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아이를 가졌을 뿐인데, 아이가 된 듯했다.
은호는 발가벗은 그녀의 몸을 꼼꼼히 닦은 뒤 침대에 앉히고서 머리를 말려 주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와 닿는 손길이 정성스럽다.
머리를 다 말리고 나자 약을 먹이고, 잠옷을 입히고, 침대에 눕혀 주었다. 그러고는 눈두덩에 키스해 주었다.
와 닿는 입술이 뜨겁다.
“이제 그만 자.”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해서 가슴 가운데가 간지러웠다.
머리맡에 앉아서 하염없이 사랑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은호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안 자요?”
은호에게도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긴 하루를 보냈다더니, 눈 밑이 움푹 꺼지고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같이 자요.”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에 가만히 손을 포갰다. 그러자 은호의 얼굴에 뭉근한 미소가 들어찼다.
“난 서재에서 밀린 일 좀 처리하고.”
바쁜 남자고, 일이 많은 남자다. 그런 그가 그녀 때문에 요 며칠 시간을 허비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어리광이 나온다.
“혼자 있으면 무서운데.”
지난 3년, 그녀는 늘 혼자였다. 은호와 함께 방을 쓴 게 얼마나 된다고, 제가 생각해도 웃기는 앙탈이었다. 하지만 은호는 놀리지 않았다. 그녀의 두려움을 이해한다는 듯 뺨을 가만히 매만져 주었다.
“무서워하지 마. 부적, 다 제거했어.”
아, 입술을 동그랗게 벌린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어머니는 이제 너 못 건드려. 아니, 내가 못 건드리게 할 거야.”
다짐하듯 말한 은호가 어느새 붉어진 해주의 눈시울을 손끝으로 쓸었다.
“그러니까 넌 한방이나 잘 지켜. 넌 내가 지킬 테니까.”
슬쩍 그녀의 배 쪽으로 시선을 내리는 그를 해주가 안타까이 불렀다.
“은호 씨.”
목이 메어 와 목소리가 잘 나오려 하지 않았다.
“정말로 아이…… 괜찮아요?”
“무사하다니까? 못 믿겠으면 내일 병원 다시 가고.”
해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 말고.”
그녀가 정말로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아니, 확신이 필요했다.
“당신, 아이……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은호는 타인에게 무심하다.
무감, 무심, 무정. 그를 묘사하는 단어 그 어디에도 타인에 대한 마음은 없다. 아니, 감정이 없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고, 감정을 드러낸 존재가 해주였다지만, 애매한 그의 태도로 인해 해주 역시 오랫동안 고통받았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일반적이지 않게 던지는 남자다.
그런 그가 과연 아이를 반길까. 마음을 다해 사랑할까? 혼란스러웠다.
“아이가 생겨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내 말은 후계자, 이런 의미가 아니라 정말 당신 아이요.”
“네 애잖아.”
역시나 일반적이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대뜸 네 애라니.
“네가 낳을 내 아이.”
해주는 실소하고 말았다.
너무나 진지한 눈빛으로 생각을 밝히는 은호는 그만의 방식으로 애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싫어할 이유가 없어.”
그런 그의 방식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차은호 나름의 짙은 마음이 느껴져 가슴 가운데가 뜨거워졌다.
그렇게 홀로 감격에 젖어 들 때였다.
설핏 미간을 좁힌 은호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아, 하나는 싫어.”
싫다는 말에 해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싫다니, 잔뜩 데워졌던 가슴 안쪽에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그런데 의외의 말이 이어졌다.
“의사가 당분간은 하지 말래.”
“그게 무슨……?”
“섹스 말이야.”
해주의 물음에 능청스러운 대답이 던져졌다. 기가 막혀 입술을 벌린 채 바라보자 은호가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내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자궁벽이 불안정해서 제대로 자리 잡을 때까지는 조심해야 한다잖아.”
어쩌면 장난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장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널 양보해야 하는 존재가 생겼다는 게 싫어.”
늘 그랬듯, 은호는 그녀 앞에서 솔직하게 저를 드러내고 있었다.
“난 지금도 하고 싶어 미치겠거든.”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해주를 바라보는 눈빛에 갈급함이 어렸다.
놀릴 수도,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은호의 말에 해주는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달싹일 뿐이다.
“그러니까 당분간 유혹하지 말란 말이야. 고통스러우니까.”
“내가 언제 유혹했다고.”
유혹하지 말라니, 매번 그녀를 육체적으로 유혹한 것은 저면서.
뭐라고 한마디 해 주려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은호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 깊숙이 파고들었다.
“몰라서 물어? 넌 항상 날 유혹해.”
그러고는 슬며시 입술을 맞붙였다.
“지금도 그래. 이렇게 입술을 야하게 달싹거리면 하고 싶잖아.”
깊게 맞물린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그녀를 휘감았다. 맛보듯 혀를 움직인 그가 짧지만 아찔한 키스를 선사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물렸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열기 어린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지그시 담아낸다.
“자고 있어. 금방 올게.”
