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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여기서 끝이 아니지. 서버는 하나 더 있거든. 무려 성을 먹은 곳이 말이야.’
몇 백 수준의 소자본으로 시작한 1서버와 달리 천만 단위의 대형자본으로 시작한 2서버는 서버 내의 자본이란 자본을 내가 거의 끌어온 상황이다. 때문에 경쟁자가 들어오기 힘든 구조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칸트 성을 차지하며 세금수익까지 거두어들이고 있으니 수입의 차이는 훨씬 더 커진다. 나는 각각 계산기를 두드렸다.
“2서버는 자판기 골드 보유량이 2억 2천만. 물품 재고까지 따지면 약 3억. 일일 수익이 150만 골드이고 월 4,500만씩 번다고 보면···”
가진 것이 많아서 더할 것도 참 여러개였다. 다른 계정인 골리앗은 성을 보유하고 있고 성에서 얻는 세금 수입은 한 달에 약 1억 7천만 골드다. 도중에 뺏긴다면 날아갈 테지만 나는 남한테 성을 뺏길 마음이 추호도 없다! 그러니 고정 수입으로 잡아도 괜찮다.
‘물론 세금 쪽은 길드원들이랑 나누는 방향으로 가야겠지만.’
다음 달 즈음이 되면 성에서 얻는 수익을 공개하고 배당해줄 생각이다. 초반 투표에서 내가 먹기로 했으니 당위성은 있다. 그러나 막대한 골드를 독식하다가는 자칫 길드의 단합력과 조직력이 와해될 수 가능성이 컸다.
이보다는 공유해서 파이를 더욱 크게 키우는 것이 좋다. 군주보다는 대군주가 되는 거다.
“이제 대충 계산이 끝났네. 뭐가 이렇게 많은 거래?”
투덜거리는 내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양쪽 서버의 수익을 합치니 2억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고 이는 원화로 월 수익 2,400만원이 된다.
“미쳤다 진짜.”
통장에 남은 잔고보다 더 크다. 비단 그 정도가 아니라 군대에서 4년간 벌어들인 돈을 지금의 나는 달랑 2달이면 따라잡고 더 번다. 실로 내가 바라마지 않던 안정적인 직장을 얻었다. 즐기며 몸 축나지 않고 돈을 버는 꿈의 일터다.
휘파람이 저절로 나온다.
“팔자~ 어차피 자판기로 다~ 돌아온다~”
어버이날 기념으로 일정량의 골드를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망설일 것 없이 바로 캐릭터 두 개를 만들었다. 이름은 ‘골드파라효’였고 엘프로 생성했다. 나는 1서버와 2서버에 만든 녀석들로 크게 소리쳤다.
- [외치기]골드 팝니다. 100:12 골드 팝니다. 서울, 경기, 인천지역 직거래 합니다.
아직 게임에 돈을 쓰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한 시대다. 게임 고수에게 프로라는 감탄사를 보이는 대신 폐인이라는 핀잔을 주기 일쑤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쓰지 않으며 오락과 취미에 열정을 보이는 이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현실에서는 약할지라도 게임에서는 고수이기를 바라는 지갑전사. 남들과는 다르게. 남들보다 빠르게! 편하고 쉽게 강해지고 싶은 고객들이 내게 답장을 주었다.
- →[귓속말] v오크v : 님. 골드 살게요. 얼마나 파세요?
‘1서버의 자판기도 여유 자본은 있어야 하니까.’
쌈짓돈을 빼둔 적당한 액수를 알려주었다.
- →[귓속말] 골드파라효 : 6천만 골드가 있습니다.
- →[귓속말] v오크v : 헐? 진짜요? 그런 골드를 가진 유저가 있어요? 그거 복사한 거 아니죠?
‘에이~ 사람을 뭐로 보고 그래?’
게임 내의 아이템복사는 아주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손쉽게 뛰어난 아이템을 가지고 싶어 했고 그것은 온라인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온라인게임의 역사와 아이템 복사의 역사는 거의 함께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이 부분은 플레지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 실제로 내가 전역하기 직전에 골드복사 사태가 있었고 게임사는 백업이라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큰 진통이 있었던 만큼 저런 추측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 →[귓속말] 골드파라효 : 복사라니요. 이 정도 수준의 복사가 있었다면 운영팀에서 빽섭했겠죠.
