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캐릭터 확장
본래의 역사대로라면 뉴 온라인은 2001년 5월에 오픈베타 서비스를 시작하지만 바뀐 현실에서는 2000년 12월에 스타트했다.
예정보다 5개월이나 빠른 시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참 시간을 앞당겼음에도 2001년 5월에 오픈베타를 실시했던 본 역사와 비교하여 손실된 콘텐츠는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예산과 사람을 충분하게 지원했으니까. 정말이지 누구 하나가 희생해서 대단한 결과를 이뤄내는 것을 왜 그렇게 열광하는 거냐고. 구경할 때만 좋지 갈려나간 당사자는 피가 말랐을 텐데.’
소위 표현하는 ‘공돌이를 재촉하여 갈아 넣는’일 없이 업무량만큼 직원을 추가 채용하여 투입했다. 덕분에 본래 역사에서 ‘뉴 온라인은 슈퍼컴퓨터로 돌려도 렉이 걸릴 거다’라는 말과 최적화가 아닌 ‘개적화’로 표현하던 게임은 완벽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상식적으로 보면 최적화를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잖아.’
최적화는 목적에 따라 가장 좋은 결과가 얻어지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게임에 적용하면 ‘최소한의 성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각 기능들을 세분화해서 최하의 옵션부터 최상의 옵션까지 다양한 선택을 올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이 해당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콘솔과 PC의 차이 때문이다.
콘솔 게임은 기기의 성능과 한계가 명확하다. 반면에 PC는 각 가정에 보유하고 있는 컴퓨터 마다 상이한 성능을 갖고 있다. 때문에 각 컴퓨터의 사양에 맞춰서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도록 제작하는 것은 PC게임 업계의 가장 큰 숙제다.
‘쉽게 봐서 권장사양으로 즐길 수 있으면 최적화 성공. 아니면 실패!’
기존 역사에서의 뉴 온라인은 이 부분에서 완벽하게 실패의 외길만을 줄기차게 달린 끈기 있는 마라토너였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본래의 뉴 온라인은 기획자와 서버담당자를 포함해서 총 4명이 제작한 게임이다. 그것도 몇 달 만에 단기로 제작했다. 이런 상태에서 최적화까지 깔끔하게 해치우는 능력자는 지구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문제는 이러한 사정을 소비자가 감안하고 이해해주면서 기다려 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과정보다는 결과!
노력보다는 실적!
슬프도록 냉정하지만 사회에서 이것만큼 진실인 명언도 드물다. 그리고 ‘노력했지만 아깝게 실패했다’는 위로 대신 축배를 들기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고 오늘의 성공적인 오픈베타를 이루었다.
첫발을 잘 내딛은 것이다.
이제 정식 서비스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다음 스텝을 밟을 차례다. 캐릭터 확장
‘제대로 게임을 완성하자.’
뉴 온라인이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게임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보다 완벽한 최적화.
급속도로 고사양의 PC가 보급되고 있는 만큼 이에 발을 맞춰야 한다.
둘째는 콘텐츠 확보다.
‘뭐가 좋을까.’
콘텐츠는 게임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흔히들 사냥과 전투, 채집과 생산의 게임 내 요소들을 콘텐츠라고 하는데 여기서도 한국과 국외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는 전투와 사냥이 가장 중요한 콘텐츠다. 반면에 국외에서는 스토리를 우선적인 콘텐츠로 여긴다.
만약 스토리가 좋고 게임성이 떨어지는 게임과 게임성은 좋지만 스토리가 떨어지는 게임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준다면 한국인은 십중팔구 스토리는 떨어져도 게임성이 좋은 것을 선택한다.
이는 온라인 게임의 최고 요소를 게임 내의 스토리가 아닌 유저들 간의 상호 소통으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가 뉴 온라인에 추가해야 할 콘텐츠는 게임성이야.’
이곳이 한국이고 국내 시장에서 정식 오픈을 했을 때 제대로 성공하기 위한 선택!
내가 정한 콘텐츠는 바로 신규 직업이었다.
본 역사에서 뉴 온라인은 초반의 돌풍과 달리 흥행에 실패하였고 그 다양한 이유 중 하나로 캐릭터의 부족이 손꼽힌다.
