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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나이트로
‘풋풋해서 추억 돋기는 하는데 그래서인지 조금 맹숭맹숭하네. 어쨌든 이걸로 이메일 가입도 완료.’
구경하며 덕분에 괜찮은 사실을 알아냈다. 내가 딱히 주식에 관심이 있던 미래를 산 것은 아니지만 20년 뒤에까지 이름 떡하니 내세우고 있는 기업과 사라진 곳 정도는 얼추 안다는 사실이었다.
차곡차곡 모은 군대 월급 정도밖에 자본이 없는 지금이야 쓸모없는 정보겠지만 계획대로 되어 여유가 생긴다면 꽤 괜찮은 재테크가 될 것이다. 또 누가 알겠는가. 이 땅의 조물주라는 건물주가 될는지 말이다.
이를 위해서 열심히 플레지를 해야겠다. 그런데 생김새가 조금 달랐다.
“가입 버튼이··· 아, 맞다. 초창기에는 게임에서 바로 계정을 만들었었지.”
2000년대 중반에 들면서 ‘New’라는 신규 계정 생성 버튼을 누르면 홈페이지로 연결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계정을 생성할 수 있었다. 본인인증이니 뭐니 과정 몇 개가 더 필요했던 미래에 비해 이맘때는 주민등록번호 프리패스가 가능하다.
‘심지어 주민등록번호 생성기를 이용해서 무한하게 만들기도 했었고.’
다른 유료 게임들은 일정 레벨을 기준으로 무료가 끝이 나지만 플레지는 해당 계정으로 3일간 무료 플레이를 할 수 있다. 때문에 학생들이 3일마다 새로운 계정으로 게임하는 경우들도 흔했다.
계정 생성을 마치고 이제 서버를 고를 차례다. 나중에는 서버가 50개를 넘기게 되지만 초창기인 지금은 고작 두 개뿐이었다. 1서버와 2서버였는데 이 둘은 추후 ‘데포’와 ‘켄헬’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이것도 이벤트로 정했었지.’
일명 ‘서버명을 찾아라!’라는 이벤트 였는데 여기서 포르쉐라는 유저가 플레지 원작의 주인공인 데포와 군주 켄헬의 이름으로 응모를 한 것이 당첨이 되었고 이후 플레지는 원작 등장인물의 이름이 모두 소모될 때까지 등장인물의 이름을 한 서버들이 생겨나게 된다.
‘기왕이면 신섭으로 하자. 데포보다는 켄헬~’
이제 캐릭터 생성을 할 차례다.
이것도 미래와는 차이가 있었는데, 일단 캐릭터 생성은 계정 당 3개까지라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 능력치 부여 방식이 주사위를 통해서 한다는 것이었다.
“아! 맞다! 젠장!”
플레지는 D&D룰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게임이다. 그래서 캐릭터의 능력치도 18이라는 수치를 최대치로 잡았으며 주사위를 통해 수치가 랜덤하게 정해졌다. 물론 유저들은 어정쩡한 능력치 대신 18을 선호했고 그 때문에 그 수치가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주사위를 굴리곤 했다.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 마우스 좌클릭을 연신 해대는 수밖에.
클래스를 나이트로 하고 주사위를 굴리기 시작했다.
‘2002년도가 지났을 때면 엘프를 키웠겠지만 지금 돈을 벌려면 무조건 기사를 해야 돼.’
게임 속 골드를 많이 벌기 위해서는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까?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엘프라고 할 수 있다. 큰 투자금이 들지도 않고 원거리 공격을 하는 지라 체력의 소모도 적다. 다만 이것은 2002년도가 지나서의 이야기다.
‘지금은 드롭템에 네 것, 내 것의 개념이 없거든.’
플레지는 극악의 레벨업 시스템을 자랑한다. 때문에 유저들 대부분이 약한 초창기에는 몬스터 한 마리에 모든 인원이 달라붙어서 다구리 치는 방식이 이뤄졌다. 그리고 떨어진 아이템과 골드는 먼저 줍는 놈이 임자다.
그러니 원거리 공격을 해서는 평생 거지꼴을 못 면한다. 엘프건 뭐건 바짝 붙어야 뭐라도 챙길 수 있는 셈이니 당연하게도 검을 쓰는 기사를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이제 됐어.”
