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144화 (144/577)

< 맞다, 그게 있었지 >

-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 됩니다. 삐 소리 이후 통화료가 부가됩니다.

단단히 각오했는데 김이 빠져버렸다.

‘어떡하지? 무슨 회의 중이시려나?’

연이어서 다시 걸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담덕보다 덜 무섭다고는 해도 총군주 역시 무게감이 대단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탁해야 하는 처지에 상대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좋지 않았다.

‘어휴. 내 인맥하고는······.’

다른 누구를 찾아야 되려나, 하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영탁이 다시 전화를 걸지도 못하고 포기하기에는 아쉬워서 이래저래 고민하자 김형빈이 이해한 다는 듯이 말했다.

“전화를 안 받나 봐요?”

“응. 이 형님은 진짜 가능성 높은 형님인데······.”

“총군주라는 분이 엄청 부자이신가 보죠?”

“말도 마. 엄청나게 부자셔. 그 형님에게 3억은 돈도 아니야.”

자기 자랑처럼 좋아하며 호언장담하는 모습에 형빈이 웃으며 되물었다.

“정말요? 뭐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돈이 많아요?”

“이 형님? 들으면 깜짝 놀랄 걸? 이 형님으로 말하자면···”

신이 나서 태식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던 영탁이 돌연 입을 닫았다. 정모 중에도 어지간하면 신분을 밝히지 않으려고 했었고 비밀을 지켜달라고 당부하던 모습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물론 형빈이 자신의 말을 어기고 소문을 내리라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단지 영탁이 정말 믿는 동생에게 이야기하듯이 형빈도 정말 믿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소문이 퍼지면 대다수가 알게 된다.

영탁은 고개를 휘휘 흔들고는 입을 닫았다.

“형, 왜 말을 하시려다 말아요?”

재촉하자 영탁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우리 길드가 서버 전체의 모든 성을 차지한 길드야. 그리고 그 길드의 총 군주님이라니까? 한 달 수입만 해도 몇 천 만원은 거뜬하시다고.”

“게임으로 한 달에 몇 천 만원을 번 다고요? 에이. 말도 안 돼.”

“짜식이 뭘 모르네. 야, 넌 영화사에 있는 녀석이 뉴스도 안 보고 사냐? 뉴스에도 나와서 엄청 유명한데.”

“진짜에요?”

“그럼. 진짜지. 이런 거로 거짓말하겠어? 우리 총군주 형님이 진짜 레전드라고. 현존하는 게임계의 전설 그 자체이신 분이야.”

“아~ 예에~ 예. 플레지의 지존이자 전설이신 분이라고 접수 완료했습니다~”

“게임계의 전설이라니까?”

“형. 한국에 게임이 플레지 하나인 줄 아세요? 더군다나 서버 하나에서 최고라면서요. 그거 가지고 게임계의 전설은 오버라고 봅니다.”

“아닌데··· 아아··· 답답해.”

“아이고. 제가 답답하죠. 뉴 온라인이라고 한 번 해보세요. 플레지 못잖게 재밌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그게 그거라니까?”

“아니 그게 뭐가 같아요?”

제삼자가 들으면 횡설수설하게만 들리는 대화를 한창 하는 그때, 형빈의 전화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화면에 떠오른 발신차 번호를 보고는 영탁이 눈을 크게 떴다.

“어? 어? 어?”

“왜요? 전화 오잖아요. 줘 봐요.”

“아냐! 이거 내 거야.”

형빈은 자신의 전화기니까 자신에게 온 것이라 생각하고 전화를 돌려받으려 했는데, 영탁이 팔을 들어 막아내고는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윤태식이었다. 영탁은 두 손으로 전화기를 맞잡고는 공손하게 꾸벅 인사했다.

“형님. 안녕하셨습니까! 저예요. 치명타!”

- 치명타? 아··· 현탁이?

“아이고. 형님, 또 제 이름 까먹으셨네. 영탁이라고요. 심영탁.”

- 하하하. 그래 영탁이. 알았다. 무슨 일이야?

여유가 넉넉하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아직 아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희망이 있음을 느끼며 차분하게 말했다.

“형님. 제가 진짜 이런 부탁을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혹시 영화 투자가 가능하신가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 영화 투자? 설마 네가 출연하는 영화냐?

딱 들어도 자신이 출연한다면 신경써줄 것이라는 의도가 틀림없었다. 영탁은 여기서 거짓말을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사실 대로 말하는 편이 나았다. 그저 마음만은 감사하게 받을 따름이다.

“아니요. 제가 출연하는 영화는 아니고 아는 동생이 있는 영화사에서 제작하는 영화인데요.”

- 이미 제작 중이라고?

“네.”

영화 투자는 일반적인 투자와 다르다. 일단 영화에서 수익이 나게 되면 투자자들이 투자한 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때 지급받는 순서는 영화에 투자한 순서대로였다. 그러니 나중에 투자하면 배당 순서가 후순위로 밀리고 그만큼 수익을 보기 어려울 확률이 높아졌다. 이런 식의 불리한 구조를 가지는 계약이 대다수이기에 이미 제작 중인 영화라면 투자를

꺼리게 된다.

