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다, 그게 있었지 >
금요일 오후 촬영현장 방문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을 때였다.
“대표님!”
사무실 앞에는 김지애 팀장이 발을 동동 구르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 모습이 보임과 동시에 득달같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죠?”
“오늘 결재하셔야 하는 게 한두 건이 아닌데 이제야 오시면 어떡해요?”
“그래요? 개인적으로 할 것들이 좀 있었거든요. 중요한 것들이 아니면 그냥 진행하시거나 전화로 주시지.”
“전화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요. 게다가 꼭 대표님이 직접 확인하시고 승인 혹은 거절을 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았고요.”
중차대한 일이 있었다면 ‘도시로’ 촬영현장에 다녀오는 여유를 부렸을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일까. 의아할 따름이다.
“그래요?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네.”
김지애 팀장은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여러 서류와 함께 빠른 어조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표님. 리얼 팜 자문위원으로 섭외했던 임진석 교수님 기억하시죠?
“물론입니다.”
과거에는 게임 하나를 제작하는데 필요한 인력이 5명을 넘기지도 않았으며, 그런 인원으로도 3달이면 어지간한 완성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물론 개발 기간이 짧은 만큼 게임을 설치한 건지 버그를 설치한 건지 모를 문제작이 될 확률이 높기는 하지만, 가능은 했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서 기술력이 발전해나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졌다. 어지간한 게임은 최소 1년 이상에 20명을 넘는 인원이 공을 들여야만 완성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대작이라고 말할 수준의 게임은 곱절의 시간인 2년을 넘기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는 그래픽의 발달로 벌어진 자연스러운 변화다.
‘그렇지만 굳이 모든 게임을 뛰어난 그래픽으로 무장해서 제작할 필요는 없거든.’
클로버 스팅에 속해있는 두 개의 미니 게임이 라이트한 게임에 속한다. 하나는 주사위를 통해 칸을 이동하고 주사위로 전투를 하는 단순한 게임이다. 다른 하나는 그래픽보다는 일러스트에 신경을 쓴 매우 흔한 TCG다. 냉정하게 보자면 두 게임 모두 별다른 특징이 없다.
그러함에도 이러한 게임들이 동시 접속자를 4만 명이나 만들어주고 있었다.
‘동접자 1만 명만 모아도 성공이라는 말을 하는 게 보통이거든. 그것에 비교하면 4만 명은 대박이라고. 뭐, 이것들은 무료 게임이니 유료 게임과 비교할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하려는 말은 이거다.
뛰어난 그래픽에 훌륭한 게임성을 지닌 게임을 공산품마냥 기계에서 뚝딱뚝딱하고 찍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게이머스 포럼은 게임 엔진과 몬스터 프레데터스라는 오래 걸리는 게임을 개발함과 동시에 강과 바람 팀에게 가벼운 게임 하나를 주문했다.
그것이 바로 김지애 팀장이 말한 ‘리얼 팜’이다.
‘웰빙과 부농이라는 콘셉트에 맞춰서 제작한 농장 운영 게임이지.’
그리고 임진석 교수는 게임에 녹여낼 진짜 농사에 대한 자문을 맡아줄 전문가로 겨우겨우 찾은 전문가였다.
사실, 꿈속 미래에 따르면 원래 모바일로 이러한 게임이 등장했었고 그때는 대한민국 제일의 대학이라는 수도국립대학교의 원예학과 교수가 자문위원을 담당했었다. 내가 하는 대부분의 발상이 그러하듯 이 역시도 본래의 아이디어를 쏙 빼 온 셈이다.
이를 떠올리고서 나 역시 우선은 동일한 학교에 조언 요청을 먼저 넣었었다. 하지만 꿈속 미래와 현재의 시간대가 차이나는 탓일까, 다른 이유가 있던 것이려나. ‘게임 제작을 위한 자문은 학교의 위상을 손상할 수 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대차게 까였다.
이를 명문대의 콧대 높은 갑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이후 서울 소재에 농대를 보유하고 있는 모든 대학에 조언 요청을 해보았지만 반응이 모두 같았었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는 거절!
게임이라는 분야의 선입견이 아직은 덜해지지 않았기에 생긴 수난이었다. 그래서 오기로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전국대학교라는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곳의 임진석 교수를 간신히 설득했다.
이러니 고초를 겪었으니 기억하지 못하려야 못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분이 왜요? 설마 지금 와서 못하신다고 합니까?”
우려 섞인 물음에 전혀 아니라며 그녀가 대답했다.
“‘리얼 팜’의 자문을 맡으시면서 게임과 함께 윈-윈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구상하셨다고 해요. 혹시 대표님이 확인하시고 마음에 드시면 함께 진행하고 싶다며 자료를 보내셨어요.”