약 3분 정도 걸렸을 즈음 드디어 마음에 드는 수치의 스탯이 나왔다.
힘 16, 민첩 12, 체질 18.
지식이나 지혜부분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냥 이 수치면 충분하다. 이나마도 나이트를 선택했으니 3분 만에 끝났지 엘프였다면 최소 수 시간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메이지가 있었다면 그것부터 키웠겠지만.’
시기적으로 메이지는 ‘매직 미스터리’라는 업데이트와 함께 등장하는데 이는 아직 일 년 정도는 더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직업이 없다고 해서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초창기에 접속해서 일찌감치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이점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름은 구운몽으로 가자.’
본격적으로 플레지 월드에 접속했다. 우선 유저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 본다.
누구>
「현재 접속자 : 1352명」
“한적하네.”
아직은 게임을 하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는 아니다. 하지만 한 달 정도만 지나면 유저가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다.
‘이제 노가다를 시작해 볼까.’
중세풍의 시작 마을을 둘러본 뒤 다시금 캐릭터 선택 창으로 돌아갔다.
이유는 단순하다. 플레지에서는 캐릭터를 처음 생성하면 총 3가지의 아이템을 지급한다. 래더재킷, 대거, 양초 2개다.
이중에서 양초는 상인에게 개당 1골드에 판매할 수 있는데 초기 노가다는 바로 이를 반복하는 거였다. 구전되는 전설에 의하면 양초만 팔아서 12,000골드를 벌고 그걸로 카타르를 구매한 유저도 있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끈기를 발휘하는 특이한 유저가 아닐 수 없다.
내 노가다의 목표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창을 구매할 정도까지 할 예정이다.
‘이때는 허수아비가 공격을 했거든.’
캐릭터 레벨업을 위해 만들어 놓은 수련용 허수아비. 그런데 이 녀석이 근접하면 1~3정도의 데미지를 준다. 몸 튼튼한 기사라 할지라도 레벨 1은 16의 체력으로 시작한다. 허수아비를 때려서 레벨 업은커녕 죽지 않으면 다행인 셈이다.
하지만 창이 있다면 허수아비의 공격범위를 벗어나서 안전하게 5레벨을 찍을 수 있게 되는 거다. 이를 위해 나는 연신 캐릭터를 생성하고 양초를 파는 일을 반복했다.
‘드디어 다 모았다.’
창고 이용도 5레벨이 되어야만 할 수 있기 때문에 2골드를 숨기고 새 캐릭터를 만들어서 주은 뒤 또 양초를 팔아서 숨긴다. 이를 리플레이해서 150골드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사실 원래 구매할 예정이었던 상점용 창을 구매하려면 더 노가다를 해야 한다.
그런데 운 좋게도 마을에 오크 족 창을 판매하는 유저가 나타났다.
상점용 창에 비하면 한 등급 정도 떨어지는 스펙이긴 했다. 하지만 어차피 창이나 오크족 창이나 허수아비의 공격권을 벗어나기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저렴하니까 되팔기도 훨씬 수월 할 거고.”
머리 위에 메시지를 띄우는 유저들 사이에 파고들었다.
- 촐기 팝니다! 촐기 500골드에 팝니다!
- 님들아 저 오늘 처음 시작했는데 100골드만 주시면 감사요.
- 빨물 팔아요! 빨물 개당 30에 팝니다!
- 사냥은 어디서 하는 게 좋나요?
- 오크족 창 팝니다. 150골드에 오크족 창 팔아요.
- 게임친구 하실 분 구해요. 앞으로 같이 친하게 지내면서 게임하실 분 구해요.
이 시대에는 사람들이 레벨 업에 그렇게 집요하지 않았다. 마을은 늘 RPG인지 채팅게임인지 헷갈릴 정도로 다양한 대화들이 오갔다. 나는 그런 대화들을 무시한 채 오크족 창을 판다며 계속 글을 올리고 있는 나이트에게 다가갔다.
- 오창 삽니다.
- 거래 걸게요.
오크족 창을 팔고 있는 것이 슬슬 지겨워진 것인지, 거래 창을 올리는 속도가 꽤 빠르다. 상대가 얼른 팔아치우려는 기색이자 살짝 머리를 굴렸다.
