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146화 (146/577)

< 맞다, 그게 있었지 >

*

어느덧 9월 중순을 넘어가며 계절은 가을이 됐다. 하지만 푸르른 잎들은 물론이고 아직 따가운 햇살이 사라지지 않았다. 시골 여름의 청명한 공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기였다. 이 산 좋고 물 좋은 시골에 중형 세단이 들어섰다.

등장과 동시에 시선을 잡을 만큼 윤기가 흐르는 자동차에서 두 명의 건장한 남자가 내렸다. 이들을 보며 이청하 감독은 티 나지 않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냥 집에서 발 닦고 잠이나 잘 것이니 왜 여기까지 기어오는 거래? 내가 저런 사람들 때문에 주름이 는다니까!’

둘 중 누가 자신의 영화에 투자하겠다는 이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운전자가 주차하기 무섭게 재빨리 나와서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1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한 남성이 운전자이며 저리 허리를 굽힐 리가 없다. 다만 의아한 점은 대접받는 사내 역시도 너무 젊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애써 시선을 주지 않으며 푸념했다.

‘저건 젊은 게 아니라 어린 수준 아닌가?’

대략 2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실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청하 감독의 눈에는 부모를 잘 만난 젊은 녀석이 마음껏 돈을 뿌리고 다니는 모습으로만 보였다. 저런 투자자는 머릿속으로만 든 내용을 토대로 이래라저래라 지시하기 일쑤다.

“작작 했으면 좋으련만.”

투자자가 영화 촬영 현장에 찾아온다는 것. 이는 열에 아홉은 자신이 돈 낸 만큼 ‘내 취향에 맞는 영화로 만들려는 것.’이다. 감독의 입장에서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투자를 해준 만큼 고마운 사람이기도 하지만 가장 껄끄러운 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청하 감독은 부디 적당한 수준에서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이기를 바라며 무거운 발을 움직였다. 그런 그보다도 한발 빠르게 터보 엔터테인먼트의 투자 담당 직원인 김형빈이 접대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삐딱하게 봐서 그런지 비슷한 또래끼리 굽실굽실 하는 모습이 대학 선후배 사이에 군기 잡는 것으로도 보였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형빈은 젊은 남성이 마치 엄청난 상사인 것 마냥 그 앞에 그대로 엎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어려도 무려 1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한 투자자다. 김형빈의 입장에선 회사의 임원 모시듯 모시는 게 당연한 법.

‘나도 일단은 가서 챙기는 척이라도 해야겠지?’

그래도 엎어지기 직전의 영화를 다시 살려준 사람이니, 마냥 고깝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청하 감독은 그에게 다가가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며 얼굴을 마주하고는 풀어뒀던 마음을 다잡았다.

부모 돈으로 있는 척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눈빛에 힘이 실렸다.

“길이 많이 험했을 텐데. 여기까지 찾아오시고. 고생하셨습니다.”

“그냥 조용히 구경이나 하다 가려고 왔는데 생각지 못한 환대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있다. 지금 촬영 중인 영화와는 전혀 어울리는 인상이 아니라는 점이 아쉬울 정도로 카메라 앵글에 잡고 싶은 비주얼의 사내였다. 나이답지 않은 무게감과 젊음이 잘 어우러졌다. 요즘 추세인 꽃미남은 아니지만 남성미가 물씬 풍겼다.

‘내가 잘 모르는 신인 배우인가? 하긴, 이 좁은 나라에 배우가 한둘 이어야지.’

유명한 배우야 손에 꼽힐 정도라지만 IMF 이후로 연예인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유난할 정도로 배우지망생이 늘었다. 이러다가는 대한민국이 연예인 공화국이 되지는 않을까 우려될 정도였다.

“다행히 지금 휴식시간인데, 어떻게 촬영장 구경을 좀 해보시겠습니까?”

“아니요. 그것보다 스태프 분들에게 부탁 좀 할 수 있겠습니까?”

그 한 마디에 분위기가 주는 진중함이 싹 가셨다.

‘오자마자 부려먹겠다니.’

갑의 역할은 돈을 쥔 자의 것이고 현장에서 가장 자본에 가까운 사람은 투자자다. 문제는 못마땅하면서도 들어줘야 하는 것이 자신의 처지라는 것이다.

‘으으! 자본주의!’

뒤늦게 수긍하려는 데 한발 먼저 김형빈이 나섰다.

“어휴. 당연한 걸 가지고 무슨 부탁씩이나 하시고 그러십니까? 걱정마세요. 감독님. 들으셨죠? 사람들 좀 모아주세요.”

사회생활이란 모름지기 눈치와 타이밍이다. 그런 면에서 이청하 감독보다는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며 투자를 유치하는 김형빈이 사회 경험은 적지만 스킬은 훨씬 뛰어났다. 타이밍을 놓친 이청하 감독은 결국 한숨 한 번을 내쉬고는 사람들을 불렀다.

