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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가 준비한 새집은 성수동의 커다란 아파트였다.
이사라고는 했지만, 이삿짐을 꾸린다거나 이삿짐센터에서 사람이 온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여행 가듯 꾸린 슈트 케이스 하나가 이삿짐의 전부였다.
도대체 무슨 이사가 이래, 툴툴거린 해주가 새집에 발을 들였다.
“와아―”
그러고는 나직하게 탄성을 내질렀다.
새집은 크고, 또 넓었다.
화려한 조경의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높이도 적당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건지, 새집에는 인테리어도, 가구도, 심지어 주방의 식기들까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몸만 가면 된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마음에 들어?”
집을 둘러보는 해주 곁으로 은호가 다가왔다.
“마음에는 드는데…….”
천천히 시선을 옮기던 해주가 은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사한 이유가 뭐예요?”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다. 차은호의 모든 행동에는 늘 타당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해주를 은호가 느긋하게 훑었다. 답을 줄 듯 말 듯 애태우던 까만 눈동자에 미소가 어렸다.
“원래 이사하려고 했어. 그 집에는 안 좋은 기억이 너무 많잖아. 부적 찾아내면서 나도 정떨어졌거든.”
슬쩍 미간을 좁힌 은호가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해주의 배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게다가 계단 오르내리는 게 너나 아이한테 위험할 것 같아서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가야 해서 오늘 아침만 해도 여간 힘이 든 게 아니었다.
“다른 이유…… 있는 거 아니죠?”
“다른 이유?”
그래도 이토록 급하게 이사를 감행하기에는 이유가 약했다. 하지만 은호는 그 이유를 해주에게 알려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다른 이유 있을 게 뭐 있어.”
이럴 때의 은호는 조금은 야속하다.
입술을 꾹 다문 해주가 은호를 새침하게 흘겨보았다. 그러자 엷게 미소 지은 은호가 그녀의 콧등에 입을 맞추고는 멀어졌다.
“네 물건은 내가 조금씩 옮겨 줄 테니까 넌 그냥 휴가 왔다, 생각하고 푹 쉬고 있어.”
아예 화제를 돌리는 걸 보니 절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체념한 해주는 한숨을 폭 내쉬며 툴툴거렸다.
“휴가가 아니라, 갇힌 것 같은 기분인데요? 감옥 같은 건가?”
“그럴지도?”
은호가 나직하게 웃었다.
웃음기를 걷어 낸 은호가 커다란 창문 너머, 정원으로 시선을 던졌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선심 쓰듯 말을 잇는다.
“그럼, 정원 산책하는 정도는 봐줄게.”
그러고는 주방 쪽을 눈짓했다.
“대신, 추 여사님과 꼭 함께 다녀야 해.”
해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저 유산 기미가 있는 아내를 보호하려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과하다.
“아, 그리고.”
분명히 무언가가 있는데, 그녀에게는 말해 주지 않겠지.
“이사했다는 사실, 아무도 몰라. 당분간은 아무에게도 안 알렸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이지수 팀장에게도 말하지 마.”
“왜……?”
“묻지 말고.”
예감이 좋지 않다. 뭘 하려고 이러는 건지, 등줄기를 따라 차가운 벌레라도 기어 다니는 듯 섬뜩한 불쾌감이 꿈틀거렸다.
“대답.”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해주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에 은호의 커다란 손이 올라왔다. 머리를 꾹 누른 손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럼 좀 쉬어. 난 출근해야 해서 나가야 해.”
은호가 출근하지 않은 지 며칠이 지났다. 아무리 회사 시스템을 잘 구축해 놨다고 해도 컨트롤 타워가 계속 공석이어서는 안 될 일이다.
고개를 끄덕인 해주가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은호의 손에 손을 겹쳤다.
“언제 와요?”
보내야 하는 건 알지만, 이상하게 불안했다.
“일찍 올게.”
그런 그녀의 불안을 아는지, 은호가 뭉근히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말고, 넌 네 몸만 잘 지키고 있으면 돼.”
“네.”
고개를 끄덕이자 은호가 걸음을 옮겼다.
현관을 나서며 은호가 뒤를 돌아보았다. 요 며칠 눈에 띄게 핼쑥해진 해주의 얼굴이 심장을 아프게 헤집었다.
갔다 올게, 입 모양으로 말하고 손을 슬쩍 들어 올리자 해주의 입술이 곧 울 듯 삐죽거렸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달려온다.
“뛰지 말라니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해주가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은호 씨.”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 한마디에 가슴 안 어딘가가 시큰거리며 아프다.
사랑한다는 진부한 말에 심장이 유린당하는 기분이다.
별것 아니라며 무시했던 보잘것없는 감정이 제 존재감을 무섭게 드러내며 커지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돌려주는 대신 키스를 선택한 은호는 해주의 입술에 짙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사랑은 처음부터 욕망이었다고 말하는 듯 짧지만 강렬한 키스였다.
