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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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범이 있었다.

    경찰은 당장에 박경은과 그 공범에 대한 수배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혹시라도 증거를 훼손할까 봐 경은의 집에 경찰이 배치되었다.

    도주한 현장범이라 즉시 구인 영장과 가택수색 영장이 발부되었다.

    수색 결과, 경은의 집에서는 엄청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완전 미친년이었어.”

    경찰에게 연락받은 진우가 혀를 내둘렀다.

    그동안 해주를 몰래 촬영한 수천 장의 사진이 쏟아졌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민망한 일기들이 몇 권이나 나왔다.

    “해주 씨만 스토킹한 게 아니라 너도 스토킹했더라. 네가 좋아하는 음식, 네가 좋아하는 음악, 네가 좋아하는 색깔.”

    진우는 듣기에 조금은 끔찍한 기분이 느껴지는 사실들을 늘어놓았다. 경찰 역시 희대의 살인 사건보다 더 불쾌하고 찜찜한 일이라고 말했단다.

    “젤 웃기는 건 뭔지 알아?”

    그 와중에 웃기는 포인트가 있었던지, 진우가 싱겁게 웃었다.

    “‘어떻게 하면 차은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나?’라고 써 두고는 그 아래 빨간색 립스틱으로 ‘지해주가 되어야 함’이라고 써 뒀대.”

    제대로 미쳤다며 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진우를 바라보며 은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대로 추리했네. 멍청한 줄 알았더니, 한국대 출신은 맞는 모양이야.”

    “야, 이 시점에서 농담이 나오냐?”

    대수롭지 않게 농담을 던지는 은호를 바라보며 진우가 인상을 구겼다. 지금은 농담 따위를 할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끔찍한 건, 그 여자의 미친 짓에 동참한 공범이 있다는 거야.”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확률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높다. 그런 미친 여자가 구속되지 않은 상태로 돌아다니는데, 게다가 공범이 있다는데, 태연할 수 있을까. 모르긴 해도, 은호의 속도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차량 번호 조회했어?”

    “대포차래.”

    골목을 후진해서 빠져나가는 차량 번호를 은호가 외워 둔 덕에 조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건진 게 아무것도 없다니, 실망스러웠다.

    “CCTV로 추적하고 있는데, 쉽지 않은가 봐.”

    경찰도 난감해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굴까? 공범이?”

    이런 엄청난 사건 앞에서도 태연해 보이는 은호를 바라보며 진우가 미간을 좁혔다.

    “넌 짐작이 가?”

    “짚이는 데가 있어.”

    “누구?”

    “글쎄. 확인부터 좀 하고.”

    대답을 미룬 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소파 위에 걸쳐 두었던 코트를 집어 들었다.

    “어딜 가려고? 다음 단계에 대해 회의해야지.”

    코트를 입은 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진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다시 앉혔다.

    “어젯밤에 집에 못 들어가서 해주가 걱정할 거야.”

    그러고는 손을 슬쩍 들어 보이고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해주 얼굴 좀 보고, 평창동 갔다 오려고.”

    “드디어 회장님께 보고드리게?”

    “아니, 어머니 좀 만나 보려고.”

    “어머니?”

    어머니라는 말에 진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경은의 배후에 원정이 있다는 사실을 이번 일로 접하고 경악했던 터다. 설마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되었는데, 아직도 그 미친 여자에게 도움을 줄까.

    “어머니를 의심하는 거야?”

    대답 대신 은호가 엷게 웃었다.

    “넌 여기 남아서 9시에 사람들 오면 이 집 물건들 남김없이 다 치워 버리라고 해. 더럽고 찝찝하니까.”

    * * *

    어젯밤, 은호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불안하기만 했다.

    회의가 길어졌고, 옷을 가지러 한남동 집에 들러야 하고……. 모두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차은호는 지금 그녀 몰래 무언가 일을 도모하고 있다. 그게 그녀의 걱정을 살 수 있는 일이기에 숨기는 거겠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린 해주의 얼굴이 걱정스레 구겨졌다.

    그때였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추 여사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부회장님, 이제 오세요?”

    “해주는요?”

    “사모님은 거실에 계세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거실 창가에 앉아 있던 해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피가 살짝 비쳐서 조심하던 차였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어느덧 은호가 모습을 나타냈다.

    “나 왔어.”

    차콜그레이 슈트에 암녹색 넥타이, 회색 코트, 단정하고 세련된 헤어스타일. 어제, 집을 나설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다. 당당한 걸음걸이와 매혹적인 미소 역시 평소와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은호는 피곤해 보였다. 아닌 척 웃고 있지만, 고민을 감출 수는 없는 모양이다. 뭐가 저 남자를 저토록 괴롭히는 것일까, 생각하던 찰나 은호가 그녀를 폭 감싸 안았다.

    “뭐 하고 있었어?”

    부드럽게 끌어안은 그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걱정하고 있었어요.”

    부러 속내를 숨기지는 않았다.

    “무슨 걱정?”

    그녀의 대답에 은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해주가 말을 이었다.

    “비밀.”

    그러자 은호의 한쪽 눈썹이 위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비밀?”

    까만 눈동자가 좀 더 짙은 색을 발하며 어두워졌다.

    “은호 씨도 나한테 비밀 만들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비밀.”

    날렵하던 턱선에 힘줄이 더해지며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눈매가 그윽해지며 좀 더 어두워진다.

