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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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혈한 날부터, 매일 병원에 와서 주사를 맞았다. 그리고 오늘에야 비로소 안정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해주가 진료실을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던 지수가 쪼르르 다가왔다.

    “괜찮대?”

    “응, 이제 안심해도 된대.”

    고맙게도 지수는 해주의 산부인과 진료에 매번 따라와 주었다. 모르긴 해도 은호의 부탁이 있었던 듯하다.

    “해주야,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임신부가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못 먹으면 아이 입이 돌아간다며 지수가 호들갑을 떨었다.

    지수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해주가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광장시장 들렀다 갈래?”

    사실 얼마 전부터 기름 떡볶이가 무척이나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두 사람을 지켜보던 민영이 혀를 끌끌 찼다. 민영 역시 지수와 마찬가지로 매일 산부인과에 출근 도장을 찍던 참이다.

    가슴 앞으로 팔짱을 두른 민영이 삐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새언니는 바로 집으로 가야 해. 그 미친년이 아직 잡히기 전이란 말이야.”

    민영의 말에 지수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생각을 못 했네. 그냥 집으로 가야겠다.”

    “난 괜찮은데…….”

    시무룩해진 해주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민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해주를 나무랐다.

    “황경순 말이야, 어디로 숨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인대.”

    수배 명령이 떨어진 지 벌써 3주 가까이가 지났다. 전국적으로 사진이 배포되었고 출국 금지까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직 잡히지 않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분명히 너 잡겠다고 칼을 갈고 있을 텐데, 왜 안 나타나는지 모르겠어.”

    민영의 말에 지수가 발끈했다.

    “나타나면 좋겠어요? 그럼 해주가 위험한데?”

    “누가 좋대? 그래도 일단 나타나야 잡을 것 아니야.”

    “그러다 해주가 다치면요. 선배가 책임질 거예요?”

    “그걸 내가 어떻게 책임지니? 경찰이 책임져야지.”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도 이제는 서로에게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다. 처음처럼 핏대를 세워 가며 싸우지는 않는다. 그래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 정도는 되니 일단은 말려야 했다.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말다툼하는 두 사람 사이로 해주가 끼어들었다.

    “그만해요, 둘 다. 싸우다가 정들겠어요.”

    그러자 민영이 콧방귀를 뀌었다.

    “얘랑 내가? 웃기는 소리 집어치워. 정말 재수 없거든?”

    발끈한 민영이 목소리를 더 크게 키우자 해주가 난처한 얼굴로 제발 그만하라며 말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수가 난리다.

    “누가 할 소리?”

    “지수 너도 그만해.”

    그때,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두 사람, 조용히 해요. 나 너무 부끄러워서 다음부터는 이 병원 못 오겠어.”

    그러고는 전화를 받았다.

    “아버님?”

    윤규였다.

    -아가, 검사는 끝났니?

    “네.”

    -혼자 있니?

    윤규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불안하게 들렸다.

    “아니요. 민영이 아가씨와 이지수 팀장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고는 윤규가 잠시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도 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불안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버님?”

    -은호는 아무 말 하지 말라고 했는데, 네게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네?”

    -네 위치가 박경은, 그 여자에게 노출된 모양이야.

    순간 뒤통수를 둔기에라도 맞은 듯 머리가 띵해졌다.

    -지금 경찰이 병원 곳곳에 잠입해 있고, 은호가 그쪽으로 가고 있어.

    묘한 기분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일상을 보냈는데, 지금은 범죄자의 타깃이 되어 신변의 위험을 느껴야 한다니.

    -그러니까 가급적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고, 민영이나 이지수 팀장에게 딱 붙어서 바로 병원 뒷문으로 나가렴. 김 기사가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윤규의 말을 들으며 해주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과연 지금 이 상황이 정상적인가, 하고 말이다.

    “아버님.”

    어느새 단단해진 눈빛의 해주가 윤규를 불렀다.

    “누군가…… 정보를 흘렸나요?”

    가장 이상한 점은 과연 누가 경은에게 그녀의 위치를 알렸냐는 것이다.

    -신률, 그자를 조사하면서 경찰 쪽 누군가가 흘린 모양이야.

    대모산의 신령한 무속인 신률.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게 그가 가짜 점술인이라는 것만은 아니었다. 사기 전과를 가진 협잡꾼으로 경은과는 3년 전부터 정을 통한 사이라고 했다.

    신률의 돈으로 수술을 하고, 신률을 이용해서 원정에게 접근했다니. 이쯤 되면 박경은, 아니 황경순은 정말이지 대단한 팜므파탈인 모양이다.

    -너무 안 잡히니까 수를 쓴 모양인데, 그 바람에 은호가 경찰청을 뒤집어 놨어.

    윤규의 마지막 말에 해주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해주를 위험에 빠뜨렸으니 은호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공권력에 도전이라니, 이런 식이면 은호까지 다치게 된다.

    결심을 굳힌 해주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럼 제가 미끼가 될게요.”

    -해주야.

    해주의 말에 윤규가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가 왜!

    “아버님, 이러다가는 저희 CS 모바일 뱅킹 사업에 차질 생겨요.”

    은호와 그녀의 합작으로 탄생한 사업이다. 그를 부회장 자리에 앉힌 프로젝트였고, 영국 브리티시뱅크를 필두로 전 세계 십여 개의 은행과 MOU를 맺을 수 있었다.

