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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고기 6근을 구매하고 설 연휴 때 끓일 떡국 떡과 국거리용 소고기까지 사서 돌아올 즈음이었다.
익숙한 옆모습이 보였다.
어머니셨다.
“어? 장 보시는 중이셨어요?”
한 눈에 봐도 여자가 들기에는 버거우리만큼 큰 봉투를 든 모습이다. 재빨리 달려가서 손에 있는 것들 중 무거운 봉투들을 받아 들었다. 한시름 놓았다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작년 명절에는 바쁘다고 그냥 다 넘어가지 않았니? 올해는 이 엄마가 실력발휘를 좀 해야지.”
“가게는 어쩌고요? 대목인데?”
과일 가게를 하는 터라 명절은 대목이나 마찬가지다. 남들이 쉴 때지만 부모님께서는 이때가 더욱 바빴고 어렸을 때부터 나는 동생을 챙기는 날이 곧 명절이기도 했다.
“옛날 같지 않아.”
이러한 내 말에 어머니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셨다.
“대목이라고 바쁜 건 저기 구월동의 큰 곳들이거든.”
동네 장사꾼한테는 딱히 명절이라고 큰 차이가 없다는 말씀이시다. 나는 화제를 돌려서 재료 봉투를 들어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장을 봐온 이유는 뭐에요?”
“오랜만에 명절이라고 쉬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니?”
일을 항상 찾아서 벌이신다. 이러니 휴일이 쉬는 날이 아니고 밀린 일을 하는 날이나 마찬가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내가 말했다.
“나는 물론이고 태희도 이제 다 컸어. 왜 아직도 혼자서 다 하려고 그래. 이런 거 할 때는 나나 태희를 부르라고. 전화는 뒀다가 뭐 하려고 그래?”
“얘는! 이 까짓게 뭐가 힘들다고 사람들을 부르고 그러니? 그리고 전화비는 뭐 땅파서 나오고 하늘에서 떨어진데? 그냥 엄마가 혼자 하면 돼.”
이럴 땐 전형적인 옛날 사람이시다.
‘아니 원래부터 그러셨던가?’
워낙 부지런한 성격에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시니 말린다고 내 말을 들으실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나는 한걸음 물러서서 응원해드리기로 했다. 화목해야 할 명절에 걱정한답시고 외려 싸움이 나면 이것만한 꼴불견도 없다.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우리 가족들 고여사님의 요리로 호강하겠네요. 우리 고 여사님의 요리 솜씨는 대한민국 제일이니까요,”
“그럼. 그럼. 어디 맛있다는 집 다 찾아가서 맛 봐봐라. 이 엄마의 손맛에 비교나 되겠니?”
“물론입죠!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한껏 장을 본 짐들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부엌으로 모두 옮긴 뒤 나는 태희가 공부하고 있는 방에 노크 후 들어갔다. 그리고 한창 집중하고 있는 동생을 일으킨 뒤 손에 앞치마를 쥐여 주었다.
“오빠. 이게 뭐야?”
“전투복이야. 이제부터 우리는 전을 부칠 거거든.”
“나 공부해야 돼.”
“어허. 잔말 말고 입고 나와. 원래 머리도 적당히 쉬어줘야 좋아지는 거야. 원래 공부는 오래하는 것보다 집중력이 중요하거든. 앉아서 딴 생각하기보다는 짧고 강하게. 오케이?”
“누가 그래?”
“TV에서 그러더라. 아무튼 얼른 입고 나와.”
태희는 ‘피- 내가 누구보다 성적도 훨씬 좋은데.’ 중얼거리면서도 잠자코 앞치마를 둘렀다. 그렇게 동생과 나오자 어머니가 의아해하시더니 웃으셨다.
“뭐하는 거니? 설마 도와주려고?”
“제가 누굽니까? 우리 고여사님을 닮아서 손이 야무진 윤태식이 아닙니까. 맡겨만 주세요!”
“저는 손 안 야무진 윤태희니까 덜 맡겨주시와요.”
“보셨죠? 얘가 이렇게 철이 덜 들었답니다. 귀여운 척 해도 안 통하는 곳에서 애교를 부리네요.”
“오빠한테 한 거 아니거든!?”
넉살 좋은 반응에 분위기가 금방 화기애애해졌다.
