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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김장하게?”
“···뭐래는 거야, 이 아재새끼. 어디서 유머1번지 스타일을 배워 와서는. 그게 아니라 동창! 규환이 말하는 거다.”
“아! 그 배추!?”
“그래 이 단기기억상실증 새끼야. 저러니 진성 게임 폐인이지.”
‘너도 20년 지나봐라 이 문디 자슥아.’
감히 나를 한심하다는 투로 보다니. 별반 친하지도 않았던 친구의 이름을 그때도 기억할지 두고 보리라! 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성찬이의 말이 맞았다. 주위에 나름 전문가가 있었는데도 먼 데서 찾던 중이었으니 말이다.
고등학교 동창인 규환이는 위로 뻗쳐서 자라는 곱슬머리와 넙대대한 얼굴 때문에 배추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했던 친구다. 소심한 성격이라 별반 교류가 없었고 미래이기도 한 꿈속의 삶에서 역시 얼굴 본 적이 딱 한 번 정도였다.
‘이런 관계를 보통은 남이라고 하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나와는 달리 성찬이는 꽤 아는 듯했다. 자세히 물어보자 혀를 끌끌 차면서도 자세히 이야기해준다. 대학을 다니던 도중에 갑자기 자퇴를 했고 홈페이지 제작 관련으로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당장의 직업은 자유로운 영혼!
백수상태다.
지금은 회사들이 IT버블로 줄줄이 도산했고 관련 경력자들도 취업이 안 되서 발을 동동 굴리는 시기다. 이런 판국에 막 그쪽에 뛰어든 친구가 쉽게 취업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냉정하게 보면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취업하기 더 힘들 터다.
“얘기 들어보니까 수입도 영 시원찮은 가봐. 태식아. 전문가를 찾는 이유는 짐작하는데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기왕이면 배추를 불러보는 게 어때?”
“노는 거 보면 실력은 조금 애매하지 싶은데?”
“그건 걱정하지 마.”
진수가 끼어들었다.
“걔가 끈기 하나는 졸라게 쩐다는 거. 알잖아?”
‘그랬냐?’
잘 모르지만 친구들이 확신하는 것을 보면 규환이는 소심하게 혼자 놀지만 하기로 한 일은 묵묵하게 해내는 타입 같았다. 사교성은 떨어지더라도 연구는 해내는 전형적인 학자유형 같다. 여기에 진수가 가장 큰 장점을 이야기해주었다.
“보아하니까 뭔가 구상한 게 있는 거잖아? 믿고 맡기는 게 아니라 막막 주문할 거지?”
“물론이지.”
“그러면 친구가 최고지! 걔는 자존심도 없거든. 부려먹기 딱 좋다 이거야. 그리고 너님은 등쳐먹는 게 아니라 페이를 확실하게 챙겨주잖아. 잠깐만 들어봤는데도 저쪽 업계도 엄청 씨발이더라.”
“우리 태식이 만한 싸장님이 드물지. 어떠냐? 일 잘하는 돌쇠인데. 불러오고 싶어지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도와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여러모로 맞는 이야기들이었다. 우선 규환이의 실력은 차치하고 생각해도 내 상황에 딱 맞는 인재 유형이다.
꿈에서도 워낙 접점이 없었던 지라 녀석의 미래가 어찌 되는지는 전혀 몰랐다. 단지 ‘걔 성공했다더라.’ 같은 이야기는 없었던 것을 보면 현실에 부딪쳐서 치킨 집으로 타협했거나 국외로 떠나지 않았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동창이지만 안 친한 사이라는 건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고.’
나이가 마흔을 넘었던 경험 탓일까. 우정과 의리를 연발하는 진수와 성찬이와는 다르게 나는 다소 냉소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굉장히 절친했던 사이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으면 멀어진다.
반대로 생판 모르던 사람이라도 업무나 취미로 얽혀 자주 연락하다보면 쉽게 가까워진다. 헤어지는 일도 언제 가까웠느냐는 듯 상시적으로 일어난다.
‘여기에 돈 문제가 얽히면 다 똑같고.’