    그 하나를 바라보며 여태 고생한 게 얼마인데, 그깟 황경순 하나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

    “은호 씨가 언제까지 제 일에 매달려 있어야 해요?”

    언제까지 두려움에 떨며 은호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는 일이다.

    -해주야, 은호가 다 알아서…….

    “1층 커피숍에서 차 한잔하고 가겠습니다. 김 기사님께는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전해 주세요.”

    해주가 전화를 끊자 지수가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해주야, 지금…… 위험 상황이다. 이거니?”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가. 아가씨도 갈 테면 가요.”

    민영의 미간이 요란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새언니, 나더러 비겁하게 도망가라는 거야? 그래서 은호 오빠 눈 밖에 완전히 나라고?”

    코웃음을 친 민영이 도도한 표정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었다.

    “이거 왜 이래? 내가 싸가지는 좀 없어도, 의리는 있거든?”

    그러고는 해주의 팔에 팔짱을 둘렀다.

    “가자, 커피는 내가 살게.”

    * * *

    이쯤 되자 모든 사람의 행동이 수상해 보였다.

    누가 경찰이고 환자인지, 아니면 경은의 또 다른 공범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는 지수와 달리 민영은 잔뜩 굳은 채 해주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평온해 보이는 사람은 해주뿐인 듯했다.

    그런 해주를 빤히 쳐다보던 민영이 조용히 속삭였다.

    “나, 새언니 좀 무서워.”

    “무슨 말이에요?”

    “이럴 때 보면 은호 오빠와 다를 게 하나도 없어. 정말 인간 같지 않아 보인다고.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긴장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어?”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는지, 민영이 계속 말을 이었다.

    “축제에서 말이야.”

    그러고는 뜬금없이 오래전 축제 이야기를 꺼냈다.

    “두 사람 시선이 딱 마주치는데, 그때 알아봤어.”

    “뭘요?”

    “아, 이 인간 둘은 영혼의 색이 같구나, 라고 말이야.”

    민영의 말에 해주가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가요?”

    영혼의 색이 같다니, 꽤 괜찮은 칭찬처럼 들렸다. 물론 민영의 입장에서는 칭찬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주위를 둘러본 해주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지수가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왜, 왜 일어나?”

    안 그래도 겁이 많은 지수가 더욱 겁에 질렸다. 그런 지수를 바라보며 해주가 미간을 슬며시 좁혔다.

    “넌 앉아 있어, 물 마시러 가는 거니까.”

    “내가 가지고 올게.”

    “지수야, 여기 사람이 몇 명인지 봐 봐. 이 중에 절반은 경찰일걸?”

    해주가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내가 장담해.”

    그러고는 생긋, 고운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올게.”

    지수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해주가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차를 마시다 경은을 본 듯했다.

    대범하게도 모자 하나 쓰지 않은 경은은 사고가 있었던 날 해주가 입었던 옷을 똑같이 입고 있었다.

    “완전히 미친 거야.”

    물을 마시러 간다고 했지만, 해주는 화장실 쪽을 향해 걸었다.

    조금 전, 아이 세 명이 엄마와 함께 카페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끔찍한 활극을 보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타깃은 어차피 해주였고, 해주가 움직이면 경찰도, 경은도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 점을 믿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호가 그녀에게로 오고 있었다.

    주먹을 꼭 말아 쥔 해주가 제 아랫배를 바라보았다.

    “한방아, 엄마에게 용기를 줘.”

    모두를 위해 그녀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더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다.

    화장실까지 걸어간 해주는 화장실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경찰이 남자라면 그녀를 따라 화장실로 들어올 수 없다.

    걸음을 멈춘 해주는 다시금 발길을 돌려 공간이 휑하게 뚫린 로비 중앙에 멈춰 섰다.

    CCTV의 위치를 확인하고, 가장 구도가 잘 나오는 곳을 선택했다. 그리고 핸드백을 앞으로 돌려 배를 가렸다.

    적어도 아이는 지키고 싶었다.

    “아가, 미안해. 그래도 너무 놀라지는 마.”

    그때였다.

    “꺄아아악.”

    로비 어딘가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그러고는 키가 큰 남자 하나가 풀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도망…….”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는 해주를 향해 손을 뻗으며 도망가라고 말했다. 세상에, 그녀를 지키기 위해 배치된 잠복 경찰인 모양이다.

    그때였다. 혼란스러워진 로비의 인파를 가르고 경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 묻은 칼을 든 경은은 호러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살인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기 때문일까, 해주의 입술에서 냉소가 흘렸다.

    “하, 완전히 미쳤구나. 황경순.”

    흉기를 들이밀 줄은 몰랐는데…….

    “죽어!”

    눈알을 완전히 뒤집은 경은이 칼을 든 채 달려들었다.

    순간적으로 은호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눈을 질끈 감은 해주가 곁에 없는 은호를 떠올리며 배를 가린 핸드백을 꼭 거머쥐었다.

    “은호 씨, 미안해요. 그래도 언제까지 일을 질질 끌 수는 없잖아요.”

    그때였다. 그녀의 몸이 뒤로 획, 당겨지며 단단한 가슴에 감싸였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끝낸댔잖아.”

    은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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