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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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하지 않게 한다는 의미가 이런 것인 줄 몰랐다. 아니, 이런 게 가능한 줄 몰랐다.

    “야해, 차은호.”

    침대에 흐드러지듯 누운 해주가 신음하듯 푸념했다. 여전히 가슴은 헐떡이고, 숨결은 불안정했다.

    가슴을 터트릴 듯 커진 심장이 결국은 펑, 소리를 만들어 내며 폭발한 것만 같았다.

    가쁜 숨을 내뱉느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녀의 몸을 은호가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너도, 나도 만족했으면 됐지. 야하긴.”

    만족했다는 말에 해주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만족했어요?”

    정상적인 성관계가 아니었다.

    “좀 덜하긴 했지만, 만족했어.”

    비슷하긴 했지만, 절대 같을 수 없는 행위였다.

    “난 네 몸 어디라도 좋아. 이렇게 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우니까.”

    여전히 그녀의 다리 사이에는 그가 들어와 있다.

    “넌 어땠어?”

    그녀가 어땠는지 다 알면서, 짓궂게 물어 오는 그가 얄미웠다. 그의 손놀림에 완전히 녹아서는 짐승 같은 신음을 흘렸는데 말이다.

    “말해 봐.”

    기어코 답을 바라는 은호가 좀 더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손가락도 괜찮았어?”

    화들짝 놀란 해주가 두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말, 하지 말아요. 너무…….”

    조금 전의 상황이 떠오르자 귓등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너무 야하잖아.”

    해주의 말에 은호가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이제 알았어? 차은호는 지해주 한정 야한 남자야. 그것도 무지하게 야한 남자.”

    그러고는 그녀에게서 몸을 물렸다.

    그가 빠져나간 자리가 허전해 심장 언저리가 선득해졌다. 허전함을 잊기 위해 가슴에 손을 얹는 순간이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포근히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기억해.”

    입술이 귓바퀴를 배회하며 온기를 전해 주었다.

    “앞으로 네가 겪을 모든 섹스는 야하고, 야하고, 야할 테니까.”

    * * *

    [-사모님, 날 좀 내보내 줘요.]

    그저께 오후, 전화를 걸어온 경은이 대뜸 던진 말이다. 해주 때문에 경찰서에 있다며 투덜거렸다.

    [-잘 판단하셔요. 내가 이렇게 경찰서에 묶여 있으면 사모님에게도 안 좋아. 아시잖아요.]

    그렇게 고분고분하더니 사나운 짐승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듯 느껴졌다.

    [-사모님 비밀, 내가 다 까발려도 좋아요?]

    [비밀이라니?]

    [-차은호 부회장님과 사모님의 관계, 사모님과 차은호 부회장님 친모와의 관계. 뭐 그런 거?]

    [너, 너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는지가 중요한가? 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러고는 사악한 웃음을 터트렸다.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라는 말을 친절하게 덧붙인 경은이 수화기 너머로 사라지고, 짧지 않게 고민했다.

    의논할 상대도 없었다.

    은호를 통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윤규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청담동 오피스텔에 머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신률에게 의논할 수도 없었다. 신률만이 알던 그녀의 비밀을 경은이 알게 되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24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원정이 원하는 건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은호의 엄마로 남는 것.

    창성의 안주인, 신화건설의 여왕도 좋지만, 그녀가 가장 만족했던 자리는 다름 아닌 은호의 엄마였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은호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최선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은호가 그녀를 용서하면, 윤규도 제자리로 돌아올 터였다.

    [-지금부터는 집에만 계세요. 전화도 받지 말고,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마세요. 박진우 이사가 갈 테니, 확인서에 사인만 하시고요.]

    해 질 무렵 진우가 찾아왔고, 은호가 시키는 대로 확인서에 사인했다. 경은이 해주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한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서였다. 그리고, 원정을 이용해서 한남동 집에 CCTV와 부적을 설치했다는 사실 역시 담겨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줄곧 그랬던 듯하다.

    해주가 불임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낸 사람도 경은이었고, 해주에게 남자가 있다며 불을 붙인 사람도 경은이었다.

    그깟 계집애에게 놀아나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원정이 말아 쥔 주먹에 힘을 더했다. 손톱 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아릿한 통증이 전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자 입 안 가득 비릿한 피 향기가 번졌다. 잠시도 쉬지 않고 저를 괴롭힌 원정이 제 맞은편에 앉은 은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점심이 좀 지나서 은호가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 그러고는 저토록 평온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다.

    그저께 병원에서 봤을 때는 날이 잔뜩 서 있어 무섭기만 했는데, 오늘은 한풀 보드라워 보인다.

    “차가 맛있네요, 어머니.”

    차를 마시던 은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그래? 더 줄까?”

    “아니요. 차 마시러 온 건 아니고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등받이에서 몸을 세워 앉은 은호가 서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박경은, 그 여자 수배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수배? 경찰서에 잡아 둔 거 아니었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린 기분이다.

    “증거가 없어서 잠시 풀려났었어요.”

    그 섬뜩한 아이가 풀려났다니. 원정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 공포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하게 엮을 수 있는 증거를 찾았어요. 그런데 현행범으로 구속되는 순간 도망갔고요.”

    “어떻게 그런…….”

    “공범이 있습니다.”

    공범이 있다는 말에 원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범?”

    “검은색 카루소, 00더 1975.”

    은호가 차량 번호를 읊으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아는 차죠?”