당당히 대꾸했고 대화는 의심 대신 거래로 이어졌다.
- →[귓속말] v오크v : 음··· 저는 구로인데, 어디에 사세요?
- →[귓속말] 골드파라효 : 부천역 괜찮으세요?
나는 인천, 상대는 구로.
그렇다면 부천정도가 적당하다. 옛날처럼 삼성동까지 가는 그런 멍청한 행동은 이제 하지 않으려 한다.
‘시간 아깝고 귀찮잖아.’
처음이니까 하는 서비스이자 밑천을 위한 귀한 손님이라 특별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합리적으로 움직이겠다.
- →[귓속말] v오크v : 네 괜찮아요.
- →[귓속말] 골드파라효 : 그럼 얼마나 구매하실 건가요?
- →[귓속말] v오크v : 천만 골드 살게요. 120만원 맞죠?
- →[귓속말] 골드파라효 : 네. 서비스로 50만 골드 더 드릴게요.
‘하나 체크.’
뒤이어 외치기와 대화를 이어나갔고 500만에서 1,000만 골드 사이의 고객들과 약속을 더 잡았다. 이후 한참 발품 팔 것을 생각하면서 ‘이거 은근 귀찮네.’싶을 때였다.
- →[귓속말] 발리스타 : 1억 5천만 골드 구매하겠습니다. 가능하신 거 맞죠?
“오오!”
2서버에서 용자가 나타났다.
- →[귓속말] 골드파라효 : 네. 맞습니다.
단 번에 대량의 골드를 구매하는 큰손이 나타난 것! 금액만 해도 무려 1,800만원이다. 자잘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보다야 이쪽이 훨씬 낫다. 덕분에 시간을 상당히 단축할 수 있었고 골드 장사를 모두 마친 결과, 나의 통장에는 2,500만원이 더해졌다.
잔고는 4,900만원!
“부자가 된 마음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구나!”
이제는 기쁘게 식당을 예약하고 선물을 사면된다.
‘예약은 내가 하고 선물은 태희한테 골라달라고 해야지. 나는 이런 쪽에 센스가 없으니까.’
부모님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은 여동생이 잘 알 것이다.
11. 선물
선물과 이벤트는 주는 사람 못지않게 받는 사람의 마음역시 헤아려야 한다. 나만 준비해봐야 상대가 바쁜 상태이면 노력과 정성은 빛을 바래게 된다. 때문에 부모님께서도 시간을 비워 주십사 말씀드렸는데 여기서 한참 진땀을 흘렸다.
“외식 하자고 설득하는 게 이리도 지치는 일일 줄이야. 하여간 너무 절약하신다니까.”
바깥에서 사 먹어봐야 돈만 아깝다고 어찌나 말씀하시는지 여기서 꽤 애를 먹었다. 하지만 일 년 중에 고작 한 번 있는 기념일 아니겠는가. 부모님 생신까지 포함해서 두 분을 위한 날은 고작 세 번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고집을 부려서 밀어붙였다. 누가 보면 어마어마한 지출이나 이벤트라도 되냐고 물을 수 있을 테지만 이런 것이 우리 집안에서의 알콩달콩 함이 아닌가 싶다. 이제 남은 일은 선물을 사는 일이다.
“그런데 무슨 학생을 휴일에도 붙잡아 놓고 있어.”
오늘은 5월 5일. 여동생과 부모님 선물을 고를 생각이었는데 내가 한국의 고등학생이 어떤 신세인지 잠깐 잊고 있었다. 1학년인데도 얘네 들은 공휴일이 없나보다. 그렇다고 ‘우리 태희는 하루 쉽니다.’하고 쳐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옆에서 보기에는 ‘등신 같지만 멋있어!’일지 모르지만 막상 태희는 ‘등신 같지만 등신 같아!’라고 할지 모른다. 원래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것들이 볼 때만 좋지 현실에서는 비슷한 것만 흉내 내도 멍청하게 보이는 게 태반이다.
그냥 메시지를 남겨두기로 했다.
《삐-. 하는 소리가 나온 뒤에 말씀해 주세요.
삐-. 윤태희. 학교에서 언제 끝나냐?》
여동생에게 남긴 것은 휴대폰 음성 메시지가 아닌 초창기의 문자삐삐다. 나중에는 유치원 아이들까지 들고 다닐 정도가 되지만 현재는 휴대폰의 보급률이 매우 저조했다.