“윈-윈? 우리가 뭐 그럴만한 게 있던가요?”
“농업법인으로 투자해주시면 자신의 인맥을 통해서 농장관리도 하고 그렇게 직접 키운 작물을 유저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어떻겠냐고 물어보셔서요. 게다가 이 사업 구상 자체가 리얼 팜의 자문을 하면서 떠올리게 된 것이니 만약 따로 하게 되더라도 대표님의 허락을 구해야 할 것 같다고 하세요.”
가볍게 웃었다.
애초에 리얼 팜을 구상하면서 나 역시 떠올린 아이디어이기는 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구상을 접었다.
하나는 게이머스 포럼의 본질은 게임에 있다는 것이다.
게임 회사가 농장을 경영한다? 더군다나 내가 확신할 수도 없는 농업이라는 분야로?
지금까지 나는 남들의 눈에는 도박이지만 내게는 리스크가 전혀 없는 확실한 투자만 해왔다. 그러니 농업이라는 미지의 땅에 발을 들이미는 것은 부담이 될뿐더러 그 돈을 게임에 더 투자하는 편이 백배 천배 이득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리얼 팜이라는 게임의 수명이 매우 짧다는 것이다.
‘1년이나 2년이지. 정말 길게 봐줘서 5년? 아니 10년이라고 쳐주자고. 그러면 그 뒤에는? 배추 심고 무 심었던 그 밭들은 어쩔 건데? 땅 처분이 그렇게 간단한 것도 아니잖아.’
김지애 팀장에게 말했다.
“게임 회사에서 뭘 그런 것까지 합니까? 거절하세요.”
문득 시선을 창밖에 두었다. 빼곡한 빌딩 숲들이 들어선 값비싼 땅과 벌판에 채소들이 잔뜩 자라는 리얼 팜 농장을 상상했다. 그러던 중에 촬영현장에 다녀오면서 받아 든 시놉시스들이 연결됐고 뇌리로 기억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그럼 임진석 교수님에게는 거절하겠다고 전달···”
“김 팀장님. 잠깐만요.”
“네?”
오른손을 들고 그녀를 멈춰 세웠다.
우리 회사가 있는 곳은 강남에서도 중심지역인 테헤란로다. 이것과 2002년에 제작 예정인 영화들. 곧 큰 수익을 안겨줄 ‘도시로’를 결부해보자.
1970년대에 가장 큰돈을 만졌던 사람들이 누구일까?
바로 강남을 이용한 땅 투기꾼들이다. 오죽 돈을 많이 벌었으면 그것으로 재벌이 된 사람도 있을 정도다. 즉, 부동산이라는 것은 미래에 개발될 곳을 미리 선점한다면 헐값에 사서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전형적인 투자 분야다.
‘그리고 난 어느 지역에서 큰 개발이 이루어질지 알고 있잖아? 오오! 세상에. 너무 게임에만 매몰되어 살았어! 이런 금덩어리들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었다니!’
지나치게 떠들썩한 이슈는 관련업계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소문을 접하는 법이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의 땅값은 알지 못해도 큰 떡 덩어리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았다. 서민이야 알아도 종자돈이 없어서 한숨만 푹푹 내쉬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차분하게 기억을 되짚으면 쓸 만한 정보 들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임 교수님이 보내주셨다는 자료부터 검토해보고 다시 결정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임 교수님에게는 제가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전달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녀가 나가고 의자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5년에서 10년.
게임이 망한 뒤에 땅을 처분하는 방법!
곧 이것에 관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행복도시.’
2000년대에 들어서 땅값이 가장 많이 오른 지역이 어디일까?
단순하게 평당 단가가 오른 것으로 계산하자면 서울이다. 특히 강남인데 이것은 지역의 특성상 애초 평당 가격이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당 금액이 아닌 오른 퍼센티지로 본다면 순위는 달라진다.
1위는 세종시.
2위는 제주시다.
‘그리고 나는 어디가 세종시가 될지, 제주에서도 어디 땅을 사야 할지 제법 알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땅값의 폭등으로 배가 아팠던 꿈속의 나 역시도 역시 해당 지역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종시가 될 지역에서 채소와 복숭아 농장을 운영하자. 제주에서는 감귤과 한라봉 농장을 운영하다가 리얼 팜이 망해가면 처분하는 거야.’
이런 땅을 구매해서 농장을 운영하다 보면 게임의 인기가 시들해질 때쯤에는 투자금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이 될 것이다.