    “해주야, 그게…….”

    “이유 안 물을 테니까, 일단 좀 쉬어요. 몸도 좀 씻고.”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가 봐야 해.”

    지난 3년 은호를 지켜보며 알게 된 게 몇 가지 있다.

    은호는 절대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지 않는다. 또한 원하는 결과가 있다면 반드시 만들어 낸다. 무엇보다 제가 원하는 결과를 손에 쥐기까지는 스스로를 혹독하게 혹사시킨다.

    그게 가끔은 지나치게 가혹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타인의 관점에서는 ‘일 중독자’ 정도로 미화되곤 하지만, 해주는 그런 그가 늘 안타까웠다. 그래서 해주 역시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서든 일을 거들어 은호를 쉬게 해 주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처럼 그녀가 도울 수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그를 쉬게 만들 수 있을까. 밤새 고민했다.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을 찾았다.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일단 우겨 보기로 했다.

    “안 돼요. 나랑 침대에 3시간만 누워요. 그리고 같이 점심 먹고, 그 뒤에 나가요. 네?”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 없는 은호를 해주가 애달프게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막무가내로 그의 코트 단추를 풀었다.

    “은호 씨가 사랑이라는 걸 처음 해 봐서 잘 모르나 본데, 원래 사랑하면 마음에 안 들어도 못 이기는 척 따라 주고 그러는 거야.”

    단추를 다 풀어 내린 해주가 그의 코트를 벗겼다. 그러고는 이내 재킷의 단추를 끌렀다. 풀어야 하는 단추가 왜 이렇게 많은지, 조금은 마음이 급해졌다.

    “나 봐요. 궁금해도 안 묻잖아.”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어제 회의는 새벽이 아니라 저녁 무렵에 끝났다는 거 다 확인했고, 그대로 정 실장님과 한남동 집으로 갔다는 것도 확인했어요.”

    어젯밤, 그 사실을 전해 듣고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휘청거리며 침대에 앉아서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는 안 와.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당연히 걱정되고 불안하지.”

    은호가 거짓말을 할 일이 뭐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가 거짓말까지 해야 할 일, 그건 그녀와 아이의 안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발 벗고 나서고 싶지만, 정말로 은호를 위한다면 얌전히 그의 뒤에 숨어 있어야겠지. 그게 그를 돕는 일일 테니까.

    “그런데도 얌전하게 당신 기다렸잖아요. 그런데, 그거 하나 못 해 줘요?”

    “알았어.”

    재킷을 벗긴 다음, 그의 넥타이를 풀어내던 손이 멈춰 섰다. 당연히 서늘한 눈빛으로 안 된다며 고개를 저을 줄 알았다.

    “점심 먹고 나갈게.”

    넥타이 끝에 시선을 맞추고 있던 해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네 말대로 한다고.”

    그녀와 뭉근히 시선을 맞춘 은호가 엷게 웃었다.

    “그런데, 여기서 막 벗겨도 돼? 추 여사님 계시는데?”

    그러고는 제 뒤쪽을 설핏 가리켰다. 뒤쪽을 바라본 해주가 그제야 추 여사의 존재를 자각하고는 뺨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 모습을 바라본 은호가 소리 내어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뺨까지 물들이면 내가 너무 곤란해져. 들어가자. 들어가서 하던 것 마저 해.”

    해주의 손을 꼭 거머쥔 은호가 그녀를 침실로 이끌었다.

    그의 손은 뜨거웠고, 걸음은 다급했다. 지나치게 넓은 새집에서 침실은 멀고도 멀었다.

    복도 끝을 오른쪽으로 돌아 드디어 문이 열렸다. 그녀를 문 안으로 이끈 그가 급히 문을 닫고, 버튼을 눌러 문을 잠갔다.

    “잠이 필요한 게 아니야.”

    침실 문에 그녀를 기대 세운 그가 입술을 겹쳐 왔다.

    뜨겁게 끼치는 숨결에 짙은 페로몬이 느껴졌다. 삼키듯 입술을 머금은 그가 거칠게 빨아들였다.

    “내가 널 얼마나 참고 있는데.”

    잠시 입술을 떨어뜨린 그가 미치겠다는 듯 속내를 털어놓았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인 그가 다시금 입술을 붙여 왔다. 턱을 깊게 움직이며 안을 파고든 그가 그녀를 짙게 휘감았다.

    “으음―”

    토하듯 신음을 내뱉자 더욱 깊게 파고들어 그녀를 얽었다. 입 안에서 얽히는 살덩이가 거칠게 쓸리며 욕망을 드러낸다.

    습한 마찰음을 만들어 내며 키스가 계속되는 동안 그의 손은 그녀의 몸을 더듬어 냈다. 몸을 바짝 붙이자 단단하게 부푼 하체가 그녀의 아랫배에 닿았다.

    저도 모르게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렀다. 입술을 떨어뜨린 그가 거칠게 호흡하며 으르렁거렸다.

    “소리 내지 마. 미치겠으니까.”

    그러고는 그녀의 원피스 자락을 들어 올려 훌렁 벗겨 버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 뒤를 더듬었다.

    “은호 씨, 안 돼요.”

    당황한 해주가 그의 손을 막았다.

    “조심하라고 했단 말이야.”

    하지만 은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간단히 그녀의 속옷을 벗겨 냈다.

    “걱정하지 마. 위험하지 않게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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