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4화 (34/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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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수송

- 좌호법 : 존명.

‘이렇게 제일 먼저 복종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더욱 따라 하기 쉬워지고.’

솔선수범에서 핵심은 타인의 본보기가 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칭찬과 격려, 보상이 주어지면 앞사람의 행동은 일순간 규칙이 되어버린다. 자연스레 길드원들은 받아들였고 반발하는 이 없이 조직개편에 참여했다.

‘지내다보면 오크 요새의 좋은 점을 알 수 있을 겁니다.’

1진에서 2진으로 좌천되었다는 생각이 조금은 들 수 있을 테지만 오크 요새는 금방 오우거를 만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경험치는 물론 고가의 재료 아이템을 주는 녀석이니 칸트 성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다.

- 골리앗 : 먼저 지금 지정받은 길드로 옮기는 작업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수송대 오크에 대한 회의를 하겠으니 15분의 쉬는 시간 이후 자리에 다시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1진은 내가, 2진은 타이탄의 접속 정보를 아는 지옥검이 맡아서 길드원들을 다시 받아주었다. 이로써 첫 단추를 끼웠다. 일련의 과정을 보던 성찬이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왜 타이탄에는 왕관이 없어?”

지옥검이 접속한 로열을 보았는데 그의 머리 위에는 왕관 이펙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내 대답은 간결했다.

“여긴 요새잖아.”

“그런데?”

“영지가 없다고.”

“뭐야? 쓸데없는 데서 차별하는 거냐?”

약간은 실망을 한 얼굴이다. 있어봐야 방어력이나 공격력이 올라가는 것도 아닌 폼이 전부인데 왜 저리 신경 쓰나 싶었다. 진수가 기지개를 쫙 켜며 말했다.

“어쨌거나 성 먹었으니까 우리 열일 했다. 내가 봐도 내가 참 수고했어.”

“흐흐. 야박한 사장님아. 담배 한 타임 할텨?”

“싫다. 끊었어.”

한 대씩 꺼내서 무는 친구들을 외면하고 맥주와 과자를 입에 넣었다.

“지독한 자식이네. 어떻게 그걸 끊냐?”

“뒤졌다가 살아나봐.”

“군대에서 간첩이라도 때려잡아봤냐?”

“꺼져.”

딱히 금단현상 같은 것은 없었다. 사실 내가 담배를 피우는 정도는 폼을 부리려고 입에다가 머금었다가 뱉어내는 입담배에 지나지 않았다. 별 맛도 모르는데 다들 피우니까 자존심상 피우는 척 해왔다.

나중에는 취직 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 깊이 마셔대며 골초가 되었고 뻑뻑 피워댔지만 말이다. 만약 미래의 꿈을 꾼 것이 1년만 뒤였어도 나는 담배를 끊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다니까.’

새 출발하기 좋은 시점. 군 복무도 딱 마친 환상적인 타이밍에 정말로 인생을 다시금 살게 된 것이다.

“너 그거 아냐? 점점 모범적으로 된다는 거?”

“인마, 남자가 그러면 매력 없다고.”

“놀고 있네. 우리 같이 수영장 가봐? 웃통 까고 있으면 누가 더 인기 있을 거 같냐?”

“저속한 새끼. 사랑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게다가 얼굴은 내가 더 낫다!”

“···빨리 쳐 피우고 오기나 해!”

“옛써!”

“있다가 봅세~”

그런 가벼운 이야기 몇 마디를 나누고 휴식을 취하니 금방 15분이 지나갔다. 각자의 방법으로 심신을 정돈한 우리는 다시금 컴퓨터 앞에 앉았다.

새로이 정비된 길드원들이 각 로열의 앞으로 정렬해서 섰고 진수와 성찬이 역시 캐릭터를 줄 맞춰서 세웠다. 각이 딱 잡힌 모습이지만 이는 모니터 속의 그림일 뿐, 진짜 친구들은 옆에서 배나 긁고 한 명은 겨드랑이 냄새를 맡다가 내 과자를 뺏어 먹는 중이었다.

‘사무실에서는 탈의 금지 같은 법령을 반포할까?’

한여름이 되면 시각을 살벌하게 테러할 것 같은 예감이 물씬 들었다. 아무래도 에어컨 가동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 같았다. 방향제도 준비하고 말이다.

