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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의 섬
- 아··· 젠장···
- 이거 뭐야? 버그 아님?
- 버그 아니에요. 원래 가끔 이렇게 만나요.
- 쉬바. 뭐 이딴 게 다 있어?
죽은 사람들은 누워서 황당한 상황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런다고 누군가에게 죽음을 보상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꿈에서 말이야.”
시니컬하게 나서서 해골들을 몽땅 때려 눕혔다. 너무 빨리 죽이는 바람에 다시금 심심해하는 시간이 이어졌고 무사히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초보자의 섬은 탈 때나 내릴 때 모두 선착장이 문제다.
“깜짝이야! 아. 맞네. 내가 또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구나.”
거의 언제나 PK꾼들이 대기하는 곳! 우리가 내리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선제공격을 가해온다.
- →[귓속말] 지옥검 : 이 정도면 초심자의 섬 애들은 배를 탈 수 없으니 질질 짜고 있었겠는데?
- →[귓속말] 구운몽 : ㅇㅇ 그런데 미안해서 어째. 내린 게 하필 우리들이네?
- →[귓속말] 지옥검 : ㅋㅋㅋㅋㅋㅋㅋ
- →[귓속말] 구운몽 : 얘네 다 치우고 가자.
- →[귓속말] 지옥검 : ㅇㅋㅇㅋ
이제 초성으로 말하는 거에 아주 재미가 들리신 모양이다.
고수라 할 수 있는 40레벨 대라고 해도 엄연히 위아래는 존재하는 법. 게다가 아무리 네 명이라고 해도 나이트는 타 클래스에 비해 1대 1에서 최강을 자랑한다.
우리는 그 소속군에서도 서버 최상위이니 저들 모두를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 뤼나인버스 : 와··· 대박 짱 쎄.
- 존슨즈수프 : 봤어? 둘이서 네 명 다 귀환시킴.
- 흥부잣댁 : 나 저기 지옥검 길드 알아. 지금 칸트 성 길드이잖아.
- 좀비짱구울짱 : 성주? 지배자?
- 흥부잣댁 : 어. 두 번 다 성 먹었음.
구운몽 캐릭터는 공성전에서 프린스로 지휘해야 하기에 가입한 길드가 없는 상태다.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선 지옥검만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러한 관심은 초보자의 섬에 있던 ‘검’이 합류하면서 길드 쪽으로 옮겨갔다.
- 홈런볼존맛 : 그런 사람들이 여기는 왜 왔대?
- 오뚝너구리 : 바포메트 잡으러 왔겠지.
- 뤼나인버스 : 대박! 구경해야겠다. 언제쯤 나오나?
- 집더하기 : 따라가면 되려나?
마치 졸업하고 돌아온 초등학교에서 인기인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당당하게 길을 열어주고 선착장에서 폼을 잡고 있었다.
“검이 쟤는 너무 과묵하다니까.”
커뮤니케이션을 즐기는 지옥검과는 달리 검은 묵묵히 게임을 즐기는 타입이다. 딱히 사람들을 피하는 것은 아닌데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면 하지 않는 타입이다. 처음에는 왜 저러나 싶었는데 지금은 그냥 그런 플레이어려니 하고 편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나도 왕년에는 저랬지.’
도중에 사람들이 채팅으로 대화하는 걸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컸다.
- 여기 섬에서 뭐가 제일 쎈 몹인가요?
- 던전에 가면 보스가 있지만 섬에는 셀롭이 제일 쎄요.
‘오늘부로 아니게 되거든?’
흑기사와 백기사가 나타나기에 업데이트 이후로는 가장 강한 몬스터가 바뀌게 된다. 하지만 이런 자세한 사항을 알지 못할뿐더러 출현 빈도자체가 훨씬 적기에 초보 유저들에게 셸롭은 여전히 최강일 것이다.
- 나야나양 : 셀롭이요? 그건 어디서 나오나요?
- 불가살 : 섬 서부에 나와요. 17렙 정도 되기 전에는 도망도 못가니까 웬만하면 서부는 가지 마세요.
- 나야나양 : 네. 감사합니다.
부푼 기대와 열정을 가진 유저들을 지나서 지옥검과 함께 게론이 있는 집 방향으로 내려갔다. 도중에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는 상큼하게 무시해주었다.