    원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말씀하세요, 어머니. 숨겨서 될 일 아니니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찾아온 듯, 은호의 표정은 여유롭기까지 했다.

    “신률, 맞습니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정확한 번호는 모르지만 1975는 확실하다. 게다가 검은색 카루소라니. 신률이 신분을 감추고 몰래 움직일 때 사용하는 차가 확실했다.

    “은호야, 난 정말 몰랐어.”

    이대로라면 그녀까지 공범으로 엮일지도.

    “난, 경은 씨가 목적이 있어서 접근한 것도 몰랐…….”

    “됐습니다. 확인 감사합니다.”

    은호가 그녀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코트를 집어 든 은호가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은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어머니?”

    뒤돌아본 은호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더는 어리석은 행동 하지 않으실 걸로 믿어요.”

    다만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어서,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어머니 먼저 찾아온 이유는 적어도 어머니가 연관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였어요.”

    그가 베푸는 마지막 관용이라는 듯, 중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조용히 계세요. 제발.”

    * * *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여자다.

    주위 사람을 제 마음대로 주무르는 재주가 탁월했다.

    현욱의 말로는 그저 술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 마치 최면에 걸리기라도 한 듯 어느 순간부터는 그 여자의 말을 따르고 있었단다.

    “최면술을 익혔을까?”

    지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학 때 걔 최면술 동아리였잖아.”

    “걔가 동아리 활동도 했어요? 그 성격에?”

    “그래서 다들 놀랍다고 그랬어.”

    커피에 각설탕 세 개를 넣어 휘저은 민영이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최면술 동아리에는 찐따들만 모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는데 말이야. 황경순 걔가 들어가면서 최고의 찐따가 들어왔다고 동아리 사람들도 별로 안 좋아했다는 후문이 있었어.”

    다디단 커피를 홀짝거린 민영이 말없이 앉아 있는 해주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새언니, 임신 축하해요.”

    민영의 말에 해주의 눈썹이 비스듬히 위를 향했다.

    “아가씨, 도대체 왜 그래요?”

    미심쩍다는 듯 바라보자 입술을 감쳐문 민영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뭐, 뭐? 내가 뭘?”

    “아가씨, 나한테 새언니라고 안 부르잖아요. 야, 너, 지해주. 이렇게 부르죠.”

    평소 민영의 모습을 떠올린 해주가 씁쓸하게 웃었다.

    “거기다가 웬 존댓말? 정말 무슨 일 있어요?”

    해주의 물음에 민영이 공손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미안해요, 새언니.”

    갑자기 미안하다니. 미간을 좁힌 해주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갑자기?”

    “갑자기 아니야. 늘 미안했어요. 용기가 없어서 말을 못 했지. 새언니에게 못되게 굴었던 거, 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

    이러려고 산부인과 스케줄 알아내서 따라온 거야?

    입술을 벌린 채 민영을 바라보자 눈치를 살핀 민영이 본론을 꺼냈다.

    “그러니까 오빠 좀 설득해 줘요. 네?”

    근 일주일 가까이 뉴스가 시끄러웠다.

    대모산의 점술가 신률에 대해 특별 취재가 이루어졌고, 그의 비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검찰이 움직였고, 덕분에 정‧재계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청와대 참모진 중 몇 사람도 이 난리 통을 피할 수는 없을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가짜 점술가가 대한민국 정‧재계를 좌지우지했다는 게 외신에까지 보도되며 나라 망신을 톡톡히 시키기까지 했다.

    증권가 지라시를 통해 신률에게 돈을 갖다 바치며 그의 지시를 따랐던 사람들의 명단이 공개되었다.

    당연히 원정과 민영의 아버지인 원철의 이름도 거론되었다.

    창성금융그룹의 경우는 원정이 미치는 영향이 미미해서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신화건설은 달랐다. 주가는 하락하고 경영진 교체설까지 터져 나왔다.

    자금난까지 시달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래도 내가 황경순, 걔 자료 오빠한테 넘겨서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거잖아.”

    은호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 제일 먼저 경은을 의심한 사람이 민영이라고.

    “박경은이 황경순이라는 거, 내가 고모 생일날 눈치채고 오빠한테 귀띔한 거라니까?”

    색안경을 끼고 사람 의심하는 게 민영의 유일한 재주인데, 그런 재주가 쓰일 때도 있다며 은호가 웃었다.

    “날 봐서라도, 좀 도와주라고 해 줘요. 네?”

    “아가씨.”

    주스 잔을 내려놓은 해주가 민영을 조용히 불렀다. 그러고는 조곤조곤 설명했다.

    “신화건설은 침몰하는 배예요.”

    “뭐?”

    “이럴 때는 같이 침몰할 게 아니라 구명조끼를 입고, 구명정을 내려야 해요.”

    “야! 지해주.”

    발끈한 민영이 소리를 바락 질렀다. 평소다워서 이 모습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진다. 방긋 웃어 보인 해주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회사에 개인 돈 넣을 생각 하지 말고, 그걸로 CS모바일 주식을 사요.”

    노기 가득하던 민영의 얼굴이 슬며시 풀어졌다. 그런 민영을 쳐다보며 쐐기를 박았다.

    “내년 초에 몇 배로 뛰어요.”

    “정말……이야?”

    민영의 목소리 끝이 흥분으로 파르르 떨렸다.

    “나 지해주예요. 창성금융 경전본 본부장. 주식의 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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