“알았으니 얼른 일이나 하렴.”
“옙!”
“힝. 난 싫은데.”
일의 절반을 나와 태희가 넘겨받았다. 전 부치기에서 우리의 일은 잘 분업이 되어 있었다. 태희가 전에 계란물을 묻히면 내가 굽는다. 이걸로 끝. 하지만 분업화된 우리와 홀로 두 가지를 다 하시는 어머니의 속도가 비슷할 정도였다.
‘이런 걸 경력이라고 하는 거지.’
집안에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을 한지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 무렵, 아버지가 가게를 정리하고 들어오셨다.
“허허. 이게 다 뭐냐? 합심해서 같이 요리를 하다니? 살다보니 별의 별 일이 다 있구나.”
“품평 그만하고 당신도 거들지 그래요?”
“어이쿠. 우리 여사님 말을 제가 따라야지요. 금방 가리다.”
아버지의 합류로 네 가족이 둘러앉아서 전을 부치게 되었다. 연신 헛웃음을 흘리시며 아버지가 말하셨다.
“이게 얼마만의 일이지? 꽤 오래전에 한 번 다 같이 요리를 한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아빠. 십년은 됐을 거예요.”
“맞아. 그랬었지. 역시 우리 태희가 제일 똑똑하구나.”
나 역시 거들었다.
“생각난다. 그때 태희가 혼자 막 장난치다가 반죽도 흘리고 전도 막 쏟았었잖아. 그래서 엄마가 엄청 혼냈었지? 부엌 접근 금지령도 내렸고.”
“오빠는 꼭 기억해도 그런 거만 기억해!?”
눈을 흘기는 태희에게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 본 어머니가 말하셨다.
“태식이 너는 뭐 달랐는 줄 아니? 어떤 건 덜 익고, 어떤 건 너무 타고, 그 날 엄마는 혼자 할 걸 괜히 같이 했구나,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지금도 그때와 비슷할까봐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 한데.”
“오빠가 더 나빴네~ 티 나지 않게 실수한 거잖아. 저런 건 수습도 어렵다고.”
“윽! ···아버지. 아들이 혼자 당하는데 혼자 구경만 하시기 있습니까?”
“네 아픔을 남과 나누지 말거라.”
“슬픔은 나누라는 말이 있는데요?”
“헛소리다.”
오순도순. 도란도란.
지금 우리 가족의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로 이것보다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
온가족의 전부치기 행사를 마치고 밤이 깊었을 무렵. 나는 자는 척 시간을 보내다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지금이 12시 30분이니까 한창 주무시는 중이겠지?’
가족들이 다 잠에 빠져들었을 이때를 기다린 이유는 갈비찜을 만들이 위해서였다. 다 같이 일하는 것도 화기애애하지만 차려진 밥상을 선물로 받는 기분도 그 못잖게 좋다. 이를 위해서는 미리부터 갈비를 물에 담가서 피를 잘 빼두어야 했다.
‘핏물 뺄 때 설탕을 한 스푼 넣으라고도 하지만, 이건 급할 때 쓰는 방법이니까.’
지금은 시간 여유가 많으니 정석적으로 만들어도 된다.
그나저나 오래간만에 주방 일을 진득하게 해서 그럴까. 허리며 어깨 등등 땡기지 않는 곳이 없는 것 같았다. 분명히 군대 전역 후 규칙적으로 운동하면서 몸을 관리했는데 노동할 때 쓰는 근육이랑 실생활의 쓰는 부위는 꽤 다른 듯싶다.
그렇게 문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닫고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주방에 이동했다. 계획했던 대로 갈비의 핏물을 빼려고 봉투를 찾았는데 웬걸,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아··· 진짜. 이건 또 언제 물에 담가 두셨대?”
큼직한 통에는 이미 찰랑이는 물속에 갈비가 투하된 상태였다. 딴에는 음식재료들을 나르며 몰래 숨긴다고 했는데, 어머니는 갈비들을 진즉 알고 미리 조치하신 것이었다.
‘하긴 시장에서 만났고 그렇게 큰 봉투를 들고 있었는데 못 발견하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하는 수 없다. 내일 새벽에 조금 더 일찍 갈비찜을 완성할 수밖에.
