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17화 (17/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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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배부르냐?”

“응? 아닌데? 안 배부른데? 그냥 오빠는 언제나 많이 먹으니까 그냥 신경 써주는 건데? 나 완전 배 안 부른데?”

웃기고 있다.

“누가 봐도 배가 터져 나올 거 같은 모습인데?”

“헙!”

장난스러운 말인데 놀라서는 자기 배를 한 번 보고는 인상을 쓴다.

“숙녀에게! 배가 터질 거 같다니!”

“숙녀는 무슨.”

대꾸하면서도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어마어마한 식탐을 자랑하는 데 여기서 고작 저만큼으로 배를 다 채울 리 없다.

‘옷맵시가 안 날까봐 자제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음식도 양보한다. 나는 좋게 생각하고는 단숨에 먹어치웠다.

“오빠도 다 먹었어. 일어나자.”

“아니. 지금 엄청 중요한 말을 하는데···”

“백화점 구경 안 할 거야?”

“어? 백화점? 맞다! 백화점!”

이제야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았다는 표정이다. 금방 단순해져서는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고고~”

“어휴.”

아주 그냥 혼자 세상 흥을 다 끌고 온 얼굴이다. 어째 보아하니 오래가는 대용량 배터리가 아니라 금방 충전하고 순식간에 방전되는 성능을 자랑한다.

‘아주 사람들만 없었으면 콧노래까지 불렀을··· 이미 부르고 있냐?!’

예전 같으면 쪽팔리니까 그만하라거나 일행이 아닌 척 멀리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냥 곁에 있어준다.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이면 함께하는 것이 가족이라 본다.

태희의 콧노래는 1층 잡화&화장품 매장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눈에서 광채가 나다못해 레이저를 쏘아내기 시작했다.

“오빠. 이거 봐 봐.”

“어. 보고 있어.”

“여기 봐. 이거 진짜 예쁘지?”

“그러냐?”

“와! 이거 화장품 엄청 비싸!”

“너, 내 대답은 필요 없지?”

다리도 얇은 게 어디서 저런 체력이 나오는지 모른다. 백화점에 들어와서 돌아다니는 내내 씩씩하게 매장의 모든 상품들을 구경하기 바빴다. 아무것도 살 돈도 없는 주제에 아주 당당하시다.

“어머~ 여자 친구에게 선물 사주시러 왔나 봐요?”

‘역시 직업정신!’

우리가 커플처럼 보일 리가 없다. 군 입대 전에야 꽤 준수한 편의 얼굴에 동안이라는 말도 자주 들었지만 4년 3개월이라는 군복무 기간은 피부를 새까맣게 태우는 걸로도 모자라 동안의 느낌을 다 지워버린 상태다.

‘남성미 넘치는 모습이라 개인적으로는 만족한다만.’

아무리 좋게 봐줘도 고등학생이랑 애인으로 보일 리는 만무하다. 그냥 상술을 위한 서비스 멘트가 분명했다. 그런데 이 팔랑귀 녀석이 금방 낚여버린다.

“네! 우리 오빠 짱 멋지죠?”

“진짜 멋지시네요~ 완전 선남 선녀세요~”

‘뭘 또 받아주고 앉았냐?’

빠르게 우리 둘을 스캔하는 직원. 들뜬 태희를 보고 잘만 꾀면 물건을 팔 수 있을 거로 생각했나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뭘 모르시네. 쟤가 얼마나 짠순이 인데.’

우리 집 여자들은 절약정신이 투철하다.

“이런 건 어떠세요? 피부가 너무 곱고 투명하셔서 이런 목걸이에 귀걸이 세트를 하시면 정말 잘 어울리실 거 같은데.”

“우와~ 진짜 예뻐요~”

역시나 동생을 열심히 공략해 보는 직원이지만 태희는 잘 받아주기만 할 뿐 물건을 구매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살 돈도 없는데다가 나한테 사달라고 조를 애도 아니어서다.

그렇게 슬슬 점원도 지쳐가고 나 역시 기운이 쭉쭉 빠질 무렵, 태희가 무언가를 물끄러미 보는 게 포착됐다.

“뭐 보냐?”