- 지옥검 : 이야. 매지션은 저렇게 생겼구나.
하얀 로브를 입고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는 캐릭터들이 보였다. 마법을 쓰는 클래스답게 칼질은 느릿해서 사뭇 답답할 정도였다.
- 지옥검 : 매지션인데 칼 들고 사냥하니까 좀 이상하다.
- 구운몽 : 레벨을 4까지는 올려야 마법을 배우니까. 그런데 쟤네들 보기보다 훨씬 필사적일걸?
- 지옥검 : 왜?
- 구운몽 : 마법이 비싸잖여~
- 지옥검 : 맞다. 개당 100골드씩 5개면 500골드였지. 초반에 꽤 부담되는 액수네. 어째 먼저 줍줍하려고 바글바글하더라니.
‘초반에 양초 노가다를 내가 괜히 한 게 아니지.’
플레지의 아이템 습득 방식은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라는 선착순이다. 때문에 토글은 꽤나 운이 많이 따르는 일이었다. 운이 좋으면 4레벨에 500골드를 다 모을 수 있겠지만 재수가 없으면 4레벨이 되어도 100골드를 못 모아서 마법을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 지옥검 : 이쪽은 마법을 배운 사람들끼리만 모여 있는 모양인데?
푸르스름한 빛의 막대를 홱 내던지는 모션. 초급마법인 에너지볼트였다. 가장 기본이면서도 매우 효율적인 마법인데 이는 적중률 때문이었다. 활 공격은 방어력이 높으면 잘 박히지 않는다.
하지만 마법은 회피가 없이 100%의 성공률을 가지고 있으며 방어력이 아닌 MR에 따라서 피해가 적용된다. 때문에 저레벨이라도 충분히 위협적일 수 있으며 여럿이 모이면 화력이 집중되어서 감히 비벼보지도 못할 높은 레벨의 몬스터도 때려눕힐 수 있다.
‘역시 한국 게이머들이야. 판단이 빨라.’
매지션이 오늘 처음 업데이트 되었음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인지한 상태였다. 모여서 매지션 촌을 이루고 있었다.
- 지옥검 : 쟤네 뭐지?
게론의 집 근처에서 사람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구경할 즈음이다. 웬 붉은 이름을 가진 무리가 우리 쪽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매지션이 여섯에 나이트 셋, 엘프 하나다.
- 구운몽 : 우리 쪽으로 오는데?
- 지옥검 : 쟤네. 아까 걔네들 아냐? 선착장 PK?
- 구운몽 : 복수하러 왔나봄. ㅋㅋㅋㅋ
- 지옥검 : 깡 좋네. 아까 보니까 장비도 별로 안 좋은 거 같던데. ㅋㅋ
아마도 저들은 본토에서 40레벨을 찍은 뒤로 계속 섬에만 있던 것이 틀림없다. 초심자의 섬에서 초보들만 학살하다 보니까 본토의 상위 유저들이 얼마나 강한지 체감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이템이 탐도 났겠고.’
우리 중 누구라도 착용 중인 장비를 떨어뜨리면 저들이 지금까지 게임하면서 벌었던 돈 이상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눈이 멀어 얼마나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것인지 판단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 구운몽 : 물약 있지?
- 지옥검 : 나야 충분하지. 근데 검이가 좀 걱정이네.
- 구운몽 : 왜?
- 지옥검 : 쟤 빨물 아니고 주홍이야.
보스를 사냥하기 위해서 고가의 물약을 챙겨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도망치지 않고 이기기 위해서는 그거라도 먹어야지 말이다. 자고로 게임은 훌륭한 장비에 빵빵한 물약이 채워져야 강자의 반열에 오른다.
그때 검이가 처음으로 말했다.
- 검 : 됐어. 다 죽이면 돼.
지옥검과 내가 맞장구쳤다.
- 지옥검 : ㅋㅋㅋ 맞음. 주홍이 그까이꺼~
- 구운몽 :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맞고 때리는 거 없다. 어차피 PK들이니 선빵치자.
- 지옥검 : ㅇㅋ 마법 날리기 전에 먼저 가자. ㄱㄱㄱ!
우리가 마중 나가자 곧바로 에너지 볼트가 날아왔다.
