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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
- 셀롭
『그런 괴물로는 변신하실 수 없습니다.』
2000년 중반 이후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변신을 할 때 몬스터의 이름들이 쭉 나온 창이 나와서 이중에서 선택하는 방식이 아니라 텍스트로 직접 몬스터의 이름을 적는다는 것. 이때 이름을 잘못 넣으면 변신 한 번을 그냥 날려먹게 되는 거다.
“아! 젠장! 셀롭이 아니라 셸롭이었지?”
다들 정식 명칭 대신에 대화할 때는 셀롭, 셀롭 하니까 헷갈렸다.
‘다음에는 조심해야지.’
내 탓이니 물러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1,500골드를 재 지급한 뒤 엘프 유저를 통해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막 우기면 속여 넘길 수 있지.’
초창기인 만큼 이름을 잘못 쳐서 변신이 실패된다는 정보를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더군다나 여성 엘프처럼 한 번, 한 번씩 나눠 판매하는 이들은 더더욱 모르는 유저였다.
이렇게 게임을 즐기는 순진한 이들에게는 ‘변신이 안 됐잖아요. 한 번 더 해주세요!’라고 우기면 들어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건 필요한 투자고 내 실수잖아. 엄청 부자면서 이런 데 쪼잔하게 아끼는 건 너무 염치없다고.’
창고에 1,700만 골드를 쌓아 놓은 놈이 그리 행동하면 벌 받는 거다.
『원하는 괴물의 이름을 넣으십시오.』
- 셸롭.
두 번째의 시도에서는 제대로 성공했다. 곧 길쭉길쭉한 다리와 휘파람 소리를 자랑하는 거미 한 마리가 마을에 나타났다.
- 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
- 으앗! 공포의 셸롭이다! ㅋㅋㅋㅋㅋㅋ
누군가가 변신한다면 이렇게 옆에서 뭐가 걸리나 구경을 하는 구경꾼들도 대기하곤 한다. 그리고 좋은 변신이 아니라면 옆에서 웃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런 유저들이 보기에 셸롭은 실패한 변신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가장 품위 있는 변신은 ‘해골’이다. 셸롭은 대다수의 방어구를 착용하지 못해서 이동속도만 빠르지 사냥에는 썩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해골은 변신한 상태에서도 모든 장비를 착용할 수 있으며 유저들과 동일한 이동속도와 공격 속도를 보유했다.
때문에 이때의 해골 변신은 훗날의 데스 나이트와 같은 포스를 풍겼다.
“늑대인간도 다 되는데 얘는 못생겨서 해골 쪽이 더 인기 많았지.”
나를 비웃는 유저들의 반응을 십분 이해하며 당당히 이동했다. 가볍게 저들을 무시해 준 뒤 벤자르 주문서를 사용했다.
『기억하신 장소를 선택하세요.』
원래라면 랜덤으로 이동되어야 하는 주문서다. 그러나 순간이동 조종반지를 가졌기 때문에 내가 기억을 해두었던 장소를 선택할 수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선택 장소는 본던 입구였다.
“이제는 달릴 시간··· 전에 리스타트 한번!”
단순히 변신만 해서는 서버에서 변신을 했다는 인식을 제대로 못했다. 이런 당대의 시스템 때문에 변신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선공 몬스터에게 공격을 당하게 된다. 리스타트를 해야 몬스터가 나를 유저라고 인식하지 못하기에 재접속을 했다.
‘달려라 달려.’
던전의 7층을 목표로 마우스를 연신 클릭했다. 속도도 생명이지만 스파토이나 버그베어는 변신한 상태에서도 선공을 하는 몬스터들이라 이들은 최대한 잘 피해서 이동했다.
던전 1층. 해골이랑 스파토이 정도만 나오는 곳이라서 어려울 것이 없다. 게다가 이때는 아직 해골 궁수나 도끼병도 존재하지 않는다. 원거리인 궁수가 없는 이상 거리낄 건 전혀 없었다.
“다음은 2층 입구. 여기는 기억해 둬야지.”
본래 던전이라는 곳은 위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나중에 업데이트로 1층도 못하게 바뀌지만 이는 나중의 일이다. 바뀌기 전까지는 합법적으로 잘 이용해주면 그만이다.
