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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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비명이 병원 로비를 가득 채웠다.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은호의 품에 안긴 채 그의 감색 넥타이만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비명, 악다구니를 쓰는 경은의 고함, 다급한 발소리, 호루라기 소리. 그 모든 것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숨어 소리로만 접할 수 있었다.

짙은 안도감이 그녀를 감쌌다.

그러면서도 그 찰나의 순간이 천년처럼 느껴져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지해주, 괜찮아?”

그녀의 안부를 물어 오는 은호의 목소리에 해주가 미간을 좁혔다. 그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해주가 그의 품을 벗어나려 하자 그가 더욱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은호 씨?”

“괜찮냐고 묻잖아.”

태연한 듯 들리지만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요. 은호 씨?”

간신히 그의 품을 벗어난 해주는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의 오른손을 타고 피가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은호 씨?”

놀란 해주가 은호의 손을 잡았다.

“놀랄 것 없어. 조금 베였을 뿐이야.”

조금 베이다니, 그게 아니다.

눈물이 차올랐는지 시야가 흐릿했다. 고개를 내젓자 눈물이 뺨을 타고 후드득 떨어졌다.

“은호 씨, 손이…….”

칼날을 손으로 막은 모양이다. 사선으로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렀다.

“오빠?”

어느새 인파를 뚫고 달려온 민영이 비명을 내질렀다. 쇳소리 가득한 비명에 의료진들이 달려왔다.

두 손으로 은호의 손을 꼭 거머쥔 해주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누가 좀 도와줘요.”

아무리 눌러도 피가 멈추지 않는다. 은호의 상처를 바라보며 해주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제발 살려 줘요.”

* * *

현장에는 모두 네 명의 형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프로파일러가 경은의 폭력성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했고, 무기 소지의 가능성도 알렸다고 한다.

경험 없고 약한 존재기에 망정이지, 만약 훈련을 받았다거나 힘이 조금만 더 셌다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거라고 전했다.

그래도 사건 현장이 병원이었던 것은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다.

경은의 칼에 옆구리를 찔린 형사는 응급수술에 들어갔고, 은호 역시 바로 의료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정확하게 해주의 눈을 노리고 다가서는 칼날을 은호가 손으로 잡아냈다고 한다. 그 덕에 형사들이 경은을 체포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경은은 살인미수 혐의까지 더해져서 현행범으로 경찰에 넘겨졌다.

은호가 치료실에서 손바닥을 꿰매는 동안 해주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곧 쓰러질 정도로 흐느끼는 해주 때문에 지수도, 민영도, 치료실 앞을 지켜야 했다.

“해주야.”

윤규가 진우와 함께 병원으로 온 것은 은호가 치료실에 들어간 지 20분 정도가 지나서였다.

“아버님. 흐윽. 흑.”

가늘게 흐느끼던 해주의 울음이 윤규를 보자 더욱 커졌다. 길을 잃은 아이가 한참 만에 제 부모를 발견하고는 눈물짓는 모습과 흡사했다.

윤규 역시 그런 해주를 아이 다루듯 했다.

“아가, 넌 괜찮니?”

하얗게 질린 채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는 해주를 윤규가 걱정스레 살폈다.

고개를 끄덕인 해주가 치료실을 검지로 가리켰다.

“은호 씨가…….”

“보고받았다. 손이 찢어진 것뿐이라니 너무 걱정하지 말렴.”

윤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물이 멈추지는 않았다. 이러다가는 해주가 쓰러질 것 같아 더욱 염려스러웠다.

“내가 미안하구나. 네게 괜히 말해서 일을 키웠어.”

윤규가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해주에게 건넸다. 얼마나 운 건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손수건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아니에요. 덕분에 박경은을 잡았어요.”

간신히 진정하는가 했더니, 또다시 닭똥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그런데 은호 씨가 다쳐서. 흐으윽.”

“괜찮대도.”

해주가 가느다란 어깨를 감싼 윤규가 그녀를 가만히 토닥거려 주었다.

그때 치료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보호자분? 들어가 보세요.”

그러자 해주가 뛰다시피 치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서러운 울음소리가 치료실 앞 복도까지 흘러나왔다.

뒤늦게 치료실로 향하던 윤규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허허, 싱겁게 웃었다.

“살아는 있는 모양이니 우린 그만 갑시다.”

걸음을 돌린 윤규가 진우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박진우 이사, 수고했어. 이지수 팀장과 민영이도 수고 많았고.”

그러고는 왔던 길을 돌이켜 걸어갔다.

“다들 철수해. 저 잉꼬부부는 둘만 있고 싶을 테니까.”

* * *

황경순은 2학년 여름의 그 사건을 계기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해 가을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겨울에는 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황경순은 혼외자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성을 받아 황씨였는데, 미국으로 가면서 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되었던 모양이다. 박경은은 그렇게 탄생한 이름이었다.