나는 어머니가 평균적으로 일어나시는 5시보다 30분 빠르게 알람을 맞췄다. 그리고 군대에서처럼 긴장감을 가지고 잠을 청했다.
숙면 중이었지만 느낌 상 ‘이때다’싶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4시 26분이었다.
‘역시 정신력의 문제야.’
긴장하고 잔 보람이 있다. 나는 한 템포 늦은 휴대폰의 알람설정을 여유있게 종료시킨 뒤 부엌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밤 시간 동안 갈비에서는 핏기가 잔득 빠진 상태다. 나는 통에 가득한 핏물을 처리하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뼛가루를 제거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물로 헹궜다. 그리고 요리를 시작했다.
‘월계수 잎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다양한 품목들이 구비되어 있는 마트였다면 월계수 잎을 구할 수 있었을 테지만 재래시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넣으면 좋다는 이야기지 없다고 요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쉬운 대로 후춧가루와 소주를 이용해서 잡내를 제거하기로 했다.
이제 냄비에 고기를 삶으며 다른 재료들을 준비한다.
‘당근과 생율, 대추랑 대파.’
사실 꿈속의 나 역시도 혼자서 먹을 때는 이런 재료들을 다 갖춰서 요리하지 않았다. 그냥 갈비에다가 업체에서 기똥차게 만들어서 판매하는 양념소스를 넣어서 끓이면 그만이다. 이러면 끝내주게 맛있지는 않지만 대게의 식당에서 나오는 평균치의 요리가 완성된다.
하지만 가족과 나눌 음식 아니겠는가. 명절이라서 특별히 아들이 직접 솜씨를 발휘하는 것이니 귀찮아도 감수하는 중이었다. 물론 적당히 타협하는 부분도 있었다.
‘남자는 돌려 깎기 같은 거 안 한다.’
사나이의 요리란 들어갈 것은 얼추 다 때려 넣되 디테일은 내키는 대로 건너뛰는 것이다. 채소를 돌려 깎거나 계량스푼으로 간장 몇 스푼, 소금 몇 꼬집 씩은 넣지 않는다.
오로지 감! 느낌!
집히는 대로 턱턱 넣어버리는 과감함이 곧 생명이다.
‘사실은 못해서 얼렁뚱땅 넘기는 부분들이지만.’
어머니께서 양념장을 만드실 때는 양파와 무를 믹서기에 갈아서 넣으시지만 나는 특별 재료를 준비했다. 팩에 들은 양파즙과 무즙이다.
‘업체에서 정성스럽게 만든 재료라지.’
가위로 싹둑 잘라서 각각 여섯 팩씩 쫙 넣는다. 이후 간장은 색깔 보면서 콸콸. 물도 콸콸. 후춧가루와 설탕을 턱턱 넣었다. 다음으로 힘차게 섞으면 끝이다.
그리고 통 속의 고기가 익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익은 정도는 젓가락을 찔러보고 일부분을 떼어서 먹는 식으로 확인했다. 이후 잘 삶아지면 냄비의 모든 물을 깔끔하게 버린 뒤 양념장을 아낌없이 투하한다.
‘준비해둔 부재료들은 양념장으로 한 번 더 익혀준 뒤 넣는 거지만, 그러면 귀찮으니까.’
괜찮다. 원래 요리는 들어갈 게 빠지면 티가 나지만 다 들어가면 얼추 비슷한 맛은 내게 되어 있다. 한 번에 해결 양념장과 함께 부재료들도 넣어주었다.
이제 거의 다 끝났다. 기다렸다가 냄비가 끓기 시작하면 약 불에 놓고 양념이 고기에 잘 배이면 완료다.
“후아? 이게 무슨 냄새야?”
가장 먼저 자신의 방에서 나온 사람은 여동생이었다.
‘요즘 아주 먹는 것에 포텐이 터졌다니까.’
양념 냄새가 방 전체에 퍼져서일까. 부모님께서도 일어나셨다. 요리 앞에 있는 나를 보시고는 세상 신기한 모습을 본다는 듯 놀라셨다.
“얘 좀 봐. 아침 일찍부터 그걸 다 한 거야?”
“그럼요. 원래는 핏물을 빼는 것부터 전부 다 제가 하려고 했었는데 고여사님이 빼앗으시는 바람에 못했답니다.”