“전형준씨. 거기 사람들 몇몇만 이리 오라고 전해주실래요?”

휴식시간을 빼앗긴 어린 스태프들이 죽을상을 쓰며 내려왔다.

‘미안하다.’

지금 남아 있는 이들은 힘든 여건 속에서도 촬영장을 지키고 있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일을 시킨다는 것이 못내 미안했고 그래서 입맛이 더 썼다.

그런데 트렁크를 열고 나오는 물건들을 보니 기분이 달라졌다.

커다란 아이스박스 4개.

심지어 그 무게도 상당해서 스탭들이 다들 안간힘을 쓰고 옮기고 있다.

“이것들은 다 뭐죠?”

“더운 날씨에 다들 고생이 많으실 거라고 생각해서 먹을거리들을 챙겨왔습니다. 얼마나 계신지를 몰라서 많이 챙긴다고 챙기는 바람에 무게가 너무 나가버렸군요.”

때 아닌 중노동에 불만 가득하던 스태프들의 표정은 내용물을 아는 순간 180도로 바뀌었다. 남의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모두가 다 우리 것이라고 한다. 더위에 딱 좋은 시원한 음료수가 넘쳐난다.

“그리고 이 박스는 맥주, 이 박스는 삼겹살입니다.”

박스를 하나하나 열 때마다 스탭들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눈에서는 밝은 빛이 나왔다.

‘그동안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만 했지 이런 회식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구나.’

이청하 감독에게 작은 깨달음을 준 투자자가 말했다.

“촬영을 24시간 하고 그러지는 않으시겠지요? 오늘 촬영 끝나면 다 같이 바비큐 파티라도 하시라고 챙겨왔습니다. 부족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녀는 이 젊은 남자가 왜 말을 하다가 멈추었는지 바로 알았다. 스태프 인원이 생각보다 적었다는 의미다. 정확히는 중간에 촬영을 포기하고 나가고 비용문제와 기타 악재가 겹치며 인원을 보충하지 못하서 생긴 일이었다.

덕분에 족히 회식을 세 번은 할 만큼의 고기와 술이 생겼다.

아까까지는 죽어가던 스태프들이 신바람 나게 물건을 옮겼다. 투자자는 마지막 상자는 두라고 했다.

“그 박스는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따로요?”

“배우가 아역이라고 들었는데요? 안 보이네요?”

“저기 안에서 따로 휴식을 하고 있어서 그래요. 보시다시피 햇살이 워낙 따가워서요.”

“그러시군요.”

대답하고는 스태프 두 명이 힘들게 낑낑대며 들었던 아이스박스를 혼자서 척하니 들고는 휴게실을 향했다.

‘괜히 미안하잖아?’

지금까지 그의 모습은 영화의 내용이나 촬영에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양보할 수 있는 부분과 양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한 자신만 상황이 어색할 정도였다.

*

‘저예산 영화라 그런가? 생각보다 별 거 없네?’

나중에 돈이 많이 들어가고 유명한 배우가 잔뜩 나오는 작품이라면 구경할 거리가 많을지 모르겠다만, 도시로는 풍경 좋은 조촐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처음이니 예행연습 차원에서 가볍게 온 마당 아니겠는가.

부담 없이 들어서며 촬영 스태프의 휴게실을 보았다.

간혹 철야라거나 이곳에서 해야 할 것들이 많은 제작진을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이렇게 따로 휴식을 취할 때에는 주연 배우인 유성호와 갑분 할머니에게 제공하는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내부에는 갑분 할머니와 성호 그리고 성호의 어머니. 이렇게 세 명이 들어와 있었다. 나를 본 성호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소곤소곤, 하지만 다 들리도록 엄마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엄마. 누구야?”

다가가서 말했다.

“삼촌은 성호가 앞으로 훌륭한 배우로 성장하길 바라는 1호 팬이야.”

“어? 피터팬은 아는데···”

8살배기 아이에게 1호 팬이라는 표현은 생소한 표현이었나 보다.

“말씀은 들었어요. 이번에 영화에 투자를 해주신 투자자 분이시죠?”

“어머님에게도 이야기가 다 전달이 되었나보네요.”

아직 따로 소속사가 없는 성호와 엄마의 관계는 서로를 아끼는 모자지간이기도 하지만 이런 영화 촬영장에서는 배우와 매니저의 관계이기도 했다. 때문에 중단 직전의 영화가 재개된다는 반가운 소식을 성호는 몰라도 엄마는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호의 엄마는 아들이 영화배우로 성장할 수 있는 첫 기회가 이대로 무산 된다는 것을 엄청나게 걱정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부도 아니고 투자인데요. 영화가 잘 되면 모르긴 몰라도 여기서 제가 돈을 가장 많이 벌게 되는 사람이 될 겁니다. 그건 그렇고··· 성호야. 이거 봐라? 짜잔!”