그러고는 이내 그가 방을 빠져나갔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 되어 있었다. 잠이 얼마나 쏟아지는지, 어제 하루, 바짝 긴장해 있었던 게 거짓말 같았다.
걸음 하나도 조심해야 한다는 은호의 말에 침대에서 일어난 해주가 천천히 침실 밖으로 나갔다.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내디딘 해주가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반쯤 내려온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아침 6시, 고요해야 할 1층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은호는 욕실에서 샤워 중이고, 현재 고용된 사용인은 없다. 휴가 보냈던 사용인 둘은 은호가 기어코 잘라 버렸고, 새로운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시간에 인기척이라니, 덜컥 겁이 났다.
“설마 어머니가……?”
원정이 또 누군가를 보낸 게 아닐까, 걱정스레 미간을 좁힌 해주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주방에 다다른 해주는 낯선 얼굴 하나를 발견하고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주방에는 덩치가 좋은 중년의 여자가 콧노래를 부르며 일을 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팬에 야채를 볶고, 다른 한 손으로는 냄비에 든 무언가를 휘저었다. 그러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휙 돌렸다.
해주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여자가 활짝 웃었다.
“어머머? 사모님, 일어나셨어요?”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여자를 해주는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누구……시죠?”
누군데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 있어.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아났다.
그때였다. 은호의 비서인 정 실장이 주방 곁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슴에는 누런 종이봉투를 안은 채다.
“본부장님.”
해주를 발견한 그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몸은 괜찮으세요?”
“정 실장님.”
고개를 끄덕인 해주가 그에게 다가서며 여자를 눈짓했다.
“누구세……요?”
그러자 손가락 끝으로 눈썹 옆을 긁적인 정 실장이 여자를 소개했다.
“아, 저희 어머니세요.”
“실장님 어머니요?”
놀란 해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부회장님이 믿을 만한 사람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셔서 제가 저희 어머니를 모시고 왔어요.”
“그렇다고 어머니를…….”
고개를 저은 해주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던 참이다. 여자가 불쑥 말을 보탰다.
“난 취미도 살림, 특기도 살림 사는 거였는데, 우리 큰아들이…….”
여자가 턱 끝으로 정 실장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찬우 형이 집을 홀랑 날려 버리는 바람에 살림 살 집이 없어졌지 뭐예요?”
그러고는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얘네 집에 얹혀살 수도 없고.”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에 결혼한 정 실장은 한창 신혼을 즐기고 있을 터였다.
“마침 부회장님이 입주 가정부를 구한다길래 내가 하겠다고 한 거예요.”
이해 못 할 것은 없었다. 그녀는 집안 살림을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고, 정 실장의 어머니는 살림 살 집이 필요하니까.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으니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다.
그저 한 가지. 과연 이 사람은 믿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이 사람은 원정에게 매수되지 않고 끝까지 그녀의 사람으로 남아 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그런 것들이 해주의 머리를 복잡하게 배회했다.
“사모님, 내가 이래 봬도 손맛도 좋고, 요리도 잘해요. 게다가 청소는 또 얼마나 잘하게? 변기에 밥 말아 먹어도 될 정도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아기를 잘 봐요. 손주 셋을 내 손으로 키웠거든. 우리 딸 몸조리도 내가 다 직접 했고 말이야.”
마지막 말에 해주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친정 엄마가 없는 해주에게 꽤 솔깃한 제안이었다.
“내가 본부장님 산후 관리까지 다 해 줄 수 있어요.”
여자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제발 사용해 달라는 무언의 애원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었다.
당황한 것은 정 실장이었다.
“본부장님, 죄송합니다. 미리 여쭤봤어야 했는데.”
해주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인 정 실장이 제 엄마 앞을 가로막으며 눈치를 줬다.
그런 두 모자를 눈에 담은 해주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회사에서는 차은호 아바타로 불릴 정도로 차갑고 이성적인 정 실장이 제 엄마 앞에서는 그저 애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해주가 다시 한번 웃었다.
“전 좋아요. 정 실장님 어머니라고 그러셔서 놀란 거지, 싫은 거 아니에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해주의 말에 정 실장도 그의 어머니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그녀 뒤로 그림자가 드리우며 익숙한 향기가 끼쳐 왔다.
“다행이네.”
어느새 주방으로 들어온 은호가 뒤에서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얹은 그가 귓바퀴에 가볍게 키스했다.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물 냄새에 섞여 든 은호의 샤워 코롱 향기 때문일까. 얼마간 남아 있던 불안감도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안 싫어요. 정 실장님 어머니면 믿을 수 있고 좋아요. 죄송해서 그렇죠.”
그러자 그녀를 놓아준 은호가 빙긋 웃으며 정 실장의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추 여사님, 제 아내 허락이 떨어졌으니, 오늘부터 우리 1일 할까요?”
은호의 말에 여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좋습니다. 오늘부터 1일입니다.”
“그럼, 아침 먹고 이사 준비부터 하실까요?”
“넵, 부회장님.”
친밀하게 느껴지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해주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사…… 준비요?”
해주의 물음에 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사 갈 거야.”
갑자기 이사라니? 왜?
“언제요?”
“오늘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