- 님. 근데 제가 골드가 조금 부족한데······
- 얼마 있으신데요?
- 140이요···
10골드 싸게 불러본다.
- 하아. 알겠습니다. 팔게요.
성공이다.
“좋았어.”
오크 한 마리를 잡아봐야 떨어지는 건 고작 3~7골드다. 양초 팔아서 벌려면 캐릭 재생성을 5번이나 해야 하는 만큼 아낄 수 있으면 아끼는 게 좋다. 기분 좋게 오크족 창을 장비한 뒤 바로 허수아비가 있는 섬 서부 언덕의 수련장으로 출발했다.
이제 레벨 5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가파르게 2레벨, 3레벨이 되고 4레벨에 이르렀다. 그리고 느릿느릿 경험치 바가 차올랐다.
‘4에서 5가 문제네.’
3에서 4가 되는 경험치와 비교하자면 8배 정도의 차이다. 당연히 경험치가 오르는 것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뎌졌다. 그렇게 허수아비를 치는 게 슬슬 지겨워질 즈음, 웬 나이트 하나가 검을 들고 수련장에 왔다.
‘그러면 안 될 텐데?’
잠시 후 ‘윽! 윽!’하는 소리와 함께 몇 대 치지도 못하고 사망한다.
죽은 녀석도 어이가 없는지 시체 상태로 말했다.
- 헐? 허수아비가 사람을 치네?
웃으며 혀를 찼다.
‘내가 그래서 굳이 노가다까지 해가며 창을 들고 온 거 아니냐. 어? 다른 사람이 또 오네?’
곧이어 조금 전에 본 콩트가 다시 펼쳐졌다. 단검을 들고 허수아비와 사투를 벌이더니 ‘끄억!’하며 쓰러진 것이다.
- 뭐야? 이거 왜 죽어?
- 아놔!
뜻하지 않았는데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야 저들을 바보라고 놀릴 수 있는 것이지 꿈에서의 나는 수련장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서 레벨 1부터 사람들과 부대끼며 몬스터를 때려대며 레벨 업 했었다.
반면에 이 사람들은 나름 어설프게 정보를 구해서 시작한 모양이다.
‘또 오고 또 죽고~’
허수아비에 맞아서 죽었다는 것에 당황하는 사람이 네 명 정도 될 즈음 드디어 5레벨이 되었다.
‘오케이. 이제 슬슬 사람들 사이에서 레벨업을 할 시기가 되었구나.’
내가 복학도 포기하고 플레지를 하는 목적은 돈벌이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장사를 하는 게 맞는데 자고로 게임에서는 어느정도 레벨을 찍어 두어야 편안하게 뭐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선은 30레벨을 목표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플레지에서 30레벨은 플레지 월드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채팅인 ‘전체 채팅’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채랩이라고 불린다. 그만큼 상징적인 레벨이니 이쯤은 되어야 장사를 원활하게 할 수 있다.
수련장을 벗어나서 다음 타깃을 찾아 다녔다.
“오크랑 난쟁이 사냥하러 가자.”
초심자의 섬은 크게 5개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오크와 괴물 눈 그리고 난쟁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초기에 사냥하기 좋은 북부.
늑대와 늑대인간들이 자리 잡고 있는 남부. 이 녀석들은 나중에 북부로 부락을 옮기게 된다.
동부에는 선 공격을 하는 최초의 몬스터인 해골과 깨어 있을 때는 비선공인데 잠을 깨우면 선공을 하는 돌골렘이 자리한다.
그리고 초보들에게 공포의 상징이자 끝 판왕 같은 존재인 셸롭이 있는 서부가 있고 마지막 지역은 수련장 아래에 위치한 던전이었다.
이 중에서 내가 향하는 곳은 당연히 북부다.
‘얘들은 조심해서 때려야지. 얘들은 동족의식이 있거든.’
잘못 건드렸다가는 원거리 공격을 하는 오크 궁수를 만날 수 있고 또 오크 전사라는 무시무시한 녀석이 쫓아오는 경우도 생긴다. 난쟁이들도 마찬가지이니 무조건 혼자 있는 놈을 찾아야 했다.
‘딱 좋아. 따로 다니는 녀석이 있네.’