- 골리앗 : 지금부터 오크 요새의 세금을 지키기 위한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각자 접속가능한 시간대를 말씀해주십시오. 이를 토대로 조를 편성하고자 합니다.

세금은 하루에 한 번 들어온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요란하게 준비하느냐 하면 ‘하루’의 기준이 현실이 아닌 플레지 월드에서의 1일이기 때문이었다.

‘게임 내에서의 1시간은 현실의 10분. 즉, 플레지의 하루는 현실의 4시간.’

매일 총 6번의 세금이 들어온다는 의미다.

물론 매번 조를 편성해서 수송대 오크를 지켜야 하는 건 아니었다. 세금을 받아오지 않아도 무방하기에 그렇다. 다음으로 넘기면 해당 세금은 누적되어 다음으로 합산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넘길 수는 없으니 현실적으로 적정한 선을 찾아야 했다.

- 골리앗 : 세금 수송은 현실을 기준으로 하루에 1회. 또는 2회를 진행할 것입니다.

- 범 : 시간대는 언제쯤입니까?

- 골리앗 : 매일 다르게 편성하겠습니다. 자칫 정해진 시간을 고수했다가는 약탈당할 우려가 큽니다. 그러니 보안에 힘써주십시오.

- 구두룡검 : 알겠습니다, 총군주님.

- 좌호법 : 존명.

옆에서 진수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캬! 포청천 생각난다. 왠지 우리도 이래야 할 거 같지 않냐? 존명! 따꺼!”

“따꺼의 말을 따르오리다. ···야, 포권이 어떻게 하는 거더라? 왼손이 주먹? 오른손이 주먹?”

“그 입들을 닥쳐라.”

“예, 전하~ 성찬이 이놈을 개작두로 조지겠나이다.”

“이놈! 나는 용작두가 때려줭~”

“···이 미친놈들아. 얼른 불러주는 시간대들이나 받아 적어.”

“푸헤헷!”

수송 시간대는 매일이 달라야 한다. 어지간한 인원이 덤벼도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지만 자칫 골드 수송 때마다 세금 이상의 지출이 생길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반감정을 자꾸 쌓아서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때문에 거듭 보안유지를 강조했다. 뒤이어 길드원들이 하나씩 접속 가능한 시간들을 알려주고 진수는 강한사람들을. 성찬이는 좋은사람들 쪽의 일정을 메모지에 볼펜으로 가득 정리했다.

‘그래도 걱정을 크게 할 필요는 없겠어.’

접속 시간대를 맞추는데 애를 쓰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우려는 필요 없었다. 사실 우리 길드원들은 모두 고수들이다. 그리고 게임 고수는 하교나 퇴근 후 2시간만 즐기는 모범시민과는 거리가 멀다. 최하가 하루 접속시간 6시간이고 태반이 이를 넘는 수준이다.

더군다나 원년멤버들은 ‘필요하면 다 때려치우고라도 접속하겠음!’이라며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덕분에 게임을 직업으로 삼은 우리 못잖게 열정을 불태우는 이들을 파악할 수도 있었다.

이를 토대로 간부를 정리했다. 각 길드에 4명씩으로 총 8명이다. 여기에 부군주인 지옥검까지 9명이 되고 좌호법은 매지션들을 관리하게 된다. 이는 추후 매지션의 숫자가 늘어나면 간부로 정식 임명하기로 우선 말만 해두었다.

- 골리앗 : 주간조의 조장은 지옥검님. 야간조의 조장은 담덕님이 맡습니다.

- 지옥검 : 예, 알겠습니다.

- 담덕 : 책임지고 완수하겠습니다.

조는 주간과 야간, 2개로 구성했다. 이중에서 야간은 사람이 가장 적은 시간을 목적으로 하기에 명목상 야간일 뿐 사실상 새벽시간 대였다.

조장은 실제 오크 요새의 주인 길드인 ‘좋은사람들’에서 담당했다. 2진으로의 좌천이라는 느낌이 개미 담석만큼이라도 있을지 모르니 이를 최소화하려는 의도였다. 이어서 각 조장에 따라 인원 배치를 마쳤다.

그리고 수송대 오크의 세금 배달은 탈 없이 마무리 되었다.

