니면 부모님께 선물이라도 사드려. 다 네 복이야.”
“예? 형님. 진짜 오해이십니다. 정말로 캐스팅 직전이었다고요.”
“쯧쯧.”
“우와. 억울합니다!”
영탁이가 속상해하는 아유리딩.
유행어로는 ‘A급 자본력으로 B급 배우들을 끌어들여 C급 영화를 만들어낸 D급 연출력의 놀라운 마법.’을 남긴 놀라운 작품이다.
모험 어드벤처 영화로서 감독이 주만지를 보고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는지 사파리에서 열심히 동물들을 피해 다니고 늪에도 빠지면서 생존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는 작품이었다는데, 결과적으로는 ‘개고생만 한 영화’였다.
‘제작비가 80억이었다던가?’
2002년에 개봉한 영화의 제작비의 금액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참패했다. 이후에 감독이 한 말이 참으로 걸작이라 내가 다 기억할 정도다.
“남의 돈으로 잘 놀았다더라.”
“무슨 말이세요? 정치인이요?”
“있어. 그런 나쁜 놈이.”
그의 워딩은 ‘영화의 흥행이 뭐가 중요합니까? 영화 촬영을 얼마나 신나게 했느냐가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영화가 흥행을 못 해도 즐겁습니다.’였다.
혹시 모른다. 예술을 하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저게 옳을는지. 하지만 자타 공인으로 평범한 사고방식을 가진 내 견해로 배우는 저래도 괜찮지만, 감독은 저리 해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명색이 상업영화를 만들었고 남의 돈을 투자받아서 촬영했는데 마인드가 글러 먹었다.
‘이 감독 이름은 꼭 기억해두고 혹여라도 내가 투자하는 작품에 끼어드는지 감시해야지.’
그리고 미스틱데이는 SF 액션 영화다. 당대 최고의 배우들로 초호화 캐스팅한 작품인데 제작비는 60억 원. 전국 관객은 40만 명이다.
여기에 100억 원의 제작비로 전국 14만 명의 관객을 모집한 성냥팔이 소녀의 강림이 더해지면 2002년의 끝판 삼대장이 완성된다.
‘2002년에 한국 영화계가 휘청했다고 하더니만 괜히 그런 게 아니었구나.’
간혹 일부의 사람들은 말한다.
소재는 정말 좋은데 연출력이 부족하다거나 시기를 잘못 만났다고.
그런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나 역시 소박하게 밝혀보자면, 이러하다.
‘헛소리 꺼지라고 해. 망할 만했어.’
과감하게 해당 영화들이 있는 페이지들을 구겨서 뒷좌석으로 던졌다. 이후로도 ‘긴급조치 119’ 같은 기억에도 없는 영화가 나와서 또 ‘패스’를 외쳤다.
그러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영화를 찾았다.
‘정의의 적’이었다.
“너는 킵해두고.”
〈지독한 경찰 vs 악독한 범인〉이라는 슬로건으로 2002년 대한민국 영화계를 제대로 강타했던 영화.
‘이 시기만 해도 거의 성공한 영화는 조폭, 범죄, 형사였는데 이건 달랐지. 물론 표절 잘하기로 유명한 감독의 작품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시기고 잘 먹히도록 만들기도 했으니까. 아무튼 이건 투자다.’
영화 쪽은 다리 하나를 걸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게임처럼 제대로 파고들어서 이것저것 죄다 손을 대려고 하면 골치 아프니 처음 계획대로 결정했다. 될 성 부른 상품에서 이익을 보는 목적대로였다.
‘제작사와 배급사는 모두 시네마 팰리스.’
체크 포인트다.
그렇게 페이지를 넘기자 또다시 괜찮은 물건이 나왔다.
‘삼일절 특사’
이것도 엄청나게 흥행하고 덕분에 향후 몇 년간은 삼일절만 되면 반복적으로 나오는 영화였다.
‘투자하자.’
페이지를 더 넘기자 연속적으로 괜찮은 영화들이 터져 나왔다. 처음의 충격과 공포를 어루만져주듯이 참으로 주옥같은 작품들이었다. ‘연애 수첩’ ‘클래지’ ‘내 사랑 사수궐기 대회’였는데 모두 여배우인 송혜진이 출연할 작품이다.