친구건 남이건 이런 말은 중요하지 않다. 친구라는 개새끼도 있고 남이라는 선량한 사람도 존재한다. 그 역도 성립하기에 나이 좀 먹으면 나처럼 구분하게 된다.
상식적인 사람. 몰상식한 새끼.
전자는 수가 적고 후자는 넘치도록 많다. 때문에 당하지 않고 몰상식한 새끼도 착하게 만들려면 고삐를 내가 쥐고 있는 쪽이 나았다. 그럴 힘이 없으면 차라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저냥 살아가는 게 좋다.
그리하면 피해는 보지 않는다. 꿈에서의 나는 이런 생각으로 현실에 적응하며 살았고 지금은 서 있는 자리가 다를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주위를 보았을 때였다.
게임도 하지 않으면서 하는 척, 그러면서 해 보이는 양 연기하던 진수와 성찬이.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곧 녀석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뭐하냐?”
“뭐하긴. 사장님 눈치 보는 사원이지.”
“너 방금 표정 모르지? 졸라 이상했었음. 폼도 똥폼이고.”
“뭔 개소리래?”
픽 웃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배추 연락처 알아?”
“그 말뜻은!?
“오케이. 수첩 가져올게. 잠깐만 있어봐.”
부리나케 자신의 책상서랍을 열었다. 녀석의 수첩에는 악필이 분명한 특유의 서체로 온갖 번호와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이를 보면 사람의 습관과 관성이라는 게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수와 성찬이는 휴대폰을 구매한 상태다. 서먼 몬스터로 목돈도 벌었고 싸게 구매하는 정보도 알았으니 바로 실행한 거다. 또한 미래의 스마트폰에 비해 아무리 기능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폴더 폰 역시 기본적인 것은 갖추었다.
번호를 저장시키는 정도는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수첩을 고수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휴대폰은 전화할 때만 쓰는 거라니. 저 많은 번호들을 언제 다 입력하느냐니. 나 이거야 원.’
계산기가 나와도 주판으로 셈하는 어르신처럼 익숙한 방식을 고수하는 거였다. 차차 익숙해지면 바뀌어 갈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마냥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수첩을 뒤적이는 모습을 보면 웃음이 새어나오곤 했다.
“태식아. 너는 배추랑 별로 연락 안 했잖아. 그러니까 내가 전화 걸고 너랑 만날 수 있게 연결해줄게. 얘가 소심해서 네가 ‘한번 보자’고 하면 무지 당황할 거라고.”
“하긴 그것도 그렇겠네. 알았어.”
그 뒤에 통화가 이어졌다. 볼륨을 최대로 한 덕분에 처음 들을 때는 낯선 목소리. 그러나 차츰차츰 기억이 나는 동창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수냐? 오랜만이네?」
“어, 배추야. 너 뭐하냐?”
「나야 그냥 있지. 뭐··· 그냥저냥······.」
“딱히 뭔 일 하는 건 아니라는 거네. 잘 됐다.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요즘 태식이랑 같이 일을 하고 있는 게 있거든.”
「보험 가입하라고? 나 지난번에 윤태랑 병수한테 들었었는데··· 또 하면 너무 많은데···」
“뭐? 아니 그 양아치 새끼는 저 필요할 때만 왜 연락한대냐? 게다가 가입을 하긴 왜 해줘?”
「그게··· 어렵데서···」
“야이 병신아. 걔네보다 네가 더 졸라게 어렵지 무슨! 생각해보니 열 받네? 너 왜 나한테 대뜸 보험 어쩌구 한 거냐?”
「전화 오면 다 그러기에···」
진수는 우물쭈물하는 규환이를 대신해서 그놈들에게 온갖 욕을 다 퍼부어주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아오! 이거 휴대폰이라 통화료 겁나 비싼데. 아무튼 그딴 거 아니니까 튀어와. 홈페이지 만들어볼까 하는데 얘기 듣고는 태식이가 너 찾더라고. 친구들 중에는 네가 짱이잖아.”
