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9화 (9/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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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

‘시세가 몇 십만 골드인 데도 없어서 못 사던 아이템을 고작 3만 골드에 판매하기 시작했으니까.’

바로 이 업데이트 때문에 고 레벨 유저들은 한동안 멘탈 붕괴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싹 팔아 치워버린 거다.

아무튼 내 계획은 이렇다.

새로운 계정을 하나 만들어서 방어구 강화 주문서를 판매하는 것! 일명 자판기라고 불리는 장사용 캐릭터이고 이걸 둔 채 지금 키우고 있는 나이트로는 계속 지금처럼 사냥하고 레벨 업 하며 게임을 즐기는 거였다. 일명 돈도 벌고 오락도 함께하는 일석이조의 방식이었다.

“망설여서 뭣 하겠어.”

곧바로 용산을 향했다. 이전에 컴퓨터를 구매했던 곳에 가서 동일한 수준의 물건으로 장만하였다. 여기서도 운이 좋아진 것이 영향을 줬는지 5만원이나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 하루하루 가격이 달라지는 용산의 특성 덕분이었다.

그리고 일전에 ‘플레지 오토’의 제작자에게 제안했던 일 역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답장을 받았다. 일명 자판기를 위한 장사용 프로그램인데 이게 있어야 내가 혼자서 몇 개의 컴퓨터를 쓰며 방어구 강화 주문서를 팔고 사냥도 하는, 북치고 장구 치고가 가능해진다.

‘업데이트 전에 깔끔하게 준비를 마쳐놓자.’

이제 장사용 새 캐릭터를 육성할 차례다.

“장사용으로는 엘프나 해볼까.”

최근 업데이트 된 플레지 오토의 기능에는 원하는 스탯이 나올 때까지 자동으로 주사위를 굴려주는 기능이 추가 되었다. 덕분에 민첩 18에 체질 13이 나올 때까지 주사위를 굴리도록 설정하고 본래 캐릭터인 구운몽을 플레이했다.

‘아직 이 시기에는 민첩보다는 체질이 대세지만 나중에 숲이 나오고 여러모로 작업할 때를 고려하면 민첩 쪽이 낫지.’

한참 뒤, 더 이상 주사위가 굴러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구운몽을 잠시 쉬었다. 이후 엘프를 플레이 했는데 이때의 장비는 작은 활에 화살 100개, 나무줄기 옷을 지급받는 게 아니었다. 90년대에는 엘프도 대거와 래더 재킷을 입는다.

“이번에는 그냥 다구리에 끼어 들어서 키우자.”

풋풋하게 추억도 떠오릴 겸 남들이 치는 몬스터를 같이 치는 방식으로 올리기로 했다. 그렇게 약 4시간을 낑낑대며 키워서 레벨 6에 도달한 뒤 본토의 글라이드 마을로 이동시켰다.

이제 이 자판기용 캐릭터는 본던이 업데이트 될 때까지 이곳에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6. 포도밭 그 나이트

최근 들어서는 오후 7시부터 8시 사이에는 사냥을 하지 않고 골밭과 굴밭 사이에 있는 포도밭에서 시간을 죽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거 무진장 지루하네.”

게임에 흥미를 잃거나 사냥 혹은 노가다가 지겨워진 게 아니었다. 과거에 있었던 기막힌 사건. 그 행운을 하나 더 낚아채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었다. 바로 삼국지의 도원결의만큼이나 유명한 플레지의 포도밭 결의였다.

이 사건은 길드 대 길드의 전쟁이 포도밭에서 일어나며 발생했다. 유저들끼리 ‘싸우자’ ‘죽이자!’하면서 벌이는 감정 다툼이 아니라 실제 시스템 상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나면 1시간동안 적대 관계가 된다.

몬스터처럼 서로 칼 표시가 나타나는 건데 이는 제한 시간이 종료되거나 상대 프린스를 죽일 때, 또 항복을 받아낼 때 해제된다. 당연히 이때는 상대를 죽여도 성향 수치가 변하지 않았다. 이때 붙는 두 길드가 바로 7인의 길드와 21인의 길드이다.

