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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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던 중 가장 황당한 말이었다.

신률이 사기꾼이라니.

아무리 해주에게 몹쓸 짓을 했다지만 그 용한 무속인을 사기꾼으로 몰 수는 없다. 그랬다가 무슨 저주를 받으려고.

보이지 않는 귀라도 있다는 듯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 원정이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리 그래도 도사님을 그런 식으로 폄훼하면…….”

원정의 말에 픽, 웃은 은호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끌어 올렸다.

“돈이면 다 되던데요?”

“뭐?”

어느덧 눈물을 멈춘 원정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은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진실 하나를 던졌다.

“해주 ‘복사꽃 사주’ 아니에요.”

“뭐라고?”

원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원래 만 서른 전에 죽을 운명이라면서요.”

신률은 은호가 타고난 홍염살이 그의 수명을 눌러 만 서른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예언했다.

“서른 전에 ‘복사꽃 사주’의 여자와 결혼해서 ‘홍염살’을 눌러야만 단명을 막을 수 있다고 하셨죠? 그래야 부회장도 될 수 있고?”

불안한 표정의 원정이 고개를 끄떡였다.

“맞아. 도사님이 그렇게 말씀…….”

“해주가 ‘복사꽃 사주’가 아닌데도 저 부회장 됐어요. 만 서른하나인데, 아직 살아도 있고요.”

이번에는 원정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무슨 소리야. 해주가 복사꽃 사주가 아니라니. 내가 도사님께 해주 사주 넣어서 받은 답이야.”

그럴 리가 없다며 원정은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은호의 미간이 안타깝다는 듯 슬며시 좁혀졌다.

“해주는 자기가 몇 시에 태어났는지도 몰라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잖아요.”

은호의 대답에 말문이 막힌 듯 원정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아는 거라곤 기껏해야 음력 생일, 그리고 낮에 태어났다 정도?”

원정의 반응을 가만히 살핀 은호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한층 더 쇼킹한 사실을 흘렸다.

“내가 신률, 그자에게 돈을 줬어요. 어머니가 해주의 사주를 들고 찾아오면 무조건 복사꽃 사주라고 말하라고 했죠.”

다루기 쉬운 남자였다. 돈이면 다 되는 족속의 전형적인 표본이랄까.

“물론, 어머니가 들고 가신 그 사주조차 엉터리였고 말이죠.”

일부러 해주의 사주가 아닌 임의의 사주를 넣었다. 사주를 모르기도 했고, 어차피 답은 뻔하니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계획대로 되었고, 덕분에 편안하게 결혼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신률은 해주의 사주를 의뢰한 사람이 윤규라고 알고 있다는 거였다.

신률에게 직접 찾아가지 않았던 은호는 진우를 대신 보냈고, 말을 옮기는 과정에서 신률은 의뢰인이 윤규라고 오해했다. 굳이 오해를 풀지 않았던 건 그편이 일을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윤규에게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 신률은 원정과 손잡고 은호와 해주를 교묘하게 헤집어 댔다.

사기꾼 주제에.

코웃음을 친 은호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적을 눈짓했다.

“이깟 종이 쪼가리, 겁나지 않아요.”

돈에 의해 좌우되는 무속인의 점괘 따위, 그저 우스울 따름이다.

“어머니가 끔찍해서 그러지.”

“내가…… 끔찍해?”

붉어진 눈시울로 파들거리며 떠는 원정은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가련하기만 했다. 저런 얼굴로 상대를 몰아세우면, 피해자도 가해자가 되려나.

웃음기를 완전히 걷어 낸 은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정을 내려다보았다.

“해주가 잘못되기를 원하는 어머니의 집요함. 그 집요함이 결국 내 아내를 잡아먹게 생겼어요.”

잔뜩 힘이 들어간 입매가 뒤틀리며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몇 걸음 뒤로 물러난 원정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원정을 경멸 어린 눈빛으로 훑었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벌벌 떠는 원정은 거센 충격에 휩싸인 듯 보였다.

“미안해. 난 그저 널 지키려고. 해주 때문에 네가 다친다고 하니까.”

“그게 아니죠.”

아직도 신률을 믿어? 기가 막힌 은호가 원정 쪽으로 얼굴을 기울였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신률은 어머니에게 돈을 받고, 어머니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해 주는 사기꾼입니다.”

영험한 게 아니라 눈치가 빠른 인간이지. 의뢰인의 가려운 구석을 시원하게 긁어 주니까.

“어머니가 해주를 예뻐할 때는 해주가 복덩이라고 말했고, 이제는 어머니가 해주를 미워하니까 그런 점괘를 말하는 겁니다.”

결국 신률은 원정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 정도가 아닐까.

“그래야 어머니가 양심의 가책 없이 해주를 치울 수 있으니까요.”

“내가, 내가 왜 해주를 미워해? 미워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해주를 얼마나 예뻐했는데.”

“복사꽃 사주라니 예뻤겠죠. 어머니의 망상이 실현된 존재니까.”