마지막으로 개봉하는 아이스박스. 그것에는 음료는 물론이고 각종 간식들이 풍성하게 들어 있었다. 특별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들로 꽉꽉 채워 넣은 보람이 있게끔 엄마 주변에서 떨어지지 않던 성호가 무엇에 홀린 듯 아이스박스 가까이 다가왔다.

“형··· 형···! 저 이거 먹어도 돼요?”

“그럼. 이거 이제 다 성호 너 꺼야.”

“진짜요?”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다.’

워낙 시골이다 보니까 읍내까지 나간다 하더라도 원하는 간식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게다가 인천에서 평일에 학교도 다니면서 이곳에서 촬영도 해야 하는 엄청난 스케줄 덕분에 간식을 따로 사러 다닐 시간도 촉박한 것이 성호의 현실이었다.

“진짜. 진짜. 이거 다 제가 먹어도 돼요?”

“그럼. 진짜야.”

“와! 엄마! 이거 다 내 꺼래!”

“그 말 보다 뭘 먼저 해야지?”

“형! 감사합니다!”

‘8 살배기 아이에게 형이라니.’

웃으며 대답했다.

“형 말고 삼촌이라고 부르렴.”

“그치만 형보다 훨씬 나이 많은 것 같은 형들에게도 다 형이라고 하는 걸?”

“그 사람들에게는 계속 형이라고 하고 나한테는 삼촌이라고 하면 돼.”

“그런가아?”

확실히 귀엽다. 천진함. 그 하나로 영화가 성공할 정도였으니 귀여움 만큼은 인정해줄 수 있는 아이다.

여기서 나는 자식에게 엄격한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나 그럼 이거 지금 먹을래!”

“안 돼.”

“아! 왜!?”

신이 나서 알 모양의 초콜릿 과자를 집어드는 성호에게 엄한 눈빛으로 안 된다고 말한 그녀. 바로 성호의 표정이 울상이 됐다.

“초콜릿은 안 돼. 거기 다른 과자 먹어.”

“초콜릿은?”

“이따가 식사 끝나고 먹는 거야. 알았지?”

“빼에에~ 그치만··· 그치만··· 그치만. 그치만그치만그치만!”

“엄마가 안 된다고 했어.”

“씨! 안 먹으면 되잖아!”

성호는 한참 씩씩대더니 초콜릿을 내려놓고는 과일 맛 과자를 집었다. 앞에서 보는 입장으로는 아이가 원하니 그냥 먹게 두면 어떨까 싶었지만, 이건 부모가 아이를 양육하는 문제다. 끼어들면 주제넘은 일이니 멋쩍게 웃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어린 아이는 내 예상보다도 훨씬 쉽게 화내고 쉽게 풀었다.

“헤헷. 맛있따아!”

울상을 지었다가 과일 맛 과자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 성호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휴게실의 문이 열리면서 커다란 박스를 든 스태프들이 들어왔다.

“이게 뭐에요?”

“성호의 나이 때에는 컴퓨터 오락을 좋아하잖아요. 아이가 이런 시골에 갇힌 기분이 들고 그러면 혹시 감정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해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그제야 자신들이 가져오면서도 무엇인지 몰랐던 스태들이 박스를 열고는 놀랐다. 그 중에서 가장 막내 스태프가 제일로 격한 반응을 보였다.

“오! 레오닌!”

“뭐야? 너 아는 거야?”

“이거 완전 최신형 컴퓨터예요. 저도 사고 싶은데 예약이 너무 몰려서 못 구하고 있던 건데. 우와. 이게 이런 데서 나오네요.”

“최신형이면 엄청 비싼 거 아냐? 그걸 사려고 했다고?”

“에이~ 최신형이라고 다 비싼 거 아니에요. 물론 저렴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게이머스 포럼이라는 회사에서 제휴로 제작한 컴퓨터거든요. 가격에 비해서 미친 듯이 좋은 성능으로 유명해요. 요즘 이게 제일 뜨거운 감자에요.”

“그래?”

스태프들의 대화가 뭔지, 레오닌이 무엇인지는 어린 성호가 알 리 없다. 하지만 좋다는 것쯤은 이해했나 보다. 과자를 꽉 쥔 채로 컴퓨터 앞에 왔다. 눈빛만으로도 ‘이건 내꺼!’라고 외치는 듯했다.

‘하긴, 영화 흥행 후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가장 즐거웠던 때가 언제냐는 물음에 아이다운 대답을 해서 화제였었지?’

당시의 답변은 ‘형들이 저보고 연기 잘 했다고 읍내의 PC방에 데려갔던 날이요!’였다. 영화 촬영 중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 PC방에 갔던 때라고 할 만한 아이이니 컴퓨터가 마음에 들 것이다.