그뿐일까? 아마 그 땅을 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 줄을 설 것이다. 이러면 게임도 운영하고 다음에는 최소 10배에서 많게는 100배까지 치솟은 땅값을 두둑하게 챙기게 된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윈-윈 이다. 영화부터 땅 투자까지를 지금까지 떠올리지 못한 이유는 너무도 간단했다. 게임으로도 충분히 승승장구했고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나무가 잘 자라는 동남아시아의 선박보다 유럽의 선박 건조술이 더 발달한 것처럼 말이다.
“짱짱해서 게임 말고는 생각조차 안 했었다니. 진짜 배부른 소리네.”
기분 좋아서 휘파람마저 나왔다.
‘제안서는 검토해 봐야지. 마음에 들면 진행하고 아니면 나 혼자 땅 사고~’
김지애 팀장이 책상에 두고 간 제안서를 읽어보았다. 결과는 예상보다 괜찮다는 것.
임진석 교수가 구상하는 농업법인은 단순하게 농장경영을 하는 법인이 아니었다. 농장경영과 함께 볼거리, 놀 거리를 한 번에 제공하는 일종의 농장테마파크였다.
“원래 이런 게 나온 건 2004년이었었나?”
농장 혹은 목장 등을 이용한 테마파크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3년 후 즈음으로 기억한다. 보통은 서울에서 찾아가기 좋은 서울 근교에서 많이 했는데 굳이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애초에 땅이 크지 않아서 멀다고 하는 곳도 입소문만 타면 어렵지 않게 찾아가곤 하니까. 어디 보자, 테마파크라고는 해도 놀이공원처럼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자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히 사업으로 진행해도 괜찮을 것 같아.’
사업 구상과 계획이 제법 상세하게 나온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가 2007년 이후에 처분하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익을 가져다줄 것이고 테마파크 콘셉트를 ‘리얼 팜의 리얼 테마파크’ 같은 식으로 이름만 붙이면 시너지 효과도 잘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오케이. 진행한다.”
결정한 바를 메시지로 전달해줘도 되지만 겸사겸사 클로버 스팅을 둘러 볼 겸, 방문해보기로 했다. 바로 클로버 스팅 팀으로 향했고 도착하자 김지애 팀장이 바로 내게 달려왔다.
“예상보다 결정이 빠르시네요? 역시 거절인가요?”
“아니요. 진행하도록 하세요.”
“네? 마음이 바뀌셨네요?”
“충분히 괜찮을 것 같더군요.”
“알겠습니다. 임진석 교수님에게는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지애 팀장이 빙긋이 웃고는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이후는 팀 내부를 둘러보기로 했다.
“김무곤 팀장님은 어디 있습니까?”
“지금 내부 테스트 중이라 저 구석 쪽 컴퓨터로 가시면 보일 겁니다. 안내해드릴까요?”
“아뇨. 바쁘실 텐데 일 보세요. 그냥 가면 됩니다.”
어차피 사내에서 움직일 때는 보통 이미진 과장을 대동한다. 그 때문에 김지애 팀장은 별다른 말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부 테스트 중인 컴퓨터에 가까이 도착했을 무렵 나를 발견한 개발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엇!? 대표님!”
“궁금해서 한 번 와봤습니다. 테스트 결과가 어때요?”
갑작스러운 대표의 방문에 개발자들이 얼어붙은 것과 달리 김무곤 팀장은 관록이 있는 만큼 당황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현재까지 리얼 팜은 별다른 버그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게임 플레이 타임이 너무 짧은 데에 반해서 대기 시간이 긴 게 문제입니다.”
“이 정도면 무난합니다. 절대로 길지 않아요.”
“그렇지만 테스트를 하는 직원들 모두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걱정하지 말고 진행하세요.”
농사를 게임에서 짓고 현실에서 물건을 받는 이 게임은 본래의 미래에서는 모바일로 출시했었다. 그리고 PC와 모바일의 차이점은 접근성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모바일 게임은 손쉽게 접속할 수 있어서 기다림을 감수 할 수 있다.
반면에 PC게임은 그 접속에 제약이 많고 대기시간이 길수록 악영향이 커졌다. 이를 참작하면 리얼 팜에 피로도를 부여하고 밭을 갈거나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는 등의 활동에 이 스태미나를 소진하는 형태는 옳지 못했다.
하물며 이 피로도 회복은 기다리는 것과 현금성 아이템으로만 가능하게 하면 더욱 최악일 것이다. 그런데 이는 게임을 달랑 1개만 서비스할 때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밸런스를 조금만 조정하고 발상을 바꾸면 이건 괜찮은 전략이 된다.
‘충분히 클로버 스팅 내부의 다른 게임들과 시너지를 만들 수 있거든.’
< 맞다, 그게 있었지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