아는 동생 하나 돕자고 무례한 부탁을 하는 것이니 반문이 들어오는 것은 실로 당연했다.

- 이해가 안 가는데? 네가 출연한 것도 아니고, 네가 관련 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가 좋아서 투자를 원한다? 이유가 뭐야?

‘이유?’

영탁에게 있어 태식을 납득시킬만한 이유가 있을 리가 없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그때 태식이 말했다.

- 설마 아무이유도 없이 그냥 아는 동생이 곤란해서 연락한 거냐?

“그게··· 어··· 그러···네요······.”

헛웃음이 들렸다. 영탁이 또 안 됐구나 싶은 그때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 알았다. 그래, 어떤 영화인지나 들어보자.

단칼에 끊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영탁은 휴대폰 아랫부분을 양손으로 감싼 채 형빈에게 물었다.

“형빈아. 기회야. 이거 못 잡으면 쫑이다. 출연 배우 이름이 어떻게 돼?”

“배우요? 말한다고 알 사람들이 아닌데요.”

“그래도 빨리!”

영화를 투자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따지는 것이 무엇일까?

흥행할 만큼 뛰어난 시나리오?

아니다 배우와 감독이다. 뛰어난 시나리오보다는 흥행보증수표로 유명한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가 훨씬 투자 유치에 용이하다. 그런 면에서 형빈의 영화가 여기저기에서 소위 말하는 ‘까인’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저예산인 영화에 그런 배우가 있을리 없잖아요. 그냥 주연으로 아이랑 할머니가 나오시는데 아역은 유성호, 할머니는··· 누구시더라? 성함을 까먹었어요.”

영탁은 지금 이 영화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를 채근하듯이 윤태식이 말했다.

- 영화 제목은 뭐야? 스토리는?

“그러니까 출연자가 할머니신데··· 네?”

- 지금 제작 중인 영화 제목이 뭐냐고. 아직 제목 안 뽑았어? 가제인가? 그럼 영화 내용이 어떻게 되는 지라도 얘기해봐.

예상외였다. 일반적으로 궁금해 하는 출연자는 질문조차 없다. 영탁은 형빈에게 물어가며 중간 전달자로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소리 듣고 말았다.

- 영탁아.

“네?”

- 너 계속 ‘거래요.’ ‘하다는데요.’라면서 옆의 친구에게 물어봐서 대답할 거냐? 부탁한다면서 본인조차 내용을 몰라? 그런 상태로 전화를 했어?

“저··· 그게··· 죄송합니다.”

그제야 술기운에 실수했다는 사실을 크게 느꼈다. 영탁이 꾸벅꾸벅 사죄했다. 그리고 튼실한 동아줄이 내려왔다.

- 됐고, 매번 물어보고 대답하니까 버퍼링이 너무 길어서 답답하네. 너 지금 어디야? 보고 얘기하자.

“네? 아! 네. 여기 대학로입니다! 위치는···”

가장 명확하고 또렷한 발음으로 설명했다.

*

한편, 윤태식은 전화를 끊으며 안도했다.

“깜짝 놀랐네. 영탁이가 출연하는 영화중에는 성공한 게 없었다고.”

들어나 본다는 생각의 결정적인 이유는 심영탁이 나오지 않는 작품이라서다. 그가 알기로 심영탁이 유명해진 시기는 지금이 아니었다. 한참 뒤였고 그나마도 영화 때문로 유명해지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윤태식은 이 부분에서 합격이점을 줬다. 또한, 회사 일로 정신없는 와중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오늘 떠올리게 됐다. 바로 돈 있는 사람으로서 영화라는 상품에 투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이건 빠삭하게는 알지 못해도 대박난 영화 정도는 충분하게 아는 분야라고. 알고 싶지 않아도 미디어에서 원체 떠들었어야지. 나도 가만히 보면 알토란같은 미래 정보들을 꽤 많이 알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문제는 지금이 2001년이라는 거구나.’

투자라는 것이 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영화 투자는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이 딱 맞는 분야였다. 잘 되면 대박이지만 잘못 되면 완벽하게 쪽박을 차고 만다. 게다가 2001년인 지금은 영화 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이기에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나마 큰돈이 들어가며 활성화하던 것도 ‘성녕팔이 소녀의 강림’이라는 재앙 때문에 위축되지 않았던가.

‘이것만 아니었으면 한국도 SF볼모지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어쨌건 들어나 보자. 얼마나 답답하면 나한테 연락을 해줬겠어?’

윤태식은 친분으로 무조건 투자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직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한 마당이고 사람에게 투자하는 거라고 해도 안 될 곳에 돈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뜻밖의 수확이면 얘기는 달라지지만. 가만있어보자··· 2001년에 뭔 영화가 있었더라?’

회사가 있는 강남에서 대학로까지는 거리가 꽤 됐다. 운전대를 잡고 가속페달을 밟으며 꿈 속 미래를 되짚었다.

이윽고 약속 장소인 대학로 술집에 들어가자 손을 번쩍 들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여기에요!”

그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영탁이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맞은편에 있는 형빈은 얼굴이 벌겋게 된 모습이었다.