다크나이트, 다크메이지, 엘프. 단 세 가지의 클래스만을 가진 게임이었기에 오래지 않아서 단조로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스펠 블레이더를 쓸 수는 없지.’
다크나이트와 다크메이지의 하이브리드형 캐릭터인 이 클래스는 기존의 캐릭터를 220레벨까지 키우고 나서야 생성할 수 있는 특수 캐릭터였다. 사실상 뉴 온라인을 최고 전성기로 견인한 클래스인데 이 직업에는 문제요소가 매우 많았다.
다른 캐릭터가 레벨업당 5의 스탯을 획득하는 것과 달리 7의 스탯을 획득하는 것부터 비롯하여 이래저래 밸런스를 무너뜨린 탓이다.
‘뭐가 좋을까··· 아!’
대표 이사실에서 볼펜을 돌리던 내 뇌리에 하나의 아이템이 퍼뜩 떠올랐다. 얼른 종이에 적었다.
“마나 회복 지팡이!”
아직은 업데이트 되지 않은 플레지의 아이템.
2001년 중반에 등장하는 매지션의 중흥기를 만들어줄 소재이자 모아두면 돈이 될 투자상품의 이름이었다. 내가 뉴 온라인에 써먹을 아이디어는 바로 이 단서로부터 비롯했다.
‘정신머리하고는. 이걸 왜 못 떠올린 거지?’
기력 전환 시스템.
기본적으로 MP가 회복되기는커녕 오히려 감소하는 특성을 가진 캐릭터가 있다. 이를 회복하는 방법은 공격하여 타격을 입힐 때이고 이를 MP로 전환하도록 하는 방식인데, 이는 슈팅 게임이나 대전 격투게임에 흔히 적용된 시스템이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이를 RPG에 적용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넷젠의 핵심 개발자들은 슈팅게임을 개발하던 사람들이니 뉴 온라인에 기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좋아.’
새로운 길을 찾았으니, 이제 회의를 통해서 실무적으로 진행하는 일만 남았다. 생각들을 잘 정리한 뒤 넷젠 개발자들을 호출했다.
“회의를 진행할 겁니다. 스케줄을 잡아보세요.”
- 네. 알겠습니다.
* * *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머인 김성욱은 넷젠에서 뉴 온라인의 오픈베타를 선보이기 직전에 입사한 막내 프로그래머다. 하지만 막내라고는 해도 그의 프라이드는 매우 높다.
‘이런 이름도 없는 회사 따위.’
나름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실력을 가졌고 실제로도 3D엔진부터 클라이언트 개발까지 담당하는 조기웅 팀장의 추천을 받을 정도의 인사이기도 했다. 넷젠이 아니어도 국내에서 내노라하는 게임사에서 러브콜을 보냈을 정도다.
이를 다 무시하고 넷젠에 들어온 이유는 오직 조기웅 팀장 때문이었다. 어찌나 일손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는지 선배의 말을 무시할 수 없어서 잠깐 도와주고자 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중소기업 주제에 감히 나를 고용하다니. 영광으로 알아’라는 심정으로 들어온 넷젠.
그런데 막상 입사해보니 이게 웬걸?
게임은 이미 완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시작한 오픈 베타 테스트는 국내 게임의 모든 역대 기록을 갈아치우는 중이었다.
‘선배한테 빚을 지게 할 심산으로 온 거였는데, 이거 다 완성된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게 되었잖아. 에이, 쪽팔리게.’
조기웅 팀장이 고마워할 상황이 아니라 자신이 폴더 인사를 해야 할 상황이라서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업무들에 치여서 지냈다. 자연스레 머물렀다가 이직할 곳이 아니라 회사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생겼고 넷젠에 대해 이래저래 호기심을 갖고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의문은 회사 대표인 윤태식에 대한 거였다.
‘당최 이 사람이 하는 일이 뭔지를 모르겠어. 얼굴만 비추고 구경하다 가는 놈팡이인데 다들 왜 그렇게 칭송하는 건지 원.’