“본적은 없지만 진짜 강하긴 했나봐.”

이들의 싸움은 결국 인해전술로 21인의 길드 쪽이 승리하기는 한다. 하지만 수적 열세임에도 7명이서 대항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강한 유저들로 구성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싸움 이후의 일이었다.

혈전은 전쟁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상대방을 쓰러뜨렸을 시 전리품의 개념으로 아이템도 드롭하는데, 이 때 7인 중의 하나가 장비 중이던 검을 떨어뜨리고 만다. 무려 +8 카타르를 말이다.

‘시기로 보나 지금으로서는 가히 지존 장비지!’

상상이나 되는가? +6만 들어도 엄청나게 강력하다고 콧대를 내세울 수 있는데 무려 +8이다. 그리고 이것을 지나가던 한 쪼렙 프린스가 먹게 되는데, 여기부터가 중요하다.

칼을 떨군 기사는 아주 정중한 자세로 검을 돌려줄 것을 부탁했다. 심지어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다시 판매해달라는 부탁을 한 거다. 그런데 이 정신 나간 쪼렙 프린스는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도 못할 엄청난 만행을 저지른다.

바로 돈도 받지 않고 ‘달라고요? 네. 여기요.’해버린 것이다. 나중에 알음알음 알려진 얘기로는 초보라서 그게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닌 물건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천재랑 바보는 백짓장 차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더라.’

한편 그 행위에 감탄한 7인은 고마움의 표시로 쪼렙 프린스 유저의 성장을 돕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알게 된 이 포도밭에서 우정의 결의를 맺으며 프린스의 길드에 가입한다. 이들이 장차 칸트성의 세 번째 영주가 되는 이들이었다.

“결국 프린스라는 양반이 성을 먹자 변해버리면서 길드가 무너졌지만.”

그런 일이 아니었다면 아마 꽤 대단한 길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던 세력이다. 내가 이곳에서 하품하며 기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바로 저 일화의 멤버로 참여하기 위해서다. 그즈음 메시지가 채팅창에 나타났다.

「F4에서손떼라 길드가 Wild 길드에 전쟁을 선포하셨습니다.」

“어? 혹시 이건가?”

기대를 안고 지켜보았다. 잠시 후 포도밭에 다양한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양쪽모두 붉은 이름이 꽤 많은 것이 PK를 적잖게 한 모양이다. 어느 쪽이건 썩 매너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쪽이 7인이지? 이런 사건이 여기서 벌어지는 것만 알지 아이디까지는 모른다고.’

어떤 나이트 유저가 검을 드롭할지 바삐 쳐다보았다. 도중에 내 고민을 싹 날려주는 유저가 등장했다. 흉흉한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하고 등장한 뉴비 캐릭터. 이름이 아직 파래지지조차 못한 프린스 유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쟤가 향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야!”

잽싸게 프린스 유저의 진로 방향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2 대 1로 싸우는 나이트가 있었고 그의 아이디는 ‘지옥검’이었다.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름이지만 그는 그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아임 쏘리. 대신 나중에 보면 잘해드릴게. 정말로 안면 트고 보게 될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내가 약속한다. 이 길드는 과거보다 더욱 크게 멋지게 활동할 거야. 엄청 노련하고 확실하게 운영해줄게!’

만약 프린스 유저가 나처럼 미래의 기억을 갖고 있다면 억울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가 주은 게 뭔지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현존하지 않는 꿈 속 미래를 굳이 끌어오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사과하는 것을 보면 나는 인간성과 양심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님 말고. 이제 가자!’

프린스 유저에게 슬쩍 따라 붙어서 그의 이동속도와 보조를 맞추었다. 그리 걸으며 버튼을 미친 듯이 눌렀다.

“플레지 오토야! 너의 힘을 보여줘! 힘을 내요~ 토글 파월!”

철컥-

“굿! 베리 굿!”