「나? 진짜?」
의아해하는 규환이처럼 나 역시 ‘내가 언제?’하는 시선을 던졌다. 진수는 검지로 입술을 가리며 조용히 하라고 제스처를 취했다. 성찬이는 새빨간 거짓말을 옆에서 들으며 숨죽여 웃고 있었다.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돈 꿔달라거나 보험 같은 거 아니니까 내가 알려주는 주소로 와. 보고 얘기하자. 여기가 인천 남동구 간석동···”
「어. 금방 갈게.」
“야! 야! 주소 마저 듣고 끊어야지 이 밥통아! 너 여기가 어딘지 알아?”
「어? 모르는데?」
“···아오!”
한바탕 콩트가 연상되리만큼 주소를 불러주고 이를 받아 적는 규환이의 부산스러움이 전해졌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는 진수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10분 넘은 줄 알았네. 아으! 쫄려서 뒤져버릴 뻔 했어.”
“너 설마. 통화료 때문에 튀어오라고 한 거냐? 그냥 나 바꿔주고 얘기해도 되는 데?”
“얘가 큰일 날 소리 하네. 짜샤, 집 전화 비용도 장난 아닌데 이건 무려 휴대폰이라고! 요금이 그야말로 후덜덜 해.”
전화번호부 수첩만큼이나 아직은 사상이 안 통하는 부분 중 하나였다. 불과 몇 년 만 지나도 지금의 요금은 착한 수준이 될 텐데 제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통하지가 않는다. 덕분에 휴대폰을 실생활에서 휴대폰을 쓰기보다는 신줏단지처럼 잘 모셔두는 경우가 많았다.
걸기보다는 받는 용도가 더욱 컸다. 이 역시도 차차 적응하면서 바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언제 온대?”
“걔네집도 여기서 별로 안 멀어. 금방 올 걸?”
여기서 남자들 간의 시간을 따로 적용해야 한다. 친구 사이에서 금방이라는 뜻은 결코 10분이나 20분이 아니다.
사나이들은 조상의 얼을 답습하여 선비처럼 절대 뛰지 않으며 늦었다 해도 한량처럼 여유롭게 걸어온다. 택시를 타는 사치는 부리지 않기에 우리끼리는 최소 30분에서 1시간이 지체되는 것은 ‘그러려니’한다.
“오케이. 그럼 일 하자. 일.”
대화하며 멈춰두었던 서먼 몬스터 작업을 마저 이어가기로 했다. 아직까지도 훌륭한 시세를 유지하는 만큼 먹으면 바로 주머니에 쌈짓돈이 된다. 때문에 할 때는 같은 사냥이라서 지겨워도 우리는 끈기 있게, 또한 지독하게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게 아니면 마땅히 할 일이 없기도 하다.
‘용의 협곡이 나오지 않는 한 레벨업은 멈추다시피 한 상태이고 장비도 충분하니까.’
플레지는 돈이 된다. 하지만 장사를 위해 아이템을 선점하고 자판기를 관리하는 등의 작업을 제외하면 딱히 게임 내에서 즐길 거리에는 제한이 있었다.
미래의 게임처럼 소모할 콘텐츠가 넘쳐나고 퀘스트와 추가 아이템이 수십, 수백 개가 되는 종류가 아니었다. 만약 착용하지 못한 아이템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골리앗의 검이라는 궁극 장비에 고강화 아이템으로 무장까지 마쳤다.
새로운 작업용 캐릭터를 양성하거나 본 캐릭의 레벨을 높이는 일. 공성전 때를 대비하고 도발이 들어오면 적절하게 응수해주는 정도. 사실 상 요즘의 일과는 이것의 반복이었다.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큰 손해로 이어질 테지만 익숙해져서 실수할 일이 없는 일상이다.
‘하긴, 배부른 소리지.’
보스 몬스터나 이벤트 몹 좀 더 나왔으면··· 생각하다가 웃고 말았다.
앉아서 손가락 까딱이는 것으로 남들 월급 수준을 몇 시간 만에 번다. 또한 막대하게 수입이 들어오기는 해도 아직 이 건물은 완전히 내 소유가 아닌 마당 아니겠는가. 다이나믹한 도박은 지금보다 더욱 탄탄하고 안정적일 정도로 성공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1시간 안에 서먼 하나 더 먹어보자!”