“형! 아니 삼촌! 이거! 이거! 저 해봐도 돼요?”

“그럼. 아까 간식처럼 이것도 앞으로 성호 꺼야.”

휴게실이지만 그래도 조촐한 책상 정도는 있었고 그곳에 컴퓨터를 설치해 주었다.

‘생각보다 집기들이 열악하네? 컴퓨터 책상 정도는 나중에 하나 더 보내줘야겠어.’

설치가 끝나자마자 바로 앉아서 인터넷을 실행시켰다.

“삼촌. 이거 컴퓨터가 이상해요. 인터넷이 안 된대요.”

곧바로 울상을 짓는다.

인터넷이라는 건 컴퓨터만 있어서 될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따로 연결해 주어야 되는 것이지만 초등학생에게는 꽤나 어려운 이야기다. 아이의 입장에선 인터넷이 안 되는 이유를 알 턱이 없다.

“인터넷은 여기가 너무 산속이라 어려워. 그 대신에 인터넷은 못해도 할 수 있는 게임들을 많이 넣어서 가져왔단다.”

“게임?”

어차피 아이가 컴퓨터를 사용하는 용도의 90%는 게임이다. 이런 아이를 위해 클로버 스팅에서 판매하는 모든 패키지 게임을 설치해서 가지고 왔다. 금방 싫증을 내는 나이라고 해도 이 게임들을 다 하려면 영화 촬영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와! 게임 진짜 짱 많아!”

“삼촌이 이거 다 선물로 주는 거야. 대신, 엄마 말 잘 듣고 영화 촬영도 열심히 하는 거다. 알았지?”

“약속!”

안 그래도 시골 촬영이 힘들었던 성호가 요즘 가장 엄마에게 많이 하는 부탁이 영화 촬영 안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되냐는 말이라는데 이 선물들로 한동안은 그런 것들을 잊었으면 했다.

“너무 귀한 선물들이라··· 이런 것들을 그냥 받아도 될지······.”

마냥 좋은 8세 꼬마와 달리 성호의 엄마는 부담감을 내보였다.

“괜찮습니다. 대신 성호가 영화 촬영에 집중을 잘 할 수 있도록 관리 부탁드리겠습니다. 성호도 엄마 말 안 들으면 컴퓨터 다 치워버리라고 부탁드릴 거니까 엄마 말 잘 듣고 영화도 잘 찍어야 돼. 알았지?”

“네! 진짜 열심히 할 거야!”

이쯤 말하고 나니 성호 엄마도 더 이상 말을 하기 곤란할 것이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하신다.

회사에서도 그렇지만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적당히 빠져주는 게 센스다. 나는 모두가 즐겁게 만끽하는 것을 보고서는 김형빈에게서 진짜 볼 일을 전달 받았다.

터보 엔터테인먼트에서 추진하고 있는 모든 시놉시스와 투자 물망에 올라 있는 것까지의 정보 일체였다. 여기에 잘 보이려고 작정했는지 형빈이 추가 자료를 가져왔다.

경쟁사에서 준비하는 영화의 투자성과 배우 일람.

‘이건 지나칠 정도인데.’

나는 영화에 투자를 할 투자자다. 그런 사람에게 경쟁사의 영화 그것도 시놉시스는 물론이고 투자의 가능성과 물망에 오른 배우들 목록까지 정리가 된 자료를 준다? 이건 걸리면 퇴사 정도가 아니라 법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자료다.

가만히 보자 그가 헛웃음이 나오는 대답을 했다.

“영탁이 형 총군주님이신데요. 저희 영화를 믿고 투자해주신 분이기도 하고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이에요.”

신뢰감 가득한 웃음을 보며 두 가지를 느꼈다.

아는 사이와 우연한 도움을 다시없을 인연으로 믿고 행동하는 순수한 열정.

그리고 인맥으로 내부 정보를 전달해줄 정도의 어리석음이었다.

‘계약서 없이도 보증 서 줄 녀석이려나. 영탁이를 보고? 아니면 내 뭘 보고 이러는 건지.’

악용하거나 등을 칠 생각은 없다만, 저 청춘이 새삼스럽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역시 꿈 속 미래를 통해서 내 사상이 낡아빠진 탓일 것이다.

“그래.”

긴 말을 하지는 않았다.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자료를 감추고 나왔다.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벌써요? 이제 막 오셨는데? 촬영도 좀 보시고 그러시지 않으시고요?”

“저도 일을 해야 하니까요.”

촬영장 사람들에게 빠르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만에 처음의 이방인을 보던 시선 대신 모든 스태프가 ‘먼 길 조심해서 가세요’라는 인사를 할 정도로 환대 받으며 돌아갔다.

< 맞다, 그게 있었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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