혹시나 화면 내에 다른 오크족 몬스터가 있는지 주시하며 몇 마리를 잡았다. 그러던 도중 누군가가 난쟁이에게 정수리를 찍히면서 내 쪽으로 달려왔다.
- ㅊㅊㅊㅊ
선제공격을 하면 몬스터의 타깃이 되는 위험이 있지만 사냥 성공시 꽤 많은 경험치를 가져가게 된다. 이 때문에 이런 식으로 선만 치고 도망하면서 레벨업을 하는 유저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아마 난쟁이의 이동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도망치는 모습이 꽤나 다급했다.
‘나야 몸빵 해준다는데 나쁠 게 없지.’
바로 달려들어 오크족 창을 휘둘렀고 난쟁이는 높은 톤의 소리와 내면서도 처음 타깃만을 쫓아다녔다. 그리고 이때다 싶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체 난쟁이 하나에 몇 명이 달라붙는 거야?’
스틸의 개념이 없는 시절이라서 기본적으로 모든 몬스터의 사냥방법은 레이드 방식이었다. 지금도 난쟁이 한 마리에 달라붙은 유저가 무려 8명이다. 이렇게 되면 공격도 공격이지만 난쟁이가 죽은 뒤에 드롭 할 아이템도 신경 써야한다.
슬슬 죽을 때가 되자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집중해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곧 난쟁이가 쓰러지며 아이템이 나타났다.
“클릭! 클릭!”
초창기에는 없는 기능이 참 많다. 드롭템 습득 역시 토글 기능 대신 무조건 아이템을 직접 클릭해서 주워야 하기에 손이 바빠졌다. 그리고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내 캐릭터가 무언가 줍는 모션을 취했다.
‘뭔지 몰라도 챙기긴 했어.”
기대를 안고 확인!
인벤토리에 「난쟁이족 검」이 떡하니 있었다.
“좋았어!”
초반에 주어지는 대거는 4/2라는 타격치를 가지고 있다. 이는 작은 몬스터에게는 1~4의 타격치를, 큰 몬스터에게는 1~2의 타격치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오크족 창은 4/6이다. 그리고 난쟁이족 검은 무려 7/8이나 된다. 초반에 매우 뛰어난 공격력을 가진 무기라 하겠다.
- 아. 님아. 제가 선인데...
‘이런 애들이 꼭 있다니까.’
어차피 자기 혼자는 잡을 능력도 없는 주제에 선으로 쳤다고 나온 아이템을 달라고 하는 타입이다. 물론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면서 혼자 맞았으니 다정다감한 성격이라면 조금은 챙겨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초보다. 내 코가 석자이니 굳이 신경 써줄 필요는 없었다.
‘안 쳐줬으면 죽었을 텐데. 살려준 거에 감사나 해.’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창에서 난쟁이족 검으로 무기를 바꿨다. 그렇게 사냥한 결과 레벨 6이 되었다.
이제 오크 전사랑 같아졌다.
물론 그렇다고 오크 전사와 1대 1로 싸울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직 마땅한 방어구도 없는 상태라서 괜히 덤벼들었다가는 그냥 바로 땅바닥에 누워버리게 된다. 차분하게 몸을 사리면서 난쟁이와 오크를 잡는 게 나았다.
‘그래도 이제 난검이 있으니까 난쟁이랑 1:1도 해볼 만 해.’
초창기의 플레지는 ‘괴랄하다’는 표현을 할 만큼 어려운 난이도의 게임이었다. 가장 약한 몬스터인 오크는 물론이고 그 다음 수준인 난쟁이도 동족의식이 있다. 비슷한 레벨인 늑대 역시 늑대인간과 동족의식을 가진다.
때문에 초반에 혼자 돌아다니며 보이는 족족 잡으려 들었다가는 여기저기서 다구리를 맞게 되고 결국 도망도 못한 채 죽는 일이 비일비재해진다. 당연히 난쟁이도 주변에 다른 놈이 있나 눈치를 보고 공격해야 한다.
‘그래도 꿈에서 헛발질 엄청 한 것에 비하면 지금은 초고속 성장이라고.’
다른 유저들과 비교해도 단연 빠른 레벨업 속도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레벨 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