“태식아. 이거 생각보다 쉬운데?”

“방해도 별로 없고. 너 괜히 겁준 거 아니냐?”

“처음이니까 파악이 덜 된 거지. 게다가 우리 쪽에서 어설프지 않으니까 몇 번 간 봤다가 포기한 거고. 한명이라도 성공했었으면 우리는 완전히 얕보이는 거였어.”

“에이. 난 또 무슨 별동대나 약탈부대가 왁! 나타나는 줄 알았네.”

“어쨌거나 다 된 거잖아.”

공성전에 비해 다소 싱겁다는 둘의 반응이다. 발빠르게 대처해서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하기야 몰라도 상관없다. 내 입장에서도 이편이 낫다.

‘그런데 언제까지 갈 수 있으려나. 가능하면 오래도록 방해가 없었으면 좋겠다만.’

잘 억제된 덕분에 나만 과하게 걱정하며 부산을 떨은 양 보였지만 애석하게도 이는 채 일주일을 가지 못했다.

“야! 화패가 수송대 노린단다!”

“우리가 독식한다고, 싹 털어버린다고 장난 아니래!”

PK들도 거래할 수 있는 플레지 내의 유일한 지역, 화전민 마을. 이곳을 베이스로 활동하며 길드를 이룬 집단이 화전민 패밀리다. 여타의 뜨내기들과는 다르게 강력한 전력을 보유한 그들이 내 기억속의 등장시점보다도 빠르게 나타났다.

*

‘기존 길드들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구나.’

화전민 패밀리의 구성원들은 본래 기득권을 거머쥐었던 유저들이다. 성이 나오기 전부터 플레지에서 명성을 구가했던 이들. 업데이트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도태된 이들로 구성된 PK집단이 바로 그 정체다.

꿈에서와 달리 이번에는 등장시기가 빠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엎치락뒤치락 하며 성을 소유했다가 빼앗기는 다툼이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길드가 독점하고 틈을 내어주지 않는 마당이다.

칸트성 정복 실패. 오크 요새 역시 패배. 이에 대한 분풀이를 하고 싶고 화가 잔뜩 난 유저들이 모였다. 사회 어디에나 있는 성격 안 좋은 부류의 전형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애 같은 행동을 하는 주제에 제법 강하다는 거지.’

그런 놈들이 우리의 골드 수송을 공격하려고 칼을 갈았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건 단순한 골드 수송이 아니라 전쟁이며 자존심 싸움이다.

빼앗기면 가능성을 본 유저들이 화전민 패밀리 쪽으로 붙게 될 것이다.

PK집단이 강성해지면 신규 유저가 특히 고통받고 게임 전체 환경이 흐려지는 결과를 얻게 된다. 내 직장인 플레지가 더욱 흥할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할 순간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 오늘은 ‘좋은사람들’이 고작 5명. ‘강한사람들’에서 6명이 참여한다. 평상시에 비해 인원수가 조금 부족한 편이다.

“내부에서 배신자가 있는 건 아니겠지?”

“100% 장담은 못하지만··· 아마 없을 걸? 쟤네가 운이 좋았다고 봐.”

“우리는 살짝 없는 편이고.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냐?”

“어쩌기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보강해야지.”

“어떻게?”

“돈으로.”

오크 요새를 차지한 길드는 오크 근위병을 용병처럼 고용할 수 있다. 무려 1인당 1만골드나 하는 값비싼 몸값의 녀석들. 하지만 그 성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명실공이 현존 최강의 몬스터들이지.’

물론 플레지에서 가장 강력한 몬스터는 데스나이트다. 하지만 이는 보스 몬스터이니 예외로 두는 게 옳다. 이렇듯 보스급을 제외한 최강 중에서는 오크 근위병이 존재한다. 칸트 성에서 고용하는 적상어 단 따위와 비교하면 심히 억울할 녀석들이다.

“요새라는 설정답게 전투력 하나만큼은 아주 좋다고.”

나는 이를 언급하며 빠르게 메시지를 보냈다.

- →[귓속말] 골리앗 : 오늘 화패가 습격할 모양이야. 애들한테 근위병들을 최대한 다 붙여줘.

- →[귓속말] 지옥검 : 얼마나?

- →[귓속말] 골리앗 : 1인당 4마리씩.