그동안 김성욱이 경험한 회사 대표들은 늘 어디론가 돌아다니기 바빴다.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기 시작하면 이를 상용화시키기 위해 투자를 받아야하고 이 때문에 대표들은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다녔다.
반면에 넷젠의 대표는 한량 중에서도 한량이다. 대표이자 투자자라고 했으니 자금이 탄탄한 걸까. 여기저기 빨빨 거리며 다니지도 않았고 직원들이 잘 진행하는 것을 보다가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저럴 거면 차라리 다른 대표를 구하는 것이 낫다 싶을 정도다.
‘선배들 말로는 대표님이 없었으면 뉴 온라인이 완성되지 못했을 거라고 하지만 코빼기도 본 적이 없다고. 외려 이 회사에는 식견부터 다른 실력자들이 너무 많아서 이해가 안 갈 정도라니까.’
개발하는 시각부터가 뭔가 다르다. 체계적이고 뚜렷한 방향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를 진두지휘하는 실무자들은 자신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겸손하게 대응했다. 그래서 ‘정말 호구들인가?’ 슬쩍 말문을 떼어보면··· 웬걸!
나름 콧대 높은 자신이 찍 소리 못하고 잡아먹힐 정도였다.
‘무슨 약점 잡힌 사람들도 아니고.’
그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회사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의문만 증폭되어가던 중, 이름도 유명한 윤태식 대표의 메시지가 하달됐다.
“대표님이 회의 하신답니다. 회의실로 모여주세요.”
우르르 이동하는 사람들.
‘드디어 회사의 대표가 뭘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될 기회가 온 거려나?’
조기웅 팀장의 뒤를 따라서 회의실로 향하는 김성욱의 마음은 기대 반 의심 반이었다.
넷젠은 GM을 포함하게 된다면 35명이나 되는 어엿한 규모의 회사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GM은 개발자가 아니기에 개발자만 소집한 이 회의실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때문에 대표를 포함하더라도 8명이 전부인 조촐한 회의가 진행됐다.
김성욱으로서는 처음으로 참여하는 현장!
‘회의의 목적이 뭐려나?’
조용히 관찰하는 가운데 윤태식 대표가 입을 열었다.
“뉴 온라인의 새로운 업데이트를 위해서 함께할 새로운 직원들을 추가 모집할 생각입니다. 추천하실 분들이 있으면 추천해주시고 없으면 채용공고를 하겠습니다.”
‘새로운 직원? 이 사람 재벌 2세인가?’
게임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분야다. 이미 출시해버리고 나면 만사 오케이일 것 같지만, 무형의 상품인 주제에 생각보다 유지보수를 해야 할 것들이 많다. 일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일손이 늘어난다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다.
다만 고깝게 생각하는 중이라서일까. 김성욱의 눈에는 부정적인 요소가 들어왔다.
‘아직 오픈 베타라서 수익도 없을 텐데 직원을 늘리다니. 하여간 있는 놈들의 돈지랄이란. 게다가 개발에는 참여도 하지 않는 대표가 업데이트를 위한 직원들 채용을 무작정 하자고 하냐? 팀장들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아무리 직원이 늘어나면 일하기 수월해 진다지만 이런 막무가내 식의 고용을 팀장들이 쉽게 납득할 리가 만무하다. 특히 임경목 팀장은 ‘저 성격에 직장생활을 어떻게 하지?’ 싶을 정도로 기질이 특이했다.
실제로 자기 기획을 무시하면 상사고 뭐고 다 뒤집어 엎어버린 전례가 수두룩할 정도다.
그런데 웬걸?
“어떤 분야에서 몇 명이나 채용을 하실 계획이신가요?”
아무도 반발이 없다.
“두 명입니다. 새로운 캐릭터 추가를 위한 그래픽 디자이너와 최대한 부드러운 플레이를 위한 프로그램 개발자지요.”
“한창 오픈 베타가 진행 되고 있는 지금, 새로운 캐릭터를 위한 디자이너를 급히 고용하신다는 것은 정식 서비스와 함께 신규 캐릭터를 추가하시려는 계획으로 보입니다.”
“맞습니다.”