소박한 것 같으면서도 큐빅이 포인트를 잘 살려준 액세서리. 세련된 느낌을 잘 살려주는 디자인의 목걸이와 귀걸이였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예뻤고 태희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보였다. 슬쩍 곁에서 같이 보니 동생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아냐. 다른 데 갈래.”

몇 년간 못 봤다고 해도 어릴 때는 바쁜 부모님 대신에 내가 업고 다니면서 키웠던 동생이다. 말하지 않아도 어떤 생각인지 아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다.

‘아주 마음에 들었던 것 같은데 워낙 고가의 브랜드라서 말도 못하는 모양인데?’

가격은 18만원이다. 지금 순금 한 돈의 시세가 5만원 안팎이다. 14k로 이루어진 액세서리의 가격이 18만원이라는 건 학생의 입장에선 정말 엄청난 금액인 셈이다.

“마음에 들지?”

“응? 아닌데? 아냐! 그런 거 아냐! 나가자!”

늘 이렇게 당황하면 목소리가 커진다. 이 정도로 당황했다는 건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그걸 숨기려고 한다는 게 분명했다.

문득 생뚱맞은 기억이 떠오른다. 군대에 있을 때, 주변에서 누가 군인 아저씨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만 하면 달려가서 ‘군인은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야!’라고 소리치던 태희의 모습.

휴가 나올 때면 군인들이 좋아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건지 초코파이를 챙겨놓고 있던 기억. 복귀할 때는 가지 말라고 붙잡고 울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거 하나 포장해주세요.”

“어? 어어? 아니라니까?”

극구 부정한다. 나는 솔직하지 못한 동생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됐어. 대신 공부 열심히 해라. 엄마말도 잘 듣고.”

“치. 거 봐. 아직도 내가 어린이인줄 안다니까?”

불퉁하게 입술을 내민 자신이 어떤지 모르는 모양이다.

“30년 더 지나도 애다. 내가 너 어릴 때 기저귀 갈고··· 읍!”

“호호호! 하하하!”

별로 민망할 말도 아닌데, 급히 내 입을 막으면서 어색한 웃음소리로 내 말을 가로 막았다. 그리고 점원은 혹시나 내 마음이 바뀔세라 빠르게 상품을 포장해서 꺼내주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꾸뻑 인사를 하는 점원 뒤로 태희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얼굴에 잔뜩 웃음을 채운 채 따라왔다.

“아. 나 진짜 필요 없는데. 아~ 정말 괜찮은데~”

다시 흥얼거리는 모습에 농담을 던졌다.

“엄마 건데?”

“에엑!? 엄마 말 잘 들으라며?”

“그래야 너도 얻어 끼던가 할 거 아냐?”

뜨악 하는 표정이다. 당연히 농담인 걸 알아챌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덧 표정이 울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얼른 건네주었다.

“자.”

“헤헤헤.”

손에 쥐어주니까 금세 얼굴이 펴지고 웃는다.

‘내가 당한 건가?’

잠깐 들은 생각이지만 이내 픽 웃었다. 이 순진한 애가 그런 걸 할 리가 있으랴. 태희는 밀당 같은 거 할 줄 모른다.

“부모님 필요한 거 뭐 있나 골라 봐. 이상한 거 고르면 그거 다시 뺏는다.”

“피. 줬다 뺏기가 어디 있냐?”

“여기 있으니까 잘 골라.”

“네!”

이후로 백화점을 한참이나 더 돌아야 했고 부모님이 입으실 정장을 한 벌씩 구입했다.

‘이것도 생각을 못했네.’

하여간 그동안 집 편한 줄만 알았지. 부모님이 어떻게 사시는지는 까맣게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지금 입으시는 정장들이 10년은 된 거 같은데 말이다.

‘지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백화점을 나와서는 휴대폰을 사기 위해 부평 지하상가로 들었다. 어차피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하상가를 통해 역으로 이동해야 한다. 돌아갈 필요는 없어서 좋았다.

“뭐야? 핸드폰도 사게?”

“어. 부모님 없으시잖아.”

“오빠. 휴대폰은 진짜 엄청 비싸.”

“그래도 일할 때 있으신 게 좋지.”