“고생하지 말라고 미리 해뒀지.”
“혹시라도 ‘이 갈비는 선물용으로 산 건데요.’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내가 우리 아들을 모르니? 그런 거면 이미 냉장고에 넣을 때 ‘이거 누구누구 줄 거니까 그대로 두세요.’라고 먼저 말했겠지. 아무 말도 없었던 데다가 냉동도 아닌 냉장실에 넣었다는 거 보면 ‘오늘 갈비찜을 하려는 거구나’ 딱 티가 났단다.”
“예리하시기는······.”
“이 엄마가 이 정도란다. 몰래 요리까지 다 해줄까 하다가 그래도 아들이 정성을 보이려는데 싶어서 그건 봐줬거든.”
“어이쿠! 우리 고여사님의 은총이 하해와 같습니다 그려.”
“그럼!”
아침부터 소란스러운 웃음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러한 두 모자를 보시는 아버지의 대사는 담백했다.
“맛은 있어야 할 텐데.”
혹여 망쳤을 까봐 이래저래 걱정중이셨다.
그렇게 쉬는 날인 명절임에도 우리 가족은 명절 아침 7시즈음에 모두 일어난 상태가 되었다.
‘하여간 이놈의 집안은 그냥 편히 쉬는 방법을 모른다니까.’
오래간만에 쉬는데 느긋하게 늦잠을 자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다.
“저기, 화기애애하고 이런 분위기 다 좋은데! 나 갈비 한 점 맛보면 안 될까?”
태희가 냄비 쪽으로 왔다.
“원래 이런 거는 누가 막 맛을 봐주고 그래야 완성 되는 거잖아. 내가! 내가 오빠의 요리를 완성시켜주려고 그러는 거야. 절대로 먹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오빠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먹어줄게. 어때?”
“오냐. 와서 한 점 받아라.”
윤태희가 저렇게 주절주절 말이 많아 질 때는 어떻게든 진심을 숨기려 할 때다. 사실 뭐 저런 말은 여동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누구나 눈치 챌 수 있는 수준의 거짓말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꺼내서는 호- 호- 불고는 야무지게 먹었다. 리액션은 누가 여고생 아니랄까봐 매우 극적이었다.
“오! 완전 맛있어! 대박! 오빠 이런 건 언제 배움?”
“어허. 고여사님의 요리 솜씨를 물려받은 오빠는 이런 거 안 배워도 잘 한다.”
“그럼. 엄마도 배운 적 없이 먹어만 보고 다 만들고 그랬어.”
넉살 좋은 대사에 얼씨구 받아주시는 어머니시다.
“고여사님이 직업을 요리사로 했다면 진짜 대성했을 텐데.”
“그랬으면 네 아빠 안 만났지. 아마 TV에 내가 나오고 있었을 걸?”
자신만만하신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아버지가 얼른 분위기를 맞추셨다.
“아이고. 고여사님. 저를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안마라도 해 드릴지요?”
“듣고 보니 살짝 어깨 쪽이 결리는 것 같은데요?”
“특급 안마사 대령입니다. 요리는 아들놈이 잘 하고 있으니 우리는 저쪽에서 쉽시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식탁 닦고 설거지도 해주고 수저도 놓아주고 해야지.”
“···허허허.”
자식 앞에서는 강해지는 어머니의 불호령이다. 머쓱하게 오셔서는 주방 보조를 하시니 야금야금 갈비찜을 먹던 태희까지 일을 하게 되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편하게들 있으셨으면 싶지만 그건 외려 어머니께서 불편해하신다.
최대한 빨리 요리를 마치는 게 온 가족이 편안해지는 방법이었다. 재빨리 떡국을 완성한 뒤 일사분란하게 반찬부터 모든 세팅을 마쳤다.
“식사합시다. 치우는 건 먹고 해요!”
그렇게 오전 8시. 근 10년 만에 온가족이 명절에 모여서 식사하는 날이 만들어졌다. 떡국 맛까지 본 태희가 엄지를 치켜 올렸다.
“세상에. 둘 다 맛이 있어.”
“오라버니를 이제 존경하려무나.”
“매일 해주면 사랑해 줄게.”
“내가 싫다. 어디서 말 한마디로 평생 가정부를 만들려고 하고 있어?”
“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