‘2층 입구에서 기억을 하면 바로 2층을 기억하는 효과를 가지게 되는 셈이니까.’
이것이야말로 경험해본 자만 아는 소소한 꿀팁들이다. 뒤이어 던전 2층을 바람처럼 내달리며 지나쳤다. 1층과 비슷한 곳이라 조금도 긴장할 게 없었다.
던전 3층도 프리 패스로 통과!
‘던전 4층. 여기부터가 중요해.’
이제부터 버그베어가 나오지만 내가 집중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장사꾼으로서 움직여야 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나는 유저들 사이에서 메시지를 띄웠다.
- 물약 팝니다! 물약 팔아요! 따끈한 물약~ 개당 60골드에 팝니다!
던전에서 사냥하는 이들이 던전을 나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물약이 떨어져서다. 그런데 던전의 저층으로 가면 갈수록 다시 돌아오는 것이 참 막막하다. 오가며 허비하는 시간에 지치기 일쑤다. 이런 손님들을 위해 상인으로 뛰어보는 거다.
‘메인은 강화 주문서지만 그냥 오가면 섭섭하잖아. 짤짤이 수입을 더해보자고.’
원가 40골드짜리에 20골드의 수송비가 붙었다. 하지만 더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필요하면 사는 고객이 생기기 마련! 나는 메시지를 연신 띄우며 발 빠르게 돌아다녔다.
‘4층에서는 손님이 별로 없네.’
적당히 시간을 끌었으니 던전 5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여기서 용돈벌이를 했다.
- 물약 삽니다. 몇 개나 있으세요?
- 450개 있습니다.
- 워. 많으시네. 200개 살게요.
- 12,000골드입니다.
큰 금액은 아니다. 그냥 200개 팔고 4000골드 정도의 이익을 남긴 거다. 하지만 가외소득이라고 하면 나무 랄데 없는 액수였다. 뒤이어 던전 6층에서 나머지 250개도 15,000골드에 판매했다. 이로써 여기까지 이동하면서 9,000골드를 벌어들인 거다.
던전 7층.
‘조심해야지. 데스 나이트한테 걸리면 그냥 썰린다.’
아림에게 가는 길에는 나타날 리가 없지만 만의 하나라는 게 있으니 주의를 기울였다. 데스 나이트는 범위 공격을 하는데다가 스파토이까지 화면 전체에 계속 소환을 한다. 그러니 괜히 주변에서 얼쩡거리다 죽을 수도 있다.
“셀롭으로 변신하면 이속이 빠른 건 좋은데 방어구를 착용하지 못해서 완전 물탱이 몸이 된단 말이야.”
연신 조심하면서 마우스를 광클릭 한 끝에 드디어 아림에게 도착했다.
“이제 한숨 놨네.”
새로이 업데이트 된 본토 던전 5층~7층은 일명 패밀리 몬스터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이 되었다. 이는 3마리씩 짝지어서 스폰이 되고 돌아다닌 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싸우지 않고 이동하려는 내 입장에서 3마리씩 만나는 건 생각보다 꽤 피곤한 일이었다.
물론 나는 이 모든 난관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통과했다.
‘디스 이즈 쇼핑 타임!’
사야 할 아이템은 오직 방어구 강화 주문서 하나뿐이다. 아림은 주문서 외에 맑은 물약 등 몇 가지 판매하는 것들이 있지만 하등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처음 계획했던 대로 아주 패기 있게, 당당하게! 전 재산을 털었다.
무려 방어구 강화 주문서를 568장이나 구매한 것이다.
“골드 불어나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것 같아.”
568장이다.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아직 애들이 아림에 대한 감이 없어. 아직은 강화 주문서로 수익을 더 낼 수 있는 시기야.’
나는 신바람 나게 마을로 돌아온 뒤 자판기용 엘프 캐릭터에 주문서들을 옮겨 담았다. 이제 가격을 정하고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것만 남았다.
“아림에 대한 개념이 생기기 전에 최대한 비싸게 팔아먹자.”