잔뜩 취한 상태다.

영화에 대해서 설명해줘야 할 친구가 고주망태라서 걱정이 됐지만, 영탁이 얼굴을 보고 온 자리 아니겠는가. 윤태식은 빈 자리로 갔다.

심영탁이 일어나서 의자를 빼어 주었다.

“형빈아 인사해. 우리 길드 총군주님이셔.”

“김형빈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그냥 영탁이 아는 형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네.”

통성명 이후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제가 시간이 많지 않아서 그럽니다. 영화에 대해서 설명을 바로 들었으면 좋겠는데, 괜찮지요?”

“예. 괜찮습니다.”

확실히 열정이 있는 분야는 다른가 보다. 형빈이라는 친구는 당장 죽을 것 같은 얼굴에서 눈에서 빛을 내며 열정적으로 말했다.

“일단 영화 내용이 어떤 내용입니까?”

“시놉시스를 간략하게 설명 드리자면, 여름동안 시골 할머니 집에 맡겨졌던 도시의 아이가 시골에 적응하지 못하고 말썽만 피우다가 점점 할머니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결국 할머니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을 담은 영화입니다.”

‘아이와 할머니?’

윤태식은 시놉시스를 듣자마자 바로 한 편의 영화를 떠올렸다. 직접 관람하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던 대박 영화 중 하나였다.

기대감을 안고 물었다.

“영화 이름은 뭡니까?”

“아직 영화의 이름은 정하지 못했습니다. 저희끼리는 ‘할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보통 영화가 본격적으로 상업화 될 때, 이름을 짓는 것들이 많다. 아마 이 영화도 그런 것 같으니 일단 이름으로 내가 생각하는 영화가 맞다고 판단하긴 어렵다.

‘대충 시기적으로는 맞는 것 같은데.’

확인해보기로 했다.

“출연 배우는 누가 있죠?”

“그게.”

곤란한 얼굴로 영탁을 보았다. 불안한 시선을 보며 재차 물었다.

“영탁이가 출연 안 하는 건 확실한 거죠?”

“···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떨어뜨렸다. 친분을 통한 투자가 어려워졌다는 생각에 좌절한 모양이지만, 윤태식으로서는 ‘그래서 투자한다’였다.

“아역 배우의 이름을 알려줄 수 있습니까?”

“유성호라고 합니다. 이번 영화가 처음이라 들어보신 적은 없으실 겁니다.”

‘브라보!’

내심 쾌재를 불렀다.

유성호.

저예산 영화인 ‘도시로’를 통해 데뷔한 후 내내 승승장구하는 배우다. 그의 승승장구에는 바로 이 영화의 대박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더 들을 것도 없이 이것만으로 투자는 결정 났다.

“재밌겠군요. 얼마가 필요합니까? 투자 후의 수익 분배는 어떤 방식이지요? 계약서는 가지고 계십니까?”

관심을 크게 보이자 상대가 당황했다.

“네? 어··· 저기··· 그··· 오늘은 그냥 영탁이 형이랑 술이나 한 잔 하려고 나온 거라서······.”

“그럼 나중에 계약서 준비하셔서 연락 주십시오. 필요한 투자금은 그때 들을 수 있는 겁니까?”

“어어··· 진짜 하시게요?”

“설마 가짜이겠습니까.”

너무 아무렇지 않게 투자 결정이 나서 그런 것일까. 영탁도 형빈도 어벙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투자금을 제가 얼마나 준비해야 합니까?”

윤태식이 적당히 말을 끊어서 다시 질문했다. 그제야 정신 차린 형빈이 더듬거리며 대답을 잇는다.

“저··· 3억··· 아니··· 2억이라도···”

“정확하게 말씀해주시지요. 3억입니까, 2억입니까?”

“3억. 3억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두 분이서 기분 좋게 마시고 나중에 계약할 때 다시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윤태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는 시간보다 더 짧게 앉아 있다가 일어났지만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목적은 술자리가 아니라 영화였으니까.

“어어··· 가시네요? 그냥 확?”

“역시 우리 총군주님. 단칼이시네.”

뒷모습만 보고 있던 형빈이 영탁에게 물었다.

“진짜? 진짜 이거로 투자가 결정 난 거 맞는 거예요? 아냐. 이래놓고 막상 계약서 꺼내면 없던 일로 하자는 분들이 부기지수니까··· 기대하면 안 돼. 정신 차리자.”

“형빈아. 그럴 필요 없어. 저 형님이 투자 한다고 하셨으면 하는 거야. 3억 때문에 말 바꾸고 그러실 리가 없어.”

“형 진짜죠?”

“진짜라니까? 내가 감히 말을 꺼내기 좀 그래서 말해주지는 못하는데, 저 형님 진짜 대단하신 분이야.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이 영화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다 투자하는 것도 어렵지 않으실 걸?”

“와아··· 대박.”

형빈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반신반했다. 영탁은 괜스레 어깨를 으쓱하며 술을 마셨다.

“안주도 시켜먹자!”

“좋아요!”

이번 술맛은 쓰지 않았다.

< 맞다, 그게 있었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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