- 구운몽 : 검이가 매지션 맡아.
가장 폭발적인 딜량을 가지고 있으면서 주홍 물약이라는 막강한 회복력을 보이는 검에게 매지션을 붙인다. 지옥검과 나는 다른 근접 딜러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윽! 윽! 윽!
몇 번 칼질이 시원스레 들어갔을 뿐인데 기겁한 상대 쪽에서 다급히 메시지를 띄웠다.
- 콜라프린터 : 100
- 콜라푸린터 : 100
고작해야 1분여도 되지 않아서 여섯의 매지션 중 세 명이 도망갔고 다른 셋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귀환 주문서로 도망친 나이트 셋과 달리 뺄 때 몸을 빼지 못한 엘프는 지옥검과 나의 다구리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 지옥검 : 피통도 작은 녀석이 뻐대기는.
- 구운몽 : 얼씨구? 그동안 피케이로 돈 좀 만지셨나 보네?
- 지옥검 : 그러게. 어쩐지 때리면 금방 도망가는 놈들이 맞으면 쪼깨 아프더라고.
습득한 장비에 감정 주문서를 발랐다.
「+6 엘프족 활」
“유후! 꽁돈일세~”
+6 강화가 된 활이라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허접한 피케이 단이었나보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어중간한 녀석들을 나는 매우 사랑한다. 적당히 돈이 되어주고 매우 만만해서 잡기도 수월한데 머리는 나쁘다. 엑스트라와 호구의 3대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하겠다.
- 녹십자혈액 : 저기요···
대자로 뻗은 상태로 엘프가 우리를 불렀다.
- 녹십자혈액 : 죄송하지만 활 다시 주시면 안 될까요? ㅠㅠ
‘바보냐?’
- 구운몽 : 너 같으면 주겠어?
지금 내 입장에서 +6엘프족 활쯤은 큰돈도 아니다. 일반적인 유저가 필드에서 떨어뜨렸고 이를 주웠다면 티끌만큼도 욕심내지 않은 채 ‘즐거운 플레지 되시기를~!’하며 돌려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놈은 아니다.
- 지옥검 : 철판도 보통 철판이 아니네. 어떻게 지가 죽이러 먼저 와놓고 떨군 템을 달라고 하냐?
- 구운몽 : 그렇지. 고로~ 꺼져라.
- 녹십자혈액 : ㅠㅠ 그거 형한테 빌린 거라··· 없어지면 저 죽어요.
- 구운몽 : 그럼 죽던가.
- 지옥검 : 형제는 원래 그러면서 크는 거임.
그거야 본인 사정이지 우리가 알바는 아니다.
- 구운몽 : 깅게 빌린 활로 하고 많은 것들 중에 피케이질을 하고 다니냐?
- 지옥검 : 철분이 부족해서 그럴 거임.
주거니 받거니 하자 상대가 폭발했다.
- 녹십자혈액 : 야이 개개캬. 너 나중에 보면 디진다 진짜. 내가 너 어디 사는지 알아내서 찾아간다!!!!!!
- 구운몽 : 그래 찾아와라. 어디 내 앞에서도 그런 말 할 수 있는지 보자.
- 녹십자혈액 : 1818181818181818181818181818!!!!!!!!!!!!!!
- 구운몽 : ㅗㅡ_ㅡㅗ
- 녹십자혈액 : ㅁ뉘아룸ㄴ아ㅣ로ㅓ마ㅤㅣㅈㄴㄷ궈아ㅈㄷ갸ㅏㅗㅓ악!
플레지는 아이템이 현실에서도 고가의 현금으로 거래되는 만큼 사건과 사고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작은 이슈가 될 만큼 사회적 문제화 된 적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는 비판적인 언론에 의한 어그로가 대다수였고 딱 이슈 수준이 전부였다.
“그리고 형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거든.”
실제 이런 애들은 현피를 와도 아무것도 못하고 돌아간다. 작고 어리며 약한 사람들한테는 ‘분노조절장애’가 일어나지만 나처럼 한 덩치 하는 놈한테는 ‘분노조절잘해’가 된다.
*
보스 몬스터인 바포메트가 나타나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은 상태였다. 우리는 매지션을 처음보는 지옥검의 주장대로 스승 NPC인 게론의 집을 구경하기로 했다.