50만이었던 강화 주문서는 이벤트 이후로 빠르게 하락했고 지금은 장당 15만 선에서 거래가 되는 중이다. 확신하건데 이는 며칠 안에 더 떨어져서 3만 5천 골드가 되고 이후로고 소폭 하락하여 3만 500골드에 안착하게 된다.
‘그러니 지금 시점에서는 10만에 팔면 돼.’
남들보다 무려 5만 골드나 싸게. 하지만 내 기준으로는 약 7만 골드나 비싼 값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강화 주문서를 모두 판매했을 때 나는 투자금 약 1,700만 골드를 제외하고 무려 2,300만 골드 정도를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예상했던 수입은 1,000만 골드였는데 생각보다 많은 구매자들이 몰리면서 예측을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엇나감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따름이다.
“자리 탄탄하게 잡은 격이지. 이제 슬슬 더 규모를 키워보자.”
어차피 장사를 하는데 2서버만 고집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아무도 이 잠재시장을 눈치채지 못했을 때 다른 서버까지 선점하면 이익은 당연히 배가 된다. 다만 문제는 또 캐릭터를 키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방어구 강화 주문서가 들어간 자판기를 추가하려면 적어도 본토 던전 7층까지는 갈 수 있어야 한다. 레벨은 적어도 30이상이 되어야 죽지 않고 배달꾼 노릇을 할 수 있었다.
‘1서버에서 새로 캐릭터 하나를 키우는 건 불필요한 일이지. 효율이 떨어져.’
공성전을 대비해서 프린스도 키우는 상태다. 여기에 다른 서버에 장사용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그러니 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사자.”
1서버의 캐릭터를 구매하는 방법이다. 나는 당장 채팅창에 메시지를 올렸다.
- 1섭 30레벨 이상 나이트 삽니다. 2섭 골드로 1섭 기사 삽니다.
웹 사이트의 게시판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여기서 이렇게 구해도 충분히 거래자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다보면 친구 때문에, 혹은 개인적인 사유 때문에 서버를 옮기는 일은 허다하다.
지금 이 서버를 선택해서 키우고 있는 유저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는 게 내 확신이었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여기 골드로 캐릭터를 구매한다고 하면 충분히 매력적이거든.”
미래 같으면 ‘어디 게임 내에서 이딴 짓을!’하며 운영자가 나서고 제재를 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절에는 골드를 현금에 판다고 당당히 글을 올려도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
이윽고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귓속말이 들어왔다.
- →[귓속말] 드래곤니킥 : 저··· 33 나이트가 있는데··· 골드 얼마에 사세요?
“33레벨이라.”
이 정도 레벨이면 현재 시세로 약 15만 원 정도 한다. 그렇다면 150만 골드면 적당하리라는 생각이다. 나는 흥정하면서 가격대를 맞추는 것까지 계산하고는 대답 메시지를 보냈다.
- →[귓속말] 구운몽 : 33 나이트면 140만 골드에 사겠습니다.
1분이 지났을 즈음에 대답이 왔다.
- →[귓속말] 드래곤니킥 : 그리고 저가 원래 템을 팔고 오려고 했는데··· 그걸 못 팔아서 혹시······
‘이거 어눌한 녀석 같은데?’
말도 아닌고 글인데 무슨 ‘···’이 저리도 많은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라디오 방송에서는 5초만 가만히 있어도 방송사고인데 이 상대는 기본이 20초 딜레이다. 생각하는 게 꽤 느린 편 같았다. 하지만 장사꾼은 절대 불만을 표현하지 않는 법이다. 나는 친절히 대응해주었다.
- →[귓속말] 구운몽 : 얼마나 있으신데요?
- →[귓속말] 드래곤니킥 : 6불검이랑 4방어구요. 변반 사려고 모으던 돈도 100만 정도 되요.
‘오! 완전 땡큐잖아!’
생각보다 부자다. 그리고 나는 1서버에 캐릭터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었다. 장사가 목적이기에 추가로 골드도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나에게 더없이 좋은 이야기를 상대가 해준 것이다.
-→[귓속말] 구운몽 : 그럼 400만 골드에 거래 괜찮으세요?
솔직히 많이 후려친 감이 없잖은 가격이다. 하지만 한 번에 거래하는 입장임을 고려하면 내 제안을 뿌리치기 어려울 터다. 이뿐만 아니라 상대 유저 역시 현금화 후 다시 2서버의 골드를 구매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과정들을 단축시켜주는 셈이다.
