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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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은 증빙이 쉽지 않아.”

은호 대신 경찰서에 다녀온 진우가 차분히 설명했다.

“이번 사건 역시 폭행, 협박, 무엇 하나 성립되지 않을 거고 말이야.”

조사를 시작하긴 했지만, 범죄를 증빙할 증거가 없다.

엘리베이터 안과 13층 복도를 촬영한 CCTV 영상은 말 그대로 영상일 뿐, 음성이 지원되지 않는다. 경은이 해주를 위협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박경은, 그 여자 입 모양이나 눈빛, 몰아세우는 듯한 행동. 그리고 해주 씨의 표정이나 움츠러드는 모습. 그런 게 정황상 협박했다, 이렇게 짐작할 수는 있지. 그런데 확실한 물증은 아니거든.”

진우의 말에 은호가 미간을 구겼다.

“심증뿐이지 물증이 없다?”

“어, 풀려날 확률이 아주 커.”

안타깝게도 그게 현실이었다.

“본인이 자백하면 몰라도.”

“이딴 대답 들으려고 너 데리고 온 거 아니야.”

대한민국 최고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였던 진우를 창성 법무팀에 스카우트한 건 은호였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은호가 꽤 괜찮은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진우는 스카우트 조건보다 차은호의 오른팔 역할이라는 말에 솔깃해져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여태 단 한 번도 은호를 실망시킨 적 없다.

“나도 집어넣고 싶어. 그런데 방법이 없는 걸 어쩌냐?”

얼마나 교묘한지, 경은은 법적으로 문제 될 만한 일에는 직접 나서지 않았다. 최근 있었던 허위 사실 유포 사건에서도 강현욱의 엄마인 최미정을 이용했다.

유일하게 직접 나선 것이 오늘 있었던 사건인데, 이 또한 정황증거 정도만 남겼을 뿐이다.

“막말로 해주 씨가 비상계단에서 굴렀으면 바로 상해죄로…….”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꺼내던 진우가 입술을 꾹 닫았다. 새카만 은호의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띠며 어둑하게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무섭게.”

차은호는 무서운 놈이다. 늘 포커페이스로 감정을 숨기는 은호가 이렇듯 감정을 드러냈다는 것은 몹시도 화가 났다는 뜻이다. 까만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 목덜미라도 물어뜯기는 기분이다.

“굴렀어야 했다는 거야?”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때마침 은호가 그 자리에 나타나 해주를 구한 바람에 경은에게 빠져나갈 구멍이 생겨 버렸다. 아니었으면 현행범으로 바로 집어넣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해주를 잃을 뻔했어.”

반듯하던 은호의 입매가 미세하게 뒤틀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살벌해 진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내 아이를 가진 여자야. 내 아내라고.”

까만 눈동자가 광기를 띠고 번뜩였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 그 미친 여자를 경찰서에 잡아 둬.”

은호의 기에 눌린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길게는 못 잡아 둬.”

피의자도 아니고 용의자를 증거 없이 심증만으로 발을 묶어 두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알아. 빨리 움직일게.”

은호의 눈빛이 단단해지며 좀 더 예리하게 빛났다. 무언가 일을 저지르기 전의 표정이라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다.

“뭔가…… 하려는 거야?”

“응.”

“뭘 하려고?”

질문을 던지는 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알 것 없고. 넌 그 여자를 경찰서에 잡아 두는 것만 잘하면 돼.”

진우의 소심한 모습에 웃음을 흘린 은호가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내가 안전장치를 마저 할 동안만 말이야.”

* * *

태아가 엄마 배 속을 유영하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따뜻한 물속을 정처 없이 떠다니듯, 몸과 마음이 몽롱하다.

찰박, 찰박. 물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으음.”

나른한 신음을 가늘게 내뱉은 해주가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익숙한 손길이 그녀의 허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분명 익숙한 감각인데,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생소해 해주가 눈꺼풀을 반짝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물에 흠뻑 젖은 은호가 그녀와 눈을 지그시 맞추며 부드럽게 웃었다.

“정신이 들어?”

눈을 동그랗게 뜬 해주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이게 무슨…….”

분명히 그녀의 방, 그녀의 욕실 안이다.

“집에 왔어.”

가슴까지 따뜻한 물이 찰랑거리고, 그녀를 뒤쪽에서 감싸 안은 은호가 스펀지로 몸을 씻겨 주고 있었다.

“의사가 저녁에는 씻어도 된다고 했거든. 그래서 지금 내가 너 씻기는 중.”

천천히 움직이는 손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닦아 냈다. 정성껏 어루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럽기만 하다.

“퇴원한 건가요?”

머릿속이 뿌연 것이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회사에서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았고,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가 그녀의 팔에 진정제를 주사했고…… 그 뒤로는 모르겠다.

“퇴원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집으로 데리고 왔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자 은호가 그녀를 나무랐다.