오랫동안 ‘홍염살’이라는 올가미로 은호를 묶어 둔 원정은 ‘복사꽃 사주’라는 동아줄을 내미는 것으로 구원자가 되려고 했다. 망상도 이런 망상이 없지.

“아이까지 못 가지니 더 예쁘셨겠죠. 어머니를 보는 듯해서.”

착하고 예쁜 해주는 은호가 만들어 낸 완벽한 며느리였다. 그런 해주에게 자신을 투영한 원정은 3년이 다 되도록 아이가 없자 과거의 일을 반복하려 했다.

“그런데 어긋났겠죠.”

아이를 낳아 줄 여자를 들이밀었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기대와 달라 당황했겠지.

“아니. 이젠 해주에게서 다른 사람이 보이겠죠. 어머니가 갖지 못한 것을 가졌던, 다른 사람.”

원정과 해주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 그걸 깨달았겠지.

“사람 잘못 건드리셨어요. 난 아버지와 달리 내가 원하는 여자를 내 아내로 맞았고, 목숨 걸고 지킬 겁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해주를 향하는 타는 듯한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그저 미치도록 그녀를 원하는 남자의 욕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욕정을 넘어서는 괴이한 감정에 지배되면서 깨닫게 되었다. 오랫동안 해주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사랑, 그 빌어먹을 화학작용이 그의 심장을 장악해 버려 더는 부정할 수조차 없다.

“그러니 각오하세요. 지금부터는 해주가 아니라 절 상대해야 할 테니까요.”

“은호야.”

원정이 무릎으로 기어 와 은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은호야, 잘못했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니? 어떡하면 용서해 줄래?”

순간 오래전, 열쇠 구멍으로 내다본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무릎으로 기어가 원정의 발목을 붙든 여자가 애절한 눈빛으로 위를 올려다보았지.

[사모님, 사모님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은호, 다시는 안 봐요. 안 볼게요.]

[뭐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덜덜 떨리는 손, 절규하듯 외치는 목소리, 하염없이 쏟아지던 눈물.

그런 여자에게 원정이 뭐라고 했더라.

아, 그래. 이렇게 말했지.

[그래? 그럼 죽어.]

웃기는 일이다. 그날과 닮은 상황 속에서 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죽으라고 할까?

답을 구하는 듯, 고개를 돌려 깊게 잠든 해주의 얼굴을 눈에 담은 은호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시간을 조금 더 드릴게요. 아니, 기회를 한 번 더 드린다는 게 맞겠죠.”

같은 대답을 던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해주에게 지은 죄 다 갚으세요.”

해주를 위해서다. 비록 가짜라도 부모를 가지게 되어 행복하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한때는 해주를 귀하게 여기며 감싸 준 것에 대한 보답.

“그럼 혹시 아나요?”

그거라면 이유가 되지 않을까.

“24년 전, 어머니가 죽으라고 등 떠민 이숙향 씨가 어머니를 용서해 줄지.”

* * *

집으로 돌아온 원정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순간,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여태 믿고 의지했던 모든 것이 박살 난 듯한 기분이다.

해주는 복사꽃 사주가 아니었고, 신률은 돈을 받고 거짓 점괘를 내놓았다. 강현욱 고문과 관계를 맺은 여자는 경은이고, 경은은…….

“설마 걔도 복사꽃 사주가 아닌 거야?”

아니, 애초에 ‘복사꽃 사주’라는 것 자체가 거짓이 아닐까. 그럼 은호의 ‘홍염살’은? 그것 역시 신률이 꾸며 낸 것일까.

뭐가 뭔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에 집중했다. 지금 확실한 것은 은호가 제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침대를 짚고 있는 손등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윤규의 마음이 그 여자에게 머물러도 괜찮았다. 은호가 ‘엄마’라고 부르는 존재는 이숙향이 아니라 나원정, 바로 그녀였으니까.

후계자를 낳은 존재가 따로 있다는 것만 세상에 들키지 않는다면 된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외도 따위야 세상에 흔하디흔하니까.

그런데 절대 그 사실을 몰라야 할 은호가 알고 있었다.

“그때 기억을 잃었던 게 아니었어?”

설마, 그날 그 여자에게 커터 칼을 던져 준 것을 본 거야?

“으아악, 안 돼. 그럼 안 되는 거잖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원정이 불안한 눈빛으로 방을 돌아다녔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거야? 해주에게 갚으면 이숙향이 용서해 줄 거라고?”

원정이 예쁘게 다듬어 놓은 엄지손톱을 이로 물어뜯었다. 해주에게 지은 죄를 다 갚으라니,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굿이라도 해야 해?”

자문한 원정이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굿이라니, 도사님을 이제 어떻게 믿어.”

그때였다. 반쯤 열린 핸드백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휴대전화가 진동벨을 울렸다.

깜짝 놀란 원정이 불안한 시선으로 휴대전화를 눈에 담았다.

<박경은>

“얘가 왜?”

인상을 찌푸린 원정이 빛이 반짝거리는 휴대전화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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