‘여기도 관문 아닌 관문 역할을 하게 되지.’
마법을 익혀야 매지션이다. 이렇게 진정한 마법사로 각성시켜주는 레벨이 4이고 중요 NPC가 게론인데 초보들에게는 이곳에 오는 것부터가 모험이 된다.
초심자의 섬 남부에 위치한 게론의 집 근처는 셸롭과 해골이 출몰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 두 종류의 몬스터들이 나타나는 지역의 중간지대라 할 수 있다. 즉, 운 없으면 만나서 죽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루트가 똑같아서 추억 테크트리가 죄다 비슷비슷하단 말이야.”
코미디에 관해 이야기할 때 미국이나 다른 나라는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고들 한다. 이유는 쉽게 공감하고 박장대소할 수 있는 주 소재가 학생, 취업 준비생, 직장인의 그룹이고 사실 한국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여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시스템에 있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사례가 극히 드물다. 같은 시각을 적용하면 플레지에서도 초창기 유저들은 죄다 같은 공감대가 있었다.
‘지금이야 모든 클래스가 초심자의 섬에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엘프는 엘븐우즈, 나이트는 붉은 기사의 마을에서 시작하게 되니까. 지금이야 다 같은 고향에서 스타트고.’
선착장 꼬장의 치사함과 짜증! 이를 느끼는 1세대와 일부 모르는 2세대로 나뉘는 셈이다. 덕분에 초창기 유저들 사이에는 별 시답잖은 논란거리들이 존재했다. 개중에서 가장 재미있던 논란거리로는 군트와 게론이 있다.
플레지의 스토리상 군트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몬스터 천국. 초심자의 섬을 살만한 곳으로 만든 인물이다. 하지만 유저들은 자신의 아지트에 숨어 있는 이 NPC보다는 섬 남부에서 마법을 가르치는 게론을 더 존경했다.
<게론이 섬 남부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가장 위험한 몬스터인 셸롭을 저지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군트가 꼭 본 받아야 하는 부분이다.>
가끔 유저들은 이런 말들을 하곤 했다.
“개뿔 재미도 없던 건데 이때는 왜 그리 몰입했는지 모르겠어.”
반대로 군트를 지지하는 소수 역시 반박하곤 하였다.
<무슨 소리냐 던전에 봉인된 바포메트가 제일 위험하다. 제자인 로우가 바포메트를 봉인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느냐! 근데 게론은! 스승이라는 놈은 저한테 마법 배우러 가는 제자들을 사지로 몰고 있다!>
‘이 말싸움들을 기반으로 나중에는 공식 홈페이제 웹툰으로 연재까지 됐었지.’
은퇴한 대마법사와 군트를 추총하는 유저들의 변변찮은 갑론을박. 2000년이 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여러모로 순수했다고 생각한다. 범죄율이 적었다거나 양심적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아직은 낯선 세상인 온라인에서 조심하고 매너를 지키는 이들의 수가 많았다는 의미다.
그렇게 게론의 오두막집을 구경하던 중에 사고가 일어났다. 무려 셸롭이 두 마리나 등장한 것이다.
- 대마법사여 : ㅌㅌㅌ
- 오쿠궁수 : 아. 죽었어!
- 휫슬리 : 이게 몇 번째냐고!!
단말마를 남기며 다섯이 넘는 초보들이 주위에 케첩을 뿌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엘프들이야 3클래스 마법을 24레벨에 배우니까 괜찮지만 마법사는 4레벨에서 제아무리 높아야 12레벨이지. 셸롭이 무서울 수밖에 없는 시기이고.’
나이트는 물론이고 엘프와 비교해도 한참이나 부족한 매지션의 체력으로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삭제되는 수준이다. 몬스터의 무차별 살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 머구컵 : 또 죽을 수 없어!!
- 헤골 : ㅌㅌㅌ 더망 가.
- 헨드래이크 : 게론. 게론의 집으로 도망가자.
유저들에게 건물의 문은 클릭 한 번으로 열고 닫을 수 있지만 몬스터들에게는 닫는 순간 벽으로 인식된다. 때문에 게론의 집에 잘 피신하고 문만 잘 닫으면 충분히 생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존자들이 간신히 들어가며 문을 닫음으로써 초보들은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