“잠시 저희끼리 상의를 좀 해도 괜찮겠습니까?”
“하세요.”
대표이사의 계획을 듣자마자 각 팀장급들이 급히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약 20여 분간의 토의 끝에 임경목 팀장이 말했다. 김성욱은 현실적으로 대표의 생각이 틀렸다는 말을 조목조목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반대였다.
“최대한 시간과 자원을 아끼는 재활용 방식으로는 두 명. 완전히 새로운 것을 원하시면 다섯 명의 고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최적화를 위한 개발자를 추가하시는 건 앞으로 꾸준한 업데이트를 위해 최소 3명 이상의 개발자를 필요로 할 것 같습니다.”
‘뭐냐? 딸랑이였어?’
각 팀장들이 했던 상의는 필요성 유무나 가능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대표이사의 생각이 무엇이고 그것에 맞추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상의였다.
‘임경목 팀장님 성격이 소문이 과장 됐던 건가?’
길들여지지 않는 흉포한 맹수와 같은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이는 모습은 마치 잘 길들여진 양과 같은 모습이다.
‘조기웅 선배도?’
그의 모습 역시 임경목 팀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상이다.
조기웅 팀장은 반론보다는 뭔가를 필기하려는 몸짓이 표현되는 상태였다. 그는 기대작을 관람하려는 열혈 관객의 모습으로 질문했다.
“대표님이 이렇게 저희들을 부르신 것에는 이미 구상하신 캐릭터가 있으시지는 않을까, 생각 됩니다. 혹시 그에 관한 내용을 개략적으로나마 들으면 개발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당연합니다.”
“아!”
‘왜들 저래?’
팀장들이 바로 필기 모드에 들어갔다.
“신규 캐릭터는 버서커. 즉, 광전사라는 타이틀로 개발하면 될 것입니다. 아예 전부 다 새로운 것으로 하기엔 시간도 사람도 부족하니 우선은 이 정도가 타협점으로 적절할 듯싶군요.”
김성욱은 받아 적는 내용들을 훔쳐보고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거 뭐야?’
말하는 사람은 한 명인데 필기한 내용들이 죄다 다른 것이다.
“광전사는 그 이름답게 공격적인 성향이 두드러지는 캐릭터입니다. 무기는 따로 추가할 것 없이 다크나이트의 장비 중 양손 무기를 착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하고 방어구는 엘프와 동일한 것들을 착용합니다. 이러면 장비를 신규로 제작하지 않아도 되니 부담이 적을 겁니다.”
플레지는 캐릭터의 외형이 착용하고 있는 장비와는 상관이 없다. 때문에 새로운 아이템의 디자인적인 부담이 적지만 뉴 온라인은 매 장비마다 해당 코스튬을 디자인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윤태식 대표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기존의 것을 잘 접목시켰으니 크게 힘들이지 않고 새로운 캐릭터를 추가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있다.
“장비가 동일하면 스킬이 겹칠 수밖에 없습니다.”
‘맞아.’
임경목 팀장의 말에 김성욱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스킬이 겹치면 그게 새로운 캐릭터겠어?’
그냥 구색 맞추기이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신규 캐릭터라면 다섯 개는 추가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김성욱이 재차 느낀 점은 역시나 아무도 대표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말을 ‘우선 옳다’고 정의해두고 실용방안들을 모색하는 형태의 회의였다.
“동일한 무기에 동일한 스킬. 그런데 방어력이 떨어지는 방어구를 착용해야 하는 클래스가 과연 매력이 있겠습니까?”
“대전격투게임이나 슈팅게임의 개념을 차용하면 됩니다. 단, 너무 오버 밸런스가 될 수 있으니 광전사다운 페널티를 넣어야겠지요.”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래픽에서 2명. 개발자에서 3명을 추가하면 될 것 같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진행합시다.”
‘응? 끝이야?’
먼저 일어나는 윤태식 대표를 따라서 팀장들 역시 움직였다. 김성욱으로서는 진행되는 가 싶더니 파장을 맞이한 것으로만 여겨질 뿐이다.
‘젠장. 결론 나온 게 하나도 없는데 다들 딸랑거리느라 바쁘다니. 실망이다!’
