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137화 (137/577)

< 파푸니르 >

단순히 얼굴만 마주하러 가는 것은 아니다. 일단은 안사락스를 사냥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 어디까지 통하는가를 확인해 볼 계획이다.

“우리끼리 갈 거 아니고 레이드 팀원들 다 같이 갈 거야. 엘프들한테 가스트 준비해서 오라고 해.”

“그래? 엄청 느려지겠네.”

가스트의 독은 보스 몬스터를 침묵시켜서 스킬을 봉쇄하는 효과를 자랑한다. 안사락스 레이드에 빠질 수 없는 최고의 패인 셈.

하지만 걸음걸이가 매우 느렸다.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동안에 고구마를 백 개쯤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을 느껴야 할 정도다.

‘그래도 가스트가 파푸니르의 스킬도 막을 수 있다면 빼놓을 수 없지.’

느려서 속 터지는 것이 미흡한 준비로 실패하는 일보다 백번 나았다.

40분 즈음이 지났을 때, 아바롤의 앞에 모든 멤버가 모였다. 매지션에 비해 테이밍의 성공률이 낮은 엘프들이라서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 구운몽 : 아바롤의 축복은 1개에 30분간 효과가 유지되고 2개까지는 축적됩니다. 그러니 일단 두 개를 미리 복용하고 보조용으로 4개를 챙겨서 움직이도록 합니다.

- 분노의활질 : 옙.

- 구두룡검 : 알겠습니다.

- 악마혈 : 오래간만에 다함께군요.

- 지옥검 : 창립용사들의 부활!

새로운 영지가 생겨났다고는 해도 여전히 최고의 사냥터는 용의 협곡이다. 경쟁 길드인 올포원을 비롯한 고레벨 유저 상당수가 협곡에 머무르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전처럼 안사락스 레이드를 숨기기 위해 싸움을 거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고 창단멤버 전원이 레이드 팀에 참여할 수 있었다. 덕분에 과거 안사락스에 비해서 두 명이나 참가인원이 많았다.

- 구운몽 : 지금부터 수중 던전에 입장입니다. 아바르의 축복 모두 복용하시고! 이곳의 몹들은 보상이 짭짤하니까! 다 잡으면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 세이하 : 짭짤하시단다!

- 지옥활 : 돈 냄새가 나는구낫!

파푸니르의 위치는 수중 던전의 절벽 동굴이다. 보스 몬스터인 만큼 그곳으로 가는 동안 수생 몬스터들인 일렉 아구아나 청상어 등을 만날 수 있는데 이 녀석들 모두 초기에는 축복받은 마법석을 드랍했다.

‘너무 많이 뿌려져서 나중에는 밸런스 수정을 할 정도거든. 그러니 극 초반에 꿀을 제대로 빨아야지.’

모니터 속 캐릭터보다도 거대한 몬스터들을 모두 사냥하며 지났다. 이윽고 기대했던 보상을 청상어가 안겨주었다.

- 지옥검 : 오! 축무석 득템!

- 좌호법 : 이미 이런 것까지 꿰고 계시다니! 역시 주군이십니다!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말을 할 것까지야······.’

- 범 : 형님. 레이드 팀으로 이동하다가 득템한 거니까 나누는 거죠?

- 지옥검 : 야이~ 용 만나러 가면서 그런 말로 부정 타게 할 거냐?

- 범 : 와! 지옥검 형님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개 치사······

- 검 : 귀엽고 충성심 높은 개를 어디다 빗대냐? 개한테 사과해라.

- 범 : 죄, 죄송합니다!

- 검 : 그래. 지옥검 저 녀석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불쌍한 3인자라서 혼자 다 처먹고 싶은 거니까, 그냥 줘 버려. 불쌍하잖냐.

- 범 : 네!

- 지옥검 : ···어이?

저마다의 캐릭터들이 움직이면서 머리 위로는 장문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 지옥검 : 뭐냐? 나 가만히 있었는데 두드려 맞다가 끝났어? 어이! 2인자는 누가 기억해주는 줄 알아?! 원래 대한민국은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거든?

- 검 : 그래. 그래. 3인자 입장에선 그렇게라도 말하고 싶겠지. 이해한다.