- →[귓속말] 지옥검 : ㅇㅋㄷㅋ.

오늘 참여하는 5명의 길드원들에게 모두 고용시켜준다면 그것만으로도 20만 골드가 지출된다.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수송을 실패했을 경우를 생각하면 이런 지출은 감수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돈으로 실수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가장 확실하며 간편한 방법이 되니 말이다.

“적상어단은 고용 안 해?”

“구려서 안 돼. 그럴 바에는 긴급 콜을 부르고 말지.”

“긴급이라면?”

“언제 불러도 존명으로 대답해주는 충신이 있잖아. 진짜 고마운 길드원이다.”

“오오!”

굳건한 믿음을 갖고 메시지를 전송한다.

- →[귓속말] 골리앗 : 야간 팀인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오늘은 참여 하셔야겠습니다.

- →[귓속말] 좌호법 : 존명.

여지없이 No를 모르는 Yes맨이시다.

- →[귓속말] 좌호법 : 지금 바로 오크 요새로 달려가겠습니다.

- →[귓속말] 골리앗 : 감사합니다. 뵙는 장소는 오크 요새 말고 글말로 하지요.

- →[귓속말] 좌호법 : 존명.

부담되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그래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가 아닌 게 어디야, 라고 생각하곤 한다. 역시 인생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어디보자. 이만하면 또 쓸 카드가 남아 있나? 다 쓴 건가?’

꺼낼 패로는 구운몽 캐릭터가 있기는 하다. 같은 계정이기에 골리앗으로 참전하는가, 구운몽으로 참여하는 가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아직은 등장시키지 않아도 될 법하다.

‘프린스 클래스이기는 해도 어지간한 나이트나 엘프 정도는 이길 자신이 있지.’

전투력은 짱짱한 장비에서 나오는 법이고 나는 충분히 갖춘 상태다. 여기에 승리할 시에는 총군주가 지휘하는 채로 이겨냈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거머쥘 수 있다.

- 골리앗 : 출발합니다.

전체 참가인원은 좋은사람들 길드원 5명, 오크 근위병 20마리, 강한사람들 6명, 좌호법, 진수, 성찬이였다. 2진 길드원인 진수와 성찬이에게 4마리씩의 오크 근위병을 붙이지 않은 것은 서먼 몬스터 마법을 활용하기 위함이다.

‘8보다는 16이 좋잖아.’

듬직한 이들 매지션은 레벨 40을 넘겼다. 덕분에 몬스터를 소환할 시 맷집 끝내주고 공격력도 좋은 치마 두른 흰둥이 곰. 버그베어를 소환할 수 있다. 나중에는 카리스마의 능력치와 소환마법이 연동되어 제약을 받지만 현재는 전혀 상관없다.

한 번에 최대 8마리씩 쭉쭉 소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 서먼 법사의 위용을 느끼고 소문이 퍼질는지도 모르지.’

미래를 대비하는 폭등주! 서먼 몬스터!

요 며칠간 진수와 성찬은 물론이고, 나와 좌호법까지 넷이서 작업한 결과 6권의 마법서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것들은 혹여나 마음에 드는 매지션을 길드원으로 받을 경우 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가치가 폭등했을 때 판매할 예정이다.

이렇게 게임 속 정보를 빠삭하게 알며 이용할 때마다 문득 그리 생각하곤 한다. 주식이나 복권 같은 것도 잘 알면 참 좋았을 텐데, 하고 말이다. 그러나 꿈속의 내가 그런 쪽에는 깜깜무소식이었으니 다른 방도가 없다.

매수시기, 매도시기 같은 것은 모른 채 향후의 방향성만 안다고 그쪽 시장에 끼어들면 쪽박 차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언젠가는 뜨지만 지금은 저평가된 가치주식들을 살 수도 없다. 그건 돈을 이자율 센 곳에 묻어두는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중산층 재산이 통계로는 몇 억이어도 사실은 그 태반이 부동산인 거랑 똑같지. 쓸 수 있는 돈이 없거든.’

반면에 게임은 잘 안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이만큼 꾸준히 열정을 불태운 분야는 없었다. 그러니 전문가라 자칭할 수 있는 플레지에서 활동하고 짭짤하게 챙기는 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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