“예이~ 예이~”
심기일전하고 친구들과 사냥을 이어나갔다.
*
똑똑···
한 시간이 지났을 즈음. 사무실의 문을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배추 왔나보다.”
진수가 재빨리 달려가 문을 열어준다. 넙대대한 얼굴이 곧 나타났다.
‘진짜 디스이즈 코리안 타임···은 개뿔. 그냥 시간관념 없는 거지.’
하여간 쓸데없이 일반화를 시키는 게 문제다. 약속 잘 지키는 부류가 있는 반면에 1~2시간은 예사로 치는 녀석들도 존재한다. 내 친구들은 개념 없는 짓을 ‘친구인데 어때!’하는 삐뚤어진 우정 존속파에 속하는 것. 단지 그 차이일 뿐이었다.
여기서 ‘제때 좀 와라!’라고 하면 ‘우정이 식은 거냐!’는 말인지 방구인지 모를 반박을 듣게 된다. 참으로 갑갑한 노릇이다.
그러는 사이 규환이는 사무실에 즐비한 컴퓨터들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와. 너네 뭐야? 이거?”
“말했잖아. 요즘 태식이랑 일 한다고. 우리 사무실이야.”
“그럼 아예 회사를 차린 거야?”
“그건···”
진수가 대답하려는 데 내가 벌떡 일어났다. 이제부터는 일 이야기를 해야 하기에 친구보다는 내가 나서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사업자를 내거나 그런 건 아니야. 자세한 건 저쪽에서 나랑 이야기 하자.”
말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 그럴까?”
규환이는 친구사이인데도 내 손을 양손으로 잡더니 반사적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딱히 내가 위압적이거나 사장님을 대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것이 익숙해 보였다.
사무실 한 쪽에는 식사 장소 겸 응접실로 쓰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 있었다. 나는 규환이를 데리고 그곳에 자리 잡았다. 녀석은 익숙한 진수와 성찬이가 함께 있을 때와는 달리 나와 면담하는 듯한 분위기가 되자 다소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두 친구가 따라서 들어오지 않는지 연신 의식하는 모습이다. 내가 배추라는 동창이 낯설 듯 그 역시도 내가 어색해서일 것이다.
‘어떻게 지내는지, 요즘 뭐하는 지 같은 재미없는 얘기는 집어 치우자.’
직원 면접이라면 혹 모르지만 우리는 친구 사이다. 괜히 접대용 멘트를 하려고 머리를 굴리지는 않아도 되었다.
나는 분위기를 조금 풀어볼 겸 가볍게 물었다.
“혹시 게임 좋아해?”
“게임? 하긴 하는데···”
“어떤 거?”
“마지막 제국.”
사람은 자신의 취미와 관련해서는 쉽게 말문이 열리기 마련이다. 나는 꿈 속 경험을 토대로 규환이와 마지막 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 홈페이지 관련으로 어떤 것들을 다룰 수 있어?”
“그게··· 너무 넓은 질문이라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머뭇머뭇하던 규환이가 비로소 말을 골라내고는 질문했다.
“정확히 여기서 필요한 것들이 뭔데?”
“진수에게 들었는지 모르는데 우리는 플레지를 하고 카페도 운영하는 있어. 그리고 이것을 골자로 해서 홈페이지를 만들 거야.”
내가 홈페이지에 대해서 아는 정도는 서버가 필요하고 또 그것에 맞는 소스를 제작해야 한다는 것. 그런 뒤 도메인을 사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조차도 들은풍월이라서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신 디자인만큼은 이용자의 입장으로 잘 알았다.
“단순하게 게시판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형태의 홈페이지였으면 싶거든. 이걸 제작했으면 싶어.”
꿈속에서 자주 들어갔던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 그 디자인을 최대한 비슷하게 기억하며 노트에 그려주었다. 그리고 배추는 나름대로 진중한 표정을 한 채 내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이런 식이면··· 글을 올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기능이 필요하고, 또 게시판 마다 권한을 따로따로 줄 수 있어야겠네?”
“그렇지.”
“그럼 서버는?”
처음에는 관리업체에 맡길 요량이었다.
그러나 맡길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