“참 세상은 확확 변한다니까.”
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막냇동생인 태희에게 연락 한번 하는게 이리도 답답하다니, 정말이지 과학은 굉장한 속도로 삶을 변화시키는 게 분명하다.
휴대폰이 익숙한 세대는 꿈에도 모를 테지만, 삐삐는 연락을 받고 나면 공중전화든 어디든 찾아가서 남긴 메시지를 확인해야 한다. 한편 문자삐삐는 음성을 문자로 변경하기에 삐삐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신 발신기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레코드판 모으는 심정으로 이런 소소한 것들을 모아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워있을 즈음이다.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오빠! 나야!〉
외마디 비명처럼 짤막하게 남는 목소리. 이후 연결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콜렉트 콜로 걸려온 전화입니다. 받으시려면 1번을 받지 않으시려면 2번을 눌러주세요.〉
‘여기서 2번을 누르면 기분이 많이 꿀꿀해지지.’
군대에서 참 많이도 경험했다.
태희라는 건 확인됐으니 1번을 누른다. 웃음기를 애써 누르며 물었다.
“콜렉트 콜? 언제 입대했냐?”
〈학교에 공중전화는 전화카드 용 밖에 없단 말이야! 매점에는 전화카드 팔지도 않고!〉
“아. 그러세요?”
〈아무튼 집에 오고도 얼굴 한 번 안 비추던 사람이 웬일이래?〉
바깥에서 게임하느라 바빴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나는 대답 대신 본론으로 넘어갔다.
“몇 시에 끝나?”
〈1시. 점심 먹기 전에는 끝나.〉
“끝나고 약속 있어? 없으면 집으로 바로 와.”
〈어머나~〉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았나 보다. 태희는 무언가 눈치 챘다는 듯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약속이 있는가는 오빠가 어떻게 할 거냐에 달려 있지~! 왜?〉
‘조그마한 게 나이 조금 먹었다고.’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오빠랑 어디 좀 가자.”
〈드디어 데이트 해주시는 거? 근데 날이 좀 그렇다! 나 이제 어린이 아니거든!?〉
“누가 어린애라디? 그리고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 그냥 어버이 날 선물 좀 사러 가자고.”
〈아. 그런 거야? 어디로 가게?〉
“백화점.”
〈어머!? 백화점!? 그냥 어디 지하상가나 돌 줄 알았는데! 백화점?! 나 갈래. 약속 없어. 갈래. 그럼 우리 백화점 푸드 코트도 가?〉
‘야. 아까는 애 아니라며?’
백화점에 간다고 하면 화장품이나 구두, 백 같은 것을 사달라고 하지는 않을까 생각했는데 참으로 뜻밖의 얘기였다. 안도가 되는 한편 놀리고 싶어졌다.
“무슨 여자애가 백화점을 가면서 푸드 코트 타령이냐?”
〈그럼··· 안가?〉
삽시간에 목소리가 시무룩해진다.
죄 지은 기분이 들어서 얼른 말했다.
“간다. 가. 알았으니까. 끝나면 바로 와.”
〈네!〉
명랑한 대답을 들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보다가 퍼뜩 생각이 떠올랐다.
“이걸 선물하면 딱 좋겠는데?”
태희의 센스를 보자고 전화했었는데 막상 얘기하다보니 선물이 정해졌다. 지금 우리 집에서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다. 부모님 가게도 그렇고 태희의 학교 역시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있다.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템이 바로 휴대폰이었다.
‘이러면 백화점에는 갈 필요가 없잖아.’
생각했지만 이내 멀찌감치 치워버렸다. 다른 데는 몰라도 푸드 코트는 꼭 가야 한다.
*
벌컥 문이 열리며 소란스럽게 신발 벗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나왔어!”
우당탕탕 등장한 여동생은 고등학교 1학년다운 생생함과 젊음의 매력이 가득했다. 꿈속 기억이 선명했고 이따금 봐서 그런지 ‘좋을 때다’ ‘한창 개구질 때지’라 생각하다가 거울을 보며 혀를 찼다. 나도 20대인데 이게 무슨 노티 나는 생각이냐 싶어서다.
“그래. 가자.”