“넌 성격을 좀 고쳐야 해.”

그녀의 가슴을 닦던 손이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갔다.

“뭐가 그렇게 급하고, 그렇게 극단적이야?”

안 그래도 조심스럽던 손길이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 마치 어젯밤처럼 말이다. 그녀의 납작한 배를 어루만지며 감격에 젖던 그때처럼.

“은호 씨…….”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은호가 그녀를 꼭 껴안은 채 배를 어루만졌다.

“한방아, 너도 엄마 좀 야단쳐.”

은호의 말에 해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한방이라니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은호를 돌아보는 해주의 눈동자가 파들거렸다. 그런 그녀와 지그시 눈을 맞춘 은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우리 첫 관계 때, 생겼나 봐.”

그러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처음이었는데, 임신이 되다니. 대단하지 않아?”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분명히 잘못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아이…… 무사한 거예요?”

이제야 겨우 물어볼 용기가 났다.

다리 사이로 흐르는 피를 본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고, 발밑이 아찔해졌다. 너무 울어서였을까. 의사가 하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해주는 입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은호와 이야기해야만 했다. 결국 그녀는 혼자 지레짐작하고 절망에 빠졌던 모양이다.

“아이, 정말 괜찮아요?”

해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이를 잃었다면 내가 여기 있겠어?”

은호의 대답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애달픈 은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훑었다.

“그 여자 죽이러 갔지.”

까만 눈동자를 애잔하게 빛낸 은호가 해주의 눈물을 걷어 냈다. 그러고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너, 유산기가 있어서 조심해야 해.”

발가벗은 해주의 몸을 소중하게 품은 은호가 물을 뚝뚝 흘리며 욕실을 빠져나갔다. 침대 앞에 그녀를 내려놓고는 커다란 수건을 몸에 둘러 주었다. 그러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닦아 주며 푸념했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유산 방지 주사, 그거 맞고 있는데 다 쥐어뜯어 버리고. 결국 정맥 찢어져서 꿰매고.”

그녀의 다리를 정성스레 닦던 은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너 지금 흥분하거나 스트레스받으면 안 돼. 놀라도 안 되고, 힘줘도 안 돼.”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해주가 애틋한 눈빛으로 그를 담아냈다.

그런 그녀와 시선을 맞춘 은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냥 숨만 쉬고 가만히 있어야 한대. 안정될 때까지.”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물방울을 수건으로 훔친 은호가 한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그런데 넋 나간 얼굴에 맨발로, 피를 줄줄 흘리며 나와서는 집에 가자며 멱살이나 잡고.”

그러자 해주의 입술이 또다시 울음을 터트릴 듯 삐죽거렸다.

“난 아이 잃어버린 줄 알고…… 더는 열도 안 나고, 머리도 안 아파서 정말 놓쳐 버린 줄 알았어요.”

결국 말간 갈색 눈동자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우는 여자는 딱 질색인데 해주의 눈물만큼은 싫지 않다. 싫지 않은 게 아니라 이런 모습조차 사랑스럽다.

“너 열나. 계속 미열 있어. 그냥 네가 못 느꼈던 거지.”

은호가 해주를 가만히 품에 안았다.

그러자 해주가 그의 품을 좀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쓸어 준 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어.”

정말이지 하루가 너무 길었다.

“네 피, 네 눈물. 내가 오늘 하루 만에 지옥문을 몇 번이나 두드렸는지 몰라.”

처음으로 해주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만약 해주가 계단에서 굴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혈이 되지 않았다면, 아이가 유산되었다면…….

온갖 생각이 그의 사고 회로를 헤집으며 은호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리고 또다시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래도 내가 널 지독하게 사랑하나 봐.”

이쪽으로 돌아가도, 저쪽으로 돌아가도. 결국 길은 하나고, 답도 하나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그러니까 해주야.”

그와 똑바로 눈을 맞추고 있는 해주를 애잔하게 바라보았다.

“못 이기는 척하고, 나한테 잡혀.”

유예기간이 며칠이 남았든, 컬럼비아 대학원 장학생 자리가 주어졌든, 그딴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내민 족쇄에 그냥 네 발목 맡기라고. 내가 너 평생 사랑할 테니까.”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담갈색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하늘하늘 흔들리더니 금세 눈물이 고인다. 그리고 결국, 해주가 눈물을 쏟아 냈다.

“흐흑. 윽.”

그의 가슴에 이마를 꾹― 누른 해주가 어깨를 바들거리며 울음을 토했다.

“사랑한다니까 왜 울어? 사랑하지 마?”

그러자 자그마한 주먹이 그의 가슴을 야무지게 때렸다.

“진짜 나빠, 차은호.”

이런 식의 고백이라니.

지나치게 차은호다워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래, 나 원래 나빠. 그러니까 허튼 생각 하지 말고 내 옆에 있으라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해주를 은호가 품에 꼭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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