해주의 입술에서 뜨겁게 달궈진 신음이 흐를 때까지 집요하게 탐한 그가 입술을 떼어 냈다.
나른한 얼굴로 몸을 휘청이는 해주를 놓아준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다녀올게.”
그러고는 현관을 나섰다.
이제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면 아이고 뭐고, 해주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가 욕망을 해소해 버릴 것만 같았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해결해야 해주 역시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주차장에 닿기 무섭게 은호가 정 실장을 찾았다.
“정 실장님.”
“네, 부회장님.”
차 앞에서 대기 중이던 정 실장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박진우 이사에게 연락해서, 박경은 그 여자 이제 풀어 주라고 해요.”
드디어……. 비장한 표정의 정 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 * *
일찍 들어가겠다고 약속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며칠간 미뤘던 회의가 길어지는 바람에 회사에 머문 시간이 길어졌고, 무엇보다 박경은, 그 여자가 너무 빨리 움직였다.
자동차 뒷좌석에 몸을 실은 은호가 해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의 한 건 더 있고, 끝나고 나면 슈트 몇 벌 챙기러 집에 들렀다 갈 거야. 넌 뭐 필요한 것 없어? 갖다줄게.”
그의 물음에 해주는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그저 빨리 돌아오기나 하라고 대답했다.
-차은호 말고는 필요 없어요.
라는 예쁜 말과 함께.
어떻게 보면 흔한 부부의 대화 같은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이 뜨거워졌다.
해주가 이혼을 요구하고, 그가 방어권을 행사하면서 두 사람의 삶이 달라졌다.
어찌 생각하면 이혼 요구와 방어권으로 각자의 감정을 드러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렇게 서로의 감정을 알게 되었고, 삶은 더욱 충만해졌다.
그 변화 중 가장 좋은 건 그거였다.
집에 도착해서 불 꺼진 해주의 창문을 올려다보며 씁쓸함을 삼키지 않아도 되고, 반대로 불 켜진 창문을 올려다보며 헛된 희망을 품지 않아도 된다는 것.
해주는 그를 기다려 주고, 그는 해주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건넬 수 있다는 사실. 그 단순한 사실이 상상 이상의 만족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말을 건넬 수 없다.
“많이 늦을지도 몰라. 잠 오는데 억지로 참지 말고, 일찍 자. 알았지?”
잠시 말이 없던 해주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네.
“그래, 그럼 잘 자. 내일 아침에 봐.”
전화를 끊었다.
까맣게 불이 꺼진 휴대전화를 얼마간 내려다보던 은호가 등받이에 깊게 몸을 묻었다.
“정 실장님, 박진우 이사, 연락 왔어요?”
“네. 분부하신 대로 박경은 씨에게 본부장님 임신 소식 알렸고, 유산되었다고 전했답니다.”
“준비는 다 됐고?”
“네, 타깃은 예상대로 움직였고, 박 이사님과 법무팀 몇 분이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우리도 온에어 합시다.”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킨 은호가 매무새를 똑바로 정리했다. 어느덧 집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 여사님께 해주 잘 지키라고 하고.”
“네, 말씀드려 뒀습니다.”
검은 철문이 열리고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섰다.
차바퀴가 자갈길을 구르는 소리가 정원의 적막을 깨뜨렸다.
차에서 내린 은호가 버릇처럼 해주의 방을 올려다보았다. 엷은 불빛이 창밖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정 실장, 오늘 수고 많았어요. 내일은 9시쯤 와요.”
“네, 부회장님. 그럼 편안히 쉬십시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정 실장을 바라보고 픽, 웃음을 흘린 은호가 천천히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군데군데 보조 등을 켜 둔 것까지 해주를 흉내 내다니.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이지 대단한 여자다.
2층 거실의 불을 밝힌 은호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침실의 문을 열었다.
불 꺼진 침실,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 둔 램프만이 노랗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노란 불빛이 해주와 그가 사랑을 나누던 침대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그리고 감히 그곳을 침범한 이물질 하나.
그와 해주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눴던 곳, 그렇게 아이가 만들어진 신성한 곳이 오염되어 있었다. 은호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다시금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 은호가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러자 더러운 이물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예상대로였다.
박경은, 그 여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침대를 벗어났다. 무척이나 요염한 몸짓으로 침대를 벗어난 그녀는 야한 표정을 지으며 은호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고는 유혹하듯 그의 옷깃을 쓸어내렸다.
“파격적이네.”
은호의 입술에서 비릿한 웃음과 함께 차가운 목소리가 흘렀다.
“역시 남다른 배포야. 남의 집, 남의 침실에 몰래 들어와 남의 남편을 유혹한다라…….”
은호의 말에 경은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마음에 드나요?”
“응. 무척이나.”
이 정도까지 적극적일 줄은 몰랐지.
“아주 마음에 들어, 박경은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