도저히 이대로 이렇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건 개발자의 자존심이 용납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신규 캐릭터라니!
자긍심은커녕 자존심마저 엿 바꿔 먹은 선배들을 대신하여 그가 나설 차례였다.
우선 조기웅 팀장부터 일침을 가하기로 했다.
“저기, 선배님.”
“응? 왜?”
“정식 서비스라면 이제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신규 캐릭터라니요? 이건 무리수가 아닙니까? 게다가 이런 일은 흔하잖아요. 전문가도 아닌 투자자가 난데없는 요구를 해서 잘 될 게임을 망쳐버리는 일말이죠.”
이번 신규 캐릭터 건 역시 같은 논조라는 주장에 조기웅 팀장이 얼굴을 굳혔다.
“너 지금 뭐라고 한 거냐? 망친다고? 누가?”
“아니 그게 아니라···”
조금 전까지 말랑말랑하기만 하던 사람이 확 돌변했다. 만만하고 순순하던 양의 탈 뒤에서 느닷없이 늑대가 튀어나온 격이었다.
김성욱은 본능적으로 말을 이었다.
“당연히··· 상식적으로 3개월은 너무 짧지 않습니까. 새로운 클래스를 기획하는 것조차도 부족한 시간인데 지금부터 기획을 하고 완성까지 하라니요.”
“너 회의 때 뭘 들은 거냐? 아까 다 끝난 기획을 왜 또 한다는 거고?”
“네? 다 끝났다니요?”
“···너 평소에 나한테 불만 있었냐?”
“예?”
조기웅 팀장이 불쾌한 티를 역력하게 냈다.
“캐릭터 스토리? 이제부터 세계관에 맞춰서 넣어야 하긴 하지. 그런데 임경목 팀장님이 하면 3개월은커녕 일주일로도 충분해. 그리고 광전사 특성 기획은 아까 다 마쳤으니 진행만 하면 된다. 그런데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니요! 오해이십니다. 회의가··· 그게··· 그냥 광전사 만드세요, 하고 끝났는데··· 기획을 다 했다고 하니까···” 정식 서비스
“성욱아. 우리 회사에서 성공하고 싶으면 지금과 같은 생각의 방식으로는 어려울 거다. 대표님은 그냥 다 떠먹여 주는 스타일이 아니야. 늘 큰 그림을 그리고 퍼즐로 풀어서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의 창의성을 저해할까 우려하시는 거지.”
‘제가 보기에는 꿈보다 해몽 같던데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지만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다. 방금의 회의를 통해서 여실하게 느꼈던 부분이라서다. 눈앞의 조기웅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팀장들 모두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퍼즐보다는 뜬구름이던데.’
이런 김성욱의 생각을 꿰뚫어 본 것일까.
조기웅 팀장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 번은 우연. 두 번은 인연. 세 번은 필연이라는 말이 있지. 너도 알아보고 왔을 테지만 다시 떠올려 봐라. 이 회사가 어떻게 발전해왔냐? 한 번도 미끄러지는 일 없이 성장가도만 달리는 게 정말 운만 가지고 가능할 거라고 보냐? 회사가 그런 식으로 운영될 거라고 믿어?”
불만과 의혹을 잠재우는 것은 입증된 결과들이었다.
특히 뉴 온라인의 완성도와 운영상의 매끄러움은 자신이 보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여러 선배들의 뛰어남이 대부분의 힘을 발휘했을 테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어서 나아가게끔 하는 것은 대표의 역량이니 말이다.
“적응이 덜 되어서겠지. 아무래도 오늘은 첫 회의였으니까.”
“그런 것··· 같네요.”
“궁금한 거 있으면 말해봐라. 대답해주마. 하지만 다음부터는 나도 다 알려주지 않을 거야.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노력해야 돼.”
‘그래, 대체 회의 때 뭘 이해하신 건지 알기나 해보자.’
자존심을 내려놓은 김성욱이 조기웅 팀장에게 물었다.