미국에서의 삶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폭력 전과에 약물 중독으로 치료받은 기록까지, 아주 화려한 이력을 자랑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한국에 들어와서도 그런 습관들이 이어졌다. 그녀의 집을 수색한 경찰들은 다양한 종류의 불법 약물들을 찾을 수 있었고, 그녀의 혐의에 또 하나가 추가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해주는 은호의 몸을 씻어 주며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찬찬히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경은의 어머니를 만났던 이야기, 그녀의 미국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한 이야기, 어떻게 증거를 손에 넣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현욱과 최미정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도.

현욱은 결국 창성금융그룹의 고문직을 사퇴했고,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직도 그만두었다. 당연히 금융 경제 연구소에도 사직서를 냈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는 미정을 데리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란다. 그곳에서 미정을 치료하겠다고.

“그리고, 어머니 말이야.”

은호의 몸을 헹궈 주던 해주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원정을 못 본 지가 꽤 되어 가고 있었다.

신률이 구속되고 가장 충격을 받았을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원정일 터였다.

마땅히 찾아가서 위로를 전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직은 그만큼의 아량을 가지지 못한 탓이다.

“미국, 작은 외삼촌 집으로 가실 거야.”

“미국에요? 왜요?”

“어머니는 용서를 바라는데, 아버지가 용서가 안 되나 봐.”

윤규는 아직도 청담동 오피스텔에서 지낸다고 들었다. 24년 전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해주가 은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은요? 당신은 용서가 돼요?”

최근에야 원정이 은호의 친모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간 원정이 왜 그렇게까지 아이에 집착했는지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은호의 친모에게 행한 일까지 이해한다는 건 아니다. 은호에게는 끔찍한 기억이고, 악몽 같은 일일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은호는 태연하기만 했다.

“난 용서하고 말고도 없어.”

오히려 대수롭지 않다는 대답이다.

“내 친어머니는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아버지를 사랑했고, 아버지에게 사랑받았지만 늘 불행했지.”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는지 은호의 미간에 실금이 그어졌다.

“어쩌면 사랑이 내 친어머니를 불행하게 만든 건지도 몰라. 사랑하는 남자와는 부부가 될 수 없고, 아이를 낳았지만 자식으로 키울 수 없는 운명이었거든.”

객관적으로 따지고 보면 절대 아름다울 수 없는 사랑 이야기였다.

“아마 그날, 그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삶을 놓았을 거야.”

어린 나이에 그 집을 자주 찾았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가늘고 여린 기억 속 여자가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여서.

“어머니는 그런 내 친어머니의 등을 그저 살짝 떠민 것뿐이지.”

따지고 보면 원정의 잘못이라고만 몰아붙일 수도 없는 일이다.

물론, 원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싸늘한 얼굴로 죽으라고 말하던 순간이 심장에 말뚝처럼 박혀 있었으니까.

은호는 심장에 박힌 말뚝을 빼내는 대신 그저 무뎌지기로 했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그의 왕국을 만들기로 말이다. 그 과정에서 충분히 복수했기에 용서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

용서란 복수 없이 그 죄를 잊어 주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난 어머니에게 나쁜 짓, 할 만큼 했거든. 그래서 아버지와는 입장이 달라.”

무감한 듯 던지는 은호의 말에 해주의 눈빛이 애잔하게 흔들렸다.

이렇게 말하기까지, 그의 마음속에는 얼마나 많은 번뇌가 있었을까.

여덟 살 나이에 친어머니가 목숨을 끊는 것을 열쇠 구멍으로 지켜본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괴로워했을까.

가슴이 아렸다.

“당신이 사랑을 증오하고, 가증스럽게 생각했던 이유, 알겠어요.”

마치 결벽증이라도 있는 듯, 사랑만은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던 그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당신에게 사랑이란, 그저 끔찍한 거였네요.”

“맞아.”

고개를 끄덕인 은호가 샤워기를 껐다. 그러고는 선반 위의 타월을 내려 몸을 닦았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지 못했어. 심지어 그 사랑을 죄악처럼 숨겨야만 했지. 어머니는 사랑 때문에 평생 지옥 속에서 살았고. 친어머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놓아 버릴 만큼 유약해졌어.”

그래서 끔찍했다. 사랑이라는 알량한 감정이 어느 정도로 사람을 망가뜨리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게 내가 아는 사랑이었는데.”

타월을 허리에 감은 은호가 해주를 뭉근히 내려다보았다.

“이젠 바뀌었지.”

가느다란 팔로 다친 그를 대신해 몸을 씻겨 주는 지해주. 피 흘리는 그를 붙들고선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지해주. 저를 향해 달려드는 칼날을 보면서도 그를 향해 마지막 메시지를 던지던 지해주.

“나한테 사랑은 이제…….”

해주를 통해 알게 되었다. 사랑이 사람을 강하게도 만든다는 것을.

“너야.”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해주를 바라보던 은호가 살며시 입술을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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