우연히 얻게 되는 행운. 이를 노리고 치밀하게 준비한 나. 당연히 복 주머니를 거머쥐는 것은 내 쪽이었다.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몰라요’하듯이 여유의 시간을 두고 서성였다. 그렇게 지옥검 유저가 내 아이디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 뒤 마을로 귀환했다.

“훗훗.”

미소 지으며 감정서까지 싹 발라본다.

「+8 카타르」

그냥 8카타인줄 알았는데 내가 들고 있는 카타르와 달리 밝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일명 축복받은 카타르였다.

“역시 초강력한 장비야.”

당장 팔아도 큰 수익을 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곧 오는 메시지에 주목했다.

- →[귓속말] 지옥검 : 님. 구운몽님. 제 검 혹시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골드는 지불하겠습니다.

- →[귓속말] 구두룡검 : 구운몽님. 250만 골드 정도는 바로 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 검을 팔지 말고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 시점에서 +8이상의 무기라면 돈이 있다고 해도 구할 수 있는 장비가 아니었다. 그러니 골드를 흔쾌히 내주면서까지 돌려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둘이 말을 걸어?”

같은 길드로 짐작된다만 말이다. 잠시 누구한테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본래의 검 주인에게 메시지를 주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다. 즉각 지옥검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 →[귓속말] 구운몽 : 마을 무기상점 쪽으로 오세요.

- →[귓속말] 지옥검 : 감사합니다.

조우는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나는 귀환 주문서를 사용했고 상대방은 죽어서 마을에 부활한 마당이라 그렇다. 귓속말이 가자마자 재빠르게 달려온 그에게 내가 먼저 메시지를 띄웠다.

- 거래 걸어주세요. 그리고 돈은 필요 없습니다.

표정을 보일 수만 있다면 순수하고 겸손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을 것이다.

- 예? 그래도 사례는 드리고 싶습니다.

- 괜찮습니다. 원래 지옥검님 무기잖아요.

‘허허. 사람하고는. 줄 때 받아.’

- 구운몽님이 아니었다면, 저쪽에서 챙겨갔을 겁니다. 그랬다면 이렇게 회수도 못했겠죠. 감사로 드리는 거니까 받아주세요.

- 정말 괜찮습니다.

거듭 겸양의 말을 하며 +8 카타르를 돌려주었다. 지옥검 유저가 거듭 되물었다.

- 정말 이대로 받아도 괜찮으시겠어요?

- 네. 진짜 괜찮습니다.

-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8 카타르가 본래 주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지옥검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들인 구두룡검, 세이하, 악마혈, 지옥활, 분노의활질, 검.

모두가 와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 더불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 구운몽님 레벨이 어떻게 되세요?

- 이제 갓 40을 찍었어요.

- 오. 그럼 충분히 같이 사냥 다녀도 괜찮으실 거 같은데요? 같이 다니실래요? 저희가 캐스퍼 타이밍을 잘 잡아서 캐스퍼도 저희끼리 많이 먹었거든요.

- 괜찮습니다. 요즘은 프린스를 하나 키워볼까 생각하고 있거든요.

살짝 운을 띄웠다.

- 프린스요?

- 네. 길드하나 만들어서 놀아볼까 해서요.

그러자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나왔다.

- 나중에 프린스 렙 15넘으면 연락주세요. 구운몽님 길드로 들어가겠습니다.

- 에? 이미 혈 있으시잖아요.

- 그거야 뭐 그냥 우리끼리 놀자하고 만든 거라서요. 저희는 혈 관리도 못하고 그래서 인원을 더 받지도 못하고 그냥 이러고 있어요. 안 그래도 다른 혈에 들어갈까 했는데 마음에 드는 혈이 없어서 우리끼리 있었거든요.

검을 돌려받은 고마움을 이렇게 표현해 왔다. 나야 그물을 끌어올리는 어부의 심정으로 환영할 따름이다.

- 저야 그래주시면 너무 좋죠. 한 번에 7명이나 길드원이 생기는 건데.