- 지옥검 : 아! 열 받아!

그렇게 둘은 파푸니르가 있는 동굴에 입장할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팀원들은 검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처음 봤기에 둘의 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보았고 파푸니르의 동굴까지 심심할 틈이 없었다.

역시 아무리 과묵한 타입이라고 해도 친한 사이에다가 놀려먹을 거리가 있을 때는 저렇게 유쾌해지는 모양이다.

푸른 물로 가득한 화면 속 던전. 수룡 파푸니르를 만날 수 있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나는 팀원들을 추슬렀다.

- 구운몽 : 지금부터는 어디서 갑자기 파푸니르를 만날지 알 수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사망하지 않도록 특히 준비하고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 범 : 존명!

모두가 긴장한 모습으로 한 칸, 또 한 칸을 조심스레 이동했다.

우리는 안사락스를 백여 차례나 공략한 베테랑 드래곤 슬레이어들이다. 그러나 안사락스 조차도 한 번의 방심으로 사망에 이르기에 십상이고 실제로 그런 팀원들이 심심찮게 나오는 중이었다. 당연히 거보다도 강력하다고 자부하는 파푸니르이니 신중히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화면이 흔들렸다.

“야. 저거 우리 인식한 거 맞지?”

“어. 발견했나봐.”

아직 파푸니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게임 속 공간이 떨리는 것은 파푸니르의 가시 범위가 화면 밖에 이를 만큼 넓고 레이드 팀원들을 확인했다는 의미였다.

“나왔다!”

“오오!”

긴장감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던 진수와 성찬이가 즉각 반응했다. 시야에 들어온 푸른색의 거대한 동체. 바로 수룡 파푸니르였다.

안사락스가 육식 공룡과 비슷한 형태로 이족보행을 했다면 파푸니르는 사족보행을 하는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또한 깊은 물속의 드래곤이라는 특성을 알리기 위해서인지 귀 대신 아가미가 달렸고 지느러미 또한 곳곳에 존재했다.

- 구운몽 : 나타났습니다. 엘프들 그리고 매지션들. 충분히 거리를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파푸니르의 던전은 드래곤이 여유 있게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널찍한 통로 형 동굴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광장형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아무리 대형 보스 몬스터가 이동할 만큼 넓은 곳이라 해도 통로형 던전은 꼬불꼬불할 수밖에 없다.

즉, 지형 때문에 우리를 보고도 스킬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것은 강력한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내 위치를 아군으로부터 힐을 받을 수 있는 곳, 하지만 파푸니르가 아군 매지션을 공격하기 어려운 곳으로 정해야 했다.

- 구우몽 : 제가 먼저 자리 잡습니다. 일단은 격수들도 거리 유지해 주세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린 뒤 이동했다.

‘좋아. 자리 잡는 건 안사락스보다 훨씬 안정적이야.’

잠시 후, 파푸니르가 나를 공격할 수 있는 범위로 들어왔다.

그리고 곧장 브레스를 뿜었다. 구운몽의 체력이 순식간에 반 토막 났다.

일직선으로 쫙 뻗어져나가는 모습이 흡사 레이저 같았다. 머리를 흔들면 좌우로 반경이 넓어지니 공격 범위도 상당했다.

‘운 나쁘게 공격 가능한 지형에서 만난다면 보자마다 원 패턴으로 쓸려버릴 수 있다는 뜻.’

나야 아는 부분이었지만 이번을 봄으로써 팀원들도 잘 인식했을 것이다. 특히 안사락스의 브레스는 녹색 안개와 흡사해서 직관적이지 못했지만 파푸니르는 상반되어서 더 강하게 여겨졌다.

진수와 성찬이가 내 화면과 자신들의 것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 모니터에는 보이지도 않는 위치인데 브레스는 닿는단 말이지?”

“사거리 쩌네. 쩔어.”

어찌 됐건 원거리용인 브레스가 지나갔으니 남은 일은 구운몽이 근접해서 공격형 탱커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운영진의 장담은 과연 이유가 있었다.

특수 스킬이라고는 브레스 하나뿐이었던 안사락스와 달리 파푸니르는 두 번째 무기를 발동했다.

- 파푸니르 : 하찮은 것들! 잔재주 따위 피울 생각 마라!