‘지금이 전성기인가 했지?’
페이지를 넘기며 점검하다보니 여기가 진짜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전부 보지도 않고 적당히 투자할 영화들을 추렸는데도 6개나 나왔다.
‘정의의 적’, ‘삼일절 특사’, ‘연애수첩’, ‘클래지’, ‘내 사랑 사수궐기 대회’, ‘가내의 영광’!
작품 당 10억씩 투자한다 치면 60억이 필요하지만 크게 부담은 없었다. 한 번에 나가는 목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놀라운 점은 아직도 제작을 기다리는 작품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이다.
“2002년 안에 나올 영화들은 다 검토한 거 같은데 뭐가 이리 두껍데?”
“형빈이가 살뜰하게 가져왔거든요.”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페이지를 쫙 넘겼더니 무려 2004년에나 등장할 작품을 발견했다.
〈684 시나리오〉
684 부대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시나리오로써 대한민국 영화 중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달성했던 바로 그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환상적인 소재로 이도저도 아닌 신파극을 만들었다고 보지만,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겠는가.
무려 천만 관객 작품!
이거면 이야기는 끝난 셈이다.
그런데 이 나중에나 나올 작품이 왜 이 자료에 포함된 것일까? 의아해서 찾아보니 김형빈이 정말로 내게 충실히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거 아직 판권사가 없잖아?’
내용을 보니 ‘684부대’라는 매력적인 소재 때문에 관련 시나리오는 1980년대부터 충무로에 떠돌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99년에 동명의 소설이 히트하고 684부대에 관심이 생겨나면서 해당 작품이 물 위로 재부상하는 중이었다.
형빈이는 이런 자료들까지 알뜰살뜰하게 가져다준 것이다.
“이 자식은 여자 잘 만나야겠다. 이 정도면 보증도 막 서주고 몽땅 털려도 모를 성격 아니냐?”
“아니죠. 다 형님의 위엄을 보고 한 행동 아닐까요?”
“걔가 나를 알면 뭘 안다고.”
“제가 얘기했거든요. 진짜 직업 말고 플레지에서의 일이었는데, 이게 10억씩 팍팍 쏘신 거랑 어울리니 아주 확 가버린 모양이에요. 모니터 속 캐릭터가 튀어나왔다, 그런 거죠. 총군주님의 포스! 말입니다. 이참에 저처럼 형님 라인으로 딱 굳히려는 것일지도 모르고요. 하하!”
“그게 뭔 개소리냐?”
어이가 없어서 웃고는 잠시 생각했다.
내가 가진 정보가 생각 이상으로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 하나라도 덜 놓치려면 아무래도 영화 혹은 판권에 계약에 대해서 빠삭한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김형빈은 관련 분야에서 구할 수 있는 적절한 유형의 사람이었다.
물론, 실없는 영탁이의 농담처럼 정말로 나한테서 뭔가를 보고 한 행동인지. 아니면 호의적인 부자를 만나면 납작 엎드리는 타입인지는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제외하면 쓰기 딱 좋은 직원이었다.
‘회사 외적으로도 사람이 필요해.’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투자를 스스로 해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간석동의 빌딩을 샀던 것을 시작으로 강남의 게이머스 포럼 사옥. 게임사들까지 대부분 내가 직접 나섰다. 하지만 여기에는 운이 작용했고 김정규 팀장의 타이밍 좋은 정보 제공이 큰 몫을 한 것이 사실이다.
‘연결고리로는 쓰기 좋은 데다가 가장 중요한 점은, 다루기 쉬워.’
결정을 내리고 말했다.
“영탁아. 그 형빈이라는 친구 연봉 얼마 받냐?”
“아마 1,400만 원 정도 받을걸요?”
“월급으로 치면 120만 원가량이네.”
“왜 그러세요?”
“내가 만나 봐야겠으니까 자리 만들어줘라.”
“존명···이 아니라. 옙! 형님.”
플레지식 대답에 인상을 찌푸리자 바로 대답이 바뀌었다. 이후, 서울에 도착한 우리는 영탁의 한우 먹방과 함께 자리를 마무리했다.
< 원 스텝, 투 스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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