“콘텐츠가 부족하기 때문에 직업을 보강한다는 것은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시점이 오픈 베타중이예요. 업데이트 분량의 여유가 조금도 없이 모두 개발하는 와중이란 말입니다. 상용화에도 빠듯해서 다들 탈모가 생길 정도잖습니까.”
“그렇다고 3개 클래스만으로 게임을 운영할 수는 없다. 경쟁력이 떨어져.”
“타사 게임인 플레지만 보더라도 직업 3개만 가지고 잘만 운영이 되는 중입니다. 이런데도 굳이 이 타이밍에 쥐어짜며 무리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 플레지의 클래스는 4개인데?”
“로열이야 길드 창설 이외에는 메리트가 전혀 없잖아요. 비율도 적고. 그걸 딱히 직업이라고 하기에는 곤란하죠.”
플레지는 대한민국 온라인 게임의 시장을 연 게임이다. 김성욱은 물론이고, 거의 대부분의 게임 개발자들은 자신의 게임이 플레지와 비교 당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상업적인 성공을 논할 때는 기준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부정하고 싶으나 롤 모델이라는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성욱의 말에 조기웅 팀장이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니.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걸 직업군에서 뺄 수는 없는 문제지. 플레지의 로열 클래스가 아무리 길드를 위한 캐릭터라고 해도 나름의 개성은 분명히 있다. 때문에 로열만을 즐기는 유저들도 존재해. 오히려 독창적이고 개별적인 가장 탐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지.”
‘···듣고 보니 그러네?’
전투와 스킬 메커니즘에만 함몰해서 자칫 간과했던 부분이었다.
김성욱은 재빨리 인정하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 해도 대표님이 말씀하신 기획은 너무 허술합니다. 회의 내용에 따르면 다크나이트의 무기를 쓰고 엘프의 갑옷을 입는 캐릭터한테 격투대전게임을 섞는다고 했는데요. 도대체 이게 무슨 조합입니까?”
“핵심만 잘 말씀해주셨잖냐. 그 설명을 들었을 때 대표님이 신규 클래스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셨는지를 느꼈었다. 모르긴 몰라도 너를 뺀 남은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을 거야.”
“예?”
조기웅 팀장이 손가락을 꼽으며 질문했다.
“개발자들을 무리하게 쥐어짠다, 는 관점으로 생각해서 네가 문제인 거다. 봐라. 유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콘텐츠는 필요하다. 그런데 개발할 시간이 부족하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캐릭터 소스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을 말씀해 주셨다. 이건 이해했지?”
“네, 그랬죠.”
“두 번째 물음. 다크나이의 양손 무기는 근접용일까 원거리용일까?”
“당연히 근접입니다.”
“엘프의 방어구는?”
“원거리용이죠.”
“합쳐보자. 다크나이트의 양손 무기와 엘프의 갑옷을 입은 캐릭터는 강할까, 약할까?”
“약하겠죠.”
이건 당연한 것이었다. 무기는 근접인데 방어구는 원거리의 방어이니 효율이 나올 리 없다.
“그럼에도 대표님은 근접 공격 특화 캐릭터를 원하고 계시고요. 이걸 보완하려면 공격 스탯에 추가치를 엄청나게 줘야 하는 거잖습니까. 그러면 밸런스 붕괴되기 십상이고요.”
“그래서 슈팅게임이나 대전격투게임을 말씀하신 거다.”
“제 물음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 게임들에서의 스킬은 필살기잖아요. 그런 걸 광전사한테 주면 이 역시 밸런스 붕괴입니다.”
슈팅게임이나 대전격투게임에도 MP와 비슷한 개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발역전이자 캐릭터가 죽지 않는 무적상태를 동반해주는 필살기들이었다.
압도적인 위력을 자랑하지만 사용 횟수는 극히 적다. 단 한 번에 모아두었던 기를 대량으로 소모하기 때문에 자주 사용할 수 없었다.
이 말에 조기웅 팀장이 수긍했다.
“당연하지. 필살기가 되면 곤란해. 공격 특화의 개념을 넣는다면 나쁘지 않을 테지만 그건 광전사가 아닌 다크 메이지가 가야할 방향이니까.”
“그러면 광전사는 뭘 하는 건데요?”