- 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 득템 하세요~

“됐어!”

이것으로 대규모 업데이트 전까지 계획했던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목표해둔 모든 항목들에 동그라미가 처졌으니 그야말로 100점 만점에 100점의 성적표라 하겠다.

7. 자판기

본 서버의 업데이트 완료! 이제 진짜 거상이 될 시간이다.

“모든 준비는 이미 다 끝마쳤다.”

플레지 오토의 제작자로부터 제안했던 파일을 받았다. 수고비로 50만원을 보내 주었는데 이는 자동으로 방어구 강화 주문서를 구매하거나 판매할 수 있는 불법 프로그램이다.

‘서버 최초로 강화 주문서 자판기가 만들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지.’

나도 이게 나쁜 것은 안다. 하지만 스스로 변명해보자면 어차피 생길 것을 살짝 앞당겨서 가져왔을 뿐이다. 또한 자동사냥이나 자동채집에 비하면 이건 양반이랄 수 있다.

냉정하게 따져 봐도 남들에게 딱히 피해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유저들이 원하는 물건을 효율적으로 전달해준다는, 상인의 도리에 충실하다고 하겠다. 이렇듯 패악 수준이 아닌 정도에서 나는 꿈속의 지식을 적절히 사용할 예정이다.

“엘프 캐릭터는 창고 아래에 키핑해두고.”

컴퓨터 두 대로 접속한 나는 자판기 캐릭터를 글라이드 마을의 창고 아래에 세워두었다. 이후 자동프로그램을 세팅했는데 아직 거래는 시작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나이트 캐릭터인 구운몽을 움직여서 매물을 가져올 차례다.

잡화상점에서 물약을 무게 게이지가 가득 찰 때까지 꾹꾹 눌러서 구매했다. 다음은 발이 빠른 셸롭으로 변신할 차례다.

‘이래야 달리기가 빨라지거든.’

이 시기에는 메이플 트리 완드를 획득하면 마을에서 변신을 해준다며 1회의 변신 당 1,500골드를 받는 영업이 있었다.

“내가 오늘을 위해 변반을 팔지 않았지.”

메이플 트리 완드. 축약해서 ‘메완’이라 부르는 이 아이템은 모든 종류의 몬스터 중 하나로 랜덤하게 변신시켜준다. 때문에 잘못 했다가는 안하느니만 못한 개구리 따위로 변할 수도 있었다.

이놈의 개구리는 느리기도 오지게 느리지만 기본적으로 공격 기능이 없다. 1,500 골드를 주고 변신을 재시도 하던가 그게 아니면 유효시간인 2시간동안 마냥 대기해야만 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하지만 변신 조종 반지를 착용하고 있으면 원하는 몬스터를 고르는 것이 가능했다. 자고로 비싼 아이템은 제값을 하기 마련이다.

- 저 변신 한 방 만요.

- 1,500골드입니다.

빠른 이동과 구울 등 몇 가지 몬스터의 선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변신이 필수다. 이정도 금액은 아낄 이유가 없는 투자이기에 나는 마을에서 변신을 판매한다고 광고 중인 여자 엘프에게 1,500골드를 주고 부탁했다.

곧 메시지가 나타났다. 반지가 있는 나같은 유저만 볼 수 있는 질문 메시지였다.

『원하는 괴물의 이름을 넣으십시오.』

‘이것도 지금 시기에나 볼 수 있지.’

지금은 바로 변신이 진행되지만 나중에는 일명 변피라는 게 성행해서 하나의 절차가 추가된다. 이는 고레벨 유저들이 변신 완드로 다른 사람들을 강제로 변신시킨 뒤 상대가 개구리 같은 놈으로 변해버리면 손쉽게 PK를 하는 거였다.

이 방법이 유행하면서 나중에는 ‘누가 너에게 변신을 시도하는데 변신 할래? ’ 같은 질문지가 생기게 된다. 어찌됐건 이는 나중의 일이고 나는 원하는 몬스터의 이름을 키보드로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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