‘고로? 합당한 가격이라 할 수 있지!’
양심에 비추어 한점 부끄러움이 없음을 자신했다.
- →[귓속말] 드래곤니킥 : 그럼. 어떻게 사실 거예요?
“어째 채팅하는 거 보니까 흥정도 안 할 것 같더라니 역시 그냥 거래하는 구나. 이런 고객이 나는 참 좋아. 그런데 어떻게 사냐니? 이게 무슨 소리···아! 거래 방법을 물어보는 거구나.”
보이지도 않건만 미소를 듬뿍 지으며 대답했다.
- →[귓속말] 구운몽 : 직접 만나서 하죠.
- →[귓속말] 드래곤니킥 : 안 만나고 그냥 교환은 안 될까요?
실소가 나왔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그냥 교환하니?”
먼저 골드를 주었다가 나이트가 있는 계정을 못 받아도 문제, 그렇다고 먼저 계정을 달라고 하면 반대로 저쪽에서 문제를 제시할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이나 해볼까?”
- →[귓속말] 구운몽 : 먼저 계정을 주시면 확인하고 골드를 드릴게요.
- →[귓속말] 드래곤니킥 : 그건 좀···
“거 봐라. 너도 나 못 믿겠지? 그러니까 직접 만나야지.”
아이템베니아 혹은 아이템 메니. 이런 사이트가 등장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거래가 이런 식이었다. 워낙에 먹고 튀는 사기가 많았기에 직접 만나서 거래하는 게 정석이다. 일종의 중고거래와 비슷한 셈이었다.
- →[귓속말] 구운몽 : 그러니까 만나서 거래를 하는 게 낫죠. 사시는 곳이 어디세요?
오프라인으로 보아야 하기에 사는 곳이 지나치게 멀다면 거래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 →[귓속말] 드래곤니킥 : 저··· 삼성동이요.
“오. 캐릭터가 좀 부자다 했더니만 강남에 사시는 분이셨어?”
- →[귓속말] 구운몽 : 그럼 삼성역 근처에 피시방 있나요?
이 역시도 시기적으로 체크할 부분이다. 99년은 막 국가적으로 초고속 인터넷과 PC의 보급을 장려하고 있던 때라서 아직 PC방이 없는 동네도 꽤 있었다. 나중에는 어느 동네에나 구석구석 자리하지만 말이다.
“대표적으로 우리 동네에는 없거든.”
촌 동네이면 어떤가! 자신 있게 외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짝 눈가의 습기를 닦아준다.
- →[귓속말] 드래곤니킥 : 네.
- →[귓속말] 구운몽 : 그럼 제가 그곳 지리를 잘 모르니까, 2호선 삼성역에서 만나서 거래하기로 해요. 피시방 비는 제가 낼게요.
- →[귓속말] 드래곤니킥 : 네.
- →[귓속말] 구운몽 : 지금이 세시니까 오늘 여섯 시쯤에 시간되시죠?
- →[귓속말] 드래곤니킥 : 네.
- →[귓속말] 구운몽 : 저는 청바지에 빨간 티셔츠 입고 갈 겁니다. 어떤 거 입고 계세요?
- →[귓속말] 드래곤니킥 : 저도 청바지에 체크무늬 남방이요.
- →[귓속말] 구운몽 : 알겠습니다. 그럼 삼성역에서 세 시간 뒤에 뵙도록 하죠.
가격흥정조차 없는 고마운 고객에게 이 정도 서비스는 해줘는 게 양심 아니겠는가. 나는 고마움을 듬뿍 담아서 대화했고 끝마침과 동시에 나갈 준비를 했다.
‘부모님께 여쭐 것도 있으니 잠깐 뵈어야지’
이제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하게 되니까 일종의 사무실을 차려볼 계획이다. 아무리 자식이 군대에서 갓 전역했고 나름의 비전이 있다손 쳐도 맨날 컴퓨터 앞에만 붙어있으면 어떤 부모가 좋게 보겠는가. 그것도 모니터마다 전부 게임만 켜져 있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