휴대폰 보급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아주 고가의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오죽하면 대중교통 내에서 휴대폰을 사용하면 ‘차도 없는 주제에 무슨 휴대폰?’하는 핀잔을 듣는 일까지 왕왕 발생하곤 했다.

그러나 안 써봤으면 모를까 쓰다 보면 알게 된다. 이게 아주 편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사람은 편리함에 쉽게 적응한다.

“그래도··· 오빠 정장 사면서 돈 엄청 썼잖아.”

“오빠가 이 정도는 괜찮다.”

“뭘 괜찮아. 요즘은 게임하느라 일도 안하면서.”

‘그게 일 한 거란다. 노는 게 아니고.’

게임이 돈은 물론 훌륭한 직업까지 된다는 생각을 가지기에는 아직 무리다. 그래도 오빠가 논다고 핀잔주는 것 대신 저리 생각해주니 참 기특하다.

“돈은 충분히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니 꺼도 골라.”

“아냐! 너무 비싸. 난 이거로 충분해.”

가난한 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펑펑 쓸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때문에 뭐든지 아끼고 줄이는 버릇이 있어서 소비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차피 조금만 더 지나면 전 국민이 휴대폰을 가지는 시대가 올 거야. 미리미리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삐삐 치려니까 오빠가 답답해서 그래. 그러니까 골라.”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뒤늦게 끄덕인다. 새로 나온 신형 폴더 폰을 무시하고는 플립으로 된 휴대폰 주변에만 얼쩡거리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나저나 휴대폰 진짜 촌스럽네. 아무리 신경 써서 골라도 다 구려 보여.’

그 중 가장 투박한 휴대폰을 말하자면 지금 내 가방에 있는 녀석을 들 수 있다. 스마트폰도 아닌 것이 크기는 또 상당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버겁다. 외출할 때 작은 옆 가방이 필수일 정도다.

‘겸사겸사 나도 바꿔야지.’

태희를 불렀다.

“야. 그쪽 것들은 고르지 말고 이쪽으로 와.”

“응? 왜?”

“그거 씨티폰이잖아.”

“씨티폰? 그게 뭔데?”

“그거 공중전화 주변에서만 쓰는 거야. 그거 말고, 여기 PCS에서 골라.”

“공중전화? 학교에도 있고, 동네에도 있고, 그럼 어디서든 다 되는 거 아냐?”

“어. 아니야.”

시장 초창기에 저렴한 가격으로 밀고 들어왔던 이 제품은 공중전화의 통신망을 이용해서 사용하는 휴대폰이다. 지금은 보급률이 부족한 만큼 공중전화가 도심 곳곳에 설치된 상태다. 때문에 이를 기점으로 근방 200미터까지 통신망을 사용할 수 있기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공중전화 주변이 아니면 무용지물이 되는 발신 전용 휴대폰이다.

‘거기다 빠르게 달리면 전화가 끊기기까지 하고.’

이런 단점들이 있는 가운데 같은 시기에 PCS가 등장해버려서 씨티폰은 시장에서 금방 밀려나 버린다. 이상의 내용을 알려주자 말 잘 듣는 학생이 되어 크게 수긍했다.

“네!”

‘얘는 군대도 아닌데 왜 이리 대성박력인지 몰라.’

부모님의 휴대폰은 일하면서 막 방치해도 쉽사리 고장이 나지 않는 녀석으로 골랐다. 튼튼하기로 유명한 오토로라의 첫 폴더 폰이었다.

내 휴대폰은 삼정에서 만든 폴더폰으로 선택했다. 일단 액정이 4줄로 이루어진 여타의 폰들과 달리 5줄로 한 화면에 더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전자수첩 기능이 있어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좋았다.

“나. 그럼 이거 골라도 돼?”

태희는 걸면 걸리는 걸리버. 요즘 한창 휴대폰 광고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상품을 콕 집었다. 톱 여배우인 배진희와 아직 그런 단어는 없지만 명품 조연 염택조가 재미나게 CF를 만들면서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휴대폰이다.

‘몰랐었는데 지금 보니까 이거 현도거였네?’

분명 걸리버 휴대폰은 꽤 많은 인기를 누렸는데 이게 없어진 브랜드인 현도의 상품이라는 것이 꽤 놀랍다.