『파푸니르의 용언으로 혀가 마비되는 것을 느낍니다.』

‘이게 벌써?!’

내가 기억하는 용언과는 대사나 방식이 다소 차이를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용언이라는 스킬 자체는 무려 4년 뒤에나 나왔다. 본래 시기보다 많이 앞당겨져도 한참을 앞당긴 변화였다.

‘한 창 개발 중이던 마법을 파푸니르를 통해서 사용한 거구나.’

패치 시기의 차이였을 뿐 플레지는 자체적으로 클래스당 5개의 마법을 8개로 확장하는 작업을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완성해 두었던 고급 마법 중 하나를 드래곤에게 추가하여 선보인 것이다.

고급 마법이자 적을 침묵시키는 마법인 사일런스는 걸릴 시, 채팅은 물론이고 스킬까지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를 범위에 속한 모든 대상자들의 스킬을 봉쇄하는 용언의 형태로 발휘했다.

‘머리 잘 썼네. 꿈속 미래의 패치 방식과는 완전히 달라.’

간석동 사무실에서 같이 해서 다행이었다. 회사에서 접속했다면 의사소통이 안 돼서 답답했을 것이다.

“뭐야? 우리도 범위 안에 있었으면 힐 못 줄 뻔했던 거야?”

“그렇지. 나 침묵이라 말 안 되니까 너희가 대신 말 좀 해줘.”

“알았어.”

진수가 타이핑 준비를 했다.

“일단 격수보다는 엘프들을 붙여. 우리도 저놈한테 침묵을 걸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해.”

- 황성찬허좁 : 일단 엘프들 먼저 붙어서 가스트로 독부터 걸어 볼게요!

다들 공성전과 레이드의 베테랑들이다. 이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았다. 느릿느릿한 곱추 몬스터인 가스트들이 파푸니르에게 다가갔고 나는 드래곤과 근접전을 유도하며 시선을 끌었다.

“평타는 안사락스보다 약해.”

공지보고 굉장히 상향시켰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맞을 만 했다. 이 뜻은 브레스 한 방에 줄줄이 사망하지만 않는다면 큰 위기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 쿠와아아아!

“오. 브레스 위력을 생각하기 무섭게 바로 쏘네.”

용의 입에서 뿜어져 나간 레이저. 가스트를 파푸니르에게 붙이기 위해서 스킬 범위에 들어와 있던 엘프들 전원이 단 일격에 빈사 상태까지 떨어졌다. 실금처럼 남은 저들의 체력 수치는 50조차 되지 않을 정도!

“엘프들 완전 식겁했겠는데? 마방 높은 엘프가 저러면, 격수도 그냥 나가리겠어.”

“이걸 맞고도 체력이 반 피 이상이 남다니··· 넌 진짜 괴수다. 괴수야. 이야. 너 혹시 이거 혼자서 사냥할 수 있는 거 아니냐?”

“지금까지 본 게 전부라면, 아마도 그럴 듯?”

현재 별다른 회복마법을 받지 않는 채로 버티는 중이었다. 일반 공격이 너무도 만만한 정도라서 만약 물약만 무한하다면 능히 1대 1로 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운영진이 그렇게 자신 있게 공지를 올렸을 리 없지. 분명 뭔가 더 있을 거야. 긴장 놓지 마.”

“알았다~”

브레스 몽땅 사망해버린 가스트들을 부활의 돌로 살렸다.

다시금 느릿느릿 전진!

- 쿠와아아아!

또다시 모두를 직격하는 브레스.

어기적어기적 다가가던 가스트들이 모두 쓰러졌다. 부활의 돌로 되살렸고 바짝 붙도록 지시하였다.

‘아이템 쓰는 유저를 몬스터가 어떻게 이기겠어?’

게임이라는 게 그렇다. 제아무리 강력한 몬스터도 부활하며 물약을 먹어대는 플레이어를 어찌할 수는 없다. 가스트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듯이 한 걸음씩 가까워졌고 마침내 근접해서 파푸니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됐다! 침묵에 걸린다! 이러면 게임 끝이지.”

“좋았어! 이건 뭐 공략 시도고 뭐고 바로 잡겠네!”