“기본 공격을 하거나 혹은 적에게 피격을 당할 때마다 MP의 회복이 가능하도록 만들고, 그렇게 회복한 MP로 스킬을 사용하는 거지.”
김성욱이 잘 이해되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MP가 무한인 거 아닙니까?”
“광전사 다운 페널티를 부여하면 돼. 바로 전투 중에만 강력하도록 하는 거야.”
“예?”
“전투를 하고 있지 않을 때는 MP가 0이 된다. 이러면 다크 나이트는 스킬로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지만 광전사는 그게 불가능해지지.”
“···어?!”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아우성치던 스무고개가 슬슬 그 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RPG니까 익숙한 MP를 차용하기는 할 테지만, 개념은 MP가 아닌 분노 게이지 비슷하게 잡으면 될 거다.”
“아!”
분노.
공격을 하거나 공격을 당하면서 채워지고 가득 찼을 때는 필살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하면 된다. 전투 중에는 스킬을 쉼 없이 사용할 만큼 강력하다. 하지만 싸움이 끝나면 무력해진다.
여기까지 듣자 대번에 광전사의 콘셉트가 연상되었다.
‘그래. 이렇게 되면 기존의 소스를 재활용한다 쳐도 아무도 재탕이라고 할 수 없겠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울러 지금의 방식이 RPG계의 혁명이라는 사실까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당황해했다.
“회의 때의 그 이야기가··· 이거였단 말입니까? 정말 대표님이 처음부터 이걸 주장하신 거라고요?”
“성욱아. 네가 실력 좋은 건 나도 잘 안다만, 우리 회사에 너보다 못한 사람 역시 드물다. 특히 팀장 급 중에는 그 이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아. 그리고 그 위에 대표님이 있으시다.”
“···그게 정말이라면 회의고 자시고보다 그냥 하달해주는 게 훨씬 간단하고 확실한 것 아닙니까?”
“대표님은 자신이 생각한 것과 100% 일치하는 완성품을 요구하지 않아. 오히려 우리가 조금 다르게 만들어가는 걸 원하시지.”
“왜요?”
“그래야 개발자들이 캐릭터에 애정을 가지게 될 테니까.”
김성욱에게 조기웅 팀장의 마지막 말은 꽤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자신이 만들었다 해도 순전히 지시만 받아서 제작하는 것과 스스로 머리를 싸맨 아이디어가 녹아들어간 작품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었다.
소위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고들 한다. 하지만 똑같이 깨물었을 때 더 아픈 손가락과 덜 아픈 손가락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당연히 이 차이는 애정을 얼마나 담았느냐에 따라 나뉠 것이다.
“그런데 선배님. 아까 제가 봤을 때 다른 팀장님들은 다른 내용을 적으신 것 같았거든요. 대표님의 이 달리 해석되면 문제되는 것 아닐까요?”
“거기서 다양성이 나오는 거야. 게다가 전체적인 줄기는 같잖냐. 성욱아, 대표님은 목적성을 정해주신 것이 아니라 방향성을 짚어주신 거다. 그 때문에 오히려 대표님이 생각하신 것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올 때도 있어.”
“그러면 문제 아닙니까? 자존심 건드리는 건데?”
“천만에. 너는 모를 테지만, 그렇게 대표님을 놀라게 하면··· 그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보너스가 나오기는 하는데 그것보다는 대표님 감탄이 훨씬 더 끝내준다.”
“그···렇군요!”
“너 역시도 앞으로는 더 다양한 시각에서 보고 생각하는 버릇을 들여야 할 거야.”
입 꼬리가 귀에 걸릴 만큼 웃는 모습이었다. 김성욱은 비로소 인정했다.
‘선배들이 무한 신뢰를 보내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구나.’
대표가 없었다면 뉴 온라인도 없었을 거라는 다른 이들의 말이 이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개발자들이야 아무나 써도 되지만 이런 구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기는 다 장난이 아니구나.’
대표는 물론이고 그와 보조를 맞추는 선배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비범하게 보였다. 그러자 왠지 어깨가 펴치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 모를 뿌듯함과 자긍심!
진짜 천재들과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신의 위치마저 높여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