‘초창기에 이렇게 자리를 잘 잡아 놓고도 망할 수가 있구나.’

가장 좋은 휴대폰은 셀루러다. SJ텔레콤에서 사용하는 휴대폰인데 단말기도, 요금도 가장 비싸지만 서울을 벗어나서도 가장 안정적으로 통화가 가능한 제품이다. 게다가 휴대폰 시장을 가장 먼저 선점한 덕분에 다른 통신사에 비해 프리미엄 휴대폰이라는 이미지까지 가졌다.

때문에 SJ텔레콤을 견제하기 위해서 PCS통신사들은 공격적인 마케팅을 딱 올해까지만 했었다.

‘의무사용기간이었지.’

약정 사용기간이 아니다. 의무사용기간이다. 이는 비싼 단말기 가격에 부담을 느껴서 휴대폰 구매를 망설이는 고객을 잡고 같은 값이면 SJ를 선택하는 고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나온 정책이다. 의무 사용기간 3년을 주는 대신에 거의 공짜나 다름없게 휴대폰을 판매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게 진짜 고객을 위한 것이다. 단통법이니 뭐니 결국은 그것으로 손해는 고객만 보고 기업은 안 그래도 배가 부른데 터질 듯이 불러지는 구조가 되는 나중을 생각하니 세상이 거꾸로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의무사용기간이라는 이 좋은 정책은 결국 SJ의 소송으로 사라지게 되니까. 올해 사기를 잘했어.’

휴대폰들을 4개 구매했는데 들어간 금액은 고작 25만원이다. 통신사 가입비를 포함한 금액이니 정말 만족스러웠다.

돌아오는 길에 태희가 휴대폰의 이모저모를 살피다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오빠 그거 알아?”

목걸이 세트에 휴대폰까지. 아주 입이 귀에 걸리셨다. 그러면서 또 뭘 아냐는 말인가? 짐작도 안 간다.

“뭔데?”

“우리 반에 휴대폰 가진 사람 나 혼자다!”

“어휴. 그러세요?”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태희는 활짝 웃는 채다.

“오빠 진짜 고마워! 나 휴대폰 정말 가져보고 싶었어! 요즘 막 안 그래도 공부 스트레스 받고 그랬는데! 이제 진짜 열심히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

“별로 공부 하는 거 같지도 않던데 뭐.”

“뭐? 왜에? 나 진짜 열심히 해. 오빠가 맨날 그 컴퓨터 붙잡고 앉아서 잘 모르는 거지.”

“어휴. 그러세요? 몇 등이나 하시는데요?”

“나? 5등!”

‘어라? 잘하네?’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학교에서 반에서 5등이면 꽤 잘하는 거지만 괜히 시큰둥한 척했다.

“그럭저럭 하네.”

같은 배에서 태어났는데 공부를 잘하는 것을 보면 물려받은 유전자는 다른 가 싶었다.

“그럭저럭이라니? 우리 학교에서 5등이면 진짜 알아주거든?”

“반이 아니라 전교였어!?”

“어때?”

“그···럭저럭?”

“헹! 다 봤네요~!”

싱글벙글한 모습이다. 웃음이 전염되는 듯 나까지도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너무 우쭐해서 좋을 건 없다. 오빠답게 한 소리 했다.

“너 그거보다 성적 떨어지면 휴대폰 압수할 거야.”

“그런 게 어딨냐?”

“여기 있다니까?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

“알겠네요! 흥.”

집으로 돌아온 뒤 남은 3일간은 사온 선물들을 잠 숨겨두었다. 이후 5월 8일 어버이날에 꺼내서 쇼핑백에 잘 챙긴 뒤 식당으로 이동했다.

“태식아. 여기는 아니지?”

양식이 입에 맞지 않으실 부모님을 위해서 특별히 고른 한정식 전문점. 기와집처럼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모습에 부모님은 선뜻 들어가시려 하지 않으셨다. 미리 내게 언질을 받은 태희가 어머니를 이끌었고 나 역시 아버지의 팔을 잡은 채 억지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하셨습니까? 손님?”

“네. 윤태식입니다.”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단정한 옷을 입은 직원이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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