침묵에 당하면 딱히 지휘가 필요 없어진다. 버로우만 없다면 안사락스를 10분 이내에 녹여버리는 팀원들이 신바람 나게 달려들었다. 격수는 물론이고 매지션들마저도 모조리 공격이다.

그 점이 의문스럽다.

‘운영진이 이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브레스는 강력하지만 엘프마저 즉사하지 않고 버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침묵의 용언 역시 귀찮지만 물약은 여전히 사용 가능했다. 이 모든 것은 매지션이 지형을 이용해서 피하기만 하면 큰 타격을 입지 않기도 한다. 가장 결정적인 것이 가스트의 독이다. 침묵이 걸린다면 드래곤은 그저 체력이 아주 많은 부자 몬스터에 지나지 않는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사실 뻔한 거였다고.”

“쟤네가 무슨 엄청난 걸 준비해봐야 똑같아. 탱킹 되는 너랑 마법을 못 쓰게 하는 가스트가 있잖아. 그냥 운영진이 우릴 깔본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만.”

그때였다. 일정 시간 파푸니르를 공격하고 있던 도중에 화면이 흔들렸다.

- 파푸니르 : 감히! 이 하찮은 것들이!

침묵에 걸려서 스킬은 물론이고 말도 할 수 없어야 하는 파푸니르가 갑자기 메시지를 띄웠다.

“어?”

“침묵 풀렸어!”

시간이 되어서 풀린 느낌이 아니었다. 게다가 가스트는 지금도 여전히 공격하는 중인데 재차 걸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구나.’

일정 체력 이하로 떨어지면 모든 디버프를 삭제해버리는 게 틀림없었다.

- 파푸니르 : 하찮은 것들에게 위대한 존재를 대해야 하는 방법을 알려주도록 하지.

- 파푸니르 : 무릎을 꿇어라, 이 벌레들아!

『알 수 없는 불쾌함이 당신을 감싸는 것을 느낍니다.』

전원의 머리 위로 물약과 마법석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애니메이션이 나타났다.

‘젠장. 부패다.’

어떤 회복 물약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마법.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회복물약을 부패시키는 스킬이었다. 만약 이 부패 상태에서 물약을 사용하면 물약은 체력을 회복시키는 대신에 갉아먹는 역효과를 발휘했다.

문제는 나를 제외한 레이드 팀원 그 누구도 이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진수야. 모두에게 물약 쓰지 말라고 해!”

여전히 말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재빨리 지시했다. 하지만 파푸니르는 물약을 쓸 수밖에 없는 처지로 팀원들을 몰아갔다.

- 파푸니르 : 하찮은 것들아. 꺼져라!

파푸니르가 발을 굴렀다. 엄청난 물보라가 일어났고 레이드팀 전원의 체력이 20%이하까지 급속 하락했다. 여기서 유저는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회복을 위해 물약을 클릭하는 것.

읔!

으악!

크억!

무더기로 쓰러졌다.

“망할! 내 경험치!”

“곧 렙 50이었다고!”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전멸해버렸다!

‘호언장담할 만하네. 이러면 용언이 뭔지 알 때까지는 계속 죽는 수밖에 없잖아.’

본능적으로 체력이 떨어지면 물약을 사용하는 것이 플레지 유저이니 부패의 용언은 참으로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부패의 용언을 썼다는 건 역류의 용언도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 이건 2010년에나 나오는 건데··· 앞당겨도 너무 앞당긴 거 아니냐.’

부패가 포션을 뒤집는다면 역류는 마법을 변질시킨다. 역류에 당한 캐릭터가 버프 마법을 사용하면 그 수치만큼 오히려 디버프가 걸린다. 마찬가지로 힐을 사용하면 치유 대신 체력이 그 수치만큼 줄어든다.

‘귀환!’

혼자 살아남아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죽었다 깨어나도 방법이 없다. 뒤돌아볼 것 없이 바로 도망쳤다.

‘이렇게 발 빠르게 진화하는 회사가 왜 오토 플레이어들한테는 엉망으로 대응한 거냐고.’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건, 이런 식이면 강력함 하나만 믿고 싸워서는 답이 없었다. 파푸니르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공략을 팀원들에게 가르쳐서 다시 와야 한다.

< 파푸니르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