기다린 지 오래다. 시간 끌 것 없이 움직이려는 데 태희가 양손으로 가위자를 만들었다.
“바로? 안 돼!”
“왜?”
“옷을 갈아입어야지! 교복을 입고 나가라고?”
“교복이 뭐 어때서?”
“황금 같은 공휴일에 부평엘 나가는데! 교복을 입고 나가라고? 말도 안 돼! 절대로 안 돼!”
내 대답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쌩하니 방으로 들어가서 다시금 한바탕 소란이 이어졌다.
‘그냥 대충대충 하지.’
남자였다면 교복을 입었건 뭐건 그냥 나갔을 텐데 여자는 뭐가 이리도 신경을 쓸 게 많은 지모를 일이다. 정확하게는 머리로는 알지만 크게 공감은 못하는 상태였다. 어찌됐건 결국 30분이라는 시간이 더 지나서야 집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집에서 동암역까지 걸어서 15분. 전철을 타고 두 정거 장. 거기서 또다시 백화점까지 걸어가는 시간 20분이 소요된다. 물론 여동생의 걸음에 맞춰서 평소 혼자 다니는 것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말이다.
‘이런 거에 짜증 안 부리는 게 잘 지내는 방법이지.’
애인한테는 두 눈 질끈 감고 잘 지켜주는 것들. 하지만 가족한테는 편해서인지 실수하는 부분이다. 자잘한 배려라는 게 참 간단한 건데 이걸 어렸을 때는 참 못 지켰다. 내가 꿈속 미래를 통해서 소소하게 바뀐 점에는 이러한 부분들도 있었다.
“와! 백화점이다!”
격한 감탄사다. 혼자 놔둬도 절대 안 심심할 거 같다.
“누가 보면 어디 깡촌에서 놀러온 줄 알겠다?”
“인천은 깡촌 아닌가? 버스타고 조금만 나가면 저기가 다 밭이거든?”
“하긴 그러네.”
실제로 아직 한창 발전하고 있는 인천은 광역시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밭이 많다. 심지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젖소 농장이 있었다.
“오빠. 백화점이 왜 백화점인줄 알아?”
“물건이 많아서.”
“땡~!”
“엥?”
“백 바퀴 돌아서! 백번 돌아야 해서 백화점이야~”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미치겠다. 지금 그동안 못했던 아이쇼핑을 오늘 하루에 다 몰아서 하려는 모양이다.
“이거. 같이 올 사람을 잘못 골랐나?”
“에이~ 그럼 내가 오늘은 오빠 때문에 신경 써서 반으로 줄여준다! 오십 번만 돌자~”
못 말린다. 하지만 이럴 때는 다 방법이 있다.
“밥부터 먹자.”
“응!”
‘잔뜩 먹여서 만족스럽게 만들면 되겠지. 배부르면 잠도 잘 오잖아.’
그 에너지로 더 활달하게 돌아다니게 될는지 모르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그나저나 정말 오래간만에 오는 백화점 푸드 코트다. 외식 한번에도 진통을 겪는 우리 집답게 나 역시 가성비를 매우 중시한다. 그런 면에서 푸드 코트라는 곳은 불필요하게 비싸고 맛도 그냥저냥 이라서 기피하는 쪽에 속했다.
대신 비주얼 적으로는 꽤 즐기는 편이었다. 다양한 먹거리를 한 자리에서 보고 고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매우 설레는 일이니 말이다.
‘기대치만큼 만족감을 주지 못해서 후회하니 문제지.’
앞서는 태희의 뒤에서 쭉쭉 메뉴들을 둘러보는 데 동생이 말했다.
“오빠. 나 여기 있는 거 다 먹어도 돼?”
“다 먹으라면 다 먹을 수는 있고?”
“모르는 구나!? 여고생은 원래 언제나 배고픈 법이라고!”
“오냐. 다 골라봐. 오라버니의 위엄을 보여주지.”
“네!”
용감무쌍하게 나선 태희는 왕 돈가스를 주문했다.
“꼴랑 그거?”
“먹고 더 먹을 거야. 이건 시작이거든!”
말은 이렇게 해놓고선 절반 쯤 넘었을까. 하나 시켜놓은 거도 다 못 먹어서 은근슬쩍 내 회덮밥 위에 돈가스를 올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